제1장
1) 제비내(연천燕川)를 따라서
옴천 제비내는 영암에서 돈받재 넘어오면 왼쪽 산 밑으로 쉼 없이 흐르는 냇물이다. 옴천 월곡리, 영암읍 농덕리 암모실 장파골 골짜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은 사철 제비내를 따라 동쪽으로 흘러서 장흥 시내를 보며 강진 구강포를 지나 남해로 흐른다.
1976년 농협에 다닐 때이다. 가을 들녘에는 나락이 누렇게 익어 일렁일 때 가방에다 영농자금 대출 장부와 이자 계산용 주판을 챙겨 담고 출장을 나가는데 개산마을 사는 정영미 화장품 판매원이 예쁜 옷차림과 가방을 들고 있어 너무도 우아하게 보였다. 어디로 가느냐 물으니 신월마을 외상도 받고 화장품 팔러 간다고 한다. 나도 거기에 가니 함께 가자고 하여 냇가를 따라서 걸어가는데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여 한들한들, 산에는 단풍이 물들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 냇가 길을 따라 동행하는 이십 리 길이 피곤하지 않았다. 마을에 도착하여 조합원과 상담을 늦게까지 했는데 정영미가 기다려 줘서 저물게 길 따라오면서 많이 팔았냐 물으며 손을 넌지시 잡고 쉬어왔다.
1988년도에 월곡제 저수지를 막았다. 그 이전에는 지금 저수지 한가운데로 신월리 가는 길이 있었다. 냇가로 길을 따라 처음 갔던 기억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할아버지 신월리 밀양박씨 외가 가는 길에 지금 저수지 안 구곡마을 냇가에 김 씨들 비각이 있었고 거기에 문턱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넘어서 할아버지를 따라갔던 기억이 있다. 진외가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무척 반가이 맞아주셨다.
구곡마을에 4촌 동생 광산김씨 외가가 있었는데 한국동란 6·25 때 경찰이 빨치산 집결지라고 하여 민가에 불을 질러서 불에 타 없어진 집터에 작은아버지가 집을 짓는데 구경했던 기억이 있고 그 뒤로 사돈집 정제문이 없이 살아서 겨울에 춥다고 할아버지께서 볏짚으로 발을 엮어서 문에다 걸어줄 때 따라가 본 기억이 있다.
그 옛날에는 가을에 겨울 소먹이 소여물로 칡넝쿨과 풀을 산비탈에 뜯어말려 놓았다가 마르면 소달구지로 실어 왔다. 중학교 다닐 때 어느 날 아침에 학교 가려고 하는데 삼촌이 학교 갔다가 와서 소에 달구지를 채워서 들구실마을 앞에까지 타고 오라고 하셨다. 토요일이라서 빨리 집에 와서 소달구지를 끌고 비포장도로를 덜컹대고 가다가 큰길에서 샛길 구곡마을 가는 길에 들어서서 가는데 삼촌이 소리를 지르며 깨웠다. 잠을 자면 어떠냐고, 내가 달구지를 타고 앉아 잠이 들었다. 그래도 영락없이 소가 삼촌 기다리는 구곡마을 앞까지 갔었다. 마른풀을 소달구지에 가득 싣고 왔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 할머니께서 학교 갔다 와서 구곡마을에 취나물 뜯으러 가니 지게 지고 마중 나오라고 하셔서 봄볕이 따뜻한 날 온산에 진달래꽃이 훤히 피었을 때 할머니 계신 구곡(들구실)마을에 찾아갔는데 취나물을 뜯어 망태기에 가득 담아 놓고 4촌 동생 외할머니, 할머니 사돈이랑 마루에서 이야기하고 계시다가 내가 지게를 지고 마중을 가니 반가워하셨다. 지게에 취나물을 지고 오는데 문턱 바위 앞까지 냇가를 따라 1㎞ 정도 사돈 할머니께서 나오셔서 들어서시라고 해도 배웅하셨다.
1970년대 이전에는 하드레 날 음력 2월 1일에는 칡뿌리를 먹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하드레날 전에 나도 캘 수 있을 줄 알고 형, 삼촌을 따라서 지게에 괭이 짊어지고 신월리 안 골짜기 대밭 근처에서 칡을 캐는데 캐기가 엄청 힘이 들었다. 어린 나는 캘 수가 없어서 형들이 캐서 작다고 버린 칡과 한 뿌리 캐줘서 가지고 왔다. 중학교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동네 머슴, 형들을 따라서 냇가를 따라 올라가다 영복리 마을 입구를 들어서 마을 뒤 넓은 들을 지나 땅재를 넘어서 생금산(494m) 땔나무를 베서 지게에 짊어지고 쉬어쉬어 집에 왔다. 그때는 가까운 곳에 산과 들은 민둥산이었다. 여름에는 산과 들에 풀을 베다가 퇴비를 장만해서 논에 거름으로 사용했고 겨울에는 집 근처 산에서 마른풀 나무를 베다가 군불 때고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했기 때문에 가까운 산에는 땔나무가 귀했다.
1960년대 계원마을 북골저수지를 막았다. 중학교 다닐 때 일요일 마을 어른들 형들을 따라서 바지게를 지고 저수지 뚝 쌓는 데 가면 큰 상자 작은 상자가 있었는데, 우리는 작은 상자에 바지게로 흙을 지고 가서 상자에다 수십 번씩 져다가 부어서 가득 차면 표를 줬다. 여자들은 세숫대야 흙을 담아서 머리 위에 이고 가 부어서 상자가 가득 차면 표를 줬다. 상자를 들어서 옮겨 종일 3개 정도 담았고, 많은 사람이 이런 방법으로 울력하여 저수지 둑을 쌓고 표를 주면 밀가루로 바꿔다가 배고픈 시절에 수제비, 칼국수, 문지를 부쳐서 해 먹고 살았다.
영산마을 원들 앞에 영산초등학교를 1965년도에 건축할 당시 옴천 출신 김재명 장군이 군 시절 공병대를 투입하여 지었다. 그때 군 트럭으로 병영에서 물자를 실어 나를 때 학교를 파하고 병영에서 만나 짐칸에 모래를 가득 실었는데 그 위에 몇몇 친구들과 타고 오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다닐 때 크리스마스 전날 영산 초등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서 계원마을 사는 경석 친구와 남녀 친구들이 많이 모여서 책상에 음식을 차려서 술도 한 잔씩하고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1991년 영산초등학교 폐교 후에는 교실을 펜션으로 개조하여 옴천초등학교 36회 동창회를 남녀 20여 명 모여서 돼지 한 마리 잡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하룻밤 재미있게 놀았다.
1970년대 여름에 염소골 앞에 냇가를 건너서 산에 올라가 풀을 한 짐 베서 짊어지고 내려왔다. 도중에 풀숲에 고라니가 숨어서 귀를 흔들고 꼬리를 흔들어 파리, 모기 날리는 것을 보았다. 냇가를 따라 전라 병사또가 야영할 때 발대를 쳤다는 바르대 들을 지나서 왔다.
1988년 경지정리 하기 전에 염소골 앞에서 바르대 들을 가로질러서 지금은 동적골에서 물이 흘러서 다리를 지나 2번째 굽이쳐 흐른 곳까지 넓은 냇가가 있고 여기를 서강이라 하는 큰 洑(보)가 있었다. 큰 돌로 쌓아서 틈새가 있어 물고기가 숨어 살기 좋았다. 때죽나무 열매나 여귀대풀를 뽑아다가 돌로 찍어서 그 물을 물속 돌 틈에 넣
으면 장어, 메기가 나와 잡았다. 보(洑)안에 맑은 물이 항상 많이 담겨 있어서 여름이면 동적골 사는 친구 김등춘이가 예쁜 여동생 경순이를 데리고 와서 함께 멱을 감는데 얼 비춘 블라우스가 예뻤다. 물싸움하고 즐겁게 놀기도 했고, 친구 누나 정심이가 빨랫감을 가져와 쪼그리고 앉아서 방망이로 토닥토닥 빨래하는 모습이 처녀 때라서 더없이 예쁘고 아름답게 보였다.
경지 정리하기 전에 어느 해였던가 여름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이 보가 터져서 온 들이 물바다가 되어 커다란 구렁이, 호박, 돼지, 새끼 온갖 생활 도구들이 떠 내려와 채양보까지 범람해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가을이면 동생이 쪽대 그물을 치고 내가 몰아서 염소골 앞까지 물고기를 잡았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중간지점에 큰 대밭이 있었다고 했으나 큰 대밭은 못 보고 대나무가 듬성듬성 나 있는 것은 생각이 난다. 월곡재 저수지 막기 전에는 큰비가 내리면 은 물길이 바뀌어 논이 냇가가 되기도 하고 냇가가 밭이나 논이 되기도 했다.
산정골짜기에는 김씨들 비각(碑閣)이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커다란 고목 소나무가 있어 여름이면은 나무 위에 백로 떼가 앉아 쉬어 깃털을 다듬고 있는 모습이 한국화 그림을 보는 듯했다. 비각 뒤편으로 대밭이 있고 어릴 때 만 해도 여기에 집터가 있었다. 그 안에 큰 감나무가 있어 여름이면 땡감을 따다가 산정 앞의 논물에 담가 두어 우려내 떫은맛이 없어지면 꼴 베러 가서 먹기도 하고, 가을이면 붉은 감, 홍시를 따먹기도 했다. 겨울에 갈퀴나무를 한 짐 해서 지게에 짊어지고 한참 내려오면 냇물에 노두 돌을 건너서 나뭇짐을 지게 작대기로 받쳐 놓고 쉬면서 목이 말라, 냇가에 엎드려 물을 그냥 마셔 갈증을 달랬다. 그만큼 물이 맑고 청정(淸淨)했다. 여름이면 은어가 여기까지 올라와서 잡기도 했다.
소(牛)가 논갈이해 모내기가 끝이 나면 소가 쉬게 된다. 집 마당에 매둔 소를 끌어다 냇가 강변에 풀이 많이 있는 곳을 골라 쇠말뚝을 박아 소고삐가 5m 정도로 도망 못 가게 해 두면 풀도 뜯어 먹고 냇가에서 물도 마시고 쇠파리가 등에 붙어 꼬리로 날리며 놀았다. 학교 갔다가 돌아와 매두었던 소를 끌러서 몰고 다니면서 농수로에 몰아넣거나 산비탈들에 돌아다니며 소등에 타기도 하고 풀을 먹였다. 홀쭉한 배가 빵빵하도록 뜯어먹었다. 동네 친구들과 몇 명이 장난치고 놀다가 소가 논에 들어가서 어린 나락을 뜯어 먹어 논 주인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들에는 지금과 같이 풀이 많지 않았다.
여름날에 망태와 낫을 가지고 냇가 강변에 꼴 베러 가면은 친구 정순이도 꼴 베고 있어 한 망씩 베어두고 냇가 노두 돌에 앉아서 발로 물장구를 치며 놀고 돌을 들춰서 징거미새우 붕어를 잡으며 정겹게 놀다가 해가 설핏 넘어갈 무렵 깔(소먹이 풀) 머리에 이어주어 가고 나는 짊어지고 집에 왔다.
겨울이면 한길(신작로가 나기 전에 냇가 따라서 전라 병영성 병 사또 한양갈 때 이 길을 이용해서 한길이라 한다) 건너에 사는 정필이 형과 큰 망치를 가지고 냇물에 가서 큰 돌을 내려치면 그 속에 숨어있던 물고기들이 놀라서 나오면 잡았다.
정월 대보름이면 누군가가 액막이한다고 볏짚으로 조그마하게 만든 소쿠리에 자갈을 넣어 징검다리 사이에다가 노두를 만들어서 10원짜리 동전을 몇 개씩 사이에 놓아두기도 했다. 그때 주어다가 사탕 사 먹었다.
좌척마을 앞 산기슭 바위 아래 제비냇가에 웅덩이가 있어 깊은 곳은 2m 낮은 곳은 1m 정도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 멱감기 좋았다. 여름 내내 찬 바람이 불 때까지 바위에 올라가 뛰어내리기도 하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누나들과 여자 친구들과 함께 빨가벗고 멱감고 더운 여름을 식히며 철없이 놀았다. 짓궂은 사내아이들은 여자아이들 목욕하는데 가만히 가서 옷을 감추기도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별빛이 비치는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가서 두런두런하시면서 여기 가서 목욕하고 오셨다. 1989년 경지정리로 웅덩이는 없어지고 잡초만 무성하다.
오곡 뒤실 마을 들어가는 채양보 징검다리가 큰비에 넘쳐서 초등학교 등교 때 누나 삼촌 부모들이 손을 잡아서 건너 주고 업어서 건네줘 학교에 갔다.
여기서 200m 위쪽으로 초등학교 다닐 때 1960년대까지 물레방앗간 터가 콘크리트 벽으로 있었다. 할머니 말씀이 우리 동네 사는 사람이 1930년대부터 방아도 찧고 운영(運營)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것이 경지정리 이전에 논으로 바뀌어졌다. 그 위쪽으로 좌척마을 안의 냇가에서 물이 흘러나와 큰 냇가와 합해지는 냇가 한가운데 큰 모래사장이 있어서 단옷날 동네 사람과 청년들이 여기 모여서 씨름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놀았다고 할머니께서 시집와 새색시 적에 보셨다고 하셨다.
둘째 여동생이 어릴 때 동네 형들이 쪽대 그물로 냇가에서 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려 동생을 데리고 갔는데 걸어 다니기 싫다고 업어주라고 해서 연장보까지 업고 다니다가 내가 힘이 든다고 형들이 업어준다 해도 내가 끝까지 업고 다니다가 해가 어둑어둑해서 집에 왔다.
오곡마을 사두(蛇頭) 고개 밑의 냇가에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큰 돌을 가져다가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연장보(燕場洑)라 했는데 시퍼렇게 깊고 넓었다. 봇물이 수로를 따라 내려가 물레방아가 돌아갔는데 전(前) 사람이 운영하던 방앗간을 개산마을 박인체가 인수하여 일본에서 터빈 기계를 들여와서 10마력 정도 발전하여 쌀, 보리, 밀을 소달구지로 가정집에서 실어다 방아 찧어서 다시 가정집으로 소달구지로 실어다 줬다. 고추, 방아 찧고 목화솜을 탔다. 마지막으로 오씨가 운영하다가 1985년 시류에 따라 폐쇄하였다고 합니다. 그 터는 축사와 농협창고로 변했고 안집은 오씨매형 임씨가 지금도 살고 있다. 나는 어릴 때 엄마를 따라서 방아 찧으러 몇 번 가본 일이 있다.
연장보 고인 물에 제비가 물을 차고 오르고 멱감고 나르는 장소다 (여기에서 제비내 (川천) 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뱀이(산이 뱀형국(山이 蛇形局)) 산에서 내려오다가 언덕 아래 물이 있어 멈칫하는데 좌척 황새봉 황새가 보고 있다가 콱 찍어 잡으려 하는데 제비가 나르며 방해해서 못 잡았다는 전설이 있고 건넛산 서슬봉 밑에 제비집처럼 잔돌 자갈이 많이 있어 제비집같이 보여 제비 형국이라는 풍수설이 있다. 지금도 넘어가는 재가 사두(蛇頭) 고개이다. 一說(일설)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이 1937년 신작로를 내면서 明堂(명당) 자리라고 뱀 머리를 잘라야 한다며 신작로를 냈다 한다. 1980년에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신작로가 나기 전에는 냇가 따라서 길이 있었던 것 같다.
사두고개 넘어 도롯가에 병영 사람 김남식이 양조장을 운영해서 막걸리 소주를 자전거로 각 마을로 배달했고 나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께서 일하시다가 농주로 막걸리를 여기에 가서 사 오라고 해서 주전자를 들고 가서 사다 드린 일이 있어 기억이 생생하다.
※ 제비내 물 따라 살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옛사람들에게서 들었던 것을 최대한 재미있게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훗날 기록이 참고될 수 있게 엮으려고 최대한 다시 한번 노력했다.
첫댓글 이제 읽어보니 세삼줄거운 옛날이네 그떼가 엇그제갇은데 벌써 수 십년이 넘어버렷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