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죽은 자를 위하여
김 익 하
방부 처리나 소독 따위 용처에 쓰이는 포르말린을 아시는지요.
저는 오늘도 포르말린 냄새가 진동하는 방에 들어섰습니다. 포르말린 냄새가 역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늘 그런 곳에서 생활하는 제 자신에게 물어도 역하다고 망설이지 않고 답변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곳에서 생활한 지 오래라 포르말린 냄새가 이제 제 생활 체취와 다름없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낯선 외국인 노동자 주검을 앞에 놓고 섰습니다. 피부색과 머리카락, 또 골격을 미뤄 봐서 인도네시아 남성인 것 같은데, 서른을 남짓 넘긴 연령으로 보다 앳되어 보입니다. 핏기 잃은 진갈색 살가죽, 모진 물체에 부딪친 듯 함몰된 뒷머리 붉은 핏자국, 그런 주검을 검증할 요소들이 남자와 초대면인 제 시선에 먼저 들어옵니다. 직업에서 익혀진 직감입니다.
제가 이 남자 주검에 관여해야 합니다. 저는 산자를 이 세상에 남겨놓고 저세상으로 떠나는 자를 돕는 일에 종사하는 서른한 살 미혼 여성입니다. 사회 일반적인 통념에서는 조금 비껴서 있는 셈입니다. 이 세상 현실에는 죽은 자보다 산자를 돕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굳이 죽은 자를 돕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제 일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할 만큼 과소평가를 받아왔던 건 사실입니다. 젊은 여성으로 허구 많은 일 가운데 하필 주검을 다루는 험한 일을 하느냐고 안쓰러운 시선부터 보냅니다.
혼자서 하는 일, 그조차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직업이라 늘 외롭긴 합니다. 그런 외로움을 이겨내고자 곧잘 죽은 자에게 혼잣말을 걸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이리 서둘러 죽어서 억울하지 않으냐고. 혼자서 임종을 맞느라고 손으로 무엇을 잡으려고 버둥거리지 않았냐고. 일찍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보다 기구한 사연을 안고 저세상으로 간 사람에게 더욱 그런 안쓰러운 충동을 느껴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가 살아온 그 길이 험할뿐더러 시신마저 참혹하게 훼손되었을 때 내면에서 덩어리째 솟구치는 슬픔을 참아가면서 마음속으로 한없이 주절대며 주검이 초라하지 않도록 눈부시도록 화사하게 메이크업을 합니다. 물음은 상대적인 대답이란 언어가 있기에 존재하는 단어지요.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죽은 자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없는 헛된 물음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에겐 물음이란 반드시 대답이 있어야 하는 단어가 아니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기나 한 듯 소신껏 말합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의 결합체라 확언을 합니다. 이유인즉 영혼이 이승에서 기거하는 집이 육신이기에, 그 상태가 곧 삶이랍니다. 따라서 영혼이 육신에서 떠난 상태가 주검이며, 영혼이 거푸집인 육신에서 들락날락하는 모양새가 바로 위증으로 투병하는 상태라고 규정합니다.
그러하지만 옛사람들이 분명 그랬습니다. 저승길 가는 고인 모습이 아름다워야 유족도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영혼이 떠나간 육신, 달리 말하면 그 영혼 거푸집인 주검을 도색하여 아름답게 꾸미는 일, 즉 리모델링하는 셈입니다. 논어에는 헐어져 내린 담장에 칠하는 일을 분명 무망한 짓이라 이르긴 했지만, 저에겐 그 말이 망언으로 여길 만큼 이 일은 타인에게 넘길 수 없는 제 천직이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모 전문대학 장례지도학과를 졸업하고 미혼 몸으로 이곳에서 시체를 메이크업하는 일이 바로 제 일입니다. 으레 장례사라면 늙은이만 시신을 다루는 직업으로 알고 있는 분들은 제가 하는 일을 보고, 또 그리고 이내 제 용모를 뜯어보곤 앳되게 젊다고 말하면서도 놀라는 눈빛으로 제 처지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까지 쓰는 게 엿보입니다. 입 밖으로 내뱉진 않지만, ‘젊은 여성이 참으로 험한 일을 하는구나.’ 그런 안쓰러운 눈빛을 굳이 숨기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시신을 메이크업 의뢰 온 한 기업체 젊은 사장은 회사에다 일자리를 마련해놓을 테니 직장을 옮기라 꼬드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분은 이 일이 저의 천직인 줄 모르는 듯했기에 용기를 내서 권유를 했을 테지만, 사람 죽음 길이 외경스러워 제 스스로 택한 길이므로 그의 권유를 마음에 두지 않고 가벼이 귀 밖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시신을 청결하게 씻어내야 하므로 인체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느낌에서 냉정해지고자 마음부터 추스릅니다. 물론 사람 사체임을 잊어야 합니다. 저는 침착하게 시신 이곳저곳을 누비며 삶터 현장에서 묻어온 온갖 때를 유족 손길처럼 꼼꼼하게 닦아내기 시작합니다. 지금껏 삶을 부지하면서 싫든 좋든 몸에 옮겨붙은 때와 갖은 굴욕을 참아낸 더께들, 이승에서 지고 온 버거운 짐. 그런 것들을 낱낱이 씻어내서 저세상 길로 가벼이 가도록 알뜰히 씻어냅니다. 세상살이에서 묻은 것들은 이 풍진세상에 오롯이 남겨두고 태어날 때 그런 신성한 몸뚱이로 만들어 떠나보내도록 공을 들입니다. 물론 마음속으로 무수한 물음을 던지면서 주검에서 풍진세상에서 묻은 때를 벗겨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이 가졌던 명예나 죄도 모두 말끔히 지워내고 싶습니다.
지금 손에 잡히는 육체야 탄력을 잃은 살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생명이 존재한 생전 육신은 아름다우리만큼 터질 듯한 젊은 윤기를 발산했을 테지요. 그 육신으로 자신 앞에 펼쳐진 삶을 살아내고자 부단히 노력했을 테고요. 그러노라고 육신은 쉼 없이 세파에 부딪쳐 닳아왔을 겁니다. 또한 때로는 모멸 차게 던져오는 질시를 막아내느라 붉게 물들기도 했을 테지요. 그리고 세태에 한없이 무력한 몸뚱이를 보며 좌절과 절망도 함께 느꼈을 때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숨을 쉬고, 쉬지 않은 차이가 이렇게 다르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도록 이물스럽게 차갑도록 싸늘함이 손끝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니 소중함과 소용없음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기야 생명이 있을 때는 힘이라 있어 저항감을 느끼지만, 지금은 그런 힘이 남아 있는 부위는 어디에도 없도록 석고 구조물과 같습니다. 비로소 생명 근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그것이 무엇이며, 또 그 가치가 어떠한가를 묻고 되묻고 있습니다.
주검을 알뜰히 닦아낸 다음, 그곳에서 피를 빼내야 합니다. 방부처리해서 이 사람 고국으로 보내기까지 보관과 운송 과정에서 오는, 빠른 부패에서 시신을 보호하려 함입니다. 이제 아무 구실도 못해 쓸모 없어진 피들이 육신에서, 마치 고무호스에서 나머지 물기가 배출되듯 혈압을 잃은 피가 스멀스멀 느리게 빠져나옵니다. 피를 뽑아낸 육신으로 이 사람을 바다 건너 고국으로 보내야 합니다. 종래 살아생전 온몸으로 콸콸 관류하던 피를 비워낸 몸으로 고국 땅으로 떠나가겠지요.
일생 동안 온 육신 곳곳을 용솟음치듯 솟구쳐 다녔을 핍니다. 몸 안에서 피의 떠돎을 헤아려본다면 수만, 수천 번이 되겠고, 길이로 따지면 지구 몇 바퀴로 표현해야 옳을 테지요. 아마도 한 구비 한 구비 돌아칠 때마다 감정이 파도처럼 일어 마음과 몸을 격정적으로 움직이게 했을 겁니다. 폐에서 무한히 걸러져서 선명한 빛을 보이던 혈액이, 지금은 자동차가 멈췄던 자리에 흘린 엔진 브레이크 오일처럼 검붉기만 한 채 점질 농도가 높아져 있습니다. 기계로 치면 윤활 역할을 마친 폐유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맞습니다. 버거운 거친 삶을 사느라 여지없이 변색되었음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을 떠나보낸 육신에서 피마저 뽑아내자, 시신이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소멸로 가는 생물 변화를 바로 눈앞에 바라보면서 참아낼 수 없는 연민을 느낍니다. 저는 용서를 빌 듯 서둘러 손과 발뿐만 아니라 전신을 마사지해 뭉친 근육을 풀기 시작합니다. 이제 주검은 굳어졌다가 다시 풀어지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사멸로 들겠지요.
시신을 풀고 나서야, 저는 포르말린을 전신에 바르며 방부처리를 합니다. 전생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몸부림쳤던 몸뚱어리지만, 종래는 이렇게 아무것도 지닌 것 없이 알몸으로 간편하게 누워 있습니다. 이웃에게서 모멸 찬 시선을 막아내고자 옷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에 급급했을 거고, 사계절 변화하는 날씨로부터 육신을 지켜내고자, 양말과 장갑을 찾아 시린 곳을 부지런히 감싸기도 했을 테지요. 또한 여름철 체온을 조절하려고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에 몸을 내맡기기도 했을 터입니다.
하지만 지금 빈손 아귀에는 굳어진 살만 두텁고, 벗은 맨발은 발가락과 발가락이 맞닿는 부위가 살아온 나날을 일러줄 만큼 휘어져 있습니다. 그것이나마 고향에 남겨진 가족에겐 소중하기에 꼼꼼히 살펴 가며 그곳까지 세심하게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방부처리를 합니다.
방부처리를 끝낸 저는 잠깐 일손을 멈춥니다.지금껏 해온 작업과 달리 기분을 전환하여 다음 일에 더 정성을 들이려고 잠깐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바로 시신을 산자보다 더 아름답게 메이크업하기 위해섭니다. 메이크업에 필요한 도구들을 다시 꼼꼼히 챙긴 다음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며, 죽은 자의 가장 이상적인 표정을 머릿속에다 그려 넣습니다.
제 작업 목표가 늘 그러합니다. 보다 최상 메이크업, 아주 행복한 표정, 불운 연속으로 일생 동안 한 번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극선의 정복이 담긴 표정, 그러면서 육신이 소멸할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행복한 표정을 그려줄 작심을 합니다. 메이크업 작업을 끝낼 때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이 들 때면 하루 고단함이 사월 잔설처럼 녹아 풀어짐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눈언저리부터 메이크업을 해야겠지요. 얼굴에서 눈, 코, 귀, 입이 가장 중요한 부위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메이크업에도 그것들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귀와 코는 표정 변화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는 부위임을 아시지요. 그곳으로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는 한편, 호흡을 한다는 역할일 뿐, 타인과 소통에는 눈과 입이 창구 구실을 합니다. 그곳은 보고 먹는 기능 외 눈빛으로, 말로 타인에게 무수한 피해를 입힌 도구 역할도 해서 갖가지 죄를 저지른 부위기도 합니다. 해서 태어나서 가장 많이 변형된 부위라고 저는 단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코나 귀와 달리 눈가장과 입언저리는 가장 주름이 많이 지는 부위입니다. 타인을 향해 꾸밈이 많게 이루어져 그러합니다. 또한 얼굴 부위에서 범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부위입니다.
바로 제가 시신을 메이크업할 때, 그곳에 가장 공을 들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기도 합니다. 눈을 뜨지 않고 감고 있지만, 감겨진 모습에 따라 표정이 달라 보이므로 원형 형상을 복원하고자 눈썹을 가지런히 다듬고, 눈두덩에 밝은 색조를 올려 마치 잠을 자듯 그리 평온하게 보이도록 메이크업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눈이 감겨 있기에 망정이지 그것이 열려 있다면 그 눈빛 때문에 저는 일을 하지 못할 겁니다. 일생 동안 자신 생각에 따라 한없이 사물과 욕망을 쫓아다녔던 눈이기에 그것을 마주하기가 무척 두렵습니다. 그것이 탐욕스럽게 더듬어온 사물과 갈망을 나열하노라면 아마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또 때로는 불가사의한 상황에 좌절 빛을 드러내기도 하며, 천박한 웃음을 띠고 아부를 예사로 했던 눈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가 폭발했던 눈이고, 한없이 보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눈물이 글썽이던 눈이었을 테지요.
그리고 가슴에 모여지는 감정들을 그곳으로 통하여 타인에게 전하며, 타인에게서 오는 감정도 그곳으로 통하여 가슴으로 들어왔을 겁니다. 저는 그러하기에 눈언저리 메이크업에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지금 누가 보아도 전생에서 당했던 고통을 모두 드러낸 듯 어두운 그림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좋은 꿈을 꾸면서 평온하게 자는 듯 보입니다. 그렇게 평온하게 자는 모습은 이 사내 일생 동안 그리 많지는 않았을 테지요.
저는 코 근처의 피부색을 고치고 아래로 손길을 옮깁니다. 세상에서 가장 말썽을 부린 부위가 그곳에서 제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질없는 것에 연연하며 노상 열려 있어야 했던 입입니다. 살기 위해서 부지런히 음식을 넘겨야 했고, 또 살아 있는 동안은 자신의 정당성을 추구하려고 쉬지 않고 말들을 꾸며 내뱉어 온갖 갈등을 부추겼던 부위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러 굶주리기도 했고, 입맛이 달아 과식하기도 했으며, 남이 듣기 좋은 소리보다 남을 해코지하려는 말을 더 많이 내뱉기도 했을 겁니다. 분명 그것은 칼과 창 같은 거여서 무수한 이웃에게 얕고 깊은 상처를 입히기도 했을 테지요.
제 손길이 입술 위로 스치자 기능 때문에 졌던 주름이 가려지고 윤기가 돕니다. 죽음이 거짓이듯, 아니 누운 주검이 깊은 잠에서 벌떡 일어나 선하품을 할 것 같아 보입니다. 이제야 이국 객지에 외롭게 떠돌던 몸이 바다를 건너 그의 조국으로 귀향할 차림이 끝났습니다. 여성으로 치면 눈이 부실 만큼화사하게 꽃단장을 한 셈입니다. 죽은 자에게 ‘화사하다 함’은 부적절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어둡고 찬 표정이 아니라서 좋습니다.
아마, 이 남자 육신에서 떠난 혼령은 저승으로 간 조상령이 아니라, 아직 이국 이승에서 떠돌고 있는 원령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다른 잡귀들과 이 세상 언저리에 머무르며, 그것이 품은 원한이 풀릴 때까지 산사람을 괴롭히려 들겠지요.
그러나 지금쯤 떠난 육신을 뒤돌아본다면, 그리고 이렇게 평온하게 잠든 모습을 본다면 품었던 원한을 풀어내고, 미련 없이 저승길에 오른다고 손을 흔들 겁니다. 아니 제 먼저 바다를 건너 제 고향 길에서, 그의 육신이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가 눈으로 확인하고 저승길에 가벼이 오르는 게 합당하겠지요.
저는 평온하게 잠든 남자를 보면서 이제 제 일이 끝났음을 알고 허리를 폅니다. 그렇게 이국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을 한 남자 육신을 평온하게 고국으로 보낼 수 있는 차림을 끝낸 겁니다. 마음이 평온하며 일을 마친 뒷맛이 개운합니다. 그리고 한없이 기쁩니다. 이 일이 저의 천직이기에 오늘도 주검에 대한 경외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