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28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소설부문 당선작] 소연이
노란 모자의 시간
“오늘 늦어.”
남편이 출근을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큰 아이가 집을 나서고,
“다녀오겠습니다.”
작은 아이마저 집을 나선다.
도어락의 잠김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소파에 앉는다. 이제부터 뭘 하지. 집을 한 바퀴 휘~ 둘러본다. 어제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상태다. 군데군데 뽀얀 먼지가 보이기는 하지만, 특별할 것은 없고, 딱히 정리가 필요한 곳도 없다. 잠시 멍하게 정면의 꺼진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까만 화면에 내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참으로 무난한 모습이다. 특별히 이상한 구석도 없고, 특별히 좋아 보이는 구석도 없다. 그냥, ‘내가’ 앉아 있을 뿐이다. 누울까? 일어날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일어나는 걸 택한다. 누우면 하루가 그냥 후딱 지나가버리는 신기한 시간의 흐름을 겪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일어나 식구들이 간단히 먹은 아침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 방을 정리한다. 열심히 해주지는 않는다. 저들 방이니, 저들이 치우는 것이 기본이고, 가끔 경고성 정리를 해주는 것이 우리 집, 아니 아이들 엄마인 나의 ‘룰’이었으니까. 방정리들을 하고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8시 30분이 지나고 있을 뿐이다. 잠시, 다시 소파에 앉아 꺼진 TV 화면에 보이는 나를 본다. 참, 뭐 같네. 이렇게 시간이 무서울 줄이야. 결혼 생활 20년에, 남은 건 나이든 나와 넘치게 남은 시간인가 보다. 요즘 자꾸 입에 오르내리는 젊은 엄마들의 고단한 일상, 경력 단절의 안타까움, 이런 것들조차 난 저만치 보낸 나이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그 젊은 엄마들에게 그 때가, 그래도 좋은 거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해줄 수 있을 나이인가 보다. 지금의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경력 단절이 너무 오래 되었고, 나이가 먹은 만큼 어느 정도의 무력감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은 내 손이 필요한 현직의 남편과 독립 전인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이 남아 있는 상태이고, 무엇보다도 넘치는 시간이 있다. 문제는 이 넘치는 시간이다.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이들이 있을 때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돌아서면 어지럽히는 통에 늘 집은 난장판이었고 치워도 치워도 끝없이 치워야 하는 일상의 반복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 맞춰 끼니를 챙겨야 했고, 함께 앉아 읽고 쓰고 해야 했다. 시간은 늘 부족하고 모자랐고, 늘 바빴다. 그런데 지금은, 이 터무니없이 남아도는 시간, 이 시간이 문제였다.
- 잘 있었어? 나야, 혜선이.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해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오래 전 기억 어딘가 쯤에, 그것도 한참을 뒤진 후에야 그녀와의 시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너무 오래 걸렸다. 너한테 이렇게 연락하기까지.
휴대폰 너머의 그녀의 목소리는 생기 넘쳤다.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30년의 시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한여름 소나기처럼 힘이 있고, 시원했다. 긴 수다가 이어졌다.
- 어떻게 살았어?
- 어떻게 살긴, 다 똑같이 살지. 결혼하고, 애 낳고, 남편, 애들 챙기고. 뒤 돌아 보니, 이 만큼 시간이 흘렀지.
- 하긴, 나도 그렇다.
- 애들은 몇 명이야?
- 아들만 둘, 서영이 넌?
서영이, 참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유진이로 산 지도 30년이다.
- 아들 하나, 딸 하나.
- 딱 좋네, 머스마들은 키워 놓으니 재미가 없어. 주위에도 보면, 딸 있는 여자들이 제일 부럽더라.
- 뭐,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 그래도, 키울 때는 훨씬 더 예민하고 까칠해.
- 그래도, 나이 먹으면 딸이 최고던데?
- 살가운 아들은 열 딸 안 부럽더라.
- 우리 작은 아들이 좀 딸같이 굴기는 해.
- 그나저나 갑자기 어쩐 일이야? 그러니까, 얼마만인거지?
- 30년.
- 엄마야! 벌써 30년이야?
- 중간에 잠깐 한 번 보기는 했지, 아주 잠깐, 10년 전 쯤에.
- 그랬나? 왜 난 도통 기억이 안 나지? 우리 졸업식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애.
- 10년 전에는, 정말 잠깐 얼굴만 본 정도라서,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하고.
- 그랬구나.
- 이제 쉰을 눈 앞에 두고 이렇게 다시 우리의 시간이 닿네.
- 그러게 말이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수다를 떨고 보니, 어느새 점심 때를 훌쩍 지나 있었다. 시간이란 것이 참. 평상시 하루라면, 참으로 지루할 법한 오전에서 낮 시간인데,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너무 오랜 시간 소식 모르고 지내던 터라, 풀어놓아야 할 시간이 끝도 없이 쌓여 있었던 것 같다. 덕분에, 터무니없이 남아돌던 시간이 제법 쓸모 있게 쓴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 전화번호도 안 물어 봤네.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영은이가 알려줬나? 어? 그럼 영은이하고는 계속 연락이 되었던 거야? 여러 가지 질문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마구 날아다녔고, 딱히 정답, 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답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영은이한테 물어 보면 간단할 일이긴 하지만, 한창 수업하고 있을 시간이라, 나중으로.
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괜찮을까? 난,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흘러도, 여전히 나는 그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데. 둘러보면, 꽤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난 왜 그 날, 그 시간 속에 갇혀서 이렇게 쪼그라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괜찮을 거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거라는 말도 들었고, 열심히 바쁘게 살다 보면, 스리슬쩍 지나가는 지난 시간의 어디쯤이라고 지나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그런데, 하루하루 갈수록, 행복의 크기가 커질수록, 더 크게 다가왔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이 불현듯 찾아왔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 순간이 닥쳤다. 한참을 가슴을 부여잡고 꺽꺽거리다 보면, 죽음이 눈 앞에 와 있었고,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면, 숨이 돌아왔다. 차라리, 그대로 멈춰 버리지.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오늘 늦어.”
남편이 출근을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큰 아이가 집을 나서고,
“다녀오겠습니다.”
작은 아이마저 집을 나선다.
도어락의 잠김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소파에 앉는다. 쏟아지는 것 같이, 또 시간 앞에 앉았다. 잠시 지난 시간들을 생각한다. 혜선과의 통화가 참 많은 시간들을 내 앞에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정작 혜선과 보낸 시간을 잘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암막 커튼처럼 새까만 무언가가 그 시간들을 가로 막고 있다. 무엇일까. 이 어둡고 깊은 커튼의 정체는. 그러고 보니, 고교 졸업식부터의 시간은 또렷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남편과 아이들이 먹고 나선 간단한 아침상을 치우고, 침대도 정리하고, 집 안 여기저기를 대충 정리하는 동안 혜선의 얼굴을 생각한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지? 10년 전 쯤에도 잠깐 봤다는데, 예전의 모습도, 10년 전쯤의 모습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노란 모자. 노란 모자만 떠오른다. 커피 한 잔을 내려 식탁에 앉는다. 무섭게 남아돌던 시간이 쓰임을 발견한 것처럼 과거로 과거로 흐른다. 어디쯤일까. 어디쯤에서 나와 혜선이 발견될까. 알 수 없는 이 어두운 막 건너편에는 어떤 사연의 시간이 있길래, 이렇게 새까맣고 두꺼운 것일까. 그 어둠의 깊이만큼 노란 모자는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내 모자? 아니면,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 혜선의 모자? 커피 한 잔과 단순한 시간의 되돌림만으로는 도저히 떠오를 것 같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서 집 안을 서성거린다. 밖은 내 시간의 막과는 정반대로 해가 반짝 오른 선명한 날씨다. 연일 떠들어대는 미세먼지 농도가 한껏 줄어든 맑은 하늘이다. 참 나, 하늘은 왜 이렇게 맑은 거야. 거실 창으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의 아이들 표정까지 보일 것처럼 시야가 멀고 밝다.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절친이었고, 쌍둥이 자매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다녔었다. 그 시절 교복 자락 속에 감춰진 모습이야 고만 고만한 모습이겠지만, 우리는 ‘우리 둘’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가끔 ‘우리 둘’을 혼동해 이름을 바꿔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더없이 재미있어 했고, 가끔 서로인 척 하며 깔깔거리는 일들을 자꾸 만들었다. 그 시절 그 어떤 반짝이는 것보다도 빛났다. 그래, 그랬었어. 혼자 피식, 하고 웃는다. 싱긋이라고 해야 하나. 박장대소는 아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인 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그리웠네. 한 번 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작은 점이 되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한참 바라본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청명한 공기 속에 흩어져 15층 우리집까지 올라온다. 이렇게 맑은 날에는 소리도 멀리 퍼지는구나. 새삼, 쳐다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보였다. 시간을, 이렇게도 흘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새로웠다. 넘치는 시간이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지지 않고, 싱긋 웃어지는 소소한 여유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혜선이가 요술을 부렸네. 혜선과의 통화를 생각하며 한 번 더 웃었다.
- 지금은 어디에 살아?
- 뮌헨.
- 어휴~~ 독일까지 간 거야?
- 아, 모르고 있었어?
- 그르게, 난 전혀 모르고 있었네. 신랑 따라서?
- 아니이, 이민.
- 이민?
- 응, 작은아버지가 예전에 파독 광부셨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정착을 하셨었거든.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그 때······.
혜선의 말이 뚝. 끊어진다. 깊고 천천히. 긴 한숨이 한 번, 두 번, 세 번.
- 서영아~ 다시 연락할게. 미안.
뚝.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혜선이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지.
허탈하게 끊어진 통화가 못내 아쉬워 한참을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다시 전화벨이 울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혜선이 연락처도 안 물어 봤네. 아, 맞다. 영은이한테 연락해서 물어보면 되는데, 그게 뭐 어렵다고 그것도 여태 못했네.
무심히 지난 듯 보이는 너의 시간 앞에, 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는 죽음보다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들이, 너에게는 어떤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니가 살아가고 있는 그 시간들이, 설핏 설핏 느껴질 때면. 나와는 다른 시간이었음을. 그렇게 깨달아가고 있어. 우리 그 때. 너랑 나. 어떤 시간 속에서, 어떤 일들을. 함께 겪었던 것일까.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고. 니가 이야기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늦어.”
남편이 출근을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큰 아이가 집을 나서고,
“다녀오겠습니다.”
작은 아이마저 집을 나선다.
도어락의 잠김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소파에 앉는다. 쏟아지는 것 같이, 또 시간 앞에 앉았다. 잠시 지난 시간들을 생각한다.
혜선은 몇 달 째 연락이 없다. 이제 곧 겨울이다. 눈이 내리고, 코 끝을 빨갛게 물들이는 계절이 올 텐데. 혜선의 연락처를 묻지 않은 것을 내내 후회했다.
“너, 혜선이 기억해?”
한동안 연락이 안 되던 영은과 은행 열매의 악취에 화가 머리 끝에 도달하기 직전에 연락이 닿았다. 당최 연락이 안 되었던 것도 기묘한 느낌이지만, 내 연락이 생소한 듯 반응하는 그녀의 대답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혜선이?”
“아니, 그러고 보니, 왜 이제야 연락 하는 건데?”
“무슨 소리야~”
“부재중 통화에 내 전화 없었어?”
“전화 했었어?”
그러고 보니, 내가 직접 영은에게 통화 버튼을 눌러 통화를 시도 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것도 이상했다. 평소대로라면, 이틀이 멀다하고 사소한 것까지 수다를 떨어야하는 사이인데, 그런 시간 없이 지나온 지금이라니······. 지난 몇 달간의 안부를 서로 물어가며 각자의 시간에 대해 알려주는 말이 몇 마디 오갔다. 영은도 이렇게나 한참을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근데, 아까 누구라고 했지?”
그제야 다시 생각난 듯, 영은이 물었다.
“아~ 맞다. 이렇다니까. 혜선이.”
“혜선,,,,이?”
반갑고 설레는 내 맘과는 달리 영은은 무언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비쳤다. 그 때, 알아챘어야하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영은이 무언가 난감해할 때. 하지만, 그 땐, 혜선에 대한 반가움과 그리움, 그리고 호기심이 온통 나를 채우고 있던 시간이라, 영은의 그 당혹스러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유진아! 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다시 연락할게!”
영은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나도 덩달아 다급히 전화를 끊고 나서야, 혜선이 연락처 아냐고 물어봤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늦어.”
남편이 출근을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큰 아이가 집을 나서고,
“다녀오겠습니다.”
작은 아이마저 집을 나선다.
도어락의 잠김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소파에 앉는다. 쏟아지는 것 같이, 또 시간 앞에 앉았다. 영은하고도 연락이 쉽게 닿지를 않고, 혜선의 전화는 더 더 오리무중. 기억은 시간을 뒤로 아무리 돌려도 내 앞에 나타나주지를 않았다. 어디서부터 무얼 찾아야 혜선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까, 어디를 가면, 너와 나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맞다! 앨범!
서재 깊숙이 꽂아두고 생전 열어보지 않는 기억의 흔적들. 전투에라도 나서는 듯한 기세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좌우 책장 여기저기를 훑어가며 묻혀있던 시간의 증거를 찾았다. <세영여고 37회 졸업앨범>
내가 몇 반이었더라. 새까만 장막이 다시 드리워진다. 기억을 막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 혜선과 나의 시간을 이어보려고 하지만, 장막이 두껍고 촘촘했다. 마음이 조급할수록 장막은 더 어둡고 두꺼워지는 기분이었다. 침착하자. 이게 뭐라고. 이렇게 조급할 필요가 있나. 남아도는 게 시간인 걸.
천천히, 무심히 쏟아지는 이 많은 시간들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그 시절, 그 시간들이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교장 선생님 얼굴이 이랬었나, 이 선생님은 기억이 나는 것 같네. 이런 교복을 입었었구나. 장막은 여전했지만, 무섭게 두꺼워지는 속도가 늦춰진 듯했다. 천천히 사진 속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 하나 확인하며 한 장 한 장 넘겼다.
4반
<이 시간도 지나간다! 두려움 없이 달리자!>
범상치 않은 급훈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반이다! 장막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순간,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 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전화벨이 울린다. 말 그대로 화들짝 놀라서 선채로 보던 앨범을 놓쳐버렸다. 다행히 발을 찧지는 않았지만, 애꿎은 서재방 바닥 마루가 찍혔다. 거실로 뛰어가 소파 테이블에 놓았던 전화를 받아든다.
- 나야~
기다리던 목소리.
- 너무 간만이지?
지난 몇 번과는 다르게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어떤 말을 먼저 해야할지 몰라서, 가만히 숨만 고르고 있었다.
- 화, 났어?
내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럽게 내뱉은 혜선의 말이 이상하게 저릿저릿한 느낌이다.
- 화가 나긴, 그냥, 좀, 많이 기다렸어.
- 아~
혜선이 내뱉은 아~에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 갑자기 끊어버려서,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 미안해~
- 연락이 하고 싶었는데, 연락처도 안 물어봤지, 모야. 영은이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근래에는 영은이하고도 연락이 잘 안 되고. 영은이 기억해?
- 기억하지. 잘 지내지?
- 어? 영은이하고 연락했던 거 아니야?
- 아니, 영은이도 서영이 너처럼 한 10년 전쯤 잠깐 본 게 전부야.
- 그럼 나는 어떻게 찾았어~?
- 그게·······. 그건 그렇고, 요즘은 잘 지내지?
혜선은, 말끝을 흐리며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혜선과 닿은 그 시간이 반갑고 좋아서, 또 다시 그 옛날 그 시절 수다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이상하게 기운이 없고, 풀이 죽어 있는 듯한 느낌은 가시지를 않았다.
- 혜선아~, 너 정말 별일 없어?
- 응, 괜찮아.
- 서영아~
혜선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 목소리에 나도 울컥해서 목소리가 물기가 스며들었다.
- 서영아~
- 응, 말해.
- 괜찮지?
- 응?
- 다, 괜찮으냐고. 정말 다~ 괜찮지?
- 그럼, 시간이 좀 남아돌아서 그게 좀 허전하긴 한데, 괜찮아.
- 그럼 됐다.
- 혜선아~ 넌, 너도 괜찮지?
- 이젠, 괜찮아지려고. 니가 다 괜찮다고 하니까, 나도 다 괜찮아지려고.
- 아프지 말고.
- 응, 아프지 말아야지. 니가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주는 걸, 그리고 괜찮다고 하는 걸. 그래서 이제 나도 괜찮아질 거야.
혜선이 우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도 눈물 한 방울이 투둑 떨어졌다. 그냥 그랬다. 그리움은 아닌 것 같은, 알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잠시 서로의 울음을 지키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화제를 돌렸다.
- 참참, 혜선아~ 너 혹시 노란 모자 있어? 병아리색 노란색.
- 노란색, 모자?
- 응. 나 실은 졸업식 이후로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나. 졸업식 때도, 너를 봤는지, 못 봤는지, 어떻게 졸업식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깜깜한 막 같은 게 기억을 덮고 있는 기분이야. 그런데, 노란색 모자 하나가 선명하게 기억이 나.
- 인기가 좀 좋았지, 그 모자가.
- 니 모자였구나.
혜선이 노란색 모자를 알고 있다면, 두껍게 가려져 있는 내 기억 어딘가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노란 모자, 라는 말과 함께 혜선이 침묵했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그 때, 다시 기억 속 장막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아까보다 더 강렬한 빛이 한줄기 달려들었다. 그리고, 노란, 모자가, 보였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고, 나는 다시 서재방 바닥에 앉은 채로 졸업 앨범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한 손에는, 통화가 아쉬운 듯, 꽉 쥔 핸드폰을 들고. 정신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떨어진 장막 사이로 달려드는 빛을 향해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반 급훈이! ‘두려움없이 달리자!’라니. 다시 앨범을 열어 우리반 페이지를 펼쳤다. 하나 하나 아이들 얼굴과 이름을 확인했다.
‘차서영’ 나다! 앳된 얼굴의 교복을 입은 내가 거기에 있었다. 말갛고 생기 넘치는. 그리고 그 옆에. ‘최혜선’ 혜선이다! 혜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동그랗고 큰 눈, 동그란 얼굴. 다른 사진 속 아이들 표정과는 달리, 활짝 이가 보이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혜선이, 이렇게 생겼구나. 다시, 장막 하나가 툭 떨어진다. 천천히, 다른 사진들로 시선을 옮겼다. 예닐곱 명씩 그룹을 모여 찍은 그룹컷, 단체컷, 활동컷들이 잘 편집되어 있었다. 그룹컷 속에 혜선과 나는 교복 입은 모습도, 사복 입은 모습도 있었다. 조금씩 기억이 났다. 이 사진을 찍던 날이. 사진기사가 자리를 잡아주고 포즈를 잡아 주면, 제법 그럴 듯한 구도의 사진이 나왔다. 그렇게 천천히 보던 사진 속에서, 드디어! 발견했다! 노란 모자! 그 순간!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요란한 소리는 내며 모든 장막이 떨어졌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빛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떠올랐다! 그날, 우리, 그리고 그, 일.
나에게는 하루하루 숨을 쉬는 모든 순간이 소중했었어. 언제고, 이 숨이 끊어지고, 이 세상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떠나지를 않았거든. 그날, 우리, 그리고 그, 일. 그 시간이 없었다면, 너랑 나, 지금하고는 조금 다른 시간을 지나오지 않았을까. 니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던 시간도 있었고, 죽을 것같이 보고 싶었던 시간도 있었어. 한 번만, 한 번만 만나서 물어보고 싶기도 했었고,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있었어.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내 선택이 달라졌을까, 라는 후회를 했던 시간도 있었고,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시간도 있었어. 그 많은 시간들 지나오면서도 나를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노란 모자. 그 모자에 담은 너와의 비밀 때문이었어. 너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 기억할 수 없는 것도, 그 모자를 묻으며 비밀도 묻자고 했던 우리 둘의 맹세 때문이었을 거라고 믿었거든.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묻으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서영아~ 나는 그렇지 못했어. 그리고, 시간도 내게는 얼마 남지 않았었어. 너에게 달려가, 꼭 한마디 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시간조차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어.
졸업 사진을 찍던 날이었다. 친구들과 깔깔대며, 봄볕보다 눈부신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점심을 먹고, 담임 선생님의 종례와 함께 그 날의 일정이 끝났다. 오랜만에 학교에서 벗어난 날이라 다들 들떠 있었다. 아직 입시가 당면해 있긴 했지만, 고3 봄. 학력고사가 아직은 멀다 느껴지는 그 때, 졸업 사진 야외 촬영은, 소풍보다도 더 설레는 이벤트였다. 혜선이 쓰고 있던 노란 모자는, 그날 단연 화제였다. 유난히 동그랗고 하얀 얼굴에, 동그란 눈을 가진 혜선에게, 챙이 짧은 그 노란 모자는 너무나 잘 어울렸고, 그 어떤 봄꽃보다도 화사하게 빛이 났다. 다들 한 번씩 돌려가며 써보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자~ 다들 너무 늦게 들어가지 말고! 집으로 학원으로 어서 어서 들어가라! 저녁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담임 선생님의 당부대로 아이들은 삼삼오오 흩어졌고, 나와 혜선이, 영은이도 다음 행선지를 정하려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근처의 많은 학교들이 비슷한 시기에 졸업 사진 촬영을 했다. 가장 볕이 좋고, 가장 꽃이 예쁠 시기를 고르다 보니,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우리가 찍었던 그 장소에, 남매학교라고 하는 <세한고등학교>도 사진 촬영을 왔었다. 우리 학교는 여고, 세한고는 남고. 설립자가 남매지간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두 학교간 동아리나 방송반 등의 연합 모임들이 활발했었다. 그리고 그날, 거기서 우리는 함께 라이딩을 한 적이 있었던 세한고 자전거 동아리 회원 5명을 만났다. 남자 애들은 역시 극성맞은 면이 있는 것이, 동아리 촬영까지 밖에서 하겠다고 우겨 자전거까지 끌고 나온 참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또 무슨 계시인 거 아냐?”
“계시는 무슨~”
남학생의 말에 영은이 툭 던지듯 대꾸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라이딩이나 할까?”
“우린 자전거 없어.”
“한 명씩 뒤에 타면 되겠네.”
한 남학생이 제안했고, 서로 눈치를 살피던 우리는 하나씩 자전거에 올라탔다.
“아! 맞다! 잠깐만!”
영은이 갑자기 자전거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나 오늘 가야해! 막내 내가 데리러 가야 하는 날이야!”
부모님이 무역회사를 운영하시느라 바쁘신데다 동생이 셋이나 됐던 영은은, 늘 막내 동생 챙기느라 바빴다. 그 날도, 영은은 막내 동생을 받아야 한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결국, 혜선과 나, 둘만 세한고 남학생들과 라이딩을 시작했다.
봄이라도, 아직은 해가 짧을 때라 금세 어둑어둑해졌고, 남자애들이 달리는 대로 맡기다 보니, 제법 먼 곳까지 달렸었던 것 같다. 자전거가 멈추고 우리가 땅을 밟았을 때는, 이미 하늘은 어두웠고, 주변은 숲이나 다름없는 공원이었다. 순간, 온몸이 쭈뼛 서는 기분과 함께 두려움이 닥쳤다. 혜선과 나는, 꼭 붙어 손을 잡았다.
“우리 집에 갈래.”
호기 좋게 나섰지만, 둘러싼 남학생 다섯 명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한 남학생이 실실 웃으며 다가섰다.
“큰 길로 나가면, 택시가 있겠지.”
혜선이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면서 말했다.
그리고, 혜선의 말과 동시에, 다섯 남학생은 한꺼번에 우리 둘에게 달려들었다. 한참을 필사적으로 버텼다. 하지만, 한창 힘이 넘치는 열아홉 살의 남학생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깐!!!!!!”
그 순간! 찢어지는 듯한 혜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걘 건들지 마! 그럼! 소리도 내지 않고, 신고도 하지 않을게! 우리, 너희 누군지 다 알아! 너 세한고 3학년 이종석, 김현수, 박재인, 이윤철, 그리고, 1년 꿀은 3학년 장형식. 맞지?”
어디서 그런 오기가 나왔는지, 혜선은, 남학생들의 얼굴과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하나 하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결연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어때?! 절대로! 걘 건들지 않는 거야!!”
남학생들은 저들끼리 눈빛이 오고 가더니, 제일 나이 많은 장형식이 입을 열었다.
“그 말 어떻게 믿어?”
“너 바보야?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아무 일없이 나갈 방법이 있겠니? 기왕 벌어질 일이면! 피해를 최소화해야하는 거 아냐?!!!”
혜선은 거의 악을 쓰듯이 말했다.
잠시 뒤, 한 명은 나를 지키고, 다른 네 명이 혜선을 끌고 갔다.
“혜선아!”
내가 혜선의 손을 붙잡자, 혜선은 내 손을 뿌리치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무 소리 내지 말고 있어. 금방 끝날 거야. 그럼, 집에 가면 돼.”
끌려가던 혜선의 머리에서 노란 모자가 떨어졌다. 그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곱게 반짝이던 노란 모자. 남학생들의 짐승 같은 소리가 들렸고, 이를 앙 다문 혜선의 눈빛이 보였다.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섯 마리의 짐승이 혜선을, 내 눈 앞에서 집어 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혜선이 온갖 먼지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문대며 나를 일으켰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리도 내지 못하는 울음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혜선도 같이 울었다. 그 와중에도 먼저 눈물을 멈추고 상황을 정리한 것은, 역시 혜선이었다.
“서영아~ 잘 들어. 오늘 우리는 여기서 아무 일도 없었어.”
“혜선아~!”
“괜찮아! 내가 너를 지켰잖아! 그거면 됐어!”
혜선이 노란 모자를 내 앞에 내밀었다.
“여기, 이 모자 안에 오늘 우리한테 생긴 비밀을 꽁꽁 묶어서, 여기에 묻고 갈 거야. 여기 묻었으니까, 우린 비밀을 가진 게 없게 되는 거고. 우린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래도 신고······.”
“해도 소용이 없을 거잖아. 우리만 더 챙피해질지 모르지.”
혜선의 체념한 듯한 그 목소리.
그렇게, 그 노란 모자에 그날, 우리, 그리고 그, 일을 모두 묶어서 묻어버렸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도 두껍게 검은 장막을 드리웠다. 다시는, 열리지 말라고.
“아아아아아아악~~~!!!!!!!!!”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빛과 함께, 장막 뒤에 꽁꽁 싸매두었던 기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지. 한참을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온몸으로. 기억이 아팠고, 시간이 아팠고, 혜선이 아팠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거의 다 져 있었다. 곧 식구들이 올 시간이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앨범을 제자리에 넣어 두고 일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혜선이랑 했던 약속처럼, 아무 일 없이. 또 오늘을 지내야 하니까.
“오늘 늦어.”
남편이 출근을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큰 아이가 집을 나서고,
“다녀오겠습니다.”
작은 아이마저 집을 나선다.
도어락의 잠김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영은에게 전화를 건다. 쏟아질 듯 많은 시간이, 오늘은 긴박하고 초조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영은이 바로 전화를 받는다.
- 통화 잠깐 가능해?
- 응, 아침부터 무슨 일?
- 너, 나한테 할말 없어?
- 무슨 말?
- 혜선이.
- 하아~
영은이 탄식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 나 오늘은 오전 수업만 있어. 반차 내고 오후에 니네 집으로 갈게. 시간 괜찮지?
그렇게 영은과의 전화를 끊고 밖을 내다봤다. 오늘도 하늘은 미세 먼지 없지 깔끔하다. 저 멀리 초등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한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기억을 찾으러 간다. 그리고, 10년 전. 우리가 잠시 만났다는 그 날이 떠올랐다. 장례식장.
점심 시간이 되기도 전에, 영은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오전 수업 있다더니, 수업은 하고 오는 거야?”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영은에게 퉁박하자, 영은이 눈을 흘긴다.
“너 같으면, 수업이 되겠냐?”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한참을 한숨만 쉰 채 시간이 흘렀다. 영은도 나도. 하늘이 맑고 볕이 좋은 만큼, 집 안 거실이 환했고, 장막이 거둬진 내 기억의 시간도 환했다. 환하지만, 환해서, 상처가 더 잘 보였고, 더 도드라졌고, 더 쓰라렸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혜선이, 어떻게 된 거야?”
“니 기억은 어디까지인데?”
“그게······.”
“그날, 너희 둘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잘 몰라. 너희 둘 다 입을 꾹 다물었으니까. 처음엔 그게 섭섭했고, 좀 지나니 짐작할 수 있었고, 조금 더 지나니 기억을 못하는 너도, 점점 병들어 가던 혜선이도 이해할 수가 있었어.”
“그랬구나.”
울컥, 목이 메었다.
“넌,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무기력했고. 그래서 너희 부모님이 이름을 바꿔주시고, 심리 치료도 몇 년 했고. 그 사이 혜선인 독일로 이민을 갔어.”
“독일로 이민은 왜 갔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혜선인 나중에 원만한 생활이 어려울 만큼 예민해지고 히스테릭해졌었어. 정신과 치료도 꽤 오래 한 걸로 아는데, 큰 차도는 없었고.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어. 떠나기 직전에 혜선이가.”
“혜선이가 직접?”
“응, 떠나기 직전에 한 번 만났거든. 너를 못 보고 가서 아쉽다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날 이후 니가 혜선이를 피했어.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지.”
얼마나 아팠을까. 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던졌는데, 그런 내가 외면했으니.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섭섭했을까.
“독일로 가고는 연락이 두절되었었어. 전혀.”
“그러다 혹시 10년 전에······.”
“그래, 10년 전에 죽으러 돌아와서, 정말 죽었어.”
“장례식장.”
“너를 데리고 장례식장에 갔는데, 넌 그 때도 혜선이를 피하기만 했어.”
“그래서, 잠깐 만났었다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났구나.”
“누가? 누가 잠깐 만났었다고 해?”
“아, 아니야~ 근데, 왜 죽었어?”
“암이었대, 폐암 말기.”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목구멍 밑까지 뜨겁고 묵직한 무언가 차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아팠구나.
“한동안은 괜찮아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어찌 어찌 낳았나봐. 그런데, 남편과 정상적인 부부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고 하더라고. 다 죽어가는 몸으로 왔을 때, 한 번 만났었어. 다행히 남편이 참 좋은 사람이라 살뜰히 챙기더라고. 한국에서 죽고 싶고, 한국에서 묻히고 싶다고 해서 왔대. 널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끝까지 만나게 해달라고 안 하더라. 아마, 피하는 널 보고 또 상처받기 싫었던 거겠지.”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좀 더 빨리 기억해냈어야 했다. 그래서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고맙다고. 미안했다고, 그리고 괜찮다고 말해줬어야 했다. 바보같이 넘치는 시간을 두고도, 하지 못했다.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렀다. 식탁에 엎드려 어깨까지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울었다.
보고 싶었다.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넌 나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어긋나 버린, 이제는 다시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너와 나의 시간 사이에, 어떤 점이 있어서, 우리의 시간을 잠시 마주치게 한 거였을까. 양자물리학, 이런 어려운 개념들로 설명하면 설명이 될까. 각자 행성의 시간이 다르게 가는 것처럼, 너와 나의 시간도 저 우주 어딘 가에서 다르게 흐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너의 시간은 영영 멈추어 버린 것일까. 너의 멈춘 시간이 어떻게 나의 시간에 맞닿아 잠시나마 함께 흐를 수 있었던 걸까. 내게 넘치도록 남아도는 시간이, 너에게는 그토록 아쉬웠던 시간일까, 아니면, 남겨두고 간 시간일까. 어떤 영화처럼, 먼 우주 어디쯤엔, 너의 시간도 다시 흐르고 있을까.
“오늘 늦어.”
남편이 출근을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큰 아이가 집을 나서고,
“다녀오겠습니다.”
작은 아이마저 집을 나선다.
도어락의 잠김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창을 연다. 넘치게 많은 시간이 쏟아져 온다. 쏟아지는 시간 속에서, 나의 시간을 찾기 위해 일어선다. 이 시간들과 그 때의 시간들, 그리고 다가올 시간들 중, 어떤 것이 진정으로 나의 시간이 되어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주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냥 흘러 보내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흐르는 시간 어디쯤, 내가 지나친 소중한 시간이 흐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시간이야말로, 나의 시간들 중에서도 꼭 지켜야하는 시간일 것이다.
소연이(본명 이소연)_1979년 서울 출생. 고려대 문예창작학과, 동대학원 졸업. 충북작가 신인문학상 가작(2003). 가톨릭신문사 명예기자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소설 심사평 “가독성 높고 속도감 있는 문장 돋보여”
심사자에게 넘어온 작품이 20편. 예년보다 심사 부담이 적으리라 예상했지만, 각 작품 완독까지는 오히려 더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일부 응모자가 기초마저 미흡한 작품으로 작가의 길에 도전하는 것은 다소 성급하지 않은가 싶었다.
다행히 완독 끝 무렵에 손에 든 '아쿠아리움'과 '노란 모자의 시간' 두 편의 작품이, 당선작을 못 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해소해 주었다.
'아쿠아리움' (고경수)은 신뢰도 진정성도 없는 복잡한 인간관계, 이웃과 가족과 직장, 어디에도 심신의 안착지가 없고, 어설픈 연정마저 허망해진 중년의 시련을 다룬 작품이다. 소재, 주제가 진부하고 결말처리가 애매한데도 이 작품에 주목한 것은 필자의 질긴 문장력 때문이다.
대화와 지문의 구분도 없이 서술 일방으로 이어졌지만, 단문과 중문이 적절히 배합된 문장은 자연스럽게 리듬이 따라붙을 만큼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만한 문장력이라면 소재선택이나 구성에 좀 더 신경을 쓴다면 기성을 능가할만한 작품을 쓰리라는 기대를 갖게한다.
'노란 모자의 시간' (소연이)은 여고 시절 절친이었던 두 사람, 모면 불가능한 위기에서, 서영의 순결을 지켜 주기 위해 남학생들의 '먹잇감'을 자칭한 혜선은, '그 일(윤간)'에 대한 기억을 평생 지우지 못해 불행했던 삶을 마감하지만, '그 일'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이름조차 바꾼 서영은 지루할 만큼 평온한 삶을 누린다. 뒤늦게 기억을 되살린 서영의 뜨거운 눈물이. 두 사람 앞에 흐른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삶을 되돌릴 수가 없다. 누구나 짊어지고 사는 등짐. 그 등짐 속의 과거에 대한 선택적 기억, 혹은 선택적 망각이 가능한가? 원망은 흐르는 물에 써서 흘려보내고 은혜는 돌에 새겨 간직하라'는 말은 아무나 실현 가능한 일인가? 이 작품 주제는 정의나 의리에 앞서 자신의 안전을 우선하는 인간의 이기적 본능을 찌르는 것이다.
'그 일'의 적절한 배치로 전반의 이완 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지문을 생략한 대화처리는 가독성을 높이는 동시에, 서영과 혜선의 심리변화 과정과 상황 진전에 속도감을 더하고 있다.
당선작으로 밀며, 모든 응모자에게 감사와 격려를 보내고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위원 안수길 소설가
첫댓글 올려주신 이,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