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초량항
좁은 바닷길에서 지명 유래, 개항 전 부산의 또 다른 이름
- 남항서 자갈치 통해 북항가는 길
- 임진왜란 전사 '초량목해전'불러
- 왜관 들어서며 용두산 일대 지칭
- 영국 해도선 부산바다 '초량해'
부산항이 강화도조약에 의해 강제 개항된 지 올해로 140년을 맞았다. 전문 12개 조로 된 본 조약은 외국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서 이름 높다. 그런데 이 조약의 제4관에 보면 초량항(草梁項)이란 말이 등장한다. "조선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 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는 통상과 관련된 지명이다. 그런데 '항구 항(港)'자가 아닌 '목덜미 항(項)'자를 쓴 초량항이라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초량항은 부산항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
1859년 영국인 존 워드 함장이 측량, 제작해 부산항을 초량해(Tsau-liang-hai)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처음 알린 부산항 해도.
이에 대한 궁금증은 그다음 해 1월 말에 동래부사 홍우창(洪祐昌)과 일본 관리관 곤도 신조(近藤眞鋤)가 양국을 대표해 맺은 부산항조계조약(釜山港租界條約)에서 풀리게 된다. "조선국 경상도 동래부 소관 초량항의 일구(草梁項 一區)는 고래(古來) 일본국 관민의 거류지였다"고 하면서 용두산 일대 약 11만 평에 자리했던 초량왜관 지도까지 첨부함으로써 윤곽이 잡힌다.
그렇지만 역사 문헌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1481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동래현 산천 조에는 '초량항재절영도지내(草梁項在絶影島之內)'라고 하면서 '초량항은 절영도 안에 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초량항은 등장한다. 선조 30년 2월 20일 자 도원수 권율(權慄)의 치계에 '배들은 부산에서 서쪽으로 10리가량 떨어진 초량항에 모여 대총통(大銃筒) 한 발을 방포한 뒤에 그대로 그곳에 머물기로 한다'고 한 걸 보면 포구와 같은 초량항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만기요람 군정 편에서도 '적이 동래로 나오려면 반드시 몰운대와 초량항을 경유할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남항에서 자갈치 앞을 지나 북항으로 나오는 수로 즉 해협과 같은 길목으로 보았다. 특히 거센 조류가 흐르는 이러한 해협은 이순신 장군이 승리로 이끈 주요 해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울돌목인 명량은 명량해전, 거제 칠천량과 견내량은 한산해전, 노량은 노량해전, 초량항은 부산포해전과 관련이 깊었다. 전사(戰史)에서는 길목이란 의미를 실어서 초량목해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초량항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처음에는 주로 해협의 의미로 불리다가 1678년 이후 초량왜관이 들어서면서 점차 이들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더 있다. 1859년 6월 9일에 영국 해군 존 워드(John Ward) 함장이 부산항에 액테온호를 몰고 왔을 때 부속선 다브호를 타고 부산내항을 탐사했다. 그다음 해 10월에 영국 해군성에서 부산항 해도를 발행했는데 제목이 '초량해(Tsau-liang-hai)'였다. 당시엔 부산이란 이름보다는 초량이 란 말이 더 널리 쓰였다는 증거가 된다.
이처럼 개항 전에 초량이라는 말은 부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통했고, 그 구역도 꽤 넓었다. 본래 초량이라는 이름은 천마산, 엄광산, 수정산과 같은 산야에 서식하는 억새풀과 띠풀로 우거진 초원지대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이곳은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 한동안 목마장으로 유명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초량왜관 주변에 조선인 마을이 서서히 형성되면서 서쪽을 구초량, 동쪽을 신초량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오늘날 그나마 지명으로 남은 곳이 부산역 일대 신초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