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6일 (목) 촬영.
918년 태조 왕건은 분열된 시대를 극복하고 통일국가 고려를 세웠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개경이 새로운 수도가 되었습니다.
고려(918~1392)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난립하던 격변의 시기에 여러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개방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이번 특별전에는 5개국(한국,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 46개
기관에 흩어져 있던 450여 점의 고려를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황비창천,煌丕昌天>이 쓰인 거울 / 고려 / 개성 부근 출토 / 청동.
파도가 출렁이는 먼 바다로 배 한 척이 나아가고 있다.
배안에 표현된 인물은 새로운 세계로 거침없이 향하던 고려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바다는 다양한 물건이 오가는 교류의 길이지만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사람들은 청동거울을
바다에 던져 넣거나 거울을 사용해 제사를 지내며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도록 기원했다.
"밝게 빛나는 창성한 하늘"을 의미하는 글씨 <황비창천>이 거울에 써 있다.
(좌)청자주머니 모양 주자 / 중국9~10세기.
가죽 물통은 말을 타고 광활한 지역을 이동하는 북방민족이 사용하던 생활 용기이다.
이 주자는 유목생활을 한 거란족이 썼던 가죽 용기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물이나 술과 같은 액체류를 담을
때 사용하였다.
(우)유리주자 / 개성 부근 출토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에 귀화한 유지성의 묘지명 / 고려 1045년 / 돌.
중국 송宋 양주楊州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유지성(972~1039)의 묘지명이다.
죽은 지 6년 뒤에 다시 장사 지내면서 만든 이 묘지명에는 장사랑將仕郞, 조의태부朝議太夫 등의 관직명만
나열되어 있고 귀화한 시기나 동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복녕궁주 왕씨 묘지명 / 고려 1133년 / 돌.
고려 숙종(재위 1095~1105)의 넷째 딸이자 예종의 친동생인 복녕궁주福寧宮主 왕씨(1096~1133)의
묘지명이다. 이 묘지명에서는 중국 송나라의 연호를 쓰면서도 복녕궁주를 "천자의 딸(天子之女)이라고 표현
하였다. 사대외교의 형식 속에서도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로 자부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천자의 따님이여 보름달 같으셨네
저 흰구름 타고 하늘 위에 오르셨는가
쫓아가려 해도 따를 수 없느니
바람은 쓸쓸하고 하늘만 푸르고 푸르네
한 마디 말로써 묘지를 지으니 천년만년 잊히지 않으리라
김부식이 지은 삼국의 역사 <삼국사기> / 고려 1145년,1573년 인쇄 / 국보 제322-2호.
1145년(인종23) 김부식(1075~1151) 등이 고려 인종(재위 1122~1146)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이다.
군주의 정치 관련 기사인 본기, 신하들의 개인 전기인 열전, 통치제도나 문물 등을 분류한 지志와
연표로 구성된 기전체 방식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삼국의 정치, 역사, 경제, 인물 등을 정리했다.
김부식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는데 현종(재위1010~1031)이후 고려의 왕이
신라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여 고려 건국 초기 지배층이 가졌던 고구려 계승 의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총 50권으로 본기 28권,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열전에는 50명의 인물이 실려 있다.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의 역사 <삼국유사> / 고려 1281년 편찬 / 5권 2책 / 국보 국보 제306호, 제306-2호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의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유산이다.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아 유교사관에 입각해 편찬한 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1206~1289)이
당시 전해오던 전설과 신화, 풍속, 종교 등 <삼국사기>에서는 다루지 않은 사건과 기록을 폭넓게 담아냈다.
이 책에는 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단군신화, 부여, 삼한, 가야, 후백제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으며
고승들의 행적이나 효를 행한 사람들, 신이(神異)한 불교 전승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록했다.
단군에 대해 기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가 전통적인 역사편찬 방식으로 쓰여졌다면, 삼국유사는 보다 자유로운 체재로 우리에게 뿌리가 된
나라의 왕들을 기록했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신화가 또 다른 역사로 수록되었다.
역대 왕명과 연호를 정리한 연표 / 고려 1278년 / 목판 / 보물 제734-20호 / 법보종찰 해인사.
중국의 역대 왕조와 우리나라 삼국 및 고려의 역대 왕명과 연호를 새긴 목판이다.
고려 충렬왕 2년(1276)까지여러 왕들의 재위 기간이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해동제국년이라고 하여 신라, 발해, 궁예가 세운 마진과 일본의 연호를 적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머물렀던 경산 인흥사에서 판각한 것으로 일연과 그의 문도에 의해 찬술된 것으로
본다.3단으로 구분하고 각 단에 순차적으로 역대 왕명과 연호를 정리하였다.
이승휴가 쓴 역사 서사시 <제왕운기>/ 고려 1287년 이후 인쇄 / 보물 제1091-1호 / 삼성출판박물관.
고려 후기의 문신 이승휴(1224~1300)가 1287년에 저술하였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아 쓴 시를 모은
형식으로 상,하 2권으로 엮었다. 상권에 중국의 역사를 읊은 칠언고시를 하권에는 단군 시기부터 충렬왕대
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읊은 칠언고시와 오언고시를 수록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구분한 체제는 고려의 전통과 유구함을 드러내기 위한 고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려인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던 발해를 고려 역사의 일부로 설정함으로써 역사 인식의
폭이 넓어진 면 역시 주목된다.
고려의 건국과 희랑대사.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왕으로, 고려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희랑대사는 왕건의 정신적 지주로 후삼국 시대에 수세에 몰린 왕건을 도왔으며,
고려 건국 이후에는 왕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스님의 실제 모습을 담은 희랑대사 상에서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집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과 왕의 스승인 희랑대사는 고려 오백 년을 지속하게 한 힘을 상징합니다.
국가수호의 중심이 되었던 "왕권"과 국가 운영의 "정신적 기반"을 상징하는 두 사람의 조각상은 조성된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스승과 제자의 천백 년만의 만남이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건칠희랑대사좌상 / 고려 10세기 / 건칠과 나무에 채색 / 보물 제999호 / 법보종찰 해인사.
건칠 희랑대사 좌상은 희랑대사의 얼굴과 신체, 체격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초상 조각으로
10세기 중반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자 우리나라에 유일한 고승 초상 조각입니다.
동시대 중국과 일본에서는 입적한 고승에 대한 추모와 숭앙의 의미로 고승의 상을 활발하게 제작한 데 반해
우리나라에는 유래가 거의 전하지 않습니다.
앞면은 건칠, 뒷면 일부는 목조로 이루어졌는데, 이렇게 재료를 혼용하는 일은 이례적입니다.
18세기의 기록에서 이 조각상의 얼굴과 손을 까맣다고 묘사한 것을 보면
지금의 채색은 조선시대 18세기 이후에 보수하면서 입혀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슴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화랑대사가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함으로써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전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해인사에 전해옵니다.
태조 왕건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려 왕실을 상징하며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왕실 사찰인 봉은사에 왕건의 초상을 모시고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려 국왕이 직접분향하였습니다.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태조 왕건상>은 왕건의 무덤인 개성 현릉에서 출토되었으며,
앉아 있는 상의 높이만 138cm에 달합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세종의 명에 의해 1429년(세종11) 현릉에
매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묻힐 당시 비단옷을 입고 허리에는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천은 부식되고 청동상과 허리띠만 출토되었습니다.
왕건이 쓰고 있는 관은 황제를 상징하는 통천관으로 왕건상은 황제국 고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봉은사奉恩寺로 향하는 등불.
밤하늘에 하나둘 작은 등불을 수놓습니다.
왕궁과 개경의 주요 거리마다 걸린 등과 화려한 비단 장막을 구경하다보면
고려 국왕의 행렬을 만나게 됩니다.
고려에서는 건국 초부터 거의 매해 국가 의례로 등불을 켜는 의식인 연등회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연등회가 열리면 고려국왕은 태조 초상이 봉안된 개경 봉은사에 행차해 제사를 올리고 향을 공양했습니다.
연등회는 개경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축제였고
동시에 고려 국왕이 태조 왕건을 뵙고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의식이었습니다.
꽃 모양 접시 / 남송 12세기 / 은 /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은제 금도금 잔과 잔받침 /고려 12~13세기 / 은에 금도금 / 보물 제1899호.
은제 금도금 주자와 받침 / 고려 12세기 / 은에 금도금 / 미국 보스턴박물관.
청자 기린장식 향로 / 고려 12세기 / 개인 소장. / 동체부 복원.
청자 어룡 모양 주자 / 고려 12세기 / 국보 제61호.
청자 칠보무늬 향로 / 고려 12세기 / 국보 제95호.
(우) 청자 주자와 받침 / 고려 12세기 / 개성부근 출토.
(좌) 청자 연꽃 넝쿨무늬 주자 / 고려 12세기 / 1981년 이홍근 기증.
청자 풀꽃무늬 꽃 모양 잔과 잔받침 / 고려 12세기.
팔관회, 八關會
팔관회는 하늘의 신령과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 등 토속신께 제사를 지내는 고려 최고의
국가 행사입니다. 고려 국왕은 문무백관과 지방관, 외국의 사신단이 위계에 따라 자리한 행사를 주관하며
고려 국왕 중심의 질서를 만들고, 천자국 고려의 위상을 과시했습니다.
팔관회는 여러 물건이 오가는 교역과 문화 교류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사신과 상인은 다양한 물건을 바쳤고
하례가 끝나면 그에 대한 답례로 연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송, 여진, 탐라, 일본 등 각국의 상인과 수많은 고려인이 몰려와 물품을 거래했습니다.
청자 구름 학 국화무늬 피리 /고려 13세기 /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청자로 만든 피리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 장식적인 요소가 강해서 악기보다는 보고 즐기는 완상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몸체에는 학과 구름, 국화절지무늬를 흑백 상감으로 새겼다.
여백을 적당히 두어 구성이 여유롭다. 피리 윗부분과 아랫부분에는 백상감으로 뇌문을 넣었다.
앞면에는 여섯 개의 구멍이 있으며 옆으로 살짝 비껴 1개의 구멍을 뚫었다.
의례를 행할 때 이와 같은 악기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을 것이다.(안내문)
청자 참외모양 병 / 고려 12세기 / 국보 제94호.
청자 용머리장식 붓꽂이 / 고려 12세기
붓을 꽂아 보관하는 붓꽃이다. 고려청자 문방구 가운데 이러한 예는 많지 않다.
요삼채遼三彩에 유사한 형태의 붓꽂이가 알려져 있어서 양식적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북송 자기와 다른 특성을 지닌 요삼채 중 일부를 고려 왕실에서 선호햇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름다운 조형과 유색, 다양한 장식기법이 조화를 이룬 최상급 청자다.
청자 병 / 고려 12세기 /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청자 꽃모양 발 / 고려 12세기 /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도기의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의 비색이라고 한다.
근년에 들어와 제작이 섬세해지고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 졌다. 라고 적었다. 서긍이 기술했던 비색의
고려청자는 맑고 푸른 빛깔이 은은하게 감도는 최고 수준의 자기였다. 도자기 빛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약이다. 비색 청자의 유약층은 초기의 청자보다 2~4배 정도 두꺼워 깊고 푸른 유색을 띤다.
유약 성분과 번조 분위기 조절은 비색청자 제작의 핵심 기술이었다.
고려인은 이 기술을 얻기 위해 오랜 기간 실험과 노력을 하였고 이 작품들은 그 결과이다.
청자 사자장식 향로 / 고려 12세기 / 국보 제60호.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각종 문물에 대하여 평을 덧붙였다. 그중 산예출향狻猊出香 역시 비색인데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연꽃이 있어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라는 내용이 관심을 끈다. 서긍이 목격했던 연꽃 받침이 있는 예는
아니지만, 이 향로를 떠올리게 하는 기록이다. 뛰어난 조형미와 청자 유색이 어우러져
고려 상형청자(사물의 형태를 만든 청자)가운데 수작으로 손꼽힌다.
서긍이 본 고려
1122년 예종이 승하하자, 이듬해 6월 북송 휘종은 위로의 뜻을 전하기 위해 20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고려로 파견했습니다.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한 달 남짓하게 머물렀던 서긍徐兢은 보고 들은 문물을
상세히 기록하고 직접 그림을 그려 황제에게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북송은 금에 의해 멸망하였고
그림은 전란 속에 사라져 문장만이 전하게 됩니다.
이국인의 눈으로 본 고려는 어떤 모습이었고 , 우리가 기억하는 고려와 어떻게 달랐을까요?
서긍의 고려 견문 보고서 / 선화봉사고려도경, 지부족재본 / 국립중앙도서관.
서긍은 한 달 남짓한 체류 기간 동안에 보고 들은 고려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거의 모든 부분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여 <선화봉사고려도경> 40권을 엮어 송 휘종에게 바쳤다.
안타깝게도 현재 그림 부분은 없어지고 글만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고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며
<고려도경>이 유통되었고, 중국에서도 고증학의 영향으로 재조명을 받으면서 여러 종류의 목판본이
전하게되었다. 이 책은 청나라 때 포경박이 편찬한 <지부족재총서>에 실린 판본이며
1910년에 조선고서 간행회에서 인쇄한 것이다.
자기 전시실
해인사 장판각의 겨을 모습.
좌
목조미타불 좌상 / 일본 헤이안(平安時代) 12세기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서방 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여래에 대한 신앙은 중국과 고려,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일본에서는 특히 헤이안시대 후기 정토종의 확산으로 아미타당과 아미타상이 빈번하게 조성되었다.
아미타불좌상은 아미타불의 아홉 가지 수인 가운데 두 손을 배 앞에서 마주하여 엄지와 검지를 맞댄
상품상생인(上品上生印)을 취하고 있다. 이 부처의 손 모양은 중생의 성품이 모두 다르기에 각 단계에 맞게
설법하여 정토왕생을 돕는 아미타불의 구제 방식을 보여준다. 고려시대 불상 중에서도 비슷한 수인을 취한
아미타불이 조성되어 동북아시아가 공유한 아미타 신앙과 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
목조대일여래좌상 / 일본 헤이안(平安時代) 12세기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일본의 헤이안시대(794~1185)는 중국에서 들어온 밀교의 영향으로 밀교의 본전인 대일여래상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왼손 검지를 세우고 이를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수인은 고려시대 비로나자불의 수인과 동일하다.
그러나 일본의 대일여래가 머리를 높게 묶고 신체를 장엄한 보살의 모습인 점은 고려의 여래형 비로자나불과
다른 점이다. 두 불상 모두 여러 목재를 결합하여 불상을 조각하는 분할조립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 / 고려 말 조선 초 / 금동 / 보물 제1547호 / 대흥사 성보박물관.
한쪽 무릎을 세운 유희자(遊戱坐)와 윤왕좌(輪王坐) 자세는 송대에 특히 성행한 양식으로, 고려시대에 수용
되어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이 보살상은 결가부좌 상태에서 오른쪽 다리를 세우고, 왼팔에 체중을 실은 채
머리와 상체를 곧게 세우고 있다. 이 상과 유사한 상이 강진 고성사에서도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 대외해상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바다와 인접한 해남과 강진에 송대 윤왕좌보살상 도상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좌
수월관음도 / 고려 14세기 / 비단에 채색 /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수월관음도는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암좌 위에 앉아 옆을 바라보는
관음보살과 배례하는 선재동자를 그리는 전형적인 구성이 대부분인데, 이 수월관음도에서는 선재동자가
화면 오른쪽으로 비켜나고 대신 관음보살의 발치에 갖가지 공양물을 든 인물과 바다 괴물을 그린 것이
특징이다. 관을 쓴 용왕을 선두로 여인들과 관리들이 따르고 , 뒤에서는 바다 괴물들이 보물을 나르고 있다.
통일신라 승려 의상이 7일간 재계하자 관음의 진신(眞身)을 만나게 되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
수월관음도 / 고려 14세기 / 비단에 채색 / 보물 제1903호 / 호림박물관.
큰 원형 광배와 대나무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기암절벽 위에 관음보살이 반가좌로 앉아 있고 ,
관음보살의 시선이머무는 화면 아래쪽에는 선재동자가 보살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합장하고 서있다.
관음보살은 양손으로 흰색 염주를 쥐고 있는데, 이와 같은 도상은 다른 수월관음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푸른 대나무와 바위, 정병 등의 배치나 수월관음과 선재동자의 시선이 만드는 공간감에서 고려 수월관음도의
조화로운 구성을 느낄 수 있다.
좌
목조관음보살좌상 / 송 / 나무 / 영국박물관.
당나라 양식을 계승한 남방의 송과 북방의 요 불상은 11세기 이후가 되면 각각 독자적인 특징을 보인다.
송대에는 관음보살은 반가좌와 유희자 윤왕좌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한 관음보살상이 제작되었다.
특히 해안가에 위치한 복건성과 절강성 지역에서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수월관음 신앙이 유행하여,
유희좌 혹은 윤왕좌를 취한 관음보살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 상처럼 암좌 위에 앉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발을 대좌 아래로 편하게 내린 유희좌는 북송대 이래 관음수월상의 보편적인 자세로 정착되었으며,
암좌가 없는 경우라도 대개 수월관음상으로 간주된다.
우
목조세지보살좌상 / 금 또는 남송 / 12-13세기 / 나무 /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두 다리를 접어 편안히 바닥에 두고 오른손을 든 수인을 한 대세지보살이다.
높게 묶어 올린 보계만큼 높은 보관을 착용하였고, 보관 중앙에 보병(寶甁)이 있다.
보살의 중량감 있는 체구, 장신구, 천의(天衣) 처리와 같은 전반적인 특징은 중국 산서성 평양부 홍동현에서
출토되었거나 혹은 그곳에 소재한 금대(金代) 불보살상과 공통점이 보인다.
관음보살과 쌍을 이루어 아미타삼존불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신에 채색의 흔적이 있다.
좌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 대리국大理國 11-12세기 / 금동 / 미국 메트로폴리박물관.
천수관음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을 줄인 말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재난을 없애주는 보살이다.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은 중국 당나라 때 유입되어 아시아 각국에 퍼졌다.
고려시대의 천수관음신앙이 기록되어 있지만 조각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2점 정도 밖에 없다.
이 상은 24개의 팔로 천수관음의 형상을 표현했다. 가늘고 긴 허리와 상, 하체의 비례, 낮게 걸친 군의(裙衣)
인동무늬를 채운 보관의 형태로 보아 중국 운남성 일대에 자리했던 대리국(937~1253)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
청자 꽃, 나비무늬 정병 / 고려 12세기 /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정병은 인도에서 승려가 메고 다니던 물병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처님 앞에 깨끗한 물을 바치는 공양구로도 쓰였다.
관음보살의 지물로 나타나는 정병은 그안에 담긴 감로수로 중생의 목마름을 덜어준다는 자비의 상징물이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시대에 불교 공양구로 다수의 정병이 청동, 도기, 자기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수월관음도 / 고려 14세기 / 비단에 채색 / 보물 제1426호 /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비교적 큰 화면의 수월관음도로 배경을 이루는 큰 원형 광배나 관음보살 뒤편으로 자라는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잘리지 않고 한 폭에 담겨 있어 안정적인 화면 구성을 보인다.
관음보살의 얼굴이나 관음보살을 찾아가 배례하는 선재동자의 표정 묘사가 자연스럽다.
관음보살의 보관부터 발끝까지 투명한 사라(비단의 일종) 베일로 감쌌는데,
베일에는 유려한 원형의 당초무늬가 그려져 있다.
암좌 주변으로는 연꽃과 산호, 보주와 보석이 표현되어 관음의 정토를 상징한다.
십일면천수관음보살좌상 / 고려 / 금동.
천수는 천 개의 손이라는 의미로 이 보살의 능력과 표현방법이 매우 다양함을 상징한다.
천수관음 신앙은 중국을 통해 전해져, 우리나라에서도 관음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후기에는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기 위해 천수관음을 모신 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천수관음을 조각상으로 표현할 때에는 이 상처럼 천수를 대표하여 40수나 42수로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손에 전부 다른 지물을 들고 있는데, 모두 "대비심다라니" "천수경" 등 천수관음 계통 경전에서 규정하는 바와
일치한다. 보살의 머리는 원래 얼굴 1개에 하단에 5개, 중단에 4개, 상단에 1개가 있다.
경전에서는 분노의 얼굴, 크게 웃는 얼굴 등이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 보살상의 얼굴은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모든 사진들은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1.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 고려 1346년 / 금동 / 보물 제337호 / 청양 장곡사.
700년만에 첫 나들이를 한 장곡사 약사불은 갖가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부처이다.
이 약사불상은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 주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금동불이다.
왼손에 위로 불룩 솟은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뚜껑이 아니라 약이나 음식같은 내용물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도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 상의 복장에서 다수의 발원문과 직물이 나왔다.
발원문에는 승려 백운(白雲)의 이름과 함께 천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1346년에 백운의 주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시주하여 불상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2.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고려 / 철.
불교의 진리인 법(法)을 인격화 하여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상이다.
양손을 가슴 부분에 올려 왼손 주먹을 쥔 채 둘째 손가락을 세워 오른손으로 감싸 쥔 형태의 지권인을 하고
있다. 옷 주름은 간략하며 계단식으로 층층히 표현되어 있고 두 다리 밑으로는 형식화 된 부채꼴 모양의 옷
주름이 펼쳐져 있다. 철불은 통일신라 말부터 제작되어 고려시대에 유행했다. 이 불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반 적으로 주조 과정에서 불상의 표면에 가로와 세로의 외형틀 분할선 흔적이 남게 된다.
3.
건칠보살좌상 / 고려 14세기 / 건칠과 나무에 채색.
건칠불(乾漆佛)은 삼베나 모시에 옻칠한 후 여러 번 겹친것을 건조시켜 완성한 불상이다.
이렇게 만든 상을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문헌에서는 협저상(夾紵像) 또는 칠상(漆像)이라고 하였다.
송과의 교류로 중국 건칠불의 제작 전통이 전래되면서 고려에서도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상은 건칠 기법으로 제작된 보살좌상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크며, 광물을 새겨 넣은 장식판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금동보관이 함께 남아 있다.
4.
금동아미타불좌상 / 고려 14세기 / 금동.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에 머물며 설법하는 부처로, 한없는 광명과 수명을 상징한다.
이 아미타불상은 얼굴이 계란형으로 갸름하면서도 부피감이 있으며, 이목구비는 단정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머리의 중간 계주(髻珠), 속옷인 승각기의 띠매듭과 왼쪽 가슴 아래로 드리워진 마름모꼴
장식, 왼쪽 팔뚝 위에 겹쳐진 옷주름 표현 등은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이다.
5.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 / 고려 14세기 / 금동 / 보물 제1634호 / 문경 대승사.
700년만에 첫 나들이를 한 아미타불은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해주는 부처이다.
문경 대승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불상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불상이다.
양손은 엄지와 약지를 구부린 수인을 취하고 있고, 손바닥에 "井"자 형태의 손금이 남아 있다.
불상의 육계 부분에서 대덕(大德) 5년(1301)에 인출된 아미타삼존다라니가 발견되어 제작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사찰로 가는 길.
금동삼존불감 / 고려 11~12세기 / 금동 / 국보 제73호 / 간송미술관.
불감은 부처를 모신 작은 집입니다. 불감은 개인이 사찰 이외의 장소에서 예불을 드릴 때 사용하였고,
바위틈에 인치하거나 탑 안에 봉안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귀한 불감이 우리를 맞아줍니다.
고려의 사원 건축을 충실히 재현한 불당 형태의 감실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두 어깨를 덮는 법의를
입고 허리가 다소 긴 비례의 불상은 요나라 불상과도 유사합니다. 주변국과의 정치적 대립과 긴장속에서도
문화적 교류를 이어나가며 고려가 이룬 숭고함이 이 작은 불감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오백나한도 / 남송 1178년 / 비단에 채색 / 미국 보스턴미술관.
동북아시아에서 성행한 오백나한 신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불화로 연대가 알려진 오백나한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다. 하단에는 네 명의 나한과 이국적인 복식의 공양인이 향을 올리며 합장하고 있으며
화면 상단에는 구름 사이로 선정인을 취한 나한이 나타난다. 중국 저장성 닝보(寧波) 동전호반에 있었던
혜안원에 봉안되었으며 한 폭에 다섯 나한을 그려 총100폭으로 구성했다. 일본 나라국립박물관과
동경문화재 연구소의 광학조사로 명문이 해독되어 1178년부터 1188년에 이르는 시기에 인근 지역민의
시주를 받아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1. 오백나한도 / 남송 1178년 / 비단에 채색 / 미국 보스턴미술관.
그림 설명은 위와 같음.
2. 아미타여래도 / 고려 14세기 / 비단에 채색 / 보물 제1238호 / 개인 소장.
현존하는 고려 불화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아미타 계열의 불화이지만, 독존형 여래도는 총 6점
만이 알려져 있다. 자세 면에서는 대부분 측면을 향해 왕생자를 맞이하는 내영來迎의 상징성을 암시한다.
이에 비해 오른손을 내리면서도 이처럼 정면을 향한 자세로 표현한 형식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오른 손에는 금니로 법륜 무늬가 있으며, 가슴에는 반대로 된 만卍자형 무늬가 있다.
녹청의 내의에는 구름과 봉황무늬가, 군청의 치마 끝단은 꽃무늬로 장식되었다.
3. 석가삼존십육나한도 / 고려 14세기 비단에 채색 / 개인 소장.
석가모니, 문수보살, 보현보살 삼존과 십육나한이 그려진 불화이다. 나한은 아리한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 비를
기원하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나한제를 올렸다. 나한신앙은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크게
성행하였고 관련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상단에는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석가모니와 보살들이 그려졌고
아래에는 상서로운 구름을 따라 꽃, 쟁반, 지팡이, 발우, 금강저, 향로나 경함 등을 들고 경배를 표하는
십육나한을 표현하였다.
1. 아미타여래도 / 고려 14세기 / 비단에 채색 / 이탈리아 문화박물관.
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아미타불은 기도의 결과 만나게 되길 고대했던 존재의 모습을 숭고하게 재현했다.
푸른 연꽃 위에 서 있는 아미타여래는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리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뻗었다.
여래에게서 발하는 빛을 형상화한 두광만이 있을 뿐,
모든 이들이 태어나고 싶어 했던 정토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럼에도 고개를 숙여 응시하는 시선에서 신비로운 공간의 느낌이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방대한 경전에서
축적된 지식을 기반으로 염송과 염불을 통해 여래의 상호와 공덕을 관상하는 수행 방식이 유행했다.
전에는 중국 불화로 인식되다가 2012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아미타여래임이 밝혀졌다.
2. 아미타여래도 / 남송 13세기 / 비단에 채색 /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누군가를 맞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그렸다.
이런 도상의 그림은 임종을 준비하기 위해 수행할 때나 실제 임종을 맞이하는 의식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중국 불화이지만 같은 시기 한반도와 일본에도 유사한 도상의 불화가 남아 있어 동아시아에
아미타 내영來迎에 대한 신앙과 불화가 유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아미타여래도는 선묘가 단순하고 장식적인 성격이 강하다.
3. 아미타여래도 / 남송 13세기 / 비단에 채색 /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중국 남송대에는 아미타정토 신앙이 성행하여 아미타불이 많이 그려졌다. 정토신앙에서는 관상수행을 중시
하여 아미타불과 정토의 모습, 아미타불이 죽은자를 맞이하는 모습 등을 뚜렷해질 때까지 반복하여
상상하므로써 실제로 정토에 태어나 아미타불을 만나고자 하였다. 이 그림의 아미타불은 몸을 옆으로 틀어
죽은 자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적외선 촬영 결과 하단 왼쪽에서 경원부세마교동화 (慶元府洗馬橋東畵)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경원부는 1195년부터 1277년 사이에 사용된 중국 닝보(寧波)의 옛 지명이므로 이 그림이 해당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정18년이 새겨진 향완받침 / 고려 1358년 / 청동 / 영국 영국박물관.
몸체는 없고 받침만 남아 있는 청동 은입사 향완이다.
이 향완 받침에는 "비슬산 소재사에 있는 지장 앞에 놓는 향완"이라는 봉안 장소가 은입사로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명문은 음각으로 새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향완처럼 은입사로 장식까지 한 사례는 흔하지않다.
또한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쫓고 있는 용을표현한 점. 1358년 제작. 주상전하와 공주전하의 장수를 축원하기
위해 발원했다는 명문 등에서 공민왕(1351~1374재위)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굵은 은선과 가는 은선을 적절히 사용하여 무늬를 표현했고, 연꽃과 넝쿨, 여의두문까지 빈틈없이 입사하여
장식성을 높였다.
1
금동보살좌상 / 고려 11세기.
요대(916~1125)보살상과 유사점이 많은 고려 전기 보살상이다. 화불(化佛)이 있는 높은 보관의 형태와
보관에 묶은 끈이 흘러 내리는 모양 5개의 짧은 수직 장식이 있는 목걸이 등에서 요대에 다수 제작된 소형
금동보살상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요대에는 보관에 화불이 있고 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백의관음이
유행했던 점에서 보면 이 상 역시 관음상일 가능성이 높다.
2
금동미륵보살좌상 / 요 11세기 / 영국박물관.
3
금동대일여래좌상 / 요 11세기 / 금동 /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동자무늬 경갑 / 고려 12-13세기 / 금동 / 미국 보스턴박물관.
부처를 모신 작은 집 / 고려 14세기 / 금동 .
금속판을 조립해서 만든 전각 형태의 불감이다. 문 안쪽 면에는 금강역사를 좌우 대칭으로 부조하고 안쪽
벽에는 타출 기법을 사용하여 부처의 모임 장면을 표현하였다.
부처와 두 보살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10대 제자로 보이는 승려들이 서 있다.
불감 안쪽의 좌우 벽에는 각각 사자를 탄 문수보살상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상이 입구를 바라보는 자세로
배치되었다. 천정에는 능화문 안에 용을 새겨 넣었는데 전각의 닫집을 연상시킨다.
비사문천과 관음보살이 있는 작은 불감 / 고려 1156년 이전 / 은에 금도금.
남원군부인 임씨의 석관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는 작은 불감이다.
탑을 든 비사문천과 연꽃을 든 관음보살이 감실 형태의 불감에 봉안되어 있다.
문을 열어 예배할 수 있는 형식으로 제작 되었으며, 뒷면에는 범자梵子가 있다.
1156년에 부인을 장사 지냈다는 묘지명의 기록이 있어 1156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고봉국사 불감 / 고려 말 조선 초 / 금동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 / 송광사성보박물관.
아미타삼존불좌상 / 고려 1383년 / 은에 금도금 / 삼성미술관.
아미타불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구성된 삼존불로, 드물게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추었다.
삼존상의 주위를 둘렀던 은제난간과 청동합, 은합이 일괄로 전하고 있다. 관음보살상에서 발견된 복장
발원문에서 1383년이라는 연대와 500명이 넘는 승려, 재가 신도들이 삼존상 제작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시주자 명단에 당시 동북면 도지휘사이자 9년 뒤 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1335~1408)도 포함되어 있다.
이성계는 1383년에 2건, 1384년과 1385년에도 연이어 불사에 참여한 기록이 있다.
1302년 아미타불상 안에서 나온 저고리 / 고려 / 온양민속박물관.
아미타불상 복장물로 나온 의복 3점 중 1점으로, 흰색 주(평조직의 견직물)로 만든 홑저고리이다.
깃에는 묵서로 "納宰臣兪弘愼妻李氏"라 쓰였는데 재신 유홍신의 아내인 이씨가 헌납했다는 내용이다.
저고리는 실제로 착용한 흔적이 보여 실제 입던 의복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의복을 반으로 잘라서 한쪽만 불상에 납입했는데, 망자가 평소에 입던 의복을 아미타불상에 봉안하여
망자가 극락에서 태어나기를 염원하고, 동시에 나머지 절반은 복장 의식이 끝난 후 망자와의 이별 의식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 고려 / 보물 제1375호 / 월정사성보박물관.
불감과 관음보살상 / 고려 말 조선 초 / 금동, 은에 금도금(보살) / 국립중앙박물관.
1018년 1월에 국립중앙박물관회 젊은 친구들이 기증하였다. 그동안 국립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으로만
전해오다가 국립중잉박물관회의 노력으로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감실 내부의 가장 넓은 벽에는 본존과
협시보살 주위로 제자와 팔부중이 운집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석가모니의 설법 장면인 영산회상도로 생각된다. 관음보살상 1구가 불감과 함께 남아 있다.
청자 동자 모양 연적 / 고려 12세기 /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푸른 옷의 작은 동자
살결이 옥과 같구나
무릎 꿇은 모습 지극히 공손하고
얼굴과 눈매도 준수하구나
종일토록 나태함 없이
물병 들고 벼룻물을 따르네 이규보 푸른 자기 연적.
청자 사자장식 베개 / 고려 12세기 /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푸른 자기 베개는 물보다 맑고
손을 대면 옥을 만지듯 매끄럽구나
그 베개 베고 깊이 잠들지마라
어지럽고 황량한 꿈일 뿐이니
한단(邯鄲)의 청구(靑駒)가 어찌 부끄럽겠는가 이규보 푸른자기 베개.
* 당나라 盧生(노씨 성의 서생)이 한단(邯鄲)에서 도사에게 받은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일어나 보니
아직 조밥(조로 지은 밥)도 익지 않았다는 故事. 청구는 고사 속 노생의 말 이름이다.
안향과 이색의 초상.
좌
안향초상 / 전 이불해(1529~?) / 조선 16세기 중엽 / 비단에 채색 / 국보 제111호 / 소수박물관.
안향(1243~1306)은 한반도에 최초로 주자성리학을 전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현(1287~1367)과 같은 제자를 육성하므로써 고려 말 신진사대부 대두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이다.
고려시대 안향의 초상은 1318년 원나라 화가가 그려 문묘에 봉안한 문묘본과,
이를 저본으로 하여 안향의 고향 흥주興州(지금 영주시 순흥읍 일대)에 이모한 흥주향교본이 있었다.
이작품은 1559년 이불해李不害가 흥주향교본을 모사한 모본으로 보인다.
화폭 상단에는 안향의 진영이라는 화제와 함께 안향의 아들 안우기安于器(1265~1329)가 쓴 찬문이 활달한
행서체로 옯겨져 있다. 대학자로서의 경륜과 인자한 덕성을 드러내면서도 단아한 체구와 당당한 자세를 더욱
강조하여, 이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신진사대부의 등장을 선언하고 있다.
우
이색초상 / 작가미상 / 조선 18세기 / 비단에 채색 / 보물 제1215호.
이색(1326~1396)이 오사모烏紗帽와 담홍색 단령團領을 착용하고 서대犀帶를 한 반신상이다.
이색은 이제현(1287~1367)의 문인으로 1348년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이 초상은 필선 위주로 얼굴을 표현하고 선염이 거의 없는 고식이다. 사모 높이가 평편하고 좁고 긴 양각이
아래로 쳐져 있으며 단령의 깃이 좁은 여말선초의 상복常服 차림을 보여 준다.
이색의 초상은 여러 차례 이모되었는데 여말선초의 초상화법과 양식을 보여주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청자 주자와 받침 / 고려 12세기 / 영국피츠윌리박물관.
청자 병 / 고려 12세기 / 영국 피츠윌리엄박물관.
청자 발 / 고려 11-12세기 /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청자 모란 동자무늬 완 / 고려 12세기 / 영국 피츠윌리엄박물관.
청자 버드나무 학 연꽃무늬 매병 / 고려 13세기 / 영국 피츠윌리엄박물관.
금동대세지보살좌상 / 고려 14세기 / 금동 / 보물 제1047호 / 호림박물관.
(좌) 청자 동채 모란무늬 긴목병 / 고려 13세기 /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우) 청자 동채 긴 목병 / 고려 13세기 /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청자 철백화 동채 국화무늬 기름병. /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청자 용 봉황 모란무늬 합과 받침대 / 고려 13세기 / 국보 제220호 / 개인 소장.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 고려 1334년 / 호림박물관 / 보물 제752호.
감지紺紙 바탕 위에 금니金泥로 40권본 <화엄경>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권제40 <보현행원품>의
내용을 변상變相으로 그리고 사성寫成한 경전이다.
<보현행원품>의 원명은 <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이다.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소원<十大願>을 닦아야 하며,
이를 지니고 읽고 외우는 공덕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권두卷頭의 사성기寫成記에 의하면 1334년 충숙왕(1294~1339)복위 3년에 자선대부 장작원사를 지낸
친원계 인물인 안새한이 부모의 은혜와 원나라 황실의 덕택으로 위계位階 2품에 오른 것을 감사하며 좋은
금인 자마금紫磨金으로 이 경의 사성을 발원하였다고 한다.
은제 금도금 표주박 모양 병 / 고려 12세기 /은제 금도금 / 높이 8.0cm
은으로 표주박모양 병을 만든 후 무늬를 장식하고 금도금한 것이다. 몸체 네 곳에 팔화형(八花形)의 곽을
둔 후 안쪽에 다양한 형태의 꽃을 타출 기법으로 장식했다. 팔화형 곽 사이의 여백에도 꽃모양은 다르지만
서로 대칭되게 배치했다.
은제 금도금 표주박모양 병 / 고려 12세기 / 높이 11.1cm. * 은제 금도금 고리 / 고려 12세기 / 지름 9.0cm
은제 금도금 칼집 / 고려 / 길이 23cm.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 고려1177년 / 청동에 은입사 / 국보 제75호 / 높이 27.5cm / 표충사호국박물관.
국내에 있는 청동은입사 향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2단의 받침은 상단은 크고 둥굴지만 하단은 낮고 외반되었으며, 상단에는 운문雲文이 은입사 되어 있다.
나팔형 간주는 음각선으로 받침과 구분하였고, 한 마리의 용이 간주를 감싸고 있으며, 용 주위로는 태극과
유운문을 시문하였다. 간주의 상단에는 여의두문如意頭紋을 띠로 표현하였고 ,
구연의 전에는 옴 마 니 반 메 훔 6자의 범자梵字를 은입사하였다.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무늬 정병 / 고려 12세기 / 청동에 은입사 / 국보 제92호.
안동 태사묘 소장 허리띠 / 금동 / 고려 / 보물 제451호.
태사묘는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칠 때 큰 공적을 세웠던 김신평, 권행, 장정필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세 인물은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개국공신과 태사(왕의 스승)란 칭호를 받았고,
이 지역은 널리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의미의 안동安東이란 지명을 갖게 되었다.
금동 재질의 <여지무늬 허리띠>는 태사의 유물로 전하며 <모란무늬 허리띠>와 동으로 된
<여지무늬 허리띠>는 공민왕이 하사했다고 전한다.
여지무늬 허리띠 / 금동. 여지무늬 허리띠 장식 / 금동
모란무늬 허리띠 /금동. 여지무늬 허리띠 / 청동.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류의 지혜를 직접 필사하던 것을 목판에 새기게 되면서 많은 책을 쉽게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지식과 사상이 날로 발전하고 다양한 서적이 필요해지자 움직이는 글자인 활자가 사용되었습니다. 나무에
새긴 목판으로 한 종류의 책만 찍어낼 수 있었다면, 낱개 글자로 되어 있는 활자를 다양하게 조합하면
여러 종류의 책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고려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습니다. 금속을 녹여 활자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놀라운
창안이자 새로운 인쇄술이었습니다. 아마도 무수한 실험과 기술적 시도를 거쳐 이루어냈을 것입니다.
개경의 무덤에서 나왔다고 전하는 (복)활자는 고려가 금속활자의 최초발명국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고려시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이 금속활자는 남한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고려시대 활자이다.
㠅(산덮을 복)은 잘 쓰지 않는 글자로 일반 사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활자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으며
사면의 길이도 각각 다르다. 뒷면은 원형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형태이다.
이런 형태는 조선시대 활자와 구분되는 고려 활자의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 활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시대 인쇄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자,
고려가 금속활자의 발명국임을 입증하는 실물로서 의의가 있다.
금속활자 / 조선 1461년 이전 / 청동.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조선 전기의 한글 금속활자이다. 강희안(1417-1464)이 쓴 글씨를 글자본으로
1455(세조1)을해년에 만든 한자 활자인 을해자(乙亥字)와 함께 쓰여서 을해자병용 한글 활자라고도 한다.
1461년에 <능엄경>을 한글로 풀이해 간행한 <능엄경언해> 인쇄에 사용하였다.
이활자는 조선 후기 활자와 글자체나 모양이 달라서 조선시대 인쇄술의 변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려의 발전된 인쇄술이 있었기에 조선 전기부터 활자를 활용한 다양한 서적 간행이 가능 했다고 볼 수 있다.
지장보살도 / 둔황 천불동, 오대 10세기 / 비단에 채색 / 영국 영국박물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이 왼손에 화염보주를 오른손에 석장을 들고 읹아 있다.
문양 없는 녹황색의 가사와 대조적으로 두광과 신광은 화려하게 그렸다. 화면을 2단으로 구획하여 아래에는
꽃을 든 공양자를 그렸다. 지장보살은 일반적으로 머리를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작품처럼 두건을 쓴 지장보살은 둔황, 투루판 등 중앙아시아 지역 불화와 중국 사천의 석굴, 고려불화에서
나타난다.
경패 / 고려 / 상아, 흑단목 / 보물 제175호 / 송광사 성보박물관
경전을 펼치지 않아도 어떤 경전이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꼬리표이다.
한쪽 면에는 경전 명칭과 권수를 새겼고, 반대 면에는 부처와 보살 등을 새겼다.
1278년 원감국사 충지沖止(1226-1293)가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거란대장경 1,000여 책을 수선사(지금의
송광사)로 옮겨 봉안했고, 이후 거란대장경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다고 한다.
이 경패는 거란대장경과 함께 전해졌거나, 경전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많은 국보와 보물을 소중히 봤슴다
볼 것이 너무 많았지만 제대로 보지몬해 아쉬웠고 왕건상은 더더욱 아쉬웠던..역사의 아픔이겠죠
가서 보고 오기는 했지만...
사진으로 다시보니 더욱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려시대의 문화도 찬란한 빛으로 우리 눈을 호강시켰습니다.
다시는 돌려주고 싶지 않은 욕심이 은근히 작용함은 애국심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