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11장 천하제일지녀(天下第一智女)
-1
하후성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종지문(魔宗之門)이라고? 마종지문......'
그의 뇌리에 즉시 소림사를 방문했던 신비의 흑의여인이 떠올랐
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는 그 여인으로 인해 현오대사
(玄悟大師)가 죽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 여마(女魔)도 마종지문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후성은 가슴이 은은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마종지문이 모습을.......'
자전신도 팽수위가 냉소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마륜!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백골사마 금마륜은 안색이 무섭게 변했다.
"네 놈은 또 누구냐?"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자전신도 팽수위다!"
백골사마는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제 보니 이곳에 다 모였구나. 너희 팽가에도 이미
서찰이 당도했을 것이다. 팽가는 필히 굴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팽수위는 대로했다.
"미친 수작!"
쐐--- 액!
그는 허리에서 자전섬도(紫電閃刀)를 뽑자마자 그대로 백골사마를
덮쳤다.
츠츠츠츠... 츳!
가공할 도기(刀氣)가 자색 광망을 뿜으며 회오리쳤으나 백골사마
도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건방진 놈! 백골강시공(白骨 屍功)의 위력을 보여 주겠다!"
그의 쌍장에서 음산한 검은 기운이 뻗었다.
파파팟... 펑!
파공성과 폭음이 울림과 동시에 팽수위는 낮은 신음을 발하며 뒤
로 사 보(四步) 후퇴했으며 그의 안색은 즉시 창백해졌다.
그러나 곧 이를 부드득 갈며 팽수위는 자전섬도를 치켜들었다.
"노마! 자전십팔풍(紫電十八風)이 어떤 도법인지 똑똑히 보아라!"
자전섬도에서 자색의 기운이 뻗어 나오자 백골사마는 흠칫하여 내
심 중얼거렸다.
'듣기로 자전십팔풍은 팽가의 비전도법으로 오백 년간 적수가 없
었다고 하는데.......'
그가 멈칫하는 순간이었다.
"노마! 받아라!"
무서운 도풍(刀風)을 일으키며 자전섬도가 춤추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자색 기운으로부터 엄청난 회오리가 발생하여 휘몰아쳤다.
윙--- 윙--- 윙!
회오리 기류에는 무서운 흡인력이 일고 있었다. 백골사마는 감히
경시하는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자신의 백골강시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우우우--- 웅!
그의 회의가 바람을 품은 듯 부풀어 오르며 전신에서 가공할 악취
와 함께 흑무가 서렸다.
"죽어라, 애송이!"
우---- 웅!
그의 쌍장에서 흑색 기류가 뻗어나갔고 마침내 두 줄기 공력이 격
돌할 찰나였다.
"잠깐!"
군웅들의 귀청을 두드리는 낭랑한 외침과 함께 전광석화같이 두
명 사이로 끼어드는 백영(白影)이 있었다.
"앗! 저... 저런!"
군웅들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엄청난 위력의 자전십팔풍과 백골강
시공 사이에 뛰어든 자는 대체 누구인가? 누가 감히 그들 두 개세
고수의 틈바구니에 끼어들고 있단 말인가?
꽝... 꽈르르릉!
엄청난 폭음과 함께 군웅들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무서운 반
탄지기의 압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윽! 으으......."
두 마디의 다급한 비명이 터졌고 군웅들은 눈을 크게 떴다.
자전신도 팽수위가 뒤로 다섯 걸음이나 후퇴하고 있는가 하면 백
골사마 또한 가슴을 움켜쥔 채 삼사 보 밀려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 천하에 이토록 무서운 내공을 지닌 자가 있다니.......'
그들은 자신들을 격퇴시킨 의문의 그림자에 대해 똑같이 회의한
나머지 눈을 들어 곧장 중앙으로 향했다.
"앗!"
놀랍게도 그곳에 우뚝 서 있는 인영은 불과 이십 세 정도의 젊고
준미한 청년으로 눈같이 흰 백의(白衣)에 검고 윤기나는 긴 머리
를 흰 띠로 묶어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선풍(仙風)의 미청년이었
다.
"하후소협!"
팽수위가 놀라 부르짖었으나 백골사마의 놀라움은 그것에 비할 바
가 아니었다. 그는 아예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 어린놈이?'
하후성, 그는 팽수위를 향해 공손히 포권지례 했다.
"팽 노선배님, 잠시만 후배에게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팽수위는 입맛을 다셨으나 아무 말없이 옆으로 물러나 주었고 하
후성은 곧바로 백골사마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노선배께 한 가지 묻겠소이다."
백골사마는 대답 대신 흰자위 눈을 희번뜩였다.
"네 놈은 누구냐?"
"후배는 하후성이라 하오."
군웅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네가... 환영신룡이라는 놈이란 말이냐?"
백골사마가 놀란 듯 묻자 하후성은 다시금 쓴 웃음을 지었으나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골사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멈칫거렸다.
'과, 과연 강하다 했더니... 역시 환영신룡이었구나!'
하후성은 다시 물었다.
"노선배께 묻겠소이다. 아까 마종지문이라 하던데, 혹시 단혜령
(段慧令)이란 여인을 아시오?"
백골사마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급변했다.
"네, 네가 어찌 그녀를......."
그러나 그는 곧 실수했다는 것을 느낀 듯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
고 하후성은 그의 표정만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단혜령은 마종지문의 일원이었구나.'
그는 안색을 굳히더니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담담하나 무거운 음
성으로 물었다.
"노선배, 마종지문의 정체를 말해줄 수 없겠소?"
백골사마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것이 궁금하냐?"
"그렇소."
"흐흐!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일 년 만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백골사마는 주위를 둘러보며 득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전 무림의 구파일방(九派一幇)은 물론 일성(一成), 사가(四
家), 일장이보(一莊二堡)를 비롯하여 사파(邪派)의 남맹북단(南盟
北檀), 이곡(二谷), 일교(一敎), 일회(一會), 그리고 그밖에 전
무림의 단체와 개인에게 마존첩(魔尊帖)이 전달됐다. 으하하
핫......."
"으음!"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으나 백골사마는 더욱 득의한 괴소를
흘리며 하후성에게 말했다.
"환영신룡, 너의 소문은 익히 들었다. 그러나 너 역시 머지않아
마존첩을 받게 될 것이다."
하후성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하! 소생은 일정한 거처가 없는데 어찌 첩지를 전달하겠소?"
"마종지문의 이목(耳目)은 천하를 손바닥 보듯 한다. 네 놈이 어
디에 있건 찾아갈 것이다."
하후성의 입가에 문득 신비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소? 그러나 소생만은 좀 힘들 것이오."
백골사마는 갑자기 음산한 눈빛을 흘렸다.
"애송이 놈! 그렇다면 아주 이곳에서 너를 제거하겠다!"
쉬...... 쉭! 쉭!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지도마살이 돌연 양손을 뻗었고 그의 손가
락 사이에서 십 여 자루의 지도(紙刀)가 눈 깜빡할 사이에 섬광처
럼 날아갔다.
그러나 하후성은 빙그레 웃을 뿐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으며 놀라
운 광경이 벌어졌다.
파파파팍!
여덟 개의 지도는 그의 몸에 적중되자마자 그대로 튕겨나가더니
가루로 화해 흩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자루의 지도는
어느새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마(馬)선배께 두 개는 돌려 드리겠소이다."
하후성의 담담한 음성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으악!"
지도마살 마운천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으며 그의 양어깨에서 피가
치솟았다. 두 자루의 지도가 어깨를 관통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까 황보형이 당한 빚이오."
하후성의 재치 있는 말이었다.
"으으... 이, 이놈이!"
지도마살은 만면에 살기를 띄며 다시 몸을 날리려 했으나 백골사
마가 그를 저지했다.
"마노제, 참게. 이곳에서의 싸움은 의미가 없는 것이니 훗날을 기
약하는 것이 좋네. 자, 가세!"
휙! 휘익! 휙!
그들의 말과 행동은 일치했다.
어깨를 한 번 흔든 순간 그들은 삽시간에 장내를 벗어나 사라져
버렸고 바닥에는 지도마살이 흘린 피 만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군웅들은 모두 꿈을 꾼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큰 변화였으며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마
종지문(魔宗之門)이라는 단체와 마존첩(魔尊帖)에 대해 불안의 먹
구름을 느꼈다.
또한 군웅들은 하후성이란 신비한 청년의 놀라운 무공에 대해서도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검제 남궁진강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종리형님, 도대체 그 마존첩의 내용은 무엇이오?"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마존첩을 내밀었다.
"보게."
남궁진강을 비롯한 고인들은 모두 마존첩으로 눈길을 집중시켰고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천풍보(天風堡)를 마종문(魔宗門)의 호북분타(湖北分陀)로 봉한
다. 백 일 안으로 수라궁(修羅宮)으로 와 마종지령(魔宗之令)에
복명하라. 이에 거역하면 천풍보는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수라혈신(修羅血神>
마존첩의 내용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요, 있을 수 없는 망상으로
가득 찬 내용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대변했다.
성질이 급한 자전신도 팽수위는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이 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우리 하북 팽가에도
이런 서찰이 날아왔단 말인가?"
중인들의 안색은 모두 침통해졌다.
의사청(議事廳).
이곳은 천풍보에서 중요한 공사(公事)를 토의하거나 결정짓는 장
소로 지금 의사청에는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금무림의 사가(四家)와 일장(一莊), 이보(二堡)의
인물들로서 먼저 천풍보의 주인인 태을성수 종리자허를 비롯하여
검제 남궁진강, 천수겁천 당환성, 자전신도 팽수위가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산동(山東) 악가(岳家)의 가주 선마검 악진
원(岳震元), 태양장의 장주인 태양신군 황보숭양, 신창보의 보주
인 자면신창 소중산 등의 고수들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좌중은 한동안 조용했다.
이윽고 침묵을 깨듯이 먼저 태양신군 황보숭양이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어이가 없소이다. 마존첩인지 뭔지를 보자마자 그토록 많이
몰려왔던 무림인들이 급급히 자신의 문파와 집으로 돌아가 버리다
니......."
그 말에 팽수위도 못마땅하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그들이 이토록 이기적일 줄은 정말 몰랐소!"
태을성수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팽형은 하
북팽가가 걱정되지 않소?"
자전신도 팽수위는 탁자를 쾅 치며 거칠게 말했다.
"내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소이까? 그러나 걱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오? 앞으로의 일에 공동대응을 해야지 무작정 허겁지겁 자신
들 문파로 돌아간다면 무슨 대처를 할 수 있겠소?"
중인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침중하게 침묵을 지켰고 검제 남
궁진강이 탄식하며 침묵을 깨뜨렸다.
"근 백 년 동안 무림은 너무도 평온했었소. 그러나 그 반면 정파
무림은 오히려 단결심이 약해지고 각기 자파(自派)의 안위에만 신
경을 쓰는 좋지 않은 풍토가 생겨났소."
자면신창 소중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옳은 말이오. 그동안 무림인들은 구파일방, 특히 소림을 너무도
의지해 왔었소."
소중산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실상 정파무림의 지주인 소림은 백 년전 탕마멸사(蕩魔滅
邪)에 앞장섰던 희대의 고수 마애천불(魔涯天佛)을 불러들인 이
후 줄곧 강호 일에 관계하지 않았소."
하후성은 흠칫했다.
'마애천불이란 천뢰 사숙님을 말하는구나.'
소중산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팔파일방의 세력도 이제는 예전 같지가 않소이
다."
종리자허도 탄식했다.
"아! 아무튼 이미 발등에 불은 떨어졌소이다. 마종문이 어떤 것인
지는 모르나 백골사마같은 노마들이 수하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실로 무서운 집단임에 틀림없소."
남궁진강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표했다.
"으음, 형님의 말씀이 맞소이다. 소제의 추측대로라면 아마 백일
후에 있을 수라궁 마종지문의 개파대전 이후 강호무림에는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것 같소이다."
중인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치자 종리자허가 다시 탄식하
며 입을 열었다.
"으음,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소이다. 더구나 정파무림의 본
산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少林寺)마저 백 년 이래 무림의 일에
관여치 않고 있으며 구파일방 중 가장 강한 무당(武當), 천산파
(天山派)도 이십 년 이래 두문불출이요, 해남파(海南派)는 이미
팔십 년 전에 문을 닫아 걸었고......."
종리자허는 침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더구나 공동파마저 천하제일도(天下第一道)이신 적봉우사(赤鳳羽
士)께서 실종된 이후 무림과 인연을 끊었으니 결국 구파일방은 당
금에 이르러서는 이름만 있을 뿐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존재일 뿐
이오."
그의 말이 끝난 순간 하후성은 움찔했다.
'적봉우사라고?'
종리자허는 다시 침중하게 말했다.
"특히 가장 애석한 것은 정파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중
원무성(中原武城)의 노성주(老城主)인 주청산(朱靑山) 노선배께서
이십 년 이래 두문불출 하시는 것이오."
하후성은 그 순간 웬일인지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주청산!'
하후성은 급히 물었다.
"그 분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당환성이 대답했다.
"으음, 주청산 노선배는 대단한 고수(高手)로써 정파무림의 명숙
으로 추대 받고 있으며, 중원무성(中原武城)은 성역(聖域)으로 되
어 있소."
"으음."
"주청산 노대협은 여태까지 한 번도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육장(肉掌)만을 썼으나 그 분의 권(拳), 장(掌), 지(指)는 무림의
독보적 절기로 알려져 있소. 원래 그 분은 오십 년 전 무당파(武
當派)의 속가제자(俗家弟子)로써 현 무당장문인 을목자(乙木子)의
사숙 뻘이 되오."
당환성이 말하는 동안 중인들은 모두 공경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로 미루어 중원무성의 성주인 주청산이 얼마나 존경받는 인물인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당환성은 재차 말을 이었다.
"그 분은 무당파의 내가권장법(內家拳掌法)에 자신이 깨달은 독문
의 무학을 가미하여 장삼봉(張三峯) 진인으로부터 시작된 무당내
가권을 완성시킨 절세고수이오."
하후성은 가슴이 더욱 진동하여 안색이 변하며 조심스럽게 물었
다.
"혹시... 그 분에게 손녀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당환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후소협이 그걸 어떻게? 그 분의 손녀는 거의 무림에 나온 적이
없는데......."
하후성의 심장은 더욱 심하게 뛰었다.
"그, 그 분 손녀의 이... 름은?"
당환성은 의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 너무 오랜 일이라서......."
그러자 옆에 있던 남궁진강이 말했다.
"노부가 알기로 그 분 노대협의 손녀 이름은 주설란(朱雪蘭)이라
고 들었소이다."
하후성은 마침내 심장이 탁 멎는 것같은 충격을 받으며 일시간에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드디어... 아버님이 마지막 남긴 중 자(中字)의 뜻을 알았구
나.......'
중인들은 모두 그의 반응에 의아심을 금치 못했다. 하후성은 그들
을 의식하여 곧 표정을 회복시켰으나 내심 끓어오르는 격동을 누
를 길이 없었다.
'아버님! 드디어 외증조부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
버님, 소자는 어찌해야만 하옵니까?'
하후성의 마음은 심한 격탕을 거듭했다.
혈연(血緣), 그것은 인간 본연의 끊을 수 없는 감정이 아닌가?
그러나 혈연을 느끼기에 하후성의 외증조부는 너무도 많은 한(限)
을 하후성의 가슴에 못박히게 한 존재로 비록 겉으로는 태연한 표
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심 무수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좌중의 화제가 다행하게도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있었고 자면신창
소중산이 침중하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소이까?"
종리자허가 담담하나 기개있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이 넘치면 흙으로 막고, 적이 오면 군사(軍士)로 막으라 했소.
정파무림의 의기를 잃지 않으면 그 어떤 사(邪)의 세력도 능히 물
리칠 수가 있는 법이오. 우선 각자의 문파로 돌아가 대책을 상의
한 뒤 백 일후에 있을 마종문의 개파대전 이전에 다시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팽수위가 다시 탁자를 두들겼다.
"좋소! 대체 수라궁 마종지문이 어떤 곳인지 그때 가서 똑똑히 보
겠소."
황보숭양도 두 눈에 홍광을 뿜어내며 말했다.
"그때 우리 태양장도 뜨거운 맛을 보여 그들의 생각이 망상이었음
을 일깨워 주겠소!"
중인들은 팽수위나 황보숭양의 말에 모두 투지가 끓어오르고 있었
으나 반면에 웬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부지불식간 거대한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장차 무림에 엄청난 혈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하늘에 무수히 떨어지는 은백의 눈송이는
소리없이 지계(地界)를 덮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눈같이 희다면
더이상 무림의 혈풍(血風)은 일지 않으리라.
한 객방의 창가에서 하후성은 창문을 열어젖힌 채 소리 없이 내리
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풍보를 떠나려 했으나 보주인 태을성수 종리자허가 극력
붙드는 바람에 하룻밤 유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든 객방은 고귀한 빈객을 모시는 곳으로 매우 단아하게 꾸며
져 있었고, 또한 천풍보의 깊은 후전(後殿)에 위치하고 있어 조용
하기 그지없었다.
하후성은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눈만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독고황(獨孤皇).......
하후성은 창밖의 어둠 속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내심 부르짖었
다.
'황(皇). 지금쯤 너도 이 눈을 보고 있겠지. 황, 너는 대체 이 하
늘 아래 어느 곳에 있느냐? 오늘따라 웬일인지 그대가 더욱 그립
구나.'
하후성은 창 밖으로 팔을 내밀어 손바닥에 떨어지는 차가운 눈의
감촉을 느꼈다.
'너는 나에게 말했지, 언젠가 이 중원제일의 고수(高手)가 되겠다
고! 그런데 어찌하여 무림에서 너의 소식을 조금도 들을 수가 없
단 말인가? 너와 헤어진 후 벌써 다섯 번째 오는 눈이건만 세월이
갈수록 나의 마음은 자꾸 외로워지기만 하는구나.'
하후성은 마음이 울적해짐을 금치 못했다. 부모형제의 정(情)을
누려보지 못한 그는 오직 독고황에게만 유일하게 뜨거운 정을 주
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헤어진지 오 년이 지나도록 만날 수 없었으니.......
하후성의 마음은 고독(孤獨)으로 쓸쓸하기만 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품 속에 손을 집어 넣었고
그의 손에는 한 권의 비단 책자가 들려 나왔다.
<뇌음진경(雷音眞經)>
그것은 바로 오 년전 하란산에서 그의 부친 하후연(夏候淵)의 목
숨과 바꾸어 온 천축(天竺) 대뢰음사(大雷音寺)의 보전(寶典)이었
다.
하후성은 뇌음진경을 두 손에 들자 일단 먼저 마음의 격동을 억눌
러야 했다.
'황. 오늘 드디어 외증조부님의 행방을 알아냈다. 어머님의 소식
도....... 미칠 듯이 보고 싶다, 그들을....... 그러면서도 달려
가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아느냐? 황.......'
하후성은 뇌음진경을 움켜쥐었다.
'이 한 권의 책자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눈보라 속에서 숨지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황.......'
뇌음진경을 쥔 손이 격하게 떨렸으나 그가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
것은 불문의 반야밀다대승신공으로 다져진 초인적인 정력(定力)
때문이었다.
이윽고 하후성은 간신히 마음을 가라 앉히고 뇌음진경을 품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주청산(朱靑山), 나의 외증조부....... 그러나 결코... 결코..'
하후성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런데 문득 방 밖에서 한 줄기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후소협, 좀 들어가도 되겠소?"
그는 태을성수 종리자허였고 하후성은 흠칫하여 돌아서며 담담히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선배님."
문이 열리고 종리자허의 인자하고 현기어린 모습이 들어섰다. 그
는 만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짓더니 활짝 열린 창문을 보며 말했
다.
"허허! 소협은 무척이나 낭만적인 성품을 지녔구려. 밤에 자지 않
고 눈을 감상하다니......."
"무슨 말씀을.......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밤중에?"
종리자허는 방 안의 탁자에 앉으며 신중히 말했다.
"소협에게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하후성이 의문을 느끼며 맞은편에 가 앉자 종리자허는 그를 진지
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협, 솔직히 대답해 주시겠소?"
"무엇을......?"
"소협은 소림(少林) 출신이 아니시오?"
하후성은 흠칫했다.
"아까 영빈청에서 소협이 백골사마와 황보숭양대협을 갈라서게 한
무공은 노부가 알기로는 소림의 범자대비공(梵慈大悲攻)이었소."
하후성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또 한 가지, 현 천하무림에서 소협 정도의 무공을 익힐 수 있게
키울 기인(奇人)은 오직 소림의 삼성승(三聖僧)밖에 없기 때문이
오."
종리자허의 추측은 실로 칼날같았고 마침내 하후성은 탄식하고 말
았다.
"노선배의 혜안은 도저히 속일 수가 없군요. 그렇습니다, 모두 선
배님의 예측대로 입니다."
종리자허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펴지는가 싶더니 그는 덥석
하후성의 손을 잡으며 탄성을 발했다.
"오, 오! 역시... 역시!"
그는 잠시 흥분한 듯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렇게 부르짖었다.
"진정 기쁜 일이오! 실로 중원무림의 커다란 복이오!"
반면 하후성은 그저 담담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하후성과 종리자허, 그들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 앉아 향차(香茶)
를 나누며 조용히 담소를 나누었다.
종리자허는 흰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실상 노부가 회갑을 기해 정파무림인들을 초청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소."
종리자허는 차를 한 모금 마신 연후 말을 이었다.
"그것은 무림동도들과 한 가지 일을 상의하려는 의도에서였소."
하후성은 지혜로운 눈을 이따금 깜박일 뿐 조용히 경청했다.
"원래 노부는 약간의 성복지학(星卜之學)을 익히고 있었소. 그리
하여 거의 매일같이 천공(天空)을 살피는 게 버릇이 되어 있소이
다."
하후성은 그 말에 소림의 천심선사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노부는 전설로 알려진 천혈성(天血星)이 차
츰 붉게 타오르는 것을 발견했소. 뿐만 아니라 사기(邪氣)를 띈
오대마성(五大魔星)이 천혈성을 둘러싼 채 점차 홍살(紅殺)의 기
운을 퍼뜨리는 것까지 확인하게 되었소."
하후성은 눈썹을 움직였다.
'천혈성과 오대마성. 이 노선배도 그것을 발견하다니.......'
그것은 이미 천심선사와 천기선사로부터 수차에 걸쳐 익히 들은
바가 아닌가?
"전설에 의하면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빛을 내면 세상에 가공할 피
바람이 분다고 했소. 강호무림에 유사 이래 엄청난 혈겁(血劫)이
일어난다는 것이오."
종리자허의 안색은 지극히 어두워졌다.
"그래서 노부는 이번에 회갑을 명분으로 무림고수를 모아 이 일에
대해 상의를 하고자 했던 것이오. 틀림없이 거대한 마(魔)의 세력
이 암중에 자라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오."
종리자허는 탄식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겠소? 그 마(魔)의 세력이 예상보다 훨씬 빨
리 나타난 것이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노부의 성복지학은 그 경지가 얕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왔소.
그러나 소협을 보니......."
종리자허는 기광이 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소림 삼성승의 혜안(慧眼)에 대해 실로 감탄과 존경을 금할 길이
없소. 그 분들은 이미 모든 것을 예측하고 하후소협같은 무림의
신성(新星)을 키워냈으니 말이오."
하후성은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깊숙한 두 눈에 담긴 혜지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종리자허도 역시 사십오 년 전 십오 세의 나이로 무림에 출도할
때에는 천하무림의 일대기재(一代奇才)로 지칭 받은 인물이었다.
태을성수 종리자허라는 그의 이름은 전 중원을 진동했고 모든 무
림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흐르고 그는 인생의 고개에 올라섰다.
젊은 기인(奇人) 하후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부러움과 감탄이
어려 있었다.
기재(奇才)는 기재(奇才)를 알아보는가?
종리자허는 이미 하후성에게 남다른 애착을 느끼고 입가에 부드러
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협, 노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잠깐만 노부를 따라서 한 사람을 만나보지 않겠소?"
하후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종리자허의 입가에는 갑자기 자랑
스런 기색이 서렸다.
"허허! 다름이 아니고 노부의 딸아이를 만났으면 하오."
하후성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오. 그 이유는......."
종리자허는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딸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오. 그 아이는 천성적으
로 특이한 체질(體質)을 타고난 천고(天古)의 지녀(智女)라오."
그는 미간에 약간 어두운 기색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단지 흠이라면... 몸이 너무나도 허약하여 바람만 조금 불어도
쓰러질 정도로 약체일 뿐, 그러나 그 아이의 지혜는 실로 바다와
같이 깊소."
하후성은 웬지 강한 호기심을 느꼈고 종리자허는 그의 반응에 만
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부가 조금 전에 딸아이에게 소협의 얘기를 했소. 그랬더니 그
아이가 꼭 소협을 한 번 뵙고 싶다는구료. 어떻소, 소협?"
하후성은 마음이 강하게 이끌렸다.
"좋습니다. 선배님."
종리자허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고맙소, 소협."
한 채의 별원(別院).
거대한 천풍보 내에서 가장 깊숙한 후원에 정교한 솜씨로 축조된
것으로 섬세하기 그지없는 여인(女人)의 기질이 풍기는 구조를 지
니고 있었다.
인공(人工) 연못이 후원의 한가운데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는가 하
면, 바로 그 연못 한가운데 별원이 지어져 있었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목교(木橋)가 별원으로 이르는 유일한 통로였
다.
밤.
눈이 내리는 조용한 밤길을 하후성과 종리자허는 걸었으며 그들은
곧 별원이 있는 연못가에 당도했다.
연못들은 투명하게 얼어 있었으나 그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
어 몹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바로 이곳이 딸아이의 거처요."
종리자허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 후 목교 위로 올라섰다.
하후성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고 잠시 후 목교를 완전히 건너자
종리자허는 별원의 문 앞에서 멈추었다.
끼익!
문을 열자 은은하게 꾸며진 대청이 나왔다. 종리자허는 대청으로
들어섰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청 안 쪽의 월동문 앞에 두 명의 청의시비가 서 있었다.
"보주님을 뵈옵니다."
두 시비는 종리자허를 보자 꾀꼬리같은 음성으로 말하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음. 향아(香兒)는 안에 있느냐?"
종리자허가 묻자 오른쪽의 얼굴이 갸름한 시녀가 공손히 대답했
다.
"예, 보주님. 아가씨께서는 벌써부터 보주님을 기다리셨어요."
"음."
종리자허는 월동문 앞에서 부드럽게 물었다.
"향아야, 들어가도 되겠느냐?"
안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님이신가요?"
하후성은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웬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안에서 들려온 여인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운 한편 특이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써, 그 음성에는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사
람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 신비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하후성은 짧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고 은은한 음성에 취했
고 그 음성은 다시 들렸다.
"아버님, 들어오세요."
종리자허는 월동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여인의 규방(閨房)으로 은은한 여인 특유의 향기가 감돌고
실내의 장식은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고아했다.
사방 벽에는 고서화 몇 점과 수를 놓은 부드럽고 단아한 장식이
걸려 있었다.
하후성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방 한가운데에 놓인 침상이
었는데 연자색 휘장이 반쯤 걷혀 있고 거기에는 한 미녀가 비스듬
히 기대앉아 있었다.
막 보던 책(冊)을 덮는 그녀는 백의의 미소녀(美少女)로 한 번도
햇볕을 보지 못한 듯 안색이 창백했으며 몸이 극히 유약해 보였
다. 나이는 대략 십칠팔 세 정도로 보였으나 기이한 매력이 그녀
의 전신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백의소녀는 칠흑같은 머리칼을 폭포수처럼 등 뒤로 완전히 빗어
내렸는데 그 모습은 막 하계에 내려온 선녀(仙女)를 방불케 했다.
그렇다고 백의소녀의 용모가 절륜한 것은 아니었고 단지 그녀가
풍기는 인상이 지극히 고혹적이라는 것이었다.
종리자허는 침상으로 다가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향아야, 몸은 좀 어떠냐?"
소녀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좀 괜찮아요."
"허허... 다행이구나."
종리자허는 고개를 돌리며 하후성을 가리켰다.
"참, 향아야. 이 분이 바로 애비가 말한 하후소협이시다."
"아!"
소녀는 가벼운 탄성을 발했고 하후성은 그녀에게 정중히 포권했
다.
"소생 하후성, 처음 뵙겠소이다."
백의소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소녀는 종리유향(鍾里有香)이라고 하옵니다. 몸이 불편하여 예를
못 취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녀, 종리유향이 그윽한 눈으로 응시하며 살포시 미소 짓자 하후
성은 전신이 찌르르 울림을 느꼈다.
종리유향의 미소는 단번에 사람을 흡수할 듯이 신비로운 마력(魔
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법(邪法)의 미공(迷功)과는 본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써 천성적(天性的)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 매혹을 지닌 미소였다.
하후성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이끌리는 것을 느꼈으나
담담할 뿐 겉으로는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별 말씀을....... 개의치 않아도 좋소이다."
종리유향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소협의 풍모를 뵈오니 소녀의 눈이 크게 떠진 듯하여 감탄을 금
치 못하겠습니다."
하후성은 그녀의 말에 절로 가슴이 잔잔하게 흩어지는 것같았으며
종리자허가 그런 그에게 말했다.
"소협, 노부는 잠시 후에 올 테니 향아와 이야기를 나누시오."
이어 그는 하후성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밖으로 사라졌다.
종리유향은 부드러운 눈길로 아직도 침상 앞에 서 있는 하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협, 자리에 앉으세요."
"고맙소이다."
하후성은 침상 곁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난생 처음 여인의 규방에 들어왔기 때문에 자연히 마
음이 거북하고 행동도 굳어졌다.
종리유향은 그의 심정을 헤아린 듯 자연스럽게 침상에 기대 누우
며 물었다.
"실례이지만 소협의 태생은 어디인가요?"
하후성은 담담히 대답했다.
"북방의 하란산(賀蘭山) 부근이오."
종리유향은 미소 지었다.
"하란산은 비록 가보진 않았으나 그곳의 아름다움은 서책을 통해
수없이 보았어요. 정말 하란산이 그토록 아름다운가요?"
하후성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소이다. 하란산은 무척 아름다운 곳이오."
"그래요. 언젠가는 저도 그곳에 가봤으면 좋겠군요."
종리유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으나 잠시 후에는 다시 맑
게 웃었다.
하후성은 그녀가 표정을 변화시킴에 따라 비로소 그녀의 얼굴 윤
곽을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으며 내심 흠칫 놀라고 말았다.
'으음, 이제 보니 종리소저는 매우 특이한 상이구나. 그녀는 선천
적으로 심미안상(審美顔相)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은 자신은 의
식치 못하지만 천하의 모든 남자의 마음을 은연 중에 휘감게 된
다. 어떤 남자라도 소저가 웃는 모습을 보면 평생을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까 내가 느낀 감정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심미안상(審美顔相).
이것은 천성적으로 타고 나는 상(相) 중에서도 여인이 갖는 가장
희귀한 상이었다.
이 심미안상은 상천역서(相天易書)라는 고서(古書)에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이 상을 타고 난 여인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대마녀(一代魔女)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심미안상의 여인은 단명(短命)하는 것이 상례였고
하후성은 지난 날 소림에서 천기선사로부터 관상지술을 배운 적이
있어 이 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종리유향은 그가 자신의 얼굴을 계속 주시하자 창백한 얼굴에 홍
조를 띄우며 수줍은 듯 물었다.
"하후소협, 어찌하여 저의 얼굴을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나요?"
하후성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실례를 했소이다."
종리유향은 다시 그를 그윽히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듣기로 소협은 소림 삼성승(少林三聖僧)의 전인이실지 모른
다고....... 그런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렇소이다."
"소림 삼성승의 존명은 수없이 들었어요. 게다가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미 소협의 무공은 천하무적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하셨지
요."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종리 노선배의 지나친 과찬이시오. 소생은 이제 무림에 첫 발을
내민 말학 후배에 불과할 뿐이오."
그러나 종리유향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예요. 소협의 전신에서는 일대종사의 풍모가 풍기고 있어요.
또한 소협은 이미 자신도 모르게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기풍을
드러내고 있어요."
"으음."
"그것으로 보아 이미 소협의 무공 경지는 더 오를 수 없는 극(極)
의 경지에 있는 것이 분명해요."
하후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종리유향은 그의 그러한 모습에
서 도리어 일종의 형언할 길 없는 매력이 풍긴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내심 몰래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하후소협, 소녀가 왜 소협을 뵙자고 한 지 아시나요?"
하후성이 묵묵히 고개를 젓자 종리유향은 지혜가 가득 담겨진 눈
을 사르르 굴리며 말했다.
"얼마 전에 아버님으로부터 마종문에서 보내온 마존첩(魔尊帖)을
보았어요."
"마존첩......."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무척 허약했기 때문에 자라면서 낙(樂)이
라고는 책(冊)을 읽는 것밖에 없었어요. 그 덕분에 웬만큼 지식을
쌓게 되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성복지술(星卜之術)에는 큰 흥미
를 느껴 몰두했지요."
"음."
하후성은 신음을 발하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거의 매일 창문을 열고 천공을 살피던 중 저는 놀랍게도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준동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종리노선배께서도 같은 말씀이 계셨소이다."
"그래요. 벌써 몇 년 전부터 천혈성과 오대마성을 관찰해온 저는
그것이 결코 평범한 마(魔)의 기운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
래서 장차 무림은 천혈성과 오대마성의 기운을 타고난 가공할 거
마(巨魔)로 인해 혈풍에 휩쓸릴 것이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어요."
종리유향은 약간 피곤한 듯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천년무림(天年武林)을 통해서 수많은 마두들이 나타나 무림을 혈
겁에 빠뜨렸으나 그들은 모두 한 가지씩은 부족한 면(面)을 가지
고 있었어요. 즉 가장 무섭다던 육대천마(六大天魔)를 예로 들어
볼까요?"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천 년 전의 천중극마(天中極魔) 구양평(歐陽平)은 무림사상 최대
의 무공을 지녀 당시에 달마대사와 쌍벽을 이룬다 할 정도였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살심(殺心)은 있으되 웅심(雄心)이 없었어요. 또
한 무공은 있으되 지혜가 부족했죠. 그래서 결국 그는 말년에 제
자들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고 말았어요."
그녀의 말은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이후 칠백 년 전에 혈세천존(血世天尊)은 비록 무공과 지혜
를 함께 지닌 대효웅(大梟雄)이었지만 남을 너무 믿지 않는 게 탈
이었죠. 그 불신(不信) 때문에 그의 혈세교(血世敎)는 금이 가고
결국은 멸망했지요."
하후성은 갈수록 감탄의 빛을 띄며 그녀의 얘기를 들었다.
"오백 년 전의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역시 무공은 있었으나
지혜가 모자랐죠. 또한 그는 너무도 오만했기 때문에 결국 자멸하
고 말았어요."
"흐음."
"이백 년 전의 천마교주(天魔敎主)나 불사지존(不死之尊), 백년
전 적미천존(赤眉天尊) 역시 무공은 불세출의 고수이나 모두 자만
심 때문에 사라진 인물들이죠, 그런데......."
종리유향은 어두운 안색을 지었다.
"이번에 나타날 마두는 저의 상상으로도 추측하기 힘든 엄청난 능
력을 지니고 있어요. 그의 무공이나 지혜는 과거 육대천마를 합친
것보다 훨씬 뛰어나며, 더더구나 천혈성의 마기를 타고나 그 능력
이 하늘을 가를 정도예요."
하후성은 안색이 굳어졌다.
"특히 그에게는 과거 육대천마와 맞먹는 오대마성(五大魔星)이 도
움을 주고 있으니... 실로 무서운 일이에요."
종리유향은 섬섬옥수로 이마를 짚었다.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요. 단지 천기(天機)
에 그들의 출현이 예시되었을 뿐이죠......."
하후성, 그는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종리유향의 말을 듣
기만 했다. 그러나 그의 신비감 넘치는 깊은 두 눈에서는 이따금
씩 혜지가 번뜩이곤 했다.
종리유향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협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후성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담담히 말했다.
"소저, 예로부터 수많은 개세마두들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혀 왔
소. 그러나 이제껏 그 누구도 무림을 지배한 자는 없었소."
종리유향은 아름다운 눈을 빛내며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나타날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과
는 마찬가지가 될 것이오."
하후성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정도인의 기(氣)가 꺼지지 않고 살아있는 한, 평화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오."
그는 말을 마치자 신음처럼 덧붙였다.
"단지... 그 과정에 있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릴지 의문이지만 말
이오......."
하후성이 몸을 돌려 창문 쪽을 향하자 종리유향은 문득 하후성의
등이 한 없이 넓고 커다랗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후성의 등을 보는 것 자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산(山)
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즉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여전히 원래
그 자리에 산(山)처럼 변화없이 서 있을 것만 같은 굳은 신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분은 대체.......'
종리유향은 완전히 자신이 압도당하는 느낌과 함께 마음 한 구석
에서 가슴을 울리며 다가드는 뜨겁고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모든 생각들이 짧은 찰나에 새롭게 바뀌고 있었다.
'아!'
그녀는 등을 돌린 하후성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끓는 듯한 격정이 밀려들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히 천하제일지녀(天下第一智女)인 종리유향.
그러나 총명한 그녀의 두뇌조차도 지금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감정을 생전 처음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랑(愛),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 아닐지.......
종리유향의 창백하던 양 볼에 은은히 홍조가 떠올랐다. 가슴이 두
근거리기 시작하자 얼굴에 화기(和氣)가 밀려든 것으로 그러한 그
녀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때마침 몸을 돌린 하후성은 종리유향의 그런 모습을 보는 순간 가
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마음이 또다시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빨려들었다.
그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운명적인 느낌으로써, 두 남녀의 뜨
겁에 타는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 짧은 순간 우주(宇宙)는
멎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종리유향은 심한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콜록......."
"종리소저!"
하후성은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감히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종리유향은 잠시 후 간신히 기침을 멈추긴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해 있었으며 이마에는 땀방울마저 처연하
게 맺혀 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종리유향은 애처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며 긴
속눈썹에서 보이는 가느다란 떨림이 더 할 수 없이 사람의 마음을
시큰하게 했다.
하후성의 돌처럼 굳었던 의지가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종리유향의 등을 부축했다.
"소저, 몸이 무척 불편한 듯 싶소이다."
종리유향은 두 눈을 살며시 뜨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
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잠시 하후성을 바라보더니 그의 가슴에 상
체를 기댔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 앉으며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그녀를 안은 순간 그는 종리유향의 어깨가 너무나도 가냘
프다고 생각했다.
"하후소협......."
그의 가슴에 안긴 종리유향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소저."
종리유향은 눈을 사르르 감으며 물었다.
"제 모습이 무척... 추하죠?"
하후성은 그녀의 몸을 약간 힘주어 안으며 부인했다.
"아니오. 소저는 아름답소, 그 누구보다도......."
종리유향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하후소협, 당신은 만개(滿開)하고 싶은 꽃의 열망을 아시나요?"
하후성의 안색이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 꽃은 십 일(十一)을 붉지 못하다 했죠.
그러나 저는 십 일이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이
라도 활짝 피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하후성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고 종리유향은 그의 품에 기댄 채
넋두리하듯 말했다.
"소협, 어려서부터 몸이 아주 약한 소녀가 있었죠......."
"으음."
"그녀는 너무나 연약하여 언제나 침상 신세만 지고 살면서 이 세
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언제나 부러워했죠....... 그러나 하늘은
그녀에게만은 그런 행복을 주지 않는 거예요......."
문득 하후성은 가슴이 축축해짐을 느끼고 흠칫했다. 종리유향이
그의 가슴에 얼굴은 묻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후성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격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굳게 껴안았다.
"아!"
종리유향은 가는 신음을 발했으나 뿌리칠 생각이 없는 듯 오히려
그의 품에 더욱 파고 들었다.
마치 한 마리 외로운 새처럼.......
하후성의 물같이 고요하고 잔잔하던 마음에 뜨거운 파도가 일어났
다.
"소저......."
그가 부르자 종리유향은 두 눈을 떴고 신비하도록 아름다운 그녀
의 눈 속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 눈 속에는 의
혹과 기대, 그리고 막연하기는 하나 미지(未知)의 희망과 애정의
빛깔이 섞여 있었다.
"유향(有香)."
마침내 하후성의 마음이 그녀를 향해 활짝 열렸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지며 종리유향의 젖은 입술을 덮었다.
"아!"
종리유향은 전신을 바르르 떨며 그의 목에 가는 두 팔을 감았다.
과거 백화미(白花美)의 선정적이며 적나라한 육체 공세에도 굴하
지 않았으며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익혀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던 하후성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정(情)에는 약했다.
"서... 성랑(星郞)......."
종리유향이 전신을 파르르 떨며 그의 넓은 가슴에 몸과 마음을 파
묻어 왔다. 어려서부터 정(情)에 굶주려온 하후성, 그는 이 순간
처음으로 이성(異性)을 받아들인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실(淨室).
하나의 오목(烏木) 탁자를 마주하고 하후성과 태을성수 종리자허
가 앉아 있었다. 종리자허가 앉은 자리는 창문이 보이는 곳이었
다.
밝은 아침.
종리자허는 계속 창문 쪽을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다.
"소협, 아마 어젯밤이 향아 그 아이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한 날이
었을 것이오."
하후성도 시선을 창문에 둔 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종
리자허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하오."
아침 햇살 아래 종리자허의 안면에 있던 주름살이 더욱 깊게 보였
고, 그는 우울하게 말을 이었다.
"하늘이 내린 천형(天刑)인지 향아는 천성적으로 절음폐혈증(絶陰
閉血症)을 앓고 있는데... 그 절증에 걸린 자는 이십 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되오......."
하후성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 그럴 수가......."
그는 더 할 수 없이 충격을 받았다.
"그럼 그 절증을 치료할 방법이 전혀 없단 말입니까?"
종리자허는 고개를 흔들었다.
"노부는 수십 년 간 의술(醫術)에 정열을 바쳐왔소. 천하에서 의
술 만은 누구보다 높다고 자부해 왔소, 그러나 유독 딸아이만
은......."
하후성은 문득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세상에는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가 있는 법이거늘 방법이 어
찌 전혀 없겠습니까?"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대답했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소. 그러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왜......."
"두 가지 영약(靈藥) 중 하나가 있으면 되기는 하오."
하후성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자 종리자허는 거의 자조에 가까운
투로 입을 열었다.
"그 하나는 소림의 대환단(大還丹)이오."
그 말에 하후성은 그만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대환단, 그것은 이미 자신이 마지막으로 복용함으로써 영원히 소
림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만년신학(萬年神鶴)의 정혈(精血), 즉 만년학정혈(萬
年鶴精血)이오."
"아!"
만년학정혈, 그것은 실로 전설상에나 있는 영물이었으며 또 설사
있다 해도 그것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려는 것과 다르지 않았
다.
하후성은 침음했고 종리자허는 탄식하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소. 그것은 마교(魔敎)에서
전해오는 천마환혼영체대법(天魔還魂靈體大法)이오."
"그, 그것은......."
하후성이 놀라자 종리자허는 괴로운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대법을 시행하자면 필히 죄없는 동남동녀(童男童女)들
을 희생시켜야 하고 또 성공한다고 해도 향아는 그 후 무서운 천
하의 희대마녀(希代魔女)가 될 것이오."
"그... 방법을 종리소저도... 알고 있습니까?"
종리자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러나 그 아이는 마녀가 되면서까지 살고 싶다는 생
각은 없다고 했소."
하후성은 잠시 침묵했다. 정녕 이 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
인가? 그러나 그는 곧 진심이 담긴 어조로 종리자허를 향해 말했
다.
"소생이 만일 인연이 있어 만년학정혈을 얻는다면 반드시 가져오
겠습니다."
종리자허는 쓰디 쓰게 고소를 지었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닌 그
가 말없이 탄식하는 것이었다.
눈(雪)이 내렸다.
눈보라 속에 천풍보의 문(門)이 열렸다. 보문 안에서 한 명의 영
준한 백의청년이 걸어나왔으나 청년을 배웅하는 사람은 단 한 사
람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하무림이 존경하는 태을성수 종리자허였다.
그토록 흥청거리고 떠들썩하던 천풍보(天風堡)나 지금은 너무도
조용했고 종리자허는 지금 홀로 백의청년, 즉 하후성을 떠나 보내
고 있는 것이었다.
하후성은 감회 깊은 듯 천풍보를 둘러본 뒤 종리자허에게 깊이 포
권했다.
"그럼... 노선배님,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잘 가시오, 하후소협."
종리자허는 아쉬운 듯 말했다.
여전히 눈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 눈 속으로 하후성은 묻혀져 갔
다.
종리자허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문득 잿
빛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놈의 겨울은 길기도 하군......."
< 대소림사 제 1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