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1)
석비룡이 동굴을 떠난 지 삼 일이 지났다.
나흘째 새벽 동이 틀 무렵, 선녀의 이마에서는 열이 내렸다. 들끓던 기혈도 완전히 가라앉고 고통이 사라졌는지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처음 본 것은 침상 머리맡에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사내의 미소였다.
"내가 어떻게…… 여, 여긴 어디죠?"
선녀는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가슴의 상처를 건드린 듯 통증이 치밀었다.
그녀는 아! 신음을 토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설고웅이 서둘러 말했다.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으니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어르신의 말로는 소저가 무공을 익히다가 잘못돼 부상을 입었다고 했어요. 아 참! 내 정신 좀 보게."
어눌하게 말을 늘어놓다가 뭔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고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후 설고웅은 다시 석실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의 가슴 앞에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잘 차려진 소반이 들려져 있었다.
대부분 푸성귀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닭찜과 같은 것도 있었다. 설고웅이 선녀가 깨어난 후 영양보충을 시켜주기 위해 미리 잡아둔 날짐승을 요리한 것이다.
"어머! 정말 맛있겠어요."
열흘이 넘도록 의식을 차리지 못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기름진 음식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선녀는 설고웅의 얼굴을 쳐다보며 몹시 미안해했다.
"괜히 저 때문에……."
설고웅은 오히려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예요. 입맛이 없더라도 많이 드세요. 왜, 왜냐하면…… 몸이 아플수록 잘 먹어야 하고…… 그래야 빨리 기운을 차리기 때문에……."
선녀가 따스한 눈빛을 자신에게 보내오자 설고웅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혀가 굳어져 말이 술술 나오지 않았다.
"고마워요."
선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 고맙긴요. ……."
"당신 덕분에 제가 살아난 걸 알아요. 평생 잊지 못할 신세를 졌어요."
"아, 아녜요."
설고웅의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그녀를 껴안고 같이 뒹굴은 것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그것이 그녀의 생명을 살리긴 했지만……
"어머! 정말 맛있어요."
선녀는 한 숟가락을 떠먹어 보고는 감탄했다.
"헤헤, 고마워요. 많이 드세요."
설고웅은 옆에 앉아 그녀의 말 한 마디, 사소한 몸짓 하나에 마음을 기울였다.
소반 위의 그릇들을 맛있게 비우는 그녀의 모습에 흠뻑 도취되어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만약사가 석실 안으로 찾아왔다. 만약사는 선녀가 일어나 인사를 하려는 것을 마다하고 한쪽에 앉아 그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설고웅이 소반을 들고 밖으로 나간 후 만약사는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여인은 즉시 일어나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어르신께서 소녀를 구해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만약사는 그녀의 절을 받기는 했지만 그다지 달가운 표정을 아니었다.
그는 선녀가 절을 마치고 무릎을 꿇기도 전에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옥구전을 수련했던데……."
옥구전이라는 말이 꺼내지는 순간, 선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만약사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로 옥구전은 오백 년 전에 실전된 이후 백 년 전 현현교의 교주인 좌엽선에 의해 다시 복원됐다고 들었는데 소저가 어찌 그것을 아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선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불만스럽고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왜 곤란한가?"
만약사가 재차 묻자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저…… 우연히 익혔을 뿐이예요."
"우연히?"
만약사는 반사적으로 되물었지만 여인은 이미 결심을 굳힌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요. 아주 우연히!"
만약사는 세심하게 살폈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강제로 그녀의 입을 열게 할 방법도 없었다.
만약사는 눈을 내리 감고 잠시 생각을 한 다음 걱정스럽게 말했다.
"옥구전이 비록 천하무쌍의 위력을 지닌 기공이긴 하지만 그 대가로 생명을 담보로 하는 건 알고 있나?"
"……."
여인은 대답이 없었지만 만약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그녀가 옥구전의 수련을 중지할 리는 없다는 것을……
'옥구전의 일곱 단계를 거쳤으니…… 지금까지의 고통도 상당했을 터, 모르고 연마했을 리는 없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밝히기 힘든 곡절이 있을 테지.'
휴우!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만약사는 끙! 하고 무릎을 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릎을 꿇고 앉은 선녀의 옆을 지나치면서 마지막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수련을 멈추는 게 좋을 거야. 단계가 높아질수록 생명을 잃을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는 게 옥구전이니까."
* * *
보름밤의 달이 둥그렇게 떠올랐다.
소쩍, 소쩍……!
조용한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울어대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여간 구슬프게 들리지 않았다.
그 슬픈 소리가 설고웅의 가슴 속에는 아주 사무치게 느껴져 왔다.
설고웅은 바느질 쌈지를 꺼내 수를 뜨고 있었다. 그가 울적한 이유는 자신은 수판을 거의 완성했는데 약속을 지킬 형님 석비룡은 이곳에 없기 때문이다.
"에잇! 이딴 건 붙잡고 있어서 뭘 해!"
마침내 설고웅은 수판과 바늘 쌈지를 내동댕이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 하나, 그 작고 예쁜 얼굴은 바로 선녀의 얼굴이었다.
"이런 날은 선녀와 함께……."
그가 무슨 불측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조용히 대화(?)나 나누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램이다. 물론 주는 떡이야 마다하지 않겠지만……
설고웅은 성큼성큼 산길을 내려와 석실 앞에 다다랐다.
'벌써 자나?'
석실 앞은 고요했고, 등잔불도 꺼져 있었다.
"선녀! 계십니까?"
목소리를 낮추어 불렀다.
그러나 석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소리가 너무 작았나?'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문을 두드리고 목소리도 좀 더 높였다.
"선녀, 주무십니까?"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설고웅은 비시시 문을 열고 살짝 안을 엿보았다.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 하게 떠졌다.
석실 안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선녀가 없어졌어!"
그는 황급히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선녀야!"
침상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봐 그녀가 방을 나간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발끝에 무엇인가 툭 걸렸다.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옥비녀였다.
"이……이건 선녀의 머리에 꽂혀 있던 건데……?'
설고웅은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왔다.
"선녀! 선녀!"
애타게 선녀를 찾는 목소리가 밤하늘로 크고 길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갑작스럽게 하늘이 시꺼멓게 변하고, 바람은 사납게 불어댔고 비마저 흩뿌리기 시작했다.
촤아아!
빗줄기는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몰아쳐왔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것들이 갈가리 찢겨 나가며 비명을 질러댔다.
"선녀! 선녀!"
비바람 속에 묻혀 설고웅의 목소리는 십여 장도 채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디 갔지? 몸도 아플 텐데……."
설고웅은 초조한 낯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빗속을 무작정 걷고 있었다.
"저, 저건?"
그가 본 것은 절벽가의 날카로운 바위 끝에 걸린 옷 조각이었다.
"이건 선녀의 옷이야!"
설고웅은 끝이 안보이게 아득한 절벽을 내려다보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럼 설마……?"
그는 망연자실(茫然自失), 더 이상 선녀를 찾을 생각도 못하고 절벽 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였다.
스르르……!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을까?
그것은 마치 여인의 긴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듯한 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세찬 빗줄기 속에 희끄무레한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설고웅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 한 발 그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서, 선녀?"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헉!"
설고웅은 뜨거운 숨을 훅 들이켰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상대는 그가 찾는 선녀가 아니라 젊은 남자였다.
깨끗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세상의 누구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실망감만 느끼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영봉(永鳳)을 찾고 있나?"
사내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설고웅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누, 누구시죠?"
"영봉을 찾는 중이라면 포기해. 그녀는 이미 내 손에 죽었으니까."
사내의 목소리는 너무 맑아 서릿발과 같은 차가움마저 느껴졌다.
"영봉? 영봉이 누군데요?"
설고웅의 물음에 사내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네가 들고 있는 옷 조각의 주인!"
그의 말은 너무나 담담해서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을 해야 할 정도였다.
설고웅은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들어 보고서야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옷? 그, 그럼 선녀가 죽었다고……?"
설고웅은 두 팔을 벌기고는 마치 고슴도치처럼 머리털을 곤두세우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함쳤다.
"당신이 선녀를 죽였단 말인가요?"
"선녀라……."
사내는 고개를 꺾어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며 하하하! 웃었다. 허나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고 메마르게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갑자기 그는 웃음을 뚝 그치고 설고웅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하긴 너 같은 멍청이의 눈으로 본다면 선녀로 불릴 만도 하겠지."
선녀가 죽었어, 선녀가 죽었어……
설고웅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두 손을 힘없이 드리우고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며 고개를 번쩍 쳐들고 사내를 응시했다.
"말해요. 선녀는 지금 어디 있죠?"
"네 뒤에……."
설고웅의 뒤라면……
천길 절벽이었다.
천리무영 석비룡의 신법이라면 몰라도 사람의 몸으로는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 없는……
설고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죽일 거야!"
손을 재빨리 품속에 집어넣어 더듬었다.
바늘 쌈지를 찾는 것이다. 허나 바늘 쌈지는 수판과 함께 버리지 않았던가.
"죽여버릴 거야!"
설고웅은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며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코뿔소와 같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자세로 사내의 가슴팍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이다.
사내는 쯧쯧! 혀를 찼다.
"미련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앞 뒤를 분간할 줄도 모르는군."
사내는 설고웅의 몸이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늦었다 싶을 때에야 손을 움직였다.
"천상 그 계집과 같이 묻어줘야 할 놈이로군!"
그의 오른손바닥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며 자신의 몸에 막 부딪치는 설고웅의 가슴을 쳤다.
아니 그 동작은 쳤다기보다는 가볍게 밀어냈다는 표현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 위력은 눈으로 보고서도 도저히 믿기 힘든 가공할 것이었다.
콰아아앙!
커다란 충돌음에 이어,
"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설고웅의 커다란 몸이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아갔다.
그의 신형이 떨어지는 곳은 선녀, 아니 영봉이 떨어졌다는 그 절벽 아래였다.
설고웅의 무거운 몸뚱이는 아래로, 아래로 날개 잘린 새처럼 끝없이 추락했다.
사내는 고개를 꺾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영광으로 생각해야 될 거야. 설고웅! 나 금황독존(金皇獨尊)의 손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2)
항주(杭州).
예로부터 하늘에는 천당, 땅 위에는 소주와 항주[上有天堂 下有蘇杭]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도시. 장강(長江)을 통해 남북의 산물이 집산되는 항구이자 교통의 중심지로 일 년 사시사철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석비룡은 항주의 좁은 골목길과 사람 많은 시장길만을 찾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그의 평소 성미로 보아 진귀한 물품을 즐비하게 늘어놓은 고급 상점가나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넘쳐나는 홍등가를 마다하고 생선 비린내가 코를 푹푹 찌르고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매우 복잡한 뒷골목을 활보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콰당! 쾅쾅!
앞에서 뭔가 부서지고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쌍두 형제가 또 일을 벌였다!"
"아이쿠! 대두의 눈에 독기가 올랐어."
"소두는 어떻고? 공연히 옆에 붙어있다 피 볼라, 어서 피하자구."
도망치는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찾았다는 듯 석비룡의 눈이 반짝였다.
"옳거니, 이제야 걸려들었구나!"
쾌재를 부르며 소동이 일어난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곳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불량기가 다분한, 껄렁한 사내 둘이 왜소한 노인을 핍박하고 있었다.
한 놈은 키가 작고 머리가 컸으며, 다른 한 놈은 키가 크고 머리가 작았다.
생긴 것이 전혀 판이한 그들이 형제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머리 크기로 보건대 누가 대두고, 누가 소두인지는 한 눈에 구별할 수 있었다.
"네놈이 뭔데 세를 안내는 거야?"
대두가 노인의 멱살을 움켜쥐고 앞뒤로 흔들며 윽박질렀다.
소두는 노인 앞에 놓인 생선 궤짝들을 공이라도 차는 듯 뻥뻥 걷어찼다. 궤짝들이 공중으로 붕 떠 땅바닥에 떨어지며 박살났고, 땅 위로 쏟아진 생선들이 파드득거리며 몸을 틀었다.
"며,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노인은 목이 졸려 캑캑거리며 간신히 몇 마디 했지만,
"뭐, 며칠? 씨팔, 뭐 우리는 땅 파먹고 사는 줄 알아? 기다려달라는 게 어디 한두 번이야."
놈은 노인의 멱살을 움켜쥔 손을 당기며 무릎을 앞으로 세웠다.
무릎이 노인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찔렀다.
"컥!"
노인은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상인들은 벌여놓은 물건들을 주섬주섬 담아 넣거나 피하기에 바빴다. 어느 누구도 노인의 편을 들어 이 망나니 같은 놈들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석비룡이 앞으로 나섰다.
"잠시 멈추시오!"
두 놈의 시선이 일제히 석비룡을 향했다.
"뭐야!"
대두가 눈을 치떴다.
어울리지 않게 석비룡은 간사한 웃음을 헤헤 흘리며 간지럽게 말했다.
"노인에게 그런 행패를 부리시면 됩니까? 말로 하셔도 충분히……."
가는 말은 고왔지만 오는 말은 더러웠다.
"야, 이 새끼야! 계집애처럼 곱살하게 생긴 놈이 뭐하러 나서! 기루에 처박혀 계집 엉덩이나 두들길 것이지, 한 번 죽어볼 테야!"
소두가 우람한 팔뚝을 들어 찌를 듯 삿대질을 해댔다.
"아이구, 저 공자님, 큰일 당하겠군. 저 불한당 같은 놈들한테 걸렸으니……."
사람들은 쑤군거렸지만 누구도 석비룡에게 피하라고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저 불한당 같은 놈들이 벌이는 시비판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뼈도 못 추린 군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쌍두형제는 마침 재밌는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 석비룡에게 다가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뿌드득! 뿌드득!
목뼈 마주치는 소리는 듣는 이에게 으스스한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석비룡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헤헤헤, 제가 어르신들을 만나기 위해 다니느라 쇠신발이 다 닳을 지경이었습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는지요."
"이놈이 무슨 개수작을……."
대두가 악다구니를 쓰다가 멈칫했다.
소두의 안색도 변했다.
석비룡이 소매 속에서 누렇게 빛나는 금덩어리를 슬쩍 보여주었던 것이다.
대두는 헛기침을 하며 안색을 바꾸었다.
"험험, 좋아! 이 어르신들은 무척 바쁘신 분들이지만 그렇게 애원을 하니 어쩔 수 없군."
세 사람의 모습은 곧 그곳에서 사라졌고, 잠시 후 쌍두 형제와 석비룡의 모습은 후미진 뒷골목에서 볼 수 있었다.
대두와 소두는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연신 헤죽거리며 웃었다.
석비룡은 두 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아시겠죠?"
"그러니까 이름은 연일문(延一紋)이고…… 나이는 오십 세 정도……."
대두가 먼저 말했고, 소두가 뒤를 이었다.
"거기다 광동 사투리를 쓴다 그 말이지?"
석비룡이 덧붙였다.
"그리고 몸은 상당히 마른 편이고…… 참, 잊어버릴 뻔했군요. 왼쪽 다리를 약간 저는 편인데……."
쌍두 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징이 꽤 많군."
석비룡은 그들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렇죠?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을 수 있겠죠?"
"금방?"
대두는 같잖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자넨 혹시 이 항주의 인구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 자그마치 백만이야 백만! 알겠어?"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디 사는지조차 모르는 작자를 찾아?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런 거래에 닳고 닳은 놈들이라 어느 정도 힘으로 밀고 당겨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석비룡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금덩어리를 소매 속에서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은근히 물었다.
"정말 어렵겠습니까?"
소두가 잽싸게 금덩어리를 탁, 낚아챘다.
"무슨 소리? 사람 사는 곳에서 사람을 못 찾는대서야 말이 안 되지, 안 그래?"
"암암! 이건 숙명적으로 무조건 가능한 일이라고!"
쌍두형제는 누구 입이 큰지 대보기라도 할 듯 귀 밑까지 찢어져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늘 아래 그가 훔치지 못할 것은 없다고 알려진 신투(神偸) 연일문.
십구 년 전, 그는 신투라는 별호답게 사라져버린 전설의 문파 현현교를 가장 먼저 찾아냈다.
연일문은 그곳에서 현현교 삼대신물 가운데 신조경과 용봉배, 초마금을 발견했다.
현현교를 빠져나온 후 누구에게도 이를 알리지 않고 은밀히 잠적했지만, 강호에 비밀은 없는 법!
그의 수중에 현현교의 보물이 있다는 소문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강호 전체로 퍼져나갔다.
강호는 발칵 뒤집혔다.
정파와 사파를 막론하고 엄청난 무공을 얻어 이름을 떨치기 원하는 무림인들이 연일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강호의 혼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무림맹까지 가세했다.
드넓은 강호였지만 연일문이 몸을 숨길 곳은 없었다.
점점 좁혀드는 포위망.
거듭되는 암습으로 연일문은 초주검 상태에 이르렀다.
추혼검객 천일기는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연일문을 구해주게 되었고, 연일문은 감사의 뜻으로 삼대신물 가운데 신조경을 천일기에게 선물했다.
그 후 연일문은 강호에서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어떤 자들은 동영으로 갔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티벳으로 갔다고 하며, 심지어 죽었다는 소문도 떠돌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말들을 확인해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십구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운학객잔(雲鶴客棧)……
항주에서도 단연 그 규모가 크고 화려한 객잔이다.
석비룡은 쌍두 형제에게 청부를 한 후에는 하는 일 없이 술과 노름으로 하루하루를 소진하고 있었다.
낮에는 그늘 좋은 운학객잔의 후원에서 커다란 의자에 몸을 파묻고 낮잠을 자는 게 일이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석비룡은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부시시 눈을 떴다.
"으아함!"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 들고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지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급할 게 하나도 없었다.
석비룡은 가만히 누워 눈만 끔뻑 끔뻑거리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놈들에게 일을 맡긴지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 왜 아무 소식도 없는 거지? 이것들이 혹시 돈만 먹고 튄 거 아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얼굴 생김새와 심보로 보건대 그 정도 돈에 항주 밖으로 튈 놈들이 아니다.
"하긴 쉽지야 않겠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난 일이니 이름을 바꿨거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테니까."
그의 눈 속에 예리한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연일문은 용봉배의 행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 무슨 일이 있어도 찾고야 말 테다!"
석비룡의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을 때 앞쪽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함께 깔깔거리는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여간 금번 십팔봉회의 비무대회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우승을 차지해야만 해요."
여인의 목소리는 교태가 어려 철석간장(鐵石肝臟)이라도 녹여낼 것 같았다.
"당근이지!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망신을 당했다간 우리는 끝장이라구!"
"사매는 조금도 걱정 마시오. 우리가 하루 이틀 맹렬 정진했소."
석비룡은 나무그늘에서 벗어나 정원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재잘거리는 목소리의 주인들은 막 월동문을 지나 그가 있는 정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네 명의 청년무사와 한 명의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무사들은 신체가 건장한 이십대 초반이었는데 모두 태양혈(太陽穴)이 높게 불거지고 손의 근골이 울퉁불퉁한 게 내외공의 조예가 상당한 듯했다.
석비룡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은 무사들 가운데에 있는 여인이었다.
금빛 찬란한 치마에 푸른색의 저고리를 받쳐 입었는데, 보기 드문 절색의 미모였다. 높게 빗겨 올린 머리채에는 금으로 만든 봉황새 모양의 비녀가 꽂혀 있었다.
턱을 오만하게 치켜세우고 걷는 모습이 여간내기는 아닌 것 같았다.
"이번 대회를 위해 지난 사 년간 우리가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지는 누구보다도 사매가 잘 알잖소!"
무사 중의 하나가 말했다.
여인은 흥, 코웃음을 쳤다.
"과정은 문제가 안 돼요. 정작 중요한 건 결과예요. 아무리 피땀을 흘렸어도 우승을 못하면 차라리 논 것만도 못하다구요!"
석비룡은 그들이 십팔봉회 중 백소회(白沼會)의 문하들이란 것을 알아봤다. 가운데 있는 여인이 바로 백소회의 회주 채무량(蔡茂良)의 여식(女息)이자 항주의 못 말리는 말괄량이로 유명한 묘수옥녀(妙手玉女) 채소소(蔡素素)라는 것도.
채소소와 석비룡의 눈빛이 마주쳤다.
석비룡은 그녀를 쳐다보며 씨익, 환상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후후! 오랜만에 색광서생의 위력을 보여줘?'
정면에 서 있는 석비룡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채소소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세상에! 이렇게 잘난 사내가 있다니?'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미묘하게 얽히며 파박! 불꽃을 일으켰다.
옆에 있던 무사들은 멍청히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질투를 느낀 듯 험험, 헛기침을 하며 채소소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어서 들어갑시다, 사매."
그제야 못 이기듯 채소소는 그들에게 이끌려 석비룡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우뚝 섰던 석비룡은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스윽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서 의미심장한 미소가 흘렀다.
"한 번 본 먹이를 놓친다면 색광서생 석비룡이 아니지."
채소소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연일문을 찾는 일을 맡겼던 쌍두 형제였다.
"어떻게 되셨소, 찾았소?"
두 놈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오? 정말 연일문의 행방을 찾았단 말이오?"
쌍두형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 마디로 피나는 고행의 연속이었다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우리가 아니었으면 형씨는 때려죽여도 그 사람을 찾지 못했을 거야."
"공자도 아다시피 우리가 좀 발이 넓은 사람이야? 그 바람에 공자가 준 돈을 다 허비해버리고 말았지만……."
"자, 어서 갑시다."
석비룡은 급한 마음에 앞장을 섰지만 그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우뚝 선 채 헤죽헤죽 웃고 있었다.
전혀 함께 갈 생각이 없는 것이다.
석비룡은 아차 싶었다. 자신의 실수였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돈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석비룡은 품속에서 주먹만 한 금덩이 두 개를 꺼내 하나씩 던져 주었다.
약효는 즉각 나타났다.
그들은 비시시 웃으며 걸음을 떼었다.
"에이, 뭘 자꾸 이런 걸 주고 그래?"
"이 친구는 다 좋은데 너무 화끈해서 탈이라니깐! 자자, 어서 가자구."
쌍두 형제는 석비룡의 어깨를 툭 치며 앞장 서서 걸어갔다.
(3)
쌍두 형제가 석비룡을 안내한 곳은 허물어져가는 폐장원이었다.
기와를 얹었던 지붕은 여기저기 푹푹 꺼져 있었고 담장은 풀기 한 점 없어 조그만 바람에도 푸실 푸실 흙이 떨어졌다.
담 안마당에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듯 잡초들이 키재기를 하며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연일문이 이런 집에서 살고 있단 말이지?"
석비룡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쌍두 형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뭘 모르는군. 원래 뒤가 구린 놈은 이런 집이 제격이라고."
"자자! 일단 들어가봐. 사람 찾는 게 중요하지 집구석이 어떻게 생겼건 뭐가 대수야?"
삐이걱!
석비룡은 쌍두 형제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면서 폐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꽝!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이 닫혔다.
쌍두 형제는 대문 빗장을 내리고 석비룡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
아니나 다를까,
폐장원 이쪽 저쪽에서 불쑥 불쑥 검은 머리들이 솟아올랐다. 사오십여 명은 족히 되어보이는데 저마다 손에 칼과 검, 창, 몽둥이들을 꼬나쥐고 뛰쳐나왔다.
그들은 사방에서 석비룡을 둘러쌌다.
석비룡은 쌍두 형제 가운데 대두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이게 뭐요? 연일문은 어디 있는 거요?"
"실망하지 말고 잘 찾아봐. 혹시 알아? 운 좋으면 비슷하게 생긴 놈이라도 눈에 띌지."
소두는 석비룡을 포위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혹시 연일문이란 이름 가진 사람 없어?"
척! 척!
다들 한 발씩 앞으로 나섰다. 모두 자신이 연일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소두는 어깨를 으쓱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떡하지? 모두 자기가 연일문이라고 하는데."
석비룡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날 속인 건가?"
대두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 흠흠, 헛기침을 하고나서 짐짓 점잖게 말했다.
"물론 찾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냐. 나름대로 몇 군데를 쑤셔보기도 했었고…… 헌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굳이 힘들 게 고생 안 해도 한 밑천 왕창 챙길 수 있는 묘안이 뇌리를 마구 때리지 뭔가? 그래서 생각을 확 바꿔버렸지!"
그 다음 말은 석비룡이 대신 해주었다.
"내 주머니를 터는 쪽으로 말이지."
"잘 생각해보라구. 그까짓 황금 몇 조각 때문에 남은 인생 여기서 종치지 말고."
고양이 쥐 생각해주듯 한다는 말은 아마 이런 걸 보고 한 얘기이리라.
석비룡은 하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엉뚱하게 잔대가리만 굴렸던 게로군. 난 그것도 모르고 열흘이나 눈빠지게 죽치고 있었던 거고……."
소두가 킥킥 웃으며 이죽거렸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진 말게. 피차 돕고 살아야 하는 게 강호의 도리 아닌가?"
석비룡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포위한 인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날 완전히 허수아비로 본 모양인데…… 좋아! 너희들 모두가 연일문이라면…… 그에 상응한 벌을 주어야 하겠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모습이 스스슥……! 움직였다.
발을 몇 번 옮기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포위망의 한쪽으로 성큼 다가서는 것이다.
"뭐, 뭐야?"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곧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끄아악!"
"아악!"
석비룡이 놈들 사이를 휙휙 스쳐 지나가자 놈들은 마치 낫에 벼가 베이듯 픽픽 쓰러져버렸다.
"맙소사!"
"이……이건 잘못 건드렸어."
그들은 그제야 사태를 짐작했다.
돈 많은 호구쯤으로 여겼던 이 젊은 놈이 사실은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임을.
석비룡은 두 손을 잠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놀렸다. 손을 휘두를 때마다 한 놈씩 땅바닥에 누웠다.
"일각이 바쁜 나를 무려 열흘간이나 물 먹인 대가는 좀 따져봐야겠어."
"놈! 어림없다!"
쌍검을 쥔 놈 하나가 용기 있게 달려들었다.
왼손의 검으로 기만동작을 써가며 오른손에든 검으로 석비룡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석비룡은 가볍게 한 손을 치켜 들더니 놈에게 일장을 갈기면서 다른 손으로는 검을 튕겨 냈다.
쨍!
검은 공중으로 튕겨 올라가 금세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석비룡은 검을 쳐낸 손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쭉 뻗어 옆에서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오는 놈의 목을 틀어잡고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뿌드득!
놈은 한 마디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목이 덜컥 뒤로 꺾여버렸다.
쌍두 형제는 수많은 싸움판을 경험해 보았지만 석비룡과 같은 인물은 생전 처음 보았다.
마치 산보를 하듯 가벼운 동작으로 짧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한 발자국을 걸을 때마다 동료들이 땅바닥에 드러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석비룡은 사나운 얼굴로 쌍두 형제 앞으로 다가왔다.
쌍두 형제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에게 힘이 되어 줄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쯧쯧, 꽤 볼만하군. 천하의 천리무영이 일개 하오문(下午門)의 잡배들을 상대로 상승기공을 과시하는 꼴이라니!"
폐장원의 문 밖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석비룡은 고개를 홱 돌렸다.
"아직도 내 손에 혼이 나고 싶어 안달하는 놈이 남았단 말이냐?"
"흐흐흐! 길고 짧은 것이야 대봐야 알겠지."
끼이익!
정문이 열렸다.
쌍두 형제는 어리벙벙하게 천천히 열리는 정문을 쳐다봤다.
'분명히 빗장을 걸어두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들의 의문은 간단하게 풀렸다.
밖에서 미는 힘에 의해 그들이 걸어둔 빗장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린 것이다.
비시시 열린 문 사이로 인영이 나타났다.
흰 도포 자락을 신선처럼 휘날리는 인영은 챙이 넓은 모자에 검은 면사를 드리우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온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가히 패도적이라 할만 했다.
"어르신!"
쌍두 형제가 자신들의 명줄을 보전해줄 신이라도 만난 듯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까지 석비룡의 손에서 용케 살아난 잔당들도 일제히 앞으로 달려와 넙쭉 엎드렸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어르신! 저 자식은 보통 놈이 아닙니다."
석비룡은 등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냉소(冷笑)를 터뜨렸다.
"당신이 이 떨거지들의 우두머리인가?"
"우두머리?"
면사 위의 날카로운 두 눈이 석비룡을 향했다.
"그렇게 보면 그런 거고."
"날 이곳으로 유인하라고 시킨 것도 당신이고?"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면사인은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패거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수고했다. 모두들 물러가 있도록!"
그들은 마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제히 열린 정문 사이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석비룡은 면사인을 쳐다보며 냉담하게 쏘아붙였다.
"난 아직 그들과 계산할 것이 남았는데…… 모두 내쫓았으니 천상 네 놈이 대신 계산을 치러야겠어!"
"곤란한 주문을 하는군. 계산은 내가 받아야 한다."
면사인 역시 지지 않고 응수하는 동시에,
"타앗!"
외마디 기합을 지르며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쉐에에엑!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두 줄기 자색 빛이 번개같이 석비룡의 가슴을 찔러왔다.
석비룡은 급히 소리쳤다.
"자양신공(紫陽神功)!"
펑!
자색 빛줄기는 허공만 찔렀고 퍼드득! 옷자락이 나부끼는 소리와 함께 석비룡의 모습은 사오 장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곤륜(崑崙) 출신인가?"
석비룡의 물음에 면사인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자양신공이 곤륜에서 나왔다고 곤륜출신만 익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저 우매함이라니…… 그럼 이것도 한 번 구경해보도록!"
말을 시작했을 때는 십여 장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말이 끝났을 때에는 벌써 석비룡의 지척에 이르렀다.
쒜엑!
권풍이 번갯불처럼 휘몰아쳤다.
"개방( 幇)의 취타곤(醉打棍)!"
석비룡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무영환리보를 밟으며 예리한 공격들을 피했다.
"껄껄껄! 그럼 난 개방 출신이겠구나!"
면사인은 제자리에서 몸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허리를 재치며 석비룡이 피하는 거리만큼 보폭을 이동하며 공격을 가하였다.
이번 공격은 먼저와는 또 성질이 달랐다.
파파파팟!
권(拳)과 장(掌)을 연달아 펼치며 석비룡을 압박해 들어왔다.
"좋은 수법! 소림(少林)의 반야금강장(般若金剛掌)과 무당파(武當派)의 신기팔로식(神技八路式)식을 한꺼번에 펼치다니!"
한 순간 석비룡의 신형이 면사인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무영환리보를 밟다가 위기가 닥치자 만리표풍을 운영한 것이다. 세상에 도망치거나 빠져나가는 데 천리무영을 당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석비룡은 멀찌감치 떨어져 면사인을 쳐다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면사인이 말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지? 개방의 제자로 보기엔 너무 깨끗하고 무당의 도사나 소림의 돌중으로 보기엔 너무 사이비 냄새가 풍길 테지?"
석비룡은 그의 말을 인정한다는 건지 실력을 인정한다는 건지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좋아, 좋아! 구파일방의 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단 말이지? 나는 오늘 대단한 고수를 만난 셈이군 그래."
"어찌 구파일방뿐이랴? 육문오가, 십팔봉회의 무공이 모두 이 손 안에 들어 있거늘!"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테지만 지금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을 보건대 절대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가 황금 따위에 눈이 멀어 하오문 잡졸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할 리는 없을 테고…… 처음부터 다른 목적을 품고 나를 끌어들인 건가?"
"별로 대단한 목적은 아닐세. 단지 천리무영 석비룡을 붙잡아 복날 개잡듯 두들겨 팬 다음 무림맹으로 넘기는 것밖에는……!"
면사인의 말 끝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혀 있었다.
석비룡이 알겠다는 탄성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무림맹에서 나오신 척살객 중의 한 분이셨군."
면사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미친 놈! 서문화 따위가 나를 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석비룡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면사인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순전히 나와 개인적인 원한관계란 얘긴데…… 난 당신 같이 강한 고수와 원한을 맺은 기억은 도통 없는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면 나게 해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면사인은 빠른 속도로 석비룡을 향해 파앗! 쏘아져 날아왔다.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이 수십 개로 늘어나 덮쳤다.
"이크크!"
석비룡은 즉시 무영환리보를 밟아 앞뒤로 살짝 살짝 피했다.
놈의 손아귀 힘은 엄청난 기세를 담고 있어 정면으로 맞받아쳤다가는 필시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쉐에엑!
파파파팟!
장내에는 공기를 찢는 바람소리만 가득해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면사인의 장법과 동작은 더욱 절묘해졌다.
그가 펼치는 한 초식, 한 초식은 모두 성질이 판이한 것인데, 각 초식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교묘하게 보완한 것이 신기에 가까웠다.
"쥐새끼같이 도망만 치느냐?"
면사인이 소리를 질렀고, 석비룡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내가 손을 쓰면 당장 꼬리를 내릴 놈이 큰 소리만 치는구나!"
그렇게 말을 하는 와중에서 면사인의 공세는 줄기차게 퍼부어졌고, 석비룡은 계속 수세에 몰렸다.
고수간의 싸움에는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한데,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선수를 허용한 것이 실수였다.
'수비 위주의 무영환리보로는 승기를 잡을 수가 없다!'
석비룡의 판단은 정확하고 신속했다.
결정이 내려지는 즉시 그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무영환리보가 계곡의 바위를 구비도는 물처럼 부드러운 곡선 위주의 보법이라면 지금의 동작은 탁탁, 각을 이루었다.
중요한 것은 이전처럼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 면사인 앞으로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서는 그 만큼 상대의 공격을 피해야 하는 몸놀림도 빨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석비룡의 모든 신경이 집중돼 있었다.
면사인이 외쳤다.
"네놈이 무영환리보에 환공보법(幻空步法)까지 펼친다만 그렇다고 내 눈까지 속일 수는 없지!"
그도 물러서지 않고 석비룡을 향해 정면으로 맞부딪쳐 왔다.
콰콰콰콰!
쓰쓰쓰!
두 사람의 신형은 그대로 두 줄기 빛으로 화(化)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