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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해옥랑 구출, 악인은 지옥으로
1
콰우우우……!
황금해의 소용돌이는 언제나처럼 굉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수천여 개의 소용돌이가 연이어져 바닷물을 하늘로 쳐 올리며 광란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
소용돌이 위를 날아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 마리의 백색 용이었다.
허나 완전한 용이 아니었다. 머리와 앞발, 등 상체만 있는 용, 바로 용해린이 내공으로 만들어 내는 대창룡이었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들을 일그러뜨리며 나아가던 대창룡은 소요돌이군을 벗어나 내려서고 있었다.
대창룡이 휘몰아쳐 간 곳에는 한 척의 소선이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대창룡은 소선 위에 우뚝 선 한 인물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용해린, 바로 그였다.
그는 창룡노를 오른손에 쥐고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십육대(十六代) 조사(祖師)님의 유적을 찾기 위해 황금해를 뒤진 지도 벌써 삼 년이 지났군."
그는 홀로 나직이 독백했다.
마룡방이 그의 손에 무너진 후 한 달이 지났다. 마룡방이 무너진 후 바다는 너무도 조용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황금해를 뒤지고 다녔다.
"오늘도 실패다."
그렇게 무공 일도에 정진해 왔건만 그의 초식은 완벽하지 못했다. 아니 초식은 완벽했다. 공력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창룡노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의 형상은 아직도 반쪽 뿐이었다.
-반쪽 뿐인 용을 완벽히 만들어라! 더불어 본문 최강의 무공인 천황패력공(天皇覇力功)의 칠성(七成)의 벽을 뛰어넘어라! 그것만이 아수라혈을 지닌 혈마(血魔)의 후예를 영원히 잠재울 수 있다.
십 년 전,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창룡노를 쥐어 주고 떠나가며 했던 말이었다.
제 삼십 대 천패문주.
이것이 대해제일인 무적해룡 용해린의 진정한 신분이었다.
가문에 내려오는 숙명, 그것은 무공완성과 숙적인 혈마를 완벽하게 뿌리 뽑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그는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히기 위해 뼈를 깎는 고련을 해야만 했다.
"열 살 어린 나이에 홀로 지내며 무공만 익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해적들에게 시달리던 노어부 내외를 구했던 일이 없었다면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열 살 때 우연히 해적들에게 시달리던 어부들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해적들의 마수에서 구해 준 용해린을 아들을 대하듯 극진히 보살펴 줬다.
그때부터 무공만을 익히던 그의 일이 하나 더 늘었다. 바로 해적을 소탕하는 것. 남해바다의 어부들을 위해 무수한 해적들과 왜구(倭寇)들을 퇴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적해룡의 이름은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남들이 모르는 무적해룡 용해린의 어린 시절은 그러한 아픔이 있었다.
대해에서 최고로 흉폭했던 남해혈련(南海血聯), 그들은 대륙은 물론 해왕맹조차도 꺼리던 단체였다.
그런 그들을 무적해룡 용해린이 단신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그 이후 무적해룡의 이름 앞엔 항상 대해제일인의 칭호가 따라다녔다.
그러한 어린 시절을 보낸 용해린에게 아버지와의 추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부모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용해린은 이 대해와 더불어 살았다.
그럼으로 해서 거친 파도를 다스릴 줄 알았고 가문의 무공을 익히며 대자연의 힘을 몸에 축적한 것이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가문의 무공을 거의 완벽하게 익히게 됐을 때 그에게 벽(壁)이 생긴 것이다.
하늘을 가득 메우는 대창룡은 그의 애병인 창룡노에 내공을 주입하면 형성되는 최강의 강기공( 氣功)이었다.
창룡노에 내공을 주입해 만드는 대창룡은 그러나 완벽한 용이 아니었다. 단지 상반신뿐인 용이었다.
아무리 내공이 절륜해도 완전한 형태의 용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고민해 왔으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가문의 천황패력공을 극으로 연마한다면 대창룡을 완전하게 그려낼 수 있을지도……."
그러나 그것도 막연한 기대일 뿐 확실한 보장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고민한 끝에 그는 용의 남은 반쪽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창룡노, 용이 새겨진 창룡노의 면 양쪽으로 바늘 크기의 가느다란 홈이 파여져 있었다.
'대창룡이 완벽하지 않는 이유는 창룡노가 완벽한 무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룡노와 짝이 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만 해.'
인연이 있다면 창룡의 또 다른 한쪽을 만날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천황패력 탄(彈)―!"
콰우우우……!
가공할 경력이 용해린의 손에서 뻗어나갔다.
거므스름한 묵기류(墨氣流)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며 회오리치듯 앞으로 뻗쳐 갔다.
묵기류는 하나의 거대한 암초에 그대로 작렬했다.
콰콰쾅!
암초는 산산조각이 나며 돌가루들이 사방으로 날렸다.
작은 동산만한 단단한 암초가 용해린의 손짓 한 번에 박살난 것이다.
"후, 여전히 변함이 없어."
용해린의 얼굴에는 탈진한 표정이 역력했다.
"언제나 그랬듯 천황패력공을 칠성 이상 펼치려 하면 한꺼번에 내공이 사라져 버린다."
고금 최강의 패도 무공이라는 천패문의 천황패력공에는 그러한 결점이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무공이라 해도 단 한 번 사용하고 탈진한다는 것은 실로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용해린이 간신히 찾아낸 단서는 십 육 대 선조가 무공의 결점을 보완했다는 정도였다.
황금해. 이곳 바다 속에 선조의 유적이 있다 했다. 해서 선조의 흔적을 찾아 헤맨 것인데 황금해는 너무도 넓은 곳이었다.
그 가공할 소용돌이 속을 헤치며 용해린은 삼 년이란 시간을 할애했지만 얻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오늘도 성과는 없었다.
"폭풍군도로 돌아가야겠다."
그는 뱃머리를 돌렸다.
그때였다.
"……!"
문득 앞쪽 바다를 보고 있던 용해린의 얼굴이 북서쪽으로 돌려졌다.
'수면에 파장이 일고 있다. 누군가……? 이 대해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순간 용해린의 배가 북서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어 빛살 같은 속도로 뻗어 나갔다.
2
해옥랑은 피화살을 뿌리며 갑판에 곤두박질쳤다. 잠시 쓰러졌다 검을 바닥에 찍으며 힘겹게 일어났다.
'아버님이 오시기 전에 쓰러지면 안 돼. 버텨야 한다.'
쓰러졌어도 벌써 몇 번은 쓰러져야 했다.
그러나 극한에 달한 분노가 그녀의 이성과 감각을 마비시켜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빛을 잃어 가는 눈으로 죽어 널브러진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생존자는 없었다.
전멸!
세 명 살귀(殺鬼)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해옥랑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을 짚은 검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퉤!"
해옥랑은 거칠게 침을 뱉으며 코웃음을 쳤다.
'난 해옥랑이야. 날 쓰러뜨리려면 아직 멀었다구!'
현범은 피묻은 검을 시체의 옷에 스윽! 문질렀다. 그리고 해옥랑을 바라보며 가사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동빛이 우러나는 근육질의 굳강한 상체가 드러났다.
"어떠냐… 해옥랑, 처녀의 몸으로 죽는다는 것이 억울하지 않느냐? 자, 이리 와서 나의 가슴에 안긴다면 극락을 구경시켜 주고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놀고 있군."
해옥랑은 저주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 퇘! 하고 침을 뱉았다.
피로 버무러진 침이 현범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현범은 불쾌해 하기커녕 손으로 침을 찍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미녀의 침은 이렇게 꿀맛이군!"
"현범형, 농담은 그만 두고 빨리 계집을 처리합시다."
나도성은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형, 어찌 그런 섭한 말씀을…, 소림의 대머리들과 오 년을 지내온 나요. 그 간 계집을 품어 보기커녕 구경조차 못했으니…."
"왠지 불안하외다."
현범은 그런 나도성을 무시하며 성큼성큼 해옥랑에게 다가갔다.
부들부들!
전신에 경련이 일고 있는 해옥랑은 이제 서 있을 힘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현범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스치듯 지나쳤는 데도 그녀는 그냥 보고 있었다.
쫘아아악……!
옷이 찢어지며 만월을 연상시키는 두 개의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수치심 따위를 갖는 것은 이 순간 사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녀였다.
'오냐! 넌 찍혔어! 내 저승 가는 길동무로 말이지!'
그녀는 마음을 안정시키며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힘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겠지만 한 올의 힘이라도 쥐어 짜냈다.
현범의 손놀림은 대범해졌다. 그는 해옥랑의 젖가슴을 손으로 스치듯 지나치더니 이제는 아예 마음 놓고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빠끔히 고개를 내밀며 대드는 두 개의 유두를 보며 그는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계집, 죽음의 순간도 본능은 숨길 수 없다는 건가?"
'마음대로 지껄여라 놈!'
해옥랑은 현범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계속 노려보았다.
현범은 유두를 입술로 물고 혓바닥으로 굴리면서도 고개를 들어 해옥랑의 눈빛을 읽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살기가 보이면 가차 없이 쳐죽일 계획이었다.
이젠 그의 손이 한쪽 가슴을 주무르다 못해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속곳 속으로 파고 들려고 했다.
해옥랑은 잠시 꿈틀거렸다.
'경계의 눈빛이 풀릴 때 네놈의 목은 내 것이다.'
현범의 손이 속곳 속을 파고들며 검은 숲 지대에 닿았다. 다른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았던 그 비밀 지대를 피로 물든 현범의 손이 누비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해옥랑의 반응이 없자 그는 더욱 더 대범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해옥랑의 비궁 쪽으로 손이 스며들 때 현범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다다르자 자연 현범의 경계심이 느슨해졌다.
번쩍!
한순간 해옥랑의 검이 빛을 토하며 움직였다.
츄아악……!
해옥랑의 검은 정확히 현범의 등짝에 쑤셔박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이…… 이 년……!"
현범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며 해옥랑의 가슴에 일장을 갈겼다.
펑!
"큭……!"
해옥랑은 무방비 상태에서 현범의 일장을 가슴에 격타 당했다.
장력에 격타당한 그녀는 힘없이 날아가 배의 난간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때였다.
"……!"
그녀의 눈에 한 차례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저…… 저 사내는……?'
난간에 배를 걸친 채 간신히 걸려 있는 해옥랑의 눈에 한 인물이 흐릿하게 비춰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 한 손에 쥔 철노.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한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물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왜 마지막으로 그 얼굴이 떠올랐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언지 모를 아릿함이 그녀의 가슴을 쓸어갔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며 떠오른 한 글자, 바로 사랑[愛]이었다.
풍덩!
"현범형!"
해옥랑이 바다에 떨어진 동시에 진운과 나도성이 바닥에 주저앉은 현범을 향해 달려갔다.
현범이 으드득 이빨을 갈아 붙였다.
"그…… 그 년은?"
"바다에 빠졌으니 죽었을 것이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나도성의 눈은 '그것 봐라, 빨리 죽였으면 그런 꼴은 안 당했지 않았느냐'고 비웃고 있었다.
현범은 부축한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난간 쪽을 향해 걸어갔다.
"찌…… 찢어 죽일 것이다. 이 교활한 년!"
그런데 난간 쪽으로 간 현범은 기겁을 하며 물러서고 말았다.
분명 물에 빠졌던 해옥랑이 피투성이의 몸으로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닌가!
"귀…… 귀신!"
그러나 귀신은 아니었다.
해옥랑의 몸은 허공에 뜬 채로 어떤 기이한 힘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타난 한 인물이 있었다.
다름 아닌 용해린이었다.
해옥랑은 숨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의 맥박은 가늘게 뛰고 있었다.
해옥랑을 안아 든 용해린은 현범 등을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악독한 놈들이로군! 여인을 이런 지경으로 몰아가다니……!"
호불위와 나도성의 눈빛이 서로 얽혔다. 두 사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뜻하지 않게 목격자가 나타났지만 어린놈이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두 사람은 다시 검을 힘주어 쥐며 용해린을 향해 짓쳐들었다.
"어린 놈!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슈아악……!
매화이십사검과 난파풍검법!
중원 최강의 검식들이 한꺼번에 용해린의 사혈(死穴)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러나 용해린은 차갑게 조소를 날렸다.
"벌레만도 못한 놈들!"
웅후한 외침과 함께 창룡노가 기이하게 움직이며 휘장 같은 강기막을 형성했다.
차앙! 창창……!
"컥!"
"커억!"
단말마가 울리고 호불위와 나도성이 튕겨 나갔다.
간신히 바닥에 뒹구는 것을 면한 두 사람은 동시에 울컥 한 웅큼씩의 선혈을 토했다.
현범은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눈으로 용해린을 바라보았다.
'저 놈의 내공이 저 두 사람을 능가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가던 용해린은 흠칫했다.
해옥랑의 가늘게 이어지던 맥박이 자주 끊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위급하다. 담대우어른께 빨리 보여야만 한다.'
이어 그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자신의 배로 날아 내렸다.
그가 배로 날아 내렸을 때 세 사람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년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네놈은 절대 살아 나갈 수 없다!"
부상을 입은 현범까지 가세한 그들이 용해린을 동시에 공격했다.
용해린은 몸을 홱 돌렸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다음 순간 창룡노에서 백색 환영이 그들을 향해 몰아쳐 갔다. 환영은 머리와 몸통이 반만 있는 용(龍)의 형상이었다.
"대창룡!"
'흡! 저놈이 무적해룡이란 말인가?'
현범 등은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경악을 숨길 수 없었다. 무적해룡의 위명은 중원까지도 드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늦었다. 용해린의 대창룡은 그들이 주춤거리는 순간 그들의 몸을 사정없이 휘감아 버렸다.
비명은 없었다.
대신 육편(肉片)으로 변한 세 명의 몸뚱이가 우박처럼 선상에 뚝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때였다.
휙휙휙……!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무엇인가가 용해린의 몸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왔다.
용해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틀었다. 그러나 본능적인 위기 감지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날아온 물체는 그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추아악 !
용해린의 어깨에 실 같은 상흔이 길게 그어지며 선혈이 배어나왔다.
그러나 용해린은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를 훑고 지나갔던 암기(暗器)가 다시 허공을 선회하며 그를 향해 날아온 것이다.
용해린은 창룡노를 회전시켰다.
탕!
창룡노에 부딪친 암기는 퉁겨 올라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어 용해린은 암기를 잡아들었다.
별 모양의 암기이니 성형비표(星形飛剽)라 해야 옳았다. 그러나 여느 성형비표와는 달리 한 자가 넘을 정도로 컸고 피를 머금은 듯 진한 선홍빛을 띠고 있었다.
용해린이 그것을 살피고 고개를 들었을 때 조그만 배를 타고 나타난 한 사람이 급속히 다가들고 있었다.
핏빛 장포를 걸친 사악하게 생긴 노인, 그는 바로 해옥랑의 시비인 미홍을 섭혼술로 제압했었던 노인이었다.
노인을 본 용해린의 눈에 은은한 놀람이 내비쳤다.
'이렇게 가까이 오도록 내가 눈치를 못 챌 정도라니……!'
용해린은 순간 강적이 나타났음을 느꼈다.
이때 노인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꼬마야, 그 아이를 나에게 넘겨주지 않겠느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의 암기를 가볍게 받아 내는 용해린을 보고 그도 적지 않게 놀란 상태였다.
모르긴 몰라도 채 이십도 안 된 청년이 혈성비표(血星飛剽)를 가볍게 받아 냈다고 한다면 중원의 무림인들은 까무러쳤을 것이다.
혈성비표를 던진 사람이 중원 최고의 암기의 달인이며 무림십대고수 중 사마에 드는 절정고수 혈성추혼마(血星追魂魔)인 바에야.
혈성추혼마는 혈광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해옥랑을 쏘아보았다.
'죽었나? 완전 피떡이 됐군. 아까운 간세 놈들은 잃었지만…… 됐어, 대라신선이 와도 살리지 못한다.'
용해린은 생명이 경각에 달한 해옥랑의 상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야만 했다.
"이 혈채는 다음에 갚겠소!"
순간 창룡노에서 웅후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뻗어 나와 혈성추혼마의 뱃전을 때렸다.
"이 놈이……!"
콰쾅!
굉음과 함께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다행히 허공으로 솟구친 혈성추혼마는 상처하나 없이 무사했으나 그 순간 용해린의 배는 빛살처럼 바다를 갈랐다.
"교활한 놈!"
혈성추혼마는 용해린을 쏘아보았다. 그의 신형도 용해린을 쫓았다.
* * *
"이럴 수가……."
해왕신검(海王神劍)은 분노의 음성을 터뜨렸다.
미홍의 보고를 받은 해왕맹의 이인자 해왕신검이 대선단을 이끌고 이곳으로 왔을 때는 이미 상황은 끝난 후였다.
해왕신검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알지 못하는 두 구의 시신.
그것은 바로 방옥과 진운의 시신이었고, 전멸된 수하들의 시신에서 발견된 검상을 보았을 때, 그의 눈에서는 불길이 치솟았다.
그것이 다름 아닌 중원의 구파일방 중 소림을 위시한 오파의 검초식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해옥랑의 시신이 없다는 점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으나 곧 그 희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임을 알게 되었다.
백 팔 명이 모두 죽었는데 아무리 절정의 무공을 지닌 그녀라 할지라도 이 지옥과 같은 상황을 벗어날 리 만무한 것이다.
해옥랑이 죽었음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확인하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마음속에 각인해야만 했다.
해왕신검은 기혈이 끓어올라 울컥 한 모금의 피를 토했다.
"명문 정파라 자처하는 위선자들! 네놈들은 알게 될 것이다. 오늘의 일이 얼마나 많은 피를 부르게 될지를!"
분노에 찬 해왕신검의 음성이 바다를 울렸다.
일은 묘하게 진행돼 가고 있었다.
3
객잔인 듯한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놓여진 탁자에는 지금 적포(赤袍)를 걸친 한 명의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붉은 노을 같은 서기가 은연중 노인의 전신에 휘돌고 있었다. 주변을 위압하는 그 서기는 절정의 내공에서 발산되는 호신강기였다.
노인의 내공이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런 노인의 옆에는 적수정(赤水晶)으로 된 하나의 투명한 관(棺)이 놓여 있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관 안에는 한 명의 여인이 잠을 자듯 조용히 누워 있었다.
하얀 비단옷을 걸친 이십여 세의 여인.
유난히 붉어 선명한 인상을 주는 입술과 사슴처럼 길었고 학같이 흰 목이 고결한 아름다움을 주고 있었다.
적포노인은 무심한 눈빛으로 적수정 속에 여인을 내려다 봤다.
문득 적포노인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영환(影幻)이냐?"
곧 천장 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예. 접니다. 지금 막 황도(皇都)에서 돌아왔습니다."
적포노인은 붉은 수정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 어의(御醫)는 뭐라 하더냐?"
"예. 소곡주(小谷主)님의 증상은 용뇌분향(龍腦粉香)이라는 상고의 기이한 향에 중독 된 것이라 합니다. 수백 년 전, 서역(西域)에서 흥망했던 밀교(密敎)에서 사용했던 물건이라 했습니다."
"용뇌분향이라…… 이역만리 서역의 물건, 게다가 오래 전에 멸망한 밀교에서 사용했었다고……?"
적포노인의 눈빛이 의문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그가 허공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원인을 알았으면 그 치료법도 알고 있을 것."
"어의께서 말씀하시길 용뇌분향에 당한 이를 치료하려면 천년자패(千年紫貝)의 분(粉)을 먹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년자패!"
적포노인의 눈가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쉽게 구해질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또한 영환의 태도에서 그 물건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어의에게는 그 물건이 없겠지?"
"그렇습니다. 황궁약고(皇宮藥庫)에도 천년자패는 없다고 했습니다."
"흠, 그래도 어의라면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가 뭐라 하더냐?"
"어의께서는 남해 창랑포구로 찾아가시라 했습니다. 그곳의 창해약선 담대우란 인물을 만나면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라 말했습니다."
"창해약선."
적포노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적수정을 바라보았다.
'란(蘭)아! 너를 반드시 깨우겠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그는 내심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보았다가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창랑포구로 향할 것이다."
"존명!"
짤막한 대답 이후 더 이상 말을 들려오지 않았다.
적포노인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불끈 불거져 나오는 검푸른 힘줄은 살기, 그 자체이리라.
"란아를 중독시킨 자!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스스슷……!
살기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 노인의 신형은 이내 방 안에서 사라졌다.
* * *
"일단은 한고비를 넘겼지만 앞으로의 상황을 봐 가며 더 치료해야 할 것이네. 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이리도 악독한 손속을 펼쳤는지."
창해약선 담대우는 혀를 끌끌 찼다.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대해천봉 해옥랑이었다.
골절된 부위가 열여섯 군데였고, 갈라지고 끊어진 곳이 무수했으며, 산공독에 중독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나머지 전신의 주요 경락들도 상당수가 손상된 상태였다.
창해약선의 손이 아니었다면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한 상태였던 것이다.
순간 용해린의 눈이 분노의 빛을 뿜어냈다.
"저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더군요."
담대우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용해린을 바라보았다. 이 바다에서 용해린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용공자를 모른다는 것은 십중팔구 중원의 무림인들이라는 얘기인데, 상당히 잔혹한 자들이로다!"
해옥랑을 내려다보던 용해린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약선 어른! 해소저를 죽이려 한 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혈의 노인은 조금 특이한 무기를 사용하더군요."
"특이한 무기라…… 어떤 무기였나?"
"재질은 만년자금철로 만든 것 같고, 크기는 한 자 정도로 된 별 모양[星形]의 핏빛 비표(飛剽)였습니다."
담대우의 눈이 커지며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혈의를 즐겨 입고, 짙은 핏빛을 띤 한 자 크기의 성형비표를 사용하는 고수는 천하에서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아마도 그 자는 천하 십대고수의 일인으로 사마 중의 한 명인 혈성추혼마일 것 같군."
"혈성추혼마!"
용해린도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중원 최강의 열 명 고수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십대고수 정도의 인물이 해왕맹의 소종사를 공격했다니……?"
용해린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껏 중원과 대해는 오랜 평화를 유지해 왔었다. 헌데 혈성추혼마의 행동은 그런 평화를 무너뜨린 행위였다.
용해린과 담대우는 직감적으로 머지않아 피의 바람이 불 것임을 느꼈다.
용해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소저는 약선 어른께서 잘 보살펴 주십시오. 물론 해왕맹에 사람을 보내 해소저가 이곳에 있음도 알려 주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
"염려 말게나. 즉시 사람을 해왕맹에 보내 알리도록 하겠소이다."
"좋습니다. 전 자하장(紫霞莊)에 들러 문룡 형과 이 일을 의논해 보겠습니다."
"알겠네."
담대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문득 그의 눈가에 짓궂은 미소가 어렸다.
"허헛! 홍균 소저의 색기(色氣)도 완전히 사라져 가고……."
용해린이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는 한 달 전 만음마룡의 천음색혼심법에 걸린 양홍균과 어쩔 수 없이 음양교합을 했었다.
그 기이한 대법에 걸린 여인은 넘치는 음기와 색기 때문에 희대의 탕녀가 돼 버리는데, 그 증상을 창해약선 담대우가 고쳐 준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얼굴을 붉히는 용해린을 보며 담대우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문득 해옥랑을 한 번 바라보던 담대우가 불쑥 한 마디 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용공자는 바쁘겠구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되묻는 용해린의 얼굴을 주시하던 담대우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 본업이 의원이고 상인도 겸하지만 관상(觀相)도 좀 볼 줄 알지. 관상학적으로 볼 때 용공자의 미간에는 여러 개의 살(煞)이 있는데, 그 중에는 도화살(桃花煞)도 있다네."
"도화살……?"
"그렇지. 많은 여인들, 그것도 홍균소저 같은 절색의 미인들이 용공자의 곁에 맴돌게 된다는 얘기지."
"후훗. 약선어른도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 남해 바다에서 어디 가서 홍균만한 여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 있지 않나?"
담대우가 침상에 누운 해옥랑을 가리켰다.
용해린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천하 절색의 여인이 용공자의 손에 구출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네."
"우연일 것입니다."
"허허, 과연 그럴까?"
용해린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듯 그는 급히 담대우에게 인사를 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 있다가는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서."
용해린은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폈다. 그는 해옥랑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해왕맹과의 알력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신경 좀 써 주십시오."
"염려 마시게."
정색하며 대답하는 담대우를 보며 비로소 용해린은 안심했다.
용해린은 신형을 틀어 건물을 나갔다.
멀어져 가는 용해린의 뒷모습을 보면서 담대우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지금 그 눈빛은 일개 상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평범하지 않은 무림 고수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강렬했던 그의 눈빛은 찰나적으로 사라졌다.
"후후, 무적해룡이 중원으로 들어갈 날이 멀지 않았군. 용공자는 만인의 위에 선다는 천왕지상(天王之相), 그에게 여인이 다가든다는 것은 천왕지상의 주인이 천하로 향하는 것을 의미하지. 전설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그의 말이 묘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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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