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가 아니었다. [요한복음 7:1-8]
마태복음21장을 보면 -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시고 -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온 예루살렘 성민들이 나와서 호산나를 외치자,
- 온 성이 - 소동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소동했다는 헬라어 ‘쎄이오는 지축이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큰 소리를 쳤는지, -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 때문에 - 땅이 흔들리듯이 - 예루살렘 지축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닷새 후에 - 또 한 번 지축이 흔들립니다. - 그러나 이때는 닷새 전에
예수님을 향해 -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 호산나가 아니라 - 예수를 향해 호산나를 외쳤던 그 사람들이 -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 함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닷새 전에 예수님을 향해서 -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 당신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의미로 - 호산나라고 외쳤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닷새 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쳤던 것은 -
그 이전에 -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보았고 -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도 보았기에 - 그 예수님을 - 능력의 소유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생각했던 능력의 예수님께서 -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는커녕 -
사랑하라 - 용서하라 - 선행을 베풀라고만 하시니 - 자신들이 호산나를 외쳤던
그 예수님은 - 그들이 생각했던 그 예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 구원해달라고 호산나를 외쳤던 그 입술로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 이것이 허상이 실상을 죽인 십자가 사건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향하여 드릴 수 있는 -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 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고 예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장22절에 의하면 -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간(諫)했습니다. -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요.
많은 분들이 한글 성경을 읽으시면서 간했다고 하는 그 한글을 간곡히 말한 것으로
잘못알고 있습니다. - 그런데 그 간자는 ‘한자로 꾸짖었다’라는 말입니다. - 헬라어
에피티마운도 야단쳤다는 말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옷을 붙잡고 꾸짖었습니다. ‘네가 죽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허상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사단아 물러가라.” 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를 가리켜서 사탄이라고 하셨는가? -
자기를 부인할 줄 모르면 그 사람이 사단이 됩니다. - 왜? - 하나님의 실상을 파괴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정말 나를 좇아오고 싶으냐 -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아오너라.’
여러분, 믿음은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 믿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이것은 허상입니다.
보십시오. - 호산나를 외치다가 - 자신들의 뜻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자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쳤던 - 예루살렘 유대인들이나 -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 자기 상식으로 이해하지
못한다하여 - 예수님을 꾸짖었던 베드로나 - 자기 기준대로 신앙 생활하는 성도나 - 모두는 - 예수님에 대한 허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에게 자기 자신을 매이는 것입니다. - 좋을 때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질병, 가난, 실패, -나쁠 때도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미투운동은 - 2017년 10월 미국의 유명한 영화제작자인 - 하비 와인스타인의 -
여자배우들에게 성폭력 및 성희롱 행위를 비난하는 것을 시점으로 - SNS에서 용기
있는 고백이 모이고 모여 - 참되고 바른 변화의 물꼬를 트고자 하는 운동입니다.
강한 자가 자신의 위치를 악용하여 - 약한 자를 괴롭히거나, 또는 약한 자를 통해
-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운동은 -우리나라에서도 영향을 미쳐 - 법조계를 필두로 해서 - 예술계, - 교육계, - 정치계, - 종교계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자상한 아빠의 모습을 보였던 모 탤런트는 - 자신의 딸과 같은 어린 여성을 자신의
성적 노리개정도로만 생각했고 -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 사람은 - 자신의 위치를 악용해서 - 후배나 제자들을 -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변명과 악의에 찬 모습을 보이는 이도 있고 - 스스로가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그는 - 그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충격을 감추지 못할 일은 - 우리나라의 시문학계의 얼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 시인 고은에 대한 이야기와 - 안희정 충남도지사입니다.
아름다운 시를 썼던 시인 고은은 올해 85세입니다. -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글을
보면서 -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 손색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 그러나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 추악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를 위해 - 국민에게 호소를 했던 그는 -
우리가 생각하는 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 일평생 어렵게 일해서 모은 전 재산을 - 장학 기금으로 쾌척한
할머니들의 미담이 - 심심찮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 김밥을 팔거나 삯바느질로 - 수억, 혹은 수십억 원의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는 -그 할머니들이 평생 - 얼마나 구두쇠로 살았겠습니까? 돈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을 것이고, -이웃으로부터 욕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할머니가 - 그토록 어렵게 모은 전 재산을 사회에 미련 없이 희사 할 때,
평소 돈으로 인해 그 할머니에게 서운한 감정을 지녔던 사람들은 뭐라 했겠습니까?
“그 할머니는 - 우리가 전에 생각했던 그 할머니가 아니었다.”
우리는 때대로 어느 사람을 평가할 때 -한 단면만 본다든지 -또는 자기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 그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 그래서 선한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악하게 생각할 때도 있고 - 악한 사람을 자기의 관점에서 좋게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 당사자의 한 면이 아닌 전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의 유한함과 - 이해득실에 따른 편견, -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 등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 즉, 저 사람이 사기꾼이라 할지라도 - 나에게 잘해준다면, - 나에게는 사기꾼이 아니라,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됩니다.
가령 배고픈 늑대가 있습니다. - 한참을 걷다보니 저 멀리에 양떼가 보이는 겁니다.
- 늑대의 입장에서는 - 하나님이 자신의 처지를 아시고 - 일용할 양식을 준거라고
생각하고 - 양떼를 습격합니다.
그런데 이때 목동이 - 양떼를 습격한 늑대를 몽둥이와 돌을 던져서 좇아냈습니다. -
늑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 그 목동은 자신을 때리고 죽이려는 폭군입니다.
그러나 늑대가 폭군으로 본 그 목동은 - 양떼들에게는 폭군이 아니라 - 선한목자요, 구원자가 되는 겁니다. -
이처럼 똑같은 목동도 -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 폭군이 될 수도 있고 -
구원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거나, - 판단하기 원한다면, -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내 눈에 보여 지고 있는 당사자의 모습 외의 - 또 다른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사실을 거부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당사자의 실상이 아닌 허상을 붙잡을 수
밖에 없습니다. - 오늘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1절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메시아, - 즉 그리스도를 갈망해 왔습니까?
그러나 대망인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 오셨음에도 -유대인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주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 그 이유를 주님께서 본문 7절을 통해 밝히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한복음 7장 7절]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 자신들을 칭찬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꾸짖으시며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들이 인위적으로 제정한 종교전통과 관습을
더욱 확고히 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
하지만 주님께서는 -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옥이야 금이야 하는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 주시는 등, - 그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부정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기득권을 지닌 상층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들의 지위와 재산을 공고하게 보장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과 함께 하셨고, - 민중이 주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나 -상층부 사람들이 볼 때 -자신들의 기득권을 부정하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 그러므로 전통적인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 그리스도는 - 자신들이 생각하는 - 그 그리스도일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존재를 위협하는 - 위험인물일 따름이었습니다. -
그래서 그들이 함께 작당하여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은, -적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7장 5절이 또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한 핏줄을 나눈 형제는 -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입니다. -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해하고 곡해할지라도 - 형제만은 형제를 믿어야만 합니다.
- 그것이 형제의 특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 바로 자신들의 어머니인 마리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자신들과 한솥밥을 먹어온
자신들의 맏형이었습니다. - 그들은 예수님의 직업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갈릴리의 목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예수님의
동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동생들 보기에 - 형님이 이상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형님인 예수님이, -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 이제 곧, 하늘 위로 올라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있고, - 자기는 하나님 안에 있답니다. - 예수님과 더불어
한 지붕 밑에서 동고동락해 온 동생들로서는, -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해대는 형님
예수를 - 믿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생들에게 “예수는 -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 본문 요한복음 7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여기에서 “무리”라는 헬라어 - ‘오클로스는 - “민중”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제국의 정복자들과 - 유대교 기득권자들의 압제와 핍박 아래에서 신음하던
민중들이 -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 얼마나 애타게 열망했었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신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 그 이유는 그들은 진정한 메시아라면 - 당연히 정치적 자유와 - 경제적 번영을 자신들에게 가져다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 독립이나 번영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습니다.
하는 말이라곤 고작, - 천국이요, 영생이며,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는 식의 비현실적이고도 - 어처구니없는 말뿐이었습니다. - 그야말로 그들이 생각할 때에 예수님은 백성을 미혹케 하는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민중들 역시, - 주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한 마디로
“그 메시아는 자신들이 기다리는 - 그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전통 유대인들도, - 예수님과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들도, - 소외된
민중들도, - 그들이 경험하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 자신들의 생각과 차이가 나자 -
주님에 대해 깨닫거나 -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 누구보다도 더 일찍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스스로 부정하는 -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한 채, - 자기 편견 속에 있는 예수님 - 그리고 왜곡된
감정과 이기심의 눈에 투영된 예수님의 모습만을 - 예수님이라 속단했을 때, -
그들에게 있어서 - “그 예수님은 - 자신들이 생각하고 갈망하는 그 예수님이
아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한계 속에 갇혀 - 전체로서의 주님을 만날 수도, - 만나려 하지도 않는
유한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 주님께서 꼭 보여주고 싶으신 하나의 모습이
있다면 -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 본문 2절-5절의 내용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한복음 7장 2절 -5절]
초막절이란 - 이스라엘 선조들이 광야에서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인 동시에, - 그 해에 추수한 곡식을 -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 감사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명절을 “거둘 수”[收], “저장할 장”[藏] - 수장절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 유대인 최고의 축제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동생들은 주님을 향해,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 이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 하나님의
아들임을 - 만천하에 스스로 증거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요한복음 7장 8절입니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주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아직 차지 않았으므로 - 이번엔 올라가시지 않겠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나 본문 10절이 의외의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 ”
이번 명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 않겠다던 주님께서는 뜻밖에도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 그것도 비밀리에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신 주님께서 - 처음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은 이유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 수장절 축제에 참여하신 주님의 모습이, - 한계선상의 인간에게 보여 주실 - 단 하나의 당신의 모습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얼마 전에 설 명절을 지냈습니다. - 우리의 명절 뿐 아니라 -
이 당시에도 - 병들고 가난에 찌들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에게 명절이란, -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운 날 일 뿐입니다.
예루살렘의 감사절 축제에 참여하신 모습이 - 단 하나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남는다면, - 그 모습은 축제와는 거리가 먼 - 병들고, 버림받은 자들과는 무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장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이르신 주님께서는 - 절기 중간에 접어들기까지
당신을 나타내지 않으셨고, - 그 절기를 당신의 때로 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언제를 당신의 때로 잡고 계셨습니까?
요한복음 13장 1절이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유월절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키시던 날,
애굽의 바로가 -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수밖에 없도록 - 애굽의 모든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를 치시면서, -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양의 피를 문틀에 바르게 하심으로
살리시고 - 해방시켜 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유월절을, - 그리스도로서의 당신을 만천하에 드러낼 때로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에 한계선상의 인간들에게 보여 주실 단 하나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 끝까지 사랑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어 달린 유월절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 이것이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간직해야 할 한 컷,
- 즉 전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카톨릭의 십자가와 개신교 십자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카톨릭 십자가에는 반드시 고통당하시는 주님의 형상이 붙어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불교처럼 - 고행을 당연시하기도 합니다.
반면, 개신교의 십자가에서는 고난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영광을 내세우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개신교가 부활의 영광만을 강조하다 보니, - 은연중에 - 크리스천으로서
살아야 할 삶의 윤리를 망각하거나 - 소홀히 하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의 십자가나 개신교의 십자가나 모두 그 나름대로의 의미는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십자가는 - 이 양자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있을 수 없고, - 부활의 영광을 지향하지 않는 고난은 그 어떤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십자가를 세우십시오. -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십시오.
단지 고난을 위한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 내게 새 생명의 영광을 안겨 주시기 위해, -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당신의 사지를 찢으시며 죽음의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시는 예수님을 모셔 드리십시오.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듯 절규하시면 서도, - 나 한사람을 살려내시기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흘리신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 순간 그분에게는, 나는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개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나의 삶은 창조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계신
주님을 위한 진리의 삶으로 - 삶의 축이 바뀌어 지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여러분의 실패를, 절망을, 죄 짐을 대신 지고 돌아가셨는데, - 대체 무엇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십니까?
주님께서 주신 생명 속에서 - 새롭게 진리를 호흡하십시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사랑에 의해, -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 주님의 사랑을 위해 -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 그때부터 그 분의 사랑 안에서 - 전혀 새로운 삶이 창조될 것입니다.
설령 여러분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 여러분의 한 면을 놓고 오해할지라도,
누구보다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희들이 생각하는 아무개는 -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 2105 -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의 삶이 예배당 안과 밖에서 일치해 오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 왔음을 회개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영혼이 살찌고,
속사람이 강건케 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셨사오니, 이 생명 안에서 날마다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혹,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곡해를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는
참된 크리스천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의 감화감동 충만한 역사가
주님께서 주신 생명 속에서 - 새롭게 진리를 호흡하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사랑에 의해, -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 주님의 사랑을 위해 -
새롭게 시작할 때 - 전혀 새로운 삶이 창조될 것을 믿는 주님의 사람들과
-비전교회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