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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
백수 클럽에 가입한 것을 환영합니다. 이태백이 무색할 정도로 청년 백수가 넘쳐나는 세상에 사오정은커녕 예순 너머까지 직장 생활을 한 우리가 백수 운운함은 사치요, 욕먹을 소리인줄은 압니다만 그래도 시쳇말로 신중년(新中年) 운운 하는 것도 낯간지러운 일 같아 염치 불구하고 백수란 말을 사용함을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K형!
우리가 20대 후반에 사회 첫발을 내딛는 입사동기생으로 처음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35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서 모두 반백의 은퇴자가 되었으니 참으로 세월의 빠름이 극구광음(隙駒光陰)인 것 같습니다.
K형과 함께 보낸 수많은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특히 내가 먼저 은퇴하여 시간은
많고 할 일은 별로 없던 초년 백수 시절 적막강산인 나에게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할애해
진수성찬으로 나의 적막과 허기를 채워 주면서 항상 백수의 자존심을 배려해 마냥 얻어먹는다는 느낌을 안 갖게 한 지혜가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처럼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사회 친구로 우연히 만나 이렇게 오랫동안 우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주원인은 아마도 서로를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담백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수 클럽에 먼저 가입한 고참으로서 신참 백수에게 이제까지 지켜 온 불간섭주의의 묵계(黙契)를 깨고 조금 잔소리를 할 터이니 양해해주기 바랍니다.
K형!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과 SNS에 지천으로 널려 있고 K형도 익히 알고 있을 것으로 믿고 중언부언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난 번 만났을 때 집에는 답답해서 못 있겠고 오피스텔을 얻어서 책이나 읽고 바둑이나 두면서 소일하겠다는 말을 듣고 약간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마 K형도 곧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실감할 것입니다. 대기업이란 큰 조직 안에서 높은 직위로 보호받던 권위나 존경이 얼마나 허망한 가를 깨닫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들락거리는 발걸음이 끊긴 사무실은 잘 나가던
행복했던 시절이나 회상하는 감옥 같은 공간으로 차츰 변질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K형!
그래서 즉시 취미 활동을 시작할 것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물론 독서나 바둑도 훌륭한 취미 생활이겠지만,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어울려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 내가 참여하고 있는 취미 활동 중 하나를 주마간산으로 간단히 소개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문화역사 탐방모임
몇 년 전 일찍 백수가 되어 산으로 들로 정처 없이 싸돌아다니던 고등학교 동창 중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몸으로 실천하는 고리타분하면서 속 깊은 친구 서너 명이 발기하여 왕릉(王陵) 구경을 시작으로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창대하게 발전하여 회원 수 20여 명에
40여 회에 걸쳐 탐방을 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주로 왕릉 위주로 했으나 분야를 넓혀 박물관, 미술관, 고찰(古刹), 왕궁, 성(城), 서원(書院), 하회마을, 독립기념관, 소쇄원(瀟灑園) 등 옛것에 대한 호기심은 끝이 없어 발길 안 미친 곳이 없습니다.
1.왕릉(王陵)
(1) 조선왕릉은 남한에 40기, 북한에 2기가 있습니다. 능(陵)은 왕과 왕비, 원(園)은 왕의 사친(私親), 왕세자와 왕세자빈, 묘(墓)는 대군(大君), 공주, 옹주, 후궁, 총(塚)은 왕이나 유력자이나 주인이 확실치 않은 경우의 무덤을 각각 말합니다.
(2)왕릉은 개성의 정종, 여주의 세종, 효종, 영월의 단종 능을 제외하고는 궁궐로부터 10리 밖, 10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대부분 서울 근교(구리, 고양, 남양주, 파주, 화성, 양주)에 있습니다. 그 당시 왕이 왕실을 오랫동안 비워 놓을 수가 없어 왕이 능에 갔다가 하루 안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3)왕릉은 풍수사상에 따라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최고의 명당에 자리 잡았으며 보통 장례기간은 3~5개월, 왕릉 조성에 6,000명 내지 9,000명이 동원된 거대한 국가적 토목공사였으며,
부패방지를 위해서 동빙고, 서빙고의 얼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4)왕릉은 비록 죽어 있는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무덤이지만 그 곳은 시공을 초월한 역사의 공간이요, 조상의 숨결이 살아 있는 소리 없는 현장으로써 오늘을 관통하는 생생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딱딱한 사실(史實)은 생략하고, 정사(正史)에 잘 나오지 않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재미 위주, 흥미 본위로 몇 가지 사실(事實)을 소개하겠습니다.
(5) 동구릉은 동쪽(구리)에 9개의 능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많은 능이 있는 만큼 단릉, 합장릉, 쌍릉, 삼연릉, 동원이강릉 등 모든 형태의 능을 한 번에 볼 수 있어 그야말로 왕릉전시장 같은 곳입니다. 9개의 능 중에는 태조 이성계(건원릉)의 능이 있는데 다른 능과 달리 유일하게 봉분이 억새풀로 덮여 있습니다. 이성계가 죽은 후 고향인 함흥에 묻히길 원해서 고향의 억새와 흙을 갖다가 봉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 소풍도 가고, 대학교 때 미팅도 여러 번 갔던 곳인데 전혀 몰랐던 사실입니다.
(6)서오릉은 물론 서쪽(고양)에 5개의 능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숙종의 가족묘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영조의 능은 이 곳에 없습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원치를 않았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게 한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반발로 서오릉과 반대편인
동구릉에 조성했기 때문이랍니다. 이 곳 후미진 곳에는 사극으로 영화로 잘 알려진 장희빈의 묘가 초라한 모습으로 있어 영화(榮華)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7)선릉은 도심 속의 왕릉으로 유일한 왕릉으로서 성종의 능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도굴 당해 시신이 불태워지고 처참하게 훼손된 굴욕적인 현장입니다. 선릉역으로 더 알려져 무심코 지나치기 쉬우나 강남 한복판, 고층 빌딩 숲속에 이런 슬픈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8)홍유릉(금곡)은 우리나라 최초의 황제인 고종과 명성황후(홍릉) 그리고 순종 과 황후(유릉)가 묻힌 곳입니다. 황제의 능인만큼 왕릉에 있는 양, 호랑이 등의 석물(石物) 외에 낙타, 코끼리 등의 다양한 석물이 있으며 제상(祭床)의 색깔이 다르나 오히려 왕릉보다 규모가 작고 초라하니 망국(亡國)의 비애를 아니 느낄 수 없습니다.
(9)영릉은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능입니다. 원래는 도곡동 헌인릉 근처에 있었다고 하는데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좋지 않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자 부왕(父王)의 묏자리가 좋지 않아 그렇다고 멀리 여주로 천묘(遷墓)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널찍한 터에 혼천의 등 당시 발명품을 전시하여 조선을 홍보하는 국민교육장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 아마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10)헌릉(내곡동)과 포은 정몽주의 묘(용인)를 하루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조선 개국 시
정적(政敵)이었던 두 사람, 한 사람은 왕이 되어 이성계의 건원릉과 함께 가장 큰 헌릉에서, 또 다른 사람은 역성혁명에 반대해 척살된 후 용인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은의 묘가 왕릉 수준으로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태종 이방원의 포용력과 개국 초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가 정치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2.박물관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면 기를 쓰고 외국의 박물관은 가면서도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 박물관은 홀대를 합니다. 잠깐만 눈을 돌리면 우리 주위에는 멋있는 박물관이 널려 있는데 그 귀함을 모르고 지나치는 게 안타깝습니다.
(1)국립중앙박물관은 두말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서 볼 것이 너무 많아 혼자 호젓이 시간을 내어 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만, 특히 보존과 관련하여 화제가 되었던 선사시대의 유물인 울산 반구대암각화의 고래, 개, 늑대, 호랑이, 사슴, 곰, 거북 등 생생한 동물 그림이 놀라웠습니다.
(2)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은 광화문 옛 경제기획원 자리에 있는데 역사란 먼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실감나게 하는 곳입니다. 여자 차장이 문에 매달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으로 승객을 밀어 넣는 만원 버스, 10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의 모습의 사진이 냉난방이 완비된 럭셔리한 요즘 시내버스와 신입생이 모자라 폐교된다는 요즘 초등학교 소식과 대비되어 격세지감을 갖게 합니다.
(3)이 외에도 지하철을 타면 금세 갈 수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역), 국립민속박물관(안국역), 허준박물관(가양역)이 지척에 있습니다.
3.기념관
(1)안중근의사 기념관은 남산에 있습니다. 과거 침략 전쟁을 부정하고 군사재무장을 하는
아베 정권의 일본 행태를 볼 때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죽인 15가지 이유가 새삼 재음미됩니다.
(2)독립기념관(천안)도 가까이 있는 현충사(아산)와 함께 반드시 가 봐야 할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방문객이 많이 줄어들어 걱정이라는 현지해설사의 말에 안타까웠습니다.
(3)전쟁기념관(용산)에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습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전쟁, 북의 남침으로 수많은 동족상잔과 이산가족의 비극을 초래한 6.25전쟁, 그러나 국제시장 같은 영화를 통해서나 단편적으로 기억되는 전쟁, 특히 젊은이에게 잊혀져가는 망각의 전쟁에 대한 기록이 예술, 문화, 노래 등 다양한 자료와 함께 그 당시 역사를 증언합니다.
4.고궁(古宮)
(1)덕수궁은 서울의 한복판 시청 옆에 있는 편리한 접근성에 비해 수난과 상처투성이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심한 것 같습니다. 당초 성종의 형님인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다 선조가 임진왜란 시 피난 갔다 온 후 임시궁으로 사용하였고, 그 후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아관파천했다 환궁한 후 경운궁으로 불리다 ,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으로 개명을 했는데 , 고종은 이 곳에서 양위를 강요당하고, 한 많은 여생을 보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2)창덕궁은 원래 태종이 이궁(離宮)으로 지었으나 세종을 빼고는 모든 임금이 정궁인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좋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태종이 함께 조성한 후원(금원이나 비원으로 불리기도 함)의 아름다움 때문인 것 같습니다.
후원(비원)은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자연과 조화를 잘 살려 조선을 대표하는 정원으로서 유명한데 특히 단풍진 가을날의 부용지와 부용정의 경치가 빼어났습니다. 그러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근대 거센 격랑 속에서 마지막 임금 순종이 이 곳 대조전에서 승하한 비운의 왕궁이기도 합니다.
5.미술관
(1)겸재 정선미술관(양천구)에서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실경산수화, 순전히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풍경를 그리는 관념산수화와 달리 보고 그리되 재해석해서 그리는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진수를 마음껏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2)DDP에 나들이 나온 간송미술관에서는 신윤복의 미인도, 김홍도의 마상청앵 등 많은 유명한 작품과 함께 세계기록문화유산인 훈민정음해례본을 볼 수가 있어 즐거웠습니다.
(3)근대 회화 100선(덕수궁)에서는 이중섭(소), 김기창(가을), 박수근(빨래터),변관식(외금강산선암추색), 천경자(내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 책에서만 보던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을 실물로 직접 보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6.1박2일 탐방 여행
탐방은 대부분 서울 및 인근 위주로 당일 코스입니다만 바람도 쐴 겸 1박2일로 지방 나들이도 하기도 했습니다.
(1)안동 하회마을, 병산서원, 영주 부석사, 소수서원
(2)의재 허백련 미술관 및 고택 춘설헌(광주 무등산), 식영정과 소쇄원(담양)
(3)고산 윤선도의 부용동, 세연정, 세연지, 동천석실(완도 보길도)
7.사족(蛇足), 부수 효과
(1)무엇보다 단체인 경우 예약을 하여 전문해설사의 상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어 모르고 지나쳤던 부분을 알게 되는 소소한 기쁨이 있습니다.
(2)탐방 후 간단한 반주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역사 논쟁을 벌이는 재미 도 쏠쏠합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못난 임금이 선조냐, 인조냐? 세조가 단종을 몰아 낸 것은 백성을 위해서는 오히려 잘 된 것 아니냐? 등등 끝이 없습니다.
(3)운동 효과도 큽니다. 왕릉을 오르내리고, 수원의 화성(華城)을 한 바퀴 돌 고 나면 거의 북한산 둘레길 수준입니다.
(4)맛집을 찾아가 입이 즐겁고, 지방을 갈 때엔 오랫동안 못 본 그 곳의 동창 을 만나 회포를 푸니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일거양득이 따로 없으니 불역열호(不亦說乎)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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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소생이 다니고 있는 학교의 1학기 중간시험 대신에 제출한 취미활동에 대한 과제물입니다. 박 회장님의 사전승인도 안 받고 표절과 무단 전재를 해서 이 자리를 빌어 사후 승인과 함께 용서를 구합니다. 사실은 더 썰을 풀고 싶었으나 A4 5장으로 제한이 되어 그야말로 주마간산이 되어 약간은 아쉽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지나간 탐방의 발자취를 뒤돌아 볼 수 있어서 과제물 작성이 의무적인 고역이 아니고 즐거운 추억여행이 되었습니다.
문화 <탐방>을 전체적으로 조명한 글은 처음인 듯합니다.
이 글을 읽다 보니 괜시리 뿌듯한 기분이 드네요.
숙제로 낸 글로는 아까운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합니다.
우리 역사문화 탐방에 고정 칼럼을 써 주심이 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