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님은 지운에게 등을 떠밀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원목이 가진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질박하나 기품있게 꾸민 실내가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희남과 장수진이 창가의 테이블을 잡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좋겠지?”
희남이 창밖을 눈으로 가리키며 지운에게 물었다.
산위에 감로천이나 계곡수가 있는 모양이다.
통나무 껍질을 이어 댄 도수로로 물이 흐르고 그 물이 물레만한 크기의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었다.
작은 물줄기가 뒷뜰을 밝히고 있는 가스등 모양의 외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아주 시원해 보이는데요.”
장수진이 지운을 향해 공치사를 했다.
희남이 장수진과 나란히 앉고 마주보고 지운과 어님이 앉았다.
장수진은 극장에서 만난 이후 처음 마주보고 앉은 탓인지
새삼스럽게 어님의 행색을 힐끔힐끔 뜯어보고 있었다.
도시풍으로 세련된 지운에겐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고 속으로 경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님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어님은 자신이 이런 곳에 들어오기에는
너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장수진의 깔끔한 옷차림과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그런 내색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흰 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맨 사내가 와서 정중하게 머리를 숙인 후 주문을 받았다.
“형, 뭐든 먹고 싶은대로 시켜. 그리고….”
하고는, 지운이 장수진을 쳐다보았다.
“스테이크 먹자며?”
희남이 물었다.
“스테이크도 좋고 스트라이크도 좋고….”
장수진이 기품있게 웃고 자기는 스테이크로 하겠다고 말하자
희남도 그걸로 하되 중간 정도로 구워 달라고 했다.
지운이 이번에는 어님을 돌아보았다.
“같은 걸로 할래?”
어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터가 주문 받은 것을 적고 다시 확인한 후 돌아가려 하자
지운이 맥주네 병을 더 시켰다.
“차 가져 왔는데 네 병씩이나 시켜 어쩔려구?”
희남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두당 한 병이면 네 병은 있어야 공평한데 뭘 그래, 형?”
“한 병씩 마시면 운전은 누가 하니?”
“걱정 마, 운전 기사는 여기 있으니까.”
“마시고 운전하겠다는 거냐?”
“형이 언제부터 이랬나. 맥주 한 병에 나, 운전 못할 사람 아냐.”
“못 한다는 게 아니라 음주 운전에 걸린단 얘기야. 너 면허 있어?”
“아니.”
“거 보라구. 그럼 무면허에 음주 운전에….”
“야아, 오늘 밤 보니까 희남 형 변했네. 꼭 모범생 같애. 그렇지요?”
지운의 질문을 받고 장수진은 가볍게 웃고는 대답했다.
“그렇지도 않아요.”
“그럼 희남 형도 탈선해요?”
“탈선이라면 어떤 의미의 탈선을 말하나요?”
“나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그래요? 하지만 난 그게 어떤 경우인지 모르겠는데요.”
“뭐, 한눈 팔고, 딴짓 하고…그런 거 있잖습니까.”
“임마, 난 너처럼 한 눈 안 팔아.”
희남이 지운의 말을 가로막자 장수진은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이번엔 무슨 대답이라도 기대하는 얼굴로 어님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님은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런데 이때 출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지운이 무슨 일인지 갑자기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 그러냐?”
희남이 물었다.
“우리집 대장이 오셨어.”
어님은 고개를 들어 출구를 보았다.
풍채가 좋은 노신사가 젊은 여자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지운의 아버지 도유만은 사업체 몇 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도급 순위를 꼽을만한 건설회사도 있었고,
레저나 흥행 쪽에 투자를 한 것도 있었다.
이태 전까지만 해도 의원 배지를 달던 신분이라 정치적 배경도 있었다.
지난 선거 때는 정치 초년생과 맞붙어 낙선하는 바람에 좀 체면이 깎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회장님 보다는 의원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더 많다.
그 풍채나 재력으로 봐서는 연예계의 반반한
얼굴 하나 쯤은 꿰찰만한데 얼마전 상처를 한 후론 혼자다.
그러니 젊은 여자를 데리고 레스토랑 출입을 한다 해도 실상 흉이 될 일은 없다.
그러나 정작 지운의 경우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는 모양이다.
지운은 불쾌한 얼굴로 도유만과 함께 들어오는 여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웨이터가 두 사람을 조용한 2층으로 안내했다.
도유만은 지운을 보지 못 했는지,
보고도 짐짓 못 본 척 하고 그러는지 그대로 2층으로 오르는 나무 층계를 올라갔다.
도유만의 뒤를 따라 여자의 모습이 2층으로 사라지자
희남이 뭐가 이상한 지 입술을 씨물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형?”
“뭐를?”
“지금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내가?”
“혼자 중얼댔잖아. 지금 그 여자 알어?”
“알긴! 내가 전직 의원님을 상대하는 여자를 어떻게 알겠느냐!”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
희남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인데 지운의 처지를 생각해 감추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일부러 말머리를 장수진에게 돌리고 있는 것 부터가 그랬다.
“넌 알어, 지운이 아버지와 함께 온 여자?”
“글쎄… 텔레비에서 본 것 같은데….”
“텔레비요? 그럼 아나운선가요?”
지운이 물었다.
“아, 아녜요. 강사로 나왔던 것 같아요.”
“강사요? 텔레비에 나와 강의를 했단 얘긴가요?”
“내 기억으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럼 대학에 있나요?”
마침 이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기 때문에 장수진은 일부러
지운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운은 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함께 다닌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지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만도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지 아직 반년이 채 못 된다.
그 슬픔도 슬픔이지만 지운에게 어머니의 죽음이 한처럼 가슴에 맺혀 있는 것은
그 죽음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운은 어머니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바로 지난해 가을의 일이다.
평소 서로가 소 닭 보듯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날은 무슨 일인지 함께
일요일 산행을 한다고 떠났다.
수능을 코앞에 두고 있던 때라 지운은 정신이 없었지만 가정부의 말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두 분이 모처럼 화해를 한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그날 오후 늦게 도서관에서였다.
잠시 코피 한 잔을 빼 마시려고 열람실에서 나와 자판기 있는 데로 걸어가며
여자친구 지나에게 전화를 하려고 휴대 전화를 꺼내 드는데 삐리릭 전화가 울렸다.
대학 병원 응급실이라고 했다.
아버지 회사의 민비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중태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단숨에 달려 갔으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지운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등산복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마치 남의 말 하듯이 지운에게 한 마디 했다.
“실족 사고였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후에도 지운은 책을 들 수가 없었다. 학교도 며칠을 빼 먹고 방안에 처박힌채 귀청이 찢어지게 오디오 볼륨을 높여 놓고 꼼짝을 하지 않았다. 가정부가 달려 들어와 소리 좀 줄이라고 타일렀지만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더욱 소리를 높였다. 도유만은 그럴 때면, “수능은 안 볼 거냐?” 하고 지운의 방으로 들어와 음악 소리를 줄이거나 아주 꺼 버리고 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기만 한 아버지를 지운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로 남남처럼 살아온 부부라 해도 한 사람이 이승을 하직하고 없으면 가슴 한 구석이 빈듯해서 견디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도유만에게는 그런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보다 편안해 하는 것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에서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동안 아버지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딴 생각을 해온 것이 아닐까. 딴 생각을…. 아버지는 어찌 된 일인지 어머니의 실족 사고에 대해 그 경위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지운이 거기 대해 물을라치면, “네 기분은 이해한다만, 네 어머니 얘기는 더 않는 것이 슬픔을 잊는데 도움이 될 게다.” 하고는 말을 끊어 버렸다. 지운도 수능에 실패한 후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록 어머니의 죽음을 사고로 돌리고 자신은 거기에서 한 발 물러나 있으려고 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부자연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지운은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화난 사람처럼 달가닥거리며 잘랐다. 희남이 그런 눈치를 알고 한 마디 했다. “기분 나쁘니?” “뭐가?” “너희 대장과 그 여자… 껀.” “껀이라니? 너무 비약하지 마.” “알았다, 말 조심하지.” 지운은 미운 사람 손가락이라도 깨물듯이 크게 자른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힘을 주어 씹었다 “무슨 스테이크가 이렇게 질겨? 수그레 같군.” “괜찮은데. 너 정말 언짢은 모양이구나.” “좋을 거야 없지. 오늘 일진도 그렇고.” “일진? 오늘 너 무슨 날이라도 되는 거냐?” 희남이 포크에 고기 조각을 찍어 들고 물었다. “사실은, 귀 빠진 날인데….” “어머, 그럼 축하해야 겠네요.” 장수진이 지운에게 맥주를 부어 주며 끼어들었다. “어째 극장에서부터 오늘은 좀 이상하다 했더니 그랬었구나. 해피 버스데이는 부를 수 없고, 건배나 하자!” 희남이 잔을 들었다. 지운이 권했기 때문에 어님은 거품이 차 오른 맥주잔을 손에 쥐었다. “축하! 올해는 붙어라!” “그럼 붙어야지!” 잔을 부딪치고 모두가 주욱 들었다. “넌 왜 구경만 하고 있어?” 지운이 어님을 독촉했다. 맥주 한 잔… 마실 수는 있다. 섬에서도 한 두번 마셔본 일이 있다. 그렇지만 레스토랑 안에 있는 손님들이 보면 욕할 게다. 어님은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손님들이 보지 않는 사이 서둘러 한 잔을 다 마셔 버렸다. 세 사람이 모두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누가 볼까봐 그랬어.” 지운에게 말했다. 지운이 웃었다. “참, 너 귀여운데가 있다, 당돌하고….” “미안해.” “미안해? 천만에. 대타 치고는 괜찮은데 뭘. 근데 넌 나하고 벌써 몇 시간째 함껜데 왜 이름도 안 대니?” “어님…촌스러워. 촌뜨기이긴 하지만….” 지운은 어님을 돌아보고 싱긋 웃었다. “난 말야, 네가 시골뜨기라고 안 해도 다 알아. 근데 놀랐다. 너, 멋 있는 데가 있더라구, 지나 그 기집애보다.” 지나가 누군가. 바람 맞혔다는 그 앤가. 이런 땐 돌아보고 함께 웃어 주는 것이 예의가 될지 모른다. 어님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참, 귀빠진 날에 왜 지나가 빠졌니?” 희남이 어님의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걘 그런 애야. 지 콧대 세우는덴 뭐 있지. 그렇지만 형, 내가 그런 공주병 환자 위해 있는 건 아니잖아.” “알겠다.” 희남은 식사를 끝내고 입을 닦았다. “그래서 말인데, 지나 같은 인조 미인은 라이브용으론 쓸모가 없다구. 거기 비하면, 얠 봐. 이 앤 진짜야, 꾸민데도 없구, 칼 댄데도 없구, 체 하는데도 없구… 피부가 좀 거슬하지만.” 맥주를 주욱 비우고는 지운은 입술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닦고,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말머리를 도유만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간 그 젊은 여자 얘기로 돌렸다. “그 얘기 좀 특강 안 되겠어요?” 장수진에게 청했다. “뭘 알고 싶은데요?” “알고 있는 대로 전부….” 장수진은 옆에 앉아 있는 희남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는 난처한듯 웃었다. “알고 있는 전부가 그거예요. 테레비에 나왔다는 거.” “그 여자 테레비 강의를 보셨나요?” “잠깐 봤어요. 목소리가 안정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무슨 강의를 했나요?” “클리닉에 대해.” “클리닉이면 뭐에 대한 클리닉을….” “부부생활에 관한 걸로 기억되는데요.” 장수진은 희남을 쳐다보았다. 희남이 말을 잘랐다. “그 여자 부부문제 전문가라고 보면 돼. 됐니?” “전문가라? 그럼 홀로 되신 우리 대장께선 용무가 없을 텐데….” “임마, 그런 건 따지는 게 아냐. 부자지간이라도 사생활엔 선이 있는 거야. 넌 모른 체 해.” “모른 체 하라구? 형, 그거 형 생각이야, 아니면 무슨 교과서에 나온 얘기야?” 지운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희남의 충고에 화가 난 모양이다. “내 생각도 아니고 교과서에 나온 얘기도 아니다. 일반론이지. 화내지 마.” 지운은 맥주병을 가져다 자작으로 벌컥벌컥 들이키고 희남을 노려봤다. “유감이 많아. 형하고 나하곤 말야, 지금까지 이렇게 의견 차이를 보인 일이 없었지.” “지운아, 너 왜 이래? 왜 별안간 성질을 내?” “성질 안 나게 됐어? 희남형, 내가 누군지 알지? 난 도유만 회장의 아들이야. 그 아들이, 아버지가 텔레비에까지 나왔다는 젊으나 젊은 섹스 전문가와 데이트를 해도 모른 체 하란 얘기야?” “섹스 전문가란 당치 않아.” “부부 문제 전문가라며? “그게 어디 성문제 전문가란 얘기냐! 비약하지 마.” 지운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홀안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지운에게로 돌아왔다. “앉으세요. 누가 보면 싸우는 줄 알겠어요.” 장수진이 지운을 달랬다. 지운은 도로 앉았으나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장수진이 말을 이었다. “내가 텔레비에서 잘못 봤을 수도 있어요. 다른 여자일 수도 있잖아요.” “다른 여자래도 결과는 마찬가집니다. 내가 화를 내는 건 그 여자의 직업 때문이 아닙니다. 그 여자가 아버지의 밀회 상대라는 점이지요.” “네 기분 알겠다. 미안하다. 오늘 일은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고 가자.” 희남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네 사람은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지운과 희남이 언쟁을 한 뒤라 분위기는 어색했지만 지운이 차를 갖다 대자 희남이 입을 열었다. “운전 내가 할까?” “왜 사고 칠까 봐?” “짜식! 화 안 풀렸네.” 오던 때처럼 희남이 장수진과 나란히 뒷좌석으로 오르자 소나무향이 더욱 짙게 배어나는 산도를 차는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어님은 볼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좁은 차속에 앉아 있으려니까 술기운이 올라왔던 것이다. 지운이 차창을 조금 열어 주었다. 어님은 심호흡을 했다. 시원한 밤 바람이 폐부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기분이 상쾌해져 지운에게 뭐라고 말을 붙여 보고 싶은데 지운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종 입을 다물고 있던 희남이 차가 시내로 들어서자 지운에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 극장 앞에 내려 주라.” “극장 앞엔 왜?” “오피스에 들려 가려구.” 극장에서 머지 않은 거리에 희남이 드나드는 오피스텔이 있다. 희남은 늘 오피스에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빌딩 18층에 있는 비밀 스튜디오가 희남이 들르는 곳이었다. 희남은 자신이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한 적이 없다. 지운도 굳이 캐물은 일이 없지만 지운이 카메라를 다루기 때문에 대충 하는 일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지운은 극장 앞에다 차를 세웠다. 희남이 장수진과 내리면서 지운에게 말했다. “오늘 미안하다. 하필이면 네 귀빠진 날인데…. 전화해라. 그리고 어님씨, 이왕 대타로 나섰으니 끝까지 동행하세요. 저 녀석 오늘은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장수진이 지운과 어님에게 차례로 목례를 보내고 희남의 팔을 끼며 때마침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를 빠른 걸음으로 건너갔다. 어님은 공연히 두 사람이 부러워 그들이 맞은편 보도에서 네온불이 번쩍이는 뒷거리로 빠져나가는 것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지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손을 핸들 위에 얹은채로 앞만 보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님은 지운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지운의 차에서 내리려면 여기서나 내려야 그나마 버스 타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데 그때 뒤에서 시내 버스가 다가오며 연해 비켜달라고 경적을 울렸다. 차를 대놓은 곳이 바로 정류장 앞이었던 모양이다. 지운은 반사적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고가 도로로 오르면서 지운은 생각난듯 물었다. “숙소는 정했니?” “아직….” “시골에선 언제 왔는데?” “어제.” “그럼 어제밤엔 여관에서 잔 거야?” “아니, 택시 운전하는 오빠한테서.” “여기에 오빠가 있어?” “그런 게 아니고, 어제 만난 오빤데 친절하게 해줘서….” 지운이 이상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엉뚱한 상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 일 없었어.” “뭐라구?” 지운이 핸들을 꺾으면서 약간 소리를 높여 물었다. “아무 일 없었다니까!” “그래? 내가 언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니. 한데 너, 보기보단 대담하구나.” “뭐가 대담해?” “첨 만난 오빠를 따라가 잤다면서?” “할 수 없었어. 갈데도 없고, 지리도 모르고, 여관 갈 처지도 못 되고, 밤은 깊어가고….” 지운은 별안간 유쾌한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왜 웃어?” “너 신파굿 하는 것 같다.” “놀리지 마, 난 심각했으니까.” “알았다. 그럼 오늘밤은 어떡할래?” 지운이 교차로에서 차를 세우며 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