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3년 3월 29일(수) 10:00 날씨 맑음, 5~19도
★집합장소: 수인분당선 매교역 5번출구
★코스: 세천교 – 남수문- 화홍문(북수문)-동북각루(방화수류정) –용연 장안문 – 화서문- 화성장대(서장대) - 효원의 종- 서남각루- 팔달문 – 지동시장 (시장순대곱창타운, 늦점) - 행궁 - 간식
★참석자(9명): 운암 김종철, 묵거 박평순, 석계 송명수, 청안 양완식, 송원 장용관, 양우 정상범, 백사조운제, 박여사, 후묵 채희묵
상보****
우리는 화성 북수문 도로로 빠져나왔다. 박여사는 먼저 화성의 최고 경승지인 용연을 내려다볼수 있는 동북각루로 안내한다. 용두(龍頭)암위에 설치한 군사시설이라기에는 너무 멋진 정자다.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만들어 사방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옆, 위아래에서 유심히 보아야 정확한 모습을 그릴수 있다.
금방이라도 처마가 물찬 제비처럼 하늘로 달아날 듯 하다. ’보수예정‘이라며 ’올라가지마세요‘라고 안내판도 있고, 금줄(?)도 있고, CCTV까지 동원해놓았다. 정자에 올라가 그 멋진 용연을 보아야하는데...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란 멋진 별명은 송나라 명도(明道) 정호(程顥, 1032~1085)의 7언절구 시중"운담풍경근오천 방화수류과전천"(雲淡風輕近午天 訪花隨柳過前川, 구름 걷히고 바람 잦아진 중천으로 가는 하늘, 꽃 찾아 나서 버드나무 따라 개울가를 지나네)에서 따온 거란다.
정조는 또한 이 정자에서 용연을 내려다보며 ’화산(花山)과 수원 읍치(邑治)를 옮긴 땅 유천(柳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고 전한다. 용연과 천변의 연녹색 버드나무가 유달리 보이는 이유다.
초병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두었는데 방화수류정에는 임금을 위해 2층에도 두어 창문까지 달아놓았다고 한다. 화성 완성 이듬해인 1797년(정조 21년) 정월, 정조는 이곳 행궁에 와 연무대에서 활을 쏘고 이 정자 창에 기대어 용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시를 짓기도 했다.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이 해서체로 써 1930년대의 사진에서도 볼 수있었는데 현재의 현판은 서예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1909~2000)의 작품이다.
박여사는 북암문을 빠져나가 동북포루(東北鋪樓)가 높게 보이는 성곽 가파른 경사지 소나무 아래로 안내한다. 용연은 3월13일부터 5월25일까지 보수정비공사가 있어 출입을 금한다는 플래카드와 금줄(?)이 쳐져있다. 버드나무와 소나무가 물과 어울어져 일품이다.
우리는 소나무 아래 둘러앉았다. 박여사께서 미나리전을 풀어놓는다. 미나리로 전을 부치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미나리가 살아 일어날 것같이 생기가 실감난다. 필자는 타올 두장으로 싸온 순대와 국산쌀로 빚은 백색 뚜껑의 서울막걸리 한병을 꺼내놓았다. 온기가 그대로 있다. 다들 맛있어한다. 막걸 리가 모자란다는 얘기도 튀쳐나온다. 11:44
성밖에서 방화수류정을 머릿속에 입체적으로 담기 위해 눈을 맞추고 또 맞췄다. 팔작지붕의 짧은 용마루가 동쪽, 남쪽 팔작지붕 사이에 하나가 더 있어 복잡하다. 한국정자의 백미임에 틀림없다.
다시 성곽안으로 들어와 정자에 올라가 용연을 내려다보았다. 성곽을 축조하기 위해 수원천 개천 옆 흙을 파서 올리고 만든 연못이다. 수련만 일부 수면을 덮고 있다. 백운산, 광교산, 형제봉이 마루금으로 북쪽하늘을 맞닿아있다.
화홍문으로 향했다. 몇천이라도 버텨낸 듯 모습이 닳은 석수가 대위에서 화홍문을 지켜보고 있다. 이무기란다. 마루가 반들반들하다. 신발을 벗고 쉬었다 가도록 되어있다. 너무도 시민친화적이다. 누대길로 학생들도 지나다닌다. 남쪽으로는 우리가 걸어온 개천이 보인다. 우리일행도 신발을 벗고 마루를 밟아본다. 옛 건축물중 이렇게 마루가 반들반들학 건물 처음봤다.
동북포루가 나온다. 그곳에서 방화수류정과 다시 한번 눈을 맞춘다. 북쪽으로 수원천은 우측으로 꼬부라진다.
평탄한 성곽이다. 동북포루(砲樓). 화성에는 성벽을 따라 군시설이 많아 그게 그것처럼 느껴져 혼란스럽다.
동쪽 평지, 서쪽은 팔달산(145m)으로 되어있는 평산성(平山城)의 형태에 둘레가 총 5.7km인 성곽으로 49기의 군사시설이 있다. 동서남북 문루 4기, 수문(화홍문과 남수문) 2기, 텅빈 망루인 공심돈 3기, 지휘소인 장대(화성장대, 동장대) 2기, 신기전이라는 화기로 대량 화살을 쏘는 서노대(弩臺)와 북동노대등 2기, 병사들이 쉬는 포루(鋪樓) 5기, 홍이포, 불랑기 등 포가 설치된 포루(砲樓) 5기, 조망이 좋은 코너에 서있는 각루(角樓) 4기, 적의 눈에 띄지않게 성을 드나들 수 있는 암문(暗門) 5기, 봉수대 겸 망루인 봉돈(烽墩) 1기, 북문과 남문 양쪽에서 대문에 적의 접근을 감시하는 적대(敵臺) 4기, 직선으로 된 성에 돌출된 치성(雉城) 10기, 땅속 하수구인 은구(隱溝) 2곳.
포루(砲樓)와 포루(鋪樓)가 각각 5기가 있다. 5기의 포루(砲樓) 이름은 북동, 북서, 북, 남포루다. 사거리가 700m인 홍이포, 어깨에 메고다니는 소형포인 불랑기등을 배치하고 있다.
5기의 포루(鋪樓)는 동일, 동이, 동북, 북, 서로 보초서는 포루(鋪樓)다. 남한산성의 군포(초소)와 유사하다. 남한산성은 군포가 치성이 아닌 성 안쪽에 있었다.
정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에는 남북을 잇는 가장 중요한 대로의 문이라서 양쪽 어깨에 적대(敵臺)를 치성에 만들어 대문으로의 적의 접근을 감시하고 있다.
장안문은 북문이면서 왕이 한양에서 오는 최단 거리라서 정문으로 했다. 장안이라는 말은 중국 전한(前漢) 등 13개 왕조의 수도. 지금도 산시성(陝西省)의 수도로 시안시(西安市)의 인구는 800만명.
수원천과 나란히 북에서 남으로 달린다. 한반도 국토 종단 1번도로다.
서문인 화서문(華西門)을 지나면 팔달산 능선을 타고 기어올라간다. 서문 직전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이 있다. 동북공심돈이 둥글다면 이곳은 각이 져있다. 2층 누각마루로 올라가보았다. 걸어온 동쪽 평지성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망루자리로 제격이다. 해가 나니 좀 덥다. 청안, 운암, 박여사의 인증샷 한 컷.
노란 개나리와 하안 벚꽃이 꽃대궐이다. 진달래도 산속에서 나타난다. 서일치, 서포루(砲樓), 서이치, 그 다음이 화성장대다. 장수가 지휘하는곳. 정조가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7일까지 8일간의 모친 혜경궁 홍씨 환갑잔치를 위해 행차하여 하루는 이곳에 올라와 친위부대 장용영(오스만터키의 예니체리와 같은 정예군대) 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곳.
정조는 참관후 화성과 장용영 군사들의 위용에 만족감을 표현한 시를 지었는데 서장대 벽에 현판을 만들어 걸어놓았다. 서장대는 수원화성에서 유일하게 어제(御製, 왕이 지은 글), 어필(御筆, 왕이 쓴 글씨) 현판이 함께 게시된 건축물로 수원화성에서 가장 격이 높다. 2020년 3월 복원해 '서장대에 게시한 것. 화성에서 <화성장대(華城將臺)> 현판도 정조의 어필. 원문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5언절구 두수로 연이어 되어있다.
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칸, 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급격하게 좁아진 형태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성조(城操, 성안에서 하는 군사훈련)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서쪽으로 전돌로 쌓아올린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쇠로 된 발사 장치가 달린 활로 여러 개의 화살을 연달아 쏘게 되어 있는 기계식 활 발사대다. 동문 창룡문(蒼龍門)과 동북공심돈 사이에도 노대 하나가 또 있다. 동북노대. 소나무 두그루도 멋지고 수원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례시로 승격된 수원의 인구는 2월말 현재 122만7천명으로 울산광역시(1월 말 현재 인구 110만명)를 앞지르고 있다.
화성장대친열성조유시제우미상(華城將臺親閱城操有詩題于楣上) : 화성장대에서 친히 성내 군사훈련을 보고 시를 지어 처마 위에 쓰다.
공호사위중(拱護斯爲重) : 현륭원 호위 중요하지만,
경영불비노(經營不費勞) : 재정은 절약했고 백성 노역 지불했네.
성종평지형(城從平地迥) : 성(城)은 평지를 따라 둘렀고,
대의원천고(臺倚遠天高) : 장대는 먼 하늘 기대 높이 솟았네.
만타규모장(萬垛䂓模壯) : 수많은 성가퀴 규모 장대하고,
삼군의기호(三軍意氣豪) : 삼군의 의기가 호쾌하네.
대풍가일주(大風歌一奏) : 한고조[유방]의 대풍가 한곡 연주하니,
홍일재린포(紅日在鱗袍) : 새벽 붉은 해 비늘 갑옷 비추네.
신발벗고 서장대 마루에 올라 앉아 간식을 먹었다. 역시 맛있다. 운암의 고구마, 송원의 콜라비와 오이, 묵거의 옥수수호떡빵... 단체 인증샷도 한컷.
서암문을 지나니 절도 아니고 보신각도 아닌데 큰 종이 종각안에 들어있다. ‘효원의 종’이란다. 정조의 효심이 반영된 종이다. 송원이 이쁜 딸 이름이라며 돈을 내고 3번 타종권을 받는다. 양우와 힘껏 친다. 필자는 시잔으로 담았다. 잘 안나왔지만 보내주었다.
서포루를 지나 서암문이 나온다. 밖으로 나가니 툭 터져있다. 서장대안내소와 화장실이 있다. 잠깐 들른다. 팔달공원이란다.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그다음 나오는게 팔달산 서남쪽 하이라이트인 서남암문과 화양루(華陽樓)라는 아름다운 별명을 가진 서남각루다. 암문하면 지하로 잘 안보이는곳에 나 있는데 서남암문은 지상에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누각까지 있다. 누가 암문이라고 하겠는가? 얘기안해주면 모르고 지날 수 있다. 문을 통해 나가지 남한산성 연주봉옹성같이 옹성 통로같다. 용도(甬道, 골목길)라고 쓰여있다. 양옆으로 조금 튀어나온 것을 치(雉)라고 설명해놓았다. 용도서치와 용도 동치. 용도 끝에 자리잡고 있는게 화양루. 서남쪽 높은 곳이라 전략상 각루를 하나 만들어놓은 것 같다.
성가퀴 너머로 밖을 내다보니 바위들이 많다. 박여사는 여기서 돌을 가져다 화성을 성곽 조성에 쓰였단다.
다시 들어오니 서삼치가 있으나 눈길은 주는 보우는 없다. 3.1독립운동기념탑과 대한독립기념탑이 안쪽으로 숨어있다.
이제는 급경사 계단이다. 남포루(南砲樓)와 남치가 있고 다 내려서니 남문 팔달문이 도로끝으로 위용을 나타낸다. 옹성이 달린 팔달문(八達門) 양쪽으로 성곽이 끊어져 섬으로 되어있다. 양쪽 적대와 남암문등이 없어졌다.
지동시장의 순대집으로 들어가 순대국밥에 막걸리로 배와 기분을 채웠다.
행궁편은 시간이 되면 만들어보겠습니다.
첫댓글 후묵의 화성해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