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교재
<은혜로다>
사람들은 곧잘 말합니다. “아,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끄셨습니다. 은혜로 되야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성경에도 있는 이 말들이 왜 이렇게 걸림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제대로 된 복음을 듣고 나니 이 말들이 자꾸 거슬립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찾을 수가 없어서 [은혜]라는 말이 들어간 구절들을 성경에서 뽑아보았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카리스라고 하는데, 이 말에서 나온 것이 카리스마로 은사라는 뜻입니다. 카리스는 우아하다, 매력적이다, 은총, 총애라는 뜻도 있지만, 끄는 힘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덕택에, 선의로 이런 뜻 또한 있습니다.
창세기 6장 8절에 처음 은혜라는 말이 나오는데,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은 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사람의 악함이 가득하여 심판이 있었습니다. 이 때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근심하시며 지면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때에 노아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으로 끝날 때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시는데 우리가 보탠 것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지요. 그야말로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그 때 “은혜다”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도착하여 삶을 돌아보았을 때 “내가 걸어 온 새까만 악의 길에서 죽지 않고 천국에 도착한 것이 은혜로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은혜가 은혜 되었도다!” 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구절에서도 은혜가 입혀졌을 때 노아만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창세기 19:19]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이것은 롯의 이야기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이 쏟아져서 살아남을 사람이 없는 이 심판의 순간에 롯은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은혜를 입은 롯의 가족만이 심판에서 생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롯과 그의 모든 가족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결과에 이르기 전에 뒤를 돌아본 그의 부인은 소금기둥이 되고, 농담으로 여겨 귀 기울이지 않던 그의 사위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롯과 그의 두 딸이 천사들의 말을 지켜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은 그 순간이 그들에게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은혜는 그냥 있는 것도, 날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노아와 롯이 순종하고 구원에 이르렀을 때에 바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무조건 은혜만 바라는 것이 맞습니까?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우리의 왕은 사망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하는 죽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어야 될 우리가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망에 끌려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십자가의 공로에 보탠 것 하나 없이 거저 얻은 것입니다. 그것이 틀림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자신이 “영생을 얻었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살아난 것은 맞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사망에서 건져진 순간 삶이 끝나고 천국으로 옮겨졌다면 은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십자가에서 예수의 피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피로 깨끗하게 죄 씻음도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어 죽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뿐이기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며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이 땅에서 삶을 계속하기 때문에 받은 은혜를 지켜야 합니다. 깨끗하게 되어 받게 된 생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받은 은혜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 [천국에 도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로 우리가 영생을 받았는데, 이 영생을 지켜 정말 하늘에 도착하여야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도착했을 때 은혜라 이야기해야 합니다. 함부로 은혜를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이것을 받아 도착하여 보니 진정 은혜로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유튜브에 초등학생들이 줄다리기 시합을 하는 영상이 있습니다.(세계를 동기부여한 초등학교 줄다리기 시합 영상 - YouTube) 가운데 붉게 그어진 선이 있고 한편의 모든 선수가 그 선으로 다 끌려 들어가면 경기는 종료되는 규칙이었습니다. 청팀과 홍팀이 경기를 하는데 홍팀이 매우 불리해 보였습니다. 같은 편의 선수가 마지막의 한 아이를 빼고는 다 선 안으로 끌려 들어간 상황이었는데, 마지막에 서있던 한명의 아이는 맞은편에서 당기는 힘에 의해 바닥에 구르면서도 선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버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표정은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마치 생명이 걸린 사투를 벌이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바닥의 붉은 선을 기준으로 저쪽이 사망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선을 넘어가면 은혜는 은혜 되지 못하게 됩니다. 아이가 줄을 당기는 모습은, 마치 생명줄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사망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하여 생명줄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하는 모습도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은혜로 주어진 생명줄이 하늘에 도착할 때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상에서 홍팀은 끌려가고 당겨오고 하는 고비들을 넘기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로 이긴 것 같으나 넘어지고 하는 과정들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혜가 하늘에 도착할 때 까지 지켜야 하는, 십자가에서 내려주신 생명줄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잡아끌고 가려는 사단과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 생명줄을 붙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상의 마지막에서 결국 홍팀이 승리를 차지하는데, 우리의 삶도 그 끝에서 생명줄을 유지한 자에게만 은혜가 은혜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한 우리들이 은혜로 십자가를 져주신 덕분에 생명줄을 잡았는데, 하늘에 도착 할 때 까지 우리 안에 저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입술로 시인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새번역, 로마서 6:11-14]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은혜로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의지도 없이 그저 되게 해 달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자신의 육을 이리저리 죄에 내 맡기는 순간 사망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아까의 줄다리기에서도 가운데 선을 잠깐만 넘어가면 죽는 것입니다. 넘어갔다 와서 계속 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넘어가는 순간 경기는 끝납니다. 그런데 은혜의 생명이 달린 경기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세상에서는 그냥 믿기만 하면, 교회만 나가면 복 받는 다는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고, 교회는 사단의 소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답게, 지옥에서 살아 나온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의의 연장으로 바쳐야 합니다. 율법이 아닌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은혜로 우리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죄는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내어주지 마십시오.
[새번역, 고린도전서 5:15-20]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받아, 머리이신 그분에게 붙어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리스도로부터 떼어져 나가 창녀의 지체로 살아가려 합니까? 이 땅은 대충 살면 안 됩니다. 명심하면서 하나님이 이루신 십자가 안에서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과 합하여 생명이신 그분과 한 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창녀, 즉 세상에 들락거리면서 어떻게 참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의 음행은 남녀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이 안에 세상 것을 흠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성전이 깨끗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야 마땅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의 생명을 대신 값으로 치루고 사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킹제임스 흠정역, 히브리서 13:4-6] 결혼은 모든 것 가운데 존귀한 것이요 잠자리는 더럽히지 말아야 하거니와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 너희의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하노라.
탐욕스럽게 이 땅의 소유를 원하지 마십시오. 땅의 것을 놓는 만큼 하늘에 쌓여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를 놓으면 만개가 하늘에 쌓입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이 땅에서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해주세요.” 하고 말하는데, 실상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너는 더러우니 버리겠다.” 하실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몇 번이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한없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 때문이 아닌 내 안의 죄악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 용서해 달라며 울고불고 하지 않아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면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상하게 굳어진 습관 때문에, 용서받기 위해 교회에 가서 울며 소리치는 의식을 치러야 회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죄 속에서 그대로 살아갑니다.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의 조명에 의해 알게 됩니다. 그럼 그것을 버리고, 반복하지 않으려고 명심하고 의지를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 죄 된 습성을 버리기 위해 싸우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이 순간 돌이키면 되는 것이고, 그 부분에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냥 하나님만 믿으면 은혜로, 저절로 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그 앞에 가기에 합당하지 않은 더러운 것들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면 우리 안의 악습과 버려지지 않는 모든 악한 것들을 다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십자가가 무엇인지, 생명을 값없이 받았다는 것을 진짜로 알았다면 그 이상의 탐심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주신 생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새번역, 고린도후서 5: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이유는 사람들이 땅의 삶과 원하는 것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 분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하여 살면 안 됩니다. 그 분을 위한 삶으로 살아져야만 생명에 이르는, 즉 은혜에 이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새번역, 갈라디아서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육은 죽을지 몰라도, 그 안에 참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십자가에 사망을 못 박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그 믿음 덕분에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새번역, 요한복음 10:26-29]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양, 즉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영원한 생명인 것처럼, 지옥은 사망입니다.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양이 되었을 때,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그것들을 빼앗지 못하고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있던 에덴은 은혜의 동산이라고 말합니다. 죽지 않는 생명으로 하나님과 함께 그분이 공급하시는 것으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동산이 절대 사단이 범할 수 없는 곳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영적 세계에 선과 악이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이 가능했던 그 은혜의 공간에도 사단이 존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택한것(잡은것)은 인간입니다.
또한 우리들도 선과 악을 분명히 알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주셔서 생명을 허락하시고,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모두 생명을 빼앗기 위해 유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은혜의 동산에서 유혹에 성공한 사단이 지금은 온통 차지한 사단의 소굴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이 땅에서 그저 은혜를 핑계로 거저먹으려고 하면 사단은 옳다구나 하며, “그래, 하나님의 은혜로 다 되는 거야, 걱정하지 말고 네 멋대로 살아!” 라고 속삭이고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망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유혹에 귀를 열지 마십시오.
태초의 에덴동산은 안식을 의미하는데, 안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동산에 두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창세기 1, 2장의 모든 과정이 이 땅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설계도입니다. 6일 창조 후 7일 째 날 안식을 말합니다. 지금 6천년의 역사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어느 권사님의 꿈에 한 남자가 “이 땅의 시간은 끝났다!” 라고 하였답니다.
어쨌든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이 끝나면 천년왕국이라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6일 창조 후 7일의 안식을 말합니다. 그 시간동안은 사단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년왕국 뒤에 모두가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년왕국의 마지막에 의지에 대한 심판이 또 한번 있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십니까? 우리의 의지가 사단이 없어도 하나님을 놓을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런 사람들은 마지막의 유혹에 다 걸려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내어준바 되면 안 됩니다.
[표준새번역, 갈리디아서 3:1-3]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을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을 맺으려고 합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 지는 장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영화나 드라마가 얼마나 많습니까? 누구나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고, 그것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환상으로 그 장면을 보았던 분들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는 더욱 끔찍했었다고들 말합니다. 우리에게 아무 대가 없이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보내신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무엇에 홀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삶은 성령의 운행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 영생을 얻어 놓고도, 성령의 조명을 도외시하고, 탐심과 육신의 것에 홀려 끝을 맺으려고 합니까?
[새번역, 갈라디아서 1:6-7]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십자가 생각만 해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정에 치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분은 지금 부활하시고 하늘에 계시는데 말입니다. 그 눈물 흘리며 자기감정에 빠질 시간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수께서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생명을 주신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육신의 일들은 다른 복음입니다.
[새번역, 로마서 8: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며, 그리스도로 살지 못하는 사람은 그분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빌립보서 1:6] 여러분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도록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새번역, 로마서 12:1-2]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합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아서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감사할 조건입니다. 그 많은 시간들 속에 지었던 모든 죄들을 지금 돌이키면, 그 순간 주님의 보혈로 다 씻겨질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전하도록 하시는 이유는 내일 주님이 오실지도 모르는 때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학자들이 따지는 사람의 지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산 제물로 드려지는 합당한 예배의 삶을 사십시오.
[새번역, 로마서 6:1-2]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주시는 것인데, 죄가 크면 은혜는 더 커지고, 은혜는 클수록 좋으니 죄를 더 지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씻음을 받고 생명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 이후의 죄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고, 은혜로써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개의치 않고 살면서 계속 은혜만 바라는 것은 너무 뻔뻔한 행동입니다. 최소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그분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해보려고 해도 안 되는 연약함은 도우실 것이지만, 의식 안에 세상을 불러들이지는 마십시오. 내 의식 안에서 육신에 매이지 마십시오. 삶에 너무 분주하면 하나님을 놓칩니다. 급하지도 마십시오, 뭐든지 도가 지나친 것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병입니다.
[새번역, 로마서 6:6-8]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죄의 세력에서 진짜 해방 된 사람은 그것을 돌아보지도,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시달린다면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함부로 이야기 할 것이 아닙니다. 은혜만 믿고 편하게 세상과 벗하며 사시겠습니까? 줄다리기를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은혜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는데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이 생명을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얻은 생명을 하늘에 도달할 때까지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해야 합니다. 은혜라 말하며 의지를 놓은 채 지켜 달라고 까지 말하는 것은 거저 가지려는 세상의 복음으로, 이것에 속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제 5 교재를 읽으시고 화요일 전에 요약과 소감을 올려주세요.
여기까지 오신 여러분 하나님이 도우신 은혜였습니다.
남은 시간도 승리하시어 은혜가 은혜 되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