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상징 노래비 남긴 그, 가수는 '부업'이었다
▲ 단조로운 비석 형태의 해운대 엘레지 노래비. 1, 3절 가사만 수록되었고 건립 주체나 연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도심지에 해수욕장을 5개나 가진 것도 복인데 그 해수욕장들이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뽐내는 천혜의 자연을 가진 부산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바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해수욕장은 해운대 해수욕장이다. 피서철이면 9시 뉴스에 항상 해운대 해수욕장에 운집한 인파의 숫자로 피서의 절정을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다. 즉 해운대 해수욕장은 부산의 얼굴마담인 셈이다. '비 내리는 호남선' 등 대표곡 가수·영화녹음기사 '투잡' 각종 영화제서 8차례나 녹음상 무대 서지 않아 '얼굴 없는 가수'
바로 이 부산의 얼굴마담 해운대 해수욕장에 '얼굴 없는 가수'라는 별명의 가수 손인호가 1955년 히트시킨 '해운대 엘레지' 노래비가 서 있다. '백사장에서 동백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는 바닷물 타고 들려오네 지금도/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난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버리자 저 바다 멀리멀리'(2절 가사). 이 노래비는 지난 2000년 해운대구청에서 해운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노래를 주민들에게 공모한 결과 '해운대 엘레지'가 선정됐고 그것을 기념해 노래비를 해운대 해수욕장에 세웠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ews20.busan.com%2Fcontent%2Fimage%2F2018%2F01%2F24%2F20180124000247_0.jpg) | 손인호의 히트곡 '비 내리는 호남선'이 수록된 음반. 김형찬 제공 |
1950년대 후반에 '한 많은 대동강' '비 내리는 호남선' '울어라 기타줄' '하룻밤 풋사랑' '나는 울었네' 등 많은 히트곡을 가진 그에게 왜 '얼굴 없는 가수'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그 이유는 손인호 본래 직업이 영화녹음기사였기에 짬짬이 노래를 취입했고 더구나 본업이 너무나 바빠서 무대에는 거의 출연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투잡의 개념으로 노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에 남는 가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노래에 전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잘생긴 외모로 보아 당시의 대가수 남인수의 인기를 위협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정도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ews20.busan.com%2Fcontent%2Fimage%2F2018%2F01%2F24%2F20180124000246_0.jpg) | 1957년 손인호의 한창 전성기 시절 모습 |
1927년 평북 창성에서 출생한 손인호는 해방 후 신의주로 이사를 가 거기서 열린 이북도민 전체 노래자랑대회인 관서콩쿠르대회에서 '집 없는 천사'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 이때 심사위원장으로부터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소질을 살릴 수 있다는 권유를 받고 1946년 서울로 내려온다. 그는 당시 작곡가 김해송이 이끌던 KPK악단에서 실시한 가수모집에 응모해 또 1등을 차지해 악극단 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윤부길이 이끌던 부길부길쇼단에서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휴전 후 그는 공보처 녹음실에 입사해 '대한뉴스' 녹음을 담당하며 영화 녹음기사로도 활동하면서 작곡가 박시춘을 만나 노래 1954년에 '나는 울었네' 와 '숨쉬는 거리' 두 곡을 받아 취입하게 된다. 손인호는 우리나라 영화녹음 발전사의 산증인인 처남 이경순이 설립한 한양녹음실 책임자로 일하면서 195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3500편 정도를 녹음하며 40년간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의 70~80%를 담당하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로맨스 빠빠'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1960년대 걸작 영화들의 크레딧을 눈여겨본다면 '녹음 손인호'라는 크레딧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대종상을 비롯한 각종 영화제의 녹음상을 무려 8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녹음기사였다. 그러나 가수는 오로지 부업이었기에 TBC 방송가요대상·MBC 10대 가수상 등에서 가수상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팔도강산'이란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가수 박가연과 백마강에서 뱃사공으로 분장해 밀짚모자를 쓰고 '백마강'을 부르며 노를 젓는 장면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ews20.busan.com%2Fcontent%2Fimage%2F2018%2F01%2F24%2F20180124000249_0.jpg) | 대종상 시상식에서 녹음상을 수상한 손인호(왼쪽에서 네 번째). |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딱 한 번 무대에 선 적이 있다고 한다. 1957년 오아시스 그랜드 쇼에서 출연요청이 왔을 때다. 처남 이경순이 업계에서 힘을 좀 쓰고 있을 때라 처남이 매니저 역할을 해 쇼단과 중개역을 맡아 손인호가 개런티를 톡톡히 받고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의 신문기록들을 보면 1956, 1957, 1958년 3회 정도 손인호가 무대에 섰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영화녹음 때문에 바빴던 탓도 있지만, 그의 아내가 가수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 알리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손인호는 2000년 노래비 건립 당시에는 바빠서 참석하지 못했고 2006년 해운대를 방문, 환영행사를 가졌다. 그 후 2016년 손인호는 지병으로 89세로 사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