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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묵상글 (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 마당발 봉사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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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11 03:47
- 마당발 봉사자
요즘 개인과 인권이 중시되면서 말의 사용도 바뀝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 많이 쓰던 ‘불구자’니 ‘운전사’니
‘간호원’ 같은 말을 요즘은 쓰지 않지요.
같은 맥락에서 ‘가용인원’ 같은 말도 논란입니다.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런 면에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썼다가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허투루마투루 쓰이는 것을 싫어하고,
여기저기 자기를 내어주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 좋아하는 일 한 가지만 하려고 합니다.
어제도 모 형제회 평의원들과 평의회를 하는데
공석이 된 평의원을 대신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걱정의 마음이 있었는데 식당 봉사자들이
또 몇 분 못 오시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제도 손님이 많아 바빴는데 봉사자가 없어서
연세 드신 봉사자 한 분이 너무 고생 많이 하셨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지금 교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제일 큰 이유는 웬만큼 젊은 분들은 다 직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이 봉사하시는데 너무 힘들어 못하시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제일 큰 이유지만 그러나 앞에서 얘기한 대로
자기를 내어주려는 자세가 부족한 것도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내어주는 분들은 이미 바쁜데도 여기저기 뽑혀 더 바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는 그 반대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준 분입니다.
초기 공동체 모습을 전해주는 사도행전을 보면 이렇습니다.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부터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었고,
타루스스로 가서는 바오로 사도를 데리고 와 같이 열심히 선교하여
안티오키아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바르나바를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먼저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순종 잘하는 사람,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서 후뚜루마뚜루 쓰이는 가용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착하기만 해서는 교회 안에서 이렇게 가용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착하기만 해도 교회 밖에서는 마당발로 불리며 왕성히 활동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필수적이고 성령 충만은 마당발 봉사의 완성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소임이라고 믿는 사람,
더 나아가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만이 그 소임이 맡겨졌을 때
거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치지 않고 봉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교회 봉사자가 점점 줄어들어서 걱정하는 오늘 저이고,
바르나바와 같이 자기를 내어주는 마당발 봉사자가 많아지기를 바라고 비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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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나라는 세계사 안에서도 유례없는 대단한 발전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좁은 국토에 천연자원도 그리 풍족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최빈국으로 전락했다가,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놀라운 변화의 속도와 규모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듭니다. 1970년대만 해도 전화나 텔레비전 없는 집도 꽤 많았는데, 이제는 전화는 개인 필수품이 되었고 텔레비전은 극장을 방불케 할 만큼 큼지막합니다.
이런 빠른 변화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갈등과 분열이 가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만져서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 없었던 저 역시 빠른 변화에 혼란을 느낄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개인의 행복도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OECD 국가 중에 가장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도 뚝뚝 떨어지고 있음 역시 개인의 행복도의 하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풍요로움 속에 정신적 빈곤은 지금의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외적 풍요로움이 실제 행복과는 전혀 다름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외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내적 성장을 위해 더 힘을 내야 할 때가 아닐까요? 물론 ‘이런 정신적 성장이 가능할까?’라는 의문도 들 수 있지만, 외적 성장을 멋지게 이룬 우리의 모습은 내적 성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또 다른 나의 성장을 위해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나 빛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또 부패를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빛은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바로 우리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또한 등불을 함지 속에 놓아서 비추지 못하는 것 역시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소금과 빛은 이렇게 짠맛과 밝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부족한 존재이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내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실수로 만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당신의 전능함을 우리를 통해서 높이 드러내십니다. 이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 풍요로움을 넘어서 내적 풍요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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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해지는 데는, 얼마나 작은 것으로도 충분한가!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것, 가장 미미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한 줄기 미풍, 찰나의 느낌, 순간의 눈빛... 이 작은 것들이 최고의 행복에 이르게 해준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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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오늘은 사도 바르나바 기념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파견”입니다. <독서>에서는 바르나바 사도가 교회로부터 파견 받았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24)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거나 ‘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저 받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했을 뿐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바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는 나라’, 곧 거저 주어진 나라임을 말합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가 가야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거저 주신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지극한 열정으로 그 직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주어졌고, 하늘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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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매이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을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존중할 때 물질도 가치를 얻게 됩니다.
성경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0-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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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론사와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 부탁을 자주 했었습니다. 인터뷰는 ‘약속 대련’처럼 미리 질문지를 보내기 마련입니다.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서인지 질문지를 미처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이 메일로 보냈는데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1시간 남짓 인터뷰는 잘 끝냈습니다. 기자는 익숙하게 핸드폰을 녹음으로 해놓고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인터뷰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는 먼저 제 소개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저의 호적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가브리엘의 방문과 마리아의 응답으로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뉴욕에서는 신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다면, 이곳 댈러스에서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자는 ‘성당과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일부 개신교회에서는 가톨릭에 대해서 비방과 비난을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가톨릭은 큰 집, 개신교회는 작은 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교회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가톨릭교회에서 작은 집인 개신교회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성직자였습니다. 큰 집과 작은 집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장점은 ‘질서’이고 개신교회의 장점은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은 교계제도를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에 비해서 개신교회는 그 조직이 자유롭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맛있고, 간단한 쇼핑도 할 수 있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도 있고, 샤워 시설도 있고, 주유소의 기름값이 저렴한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사람들의 입소문이 나서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불친절하고, 음식도 맛이 없고,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는 곳입니다. 게다가 물건값이 비싼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입소문이 나서 파리만 날릴 것입니다. 휴게소가 아무리 좋아도 그곳에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가지면 미련 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합니다. 종교는 깨달음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휴게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찾을까요? 종교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때입니다. 종교가 지친 삶에 위로와 용기를 줄 때입니다. 종교가 불의한 세상에 희망을 줄 때입니다. 종교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줄 때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외면할까요? 종교가 속 빈 강정일 때입니다. 종교가 권력에 야합할 때입니다. 종교가 자본의 논리를 따라갈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외면할 때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자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청하였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놓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오늘 복음은 제가 이곳 댈러스에서 해야 할 소명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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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몇가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말하고 잇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지체할 이유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전파할 책임이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은 우리에게 치료와 구원을 통한 복음의 전파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병든 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마귀를 쫓아내라."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하고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받았으니 무상으로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과 은혜를 통해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권하십니다.
우리의 사명과 봉사가 항상 평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강화되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사랑으로써 이웃을 섬기며, 기도로써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여 항상 주님의 나라를 찾고 이루어 나가는 길을 걸어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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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골이 거의 없습니다.
‘연골이 거의 없습니다.’
이 말은 10년 전 무릎이 너무 아파 찾았던 병원에서 들은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 운동선수를 했었고
학창 시절에도 각종 스포츠를 즐겼습니다.
그러니 무릎 연골이 남아날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게 믿었던, 그리고 영원할 줄 알았던 연골이 사라지면
뼈와 뼈가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통증, 즉 아픔이 시작됩니다.
연골은 중요합니다. 아끼세요. 조금이라도 더 말입니다.
사람 중에도 이런 연골 같은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해 주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참아주고 인내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연골 같은 사람이 없다면 그 안에서 수많은 오해와 아픔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끼세요. 연골도 아끼고, 그런 사람도 아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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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참 좋은 제자들이자 선교사들
“성 바르나바 사도...”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는 우리 믿는 이들의 이중신원입니다. 안으로는 제자이자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 역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참으로 교회를 사랑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을 사랑했던 주님의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바로 성 바르나바 사도가 그러했습니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지난 주일 가톨릭신문 20면은 성미술 작가 조광호 신부의 고백과 같은 글이었고 일부 소개합니다.
“저도 교회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했어요. 회화외에도 조각과 판화, 스테인글라스등 필요한 것들을 배우면서 작업을 해요. 컴퓨터 그래픽도 배웠어요. 특히 스테인글라스의 경우는 당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동검도 채플’은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제가 받은 은총을 내놓기 위해서 만들었죠. 교회에 봉헌한 제 삶을 모두 모아 작은 경당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내놓기 위한 곳이에요. 24시간 열려 있는 이 아름다운 곳에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로, 누구나 답답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울 때,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곳이에요.”
성 바르나바 사도처럼, 역시 교회와 주님을 사랑한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인 사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볼 때 다산 정약용 역시 깊이 들여다보면 교회의 사람, 주님의 사람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다산의 어록도 공감합니다. 한결같이 진리를 깨달은, 삶의 지혜가 농축된 말씀입니다. 진리의 사도라 해도 좋을 다산입니다.
“비범한 진리는 찰나의 깨달음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축적된다. 궁리란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며 만가지 변화를 섭렵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행하는 도리를 헤아려 말없이 마음속에서 살피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길을 놔두고서 굳이 가시밭길을 헤치는 고생을 노력으로 착각하지 말라. 가을이 깊으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면 도랑이 만들어진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거친 돌길이나 우거진 덤불속을 헤칠 필요는 없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사도는 좁은 의미로 예수님께서 선택한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넓게는 초기 교회 지도자들, 더 넓게는 특정 지역에 그리그도교를 전한 대표 선교사를 뜻합니다. 그래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사도라 부르고, 성치릴로와 메토디오를 슬라브 민족의 사도, 성 파트리치오를 아일랜드의 사도라 부릅니다. 또 더 넑게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우리를 주님의 사도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바르나바가 ‘격려 또는 위로의 아들’이란 이름 뜻대로 얼마나 신도들을 잘 격려하고 위로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이어지는 내용도 그가 얼마나 교회에 충실한 인물인지, 또 사울에 대한 최선을 다한 노력에서 얼마나 좋은 배려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고, 바르나바의 편지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사도가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5세기에 쓰여진 ‘바르나바의 전도 여행과 순교’에서는 키프러스 섬에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교사로 파견하는 장면입니다. 우선적 목표가 하늘나라의 선포요 이와 더불어 치유활동과 구마활동입니다. 이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명합니다. 이미 예수운동에 동조하는 이들이 각처에 있어 제자들을 영접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흔연히 나그네를 환대하는 관습이 있었기에 무소유의 자유롭고 홀가분한 선교 여행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이에 대한 사도들의 참 좋은 보답은 주님 평화의 선물입니다. 무소유와 무욕의 자유로운 삶을 통해 그대로 주님 평화의 통로가 됐던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의 두 연설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제6차 국제 젊음이들의 성가대들 모임에서 성가대원들에게 한 연설로 그들의 섬김의 활동에서 세가지 본질적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의 형성에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첫째, 조화(harmony)입니다.
교황님은 “음악은 조화를 창조한다. 그것은 누구에나 전달되어 고통중인 이들을 위로하고, 좌절한 이들의 마음에 열정의 불을 붙인다. 음악은 하느님의 조화로운 빛을 반영하는 아름다움과 시같은 경이로운 가치들을 사람들 마음에 가져다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친교(communion)입니다.
교황님은 “합창은 혼자가 아닌 함께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와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여정은 위대한 ’연주회(concert)’의 향기가 될 수 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기여하면서 ‘친교의 교향곡’(thy symphony of communion)’안에서 각자 고유한 풍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강조했습니다.
셋째, 기쁨(joy)이다.
교황님은 “여러분은 예술, 아름다움, 영성의 오랜 보물의 관리인들이다. 이기심, 야망, 질투, 분열로 더러워진 세상적 정신상태가 너희들 안에 스며들지 않도록하라. 너희 음악은 점차 하느님께 자기증여의 기쁨이 될 수 있고, 그분의 사랑과 더불어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이고, 밝히고 모든 것을 변모시킬 것이다. 너희는 성 아우구스티누의 권고를 채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혀로, 우리의 마음과 입으로, 우리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자.”
새삼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조화, 친교, 기쁨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는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둘째는 교황청의 대사들 모임에서 한 연설인데 세부분으로 된 명연설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첫째, 가정(family)입니다.
교황님은 “교황대사들은 인류가정에 속해 있음을 깨달아 우선적 자리에 사랑과 형제애, 함께와 나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놓고 이를 살아내고 전수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로 하늘나라 가정 공동체를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분열과 전쟁으로 파괴된 비극적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둘째, 희망(hope)입니다.
교황(pope)이란 단어가 흡사 희망(hope)처럼 들립니다. 교황님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우리는 좌절하거나 비관적이 냉소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희망은 우리 세상 안에 현존하는 좋음을 인정하고 우리 시대의 도전에 직면할 힘을 마련해 준다. 이런면에서 여러분들은 희망의 표징들이 되어 달라.” 요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평화(peace)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는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 안에서 타인을 인정하고 영접하는 관계의 열매다. 우리가 무관심과 두려움을 제쳐놓을 때, 성장하고 번영하는 영구한 일치로 이끄는 상호 존경의 진정한 분위기도 피어날 수 있다. 여러분은 언제나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peacemakers)이 되도록 노력해 달라. 전능하신 분이 축복하신다” 라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역시 형제애, 희망, 평화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는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점차 우리 모두를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우리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로, 즉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 그리고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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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도>
빛이 보내시고
빛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빛나는 사람
믿음이 보내시고
믿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믿는 사람
희망이 보내시고
희망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희망하는 사람
사랑이 보내시고
사랑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사랑하는 사람
착함이 보내시고
착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착한 사람
곧음이 보내시고
곧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곧은 사람
화해가 보내시고
화해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화해하는 사람
평화가 보내시고
평화롭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평화로운 사람
기쁨이 보내시고
기쁨이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기쁜 사람
자비가 보내시고
자비롭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자비로운 사람
섬김이 보내시고
섬기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섬기는 사람
살림이 보내시고
살리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살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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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10)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우리의 도움이신 주님이 계신데 우리에게 왜 지팡이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거의 빈손에 헐벗은 상태로 파견하셔서 교사들의 처지가 무척 어려워 보였으므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엄격한 명령을 다소 누그러뜨리십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필요한 음식과 옷만 받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바오로 사도의 말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1티모 6,8). 사도는 또 이런 말도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좋은 것을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갈라 6,6). 이 말씀은 영적 결실을 추구하는 제자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자원을 스승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초대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스승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승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또 다른 해석에 따르면, 교사들이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구리 돈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말에서 금은 감정을, 은은 말씀을, 구리 돈은 목소리를 뜻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한테서 받아서는 안 되며, 오직 주님께서 주신 것만 지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단자와 철학자들의 가르침이나 엉터리 교의를 받아들여서도 안 되며,세상 걱정으로 짓눌려서도, 두 얼굴을 지녀서도,치명적인 사슬에 두 발이 묶이게 두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거룩한 땅 위를 걸어 나아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뱀으로 변하는 지팡이를 지녀서도(탈출 4,3 참조.), 육적인 것에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지팡이나 막대기는 갈대와 같습니다. 조금만 기대도 금세 부서져서 우리 손을 찌를 것입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엑카르트는 근원을 일컬어 소용돌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엑카르트가 말한 이미지, 곧 하느님 안으로 가라앉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우리
네 근원의 핵인 신성의 핵은 물론이고 안쪽의 안쪽, 씨앗의 핵까지도 소용돌이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고, 우리의 신적인 근원 속으로 가라앉는 행위는 한계를 모른다. 우리가 끝없이 떨어지고 자랄 수 있을 만큼 하느님은 깊다. ”천 년을 살거나 그 이상의 세월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더 늘어날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는 한계를 모른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는 그 정도로 위대하다. 한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해 보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할 것이고, 엑카르트가 말한 대로, “천국의 평화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만족하여 멈추어도 안 되고, 가만히 서 있어도 안 된다. 삶의 방식이 어떠하든 간에 이 세상에 정체해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먼 거리를 여행한 사람도 절대로 멈추어 서지 않는다."(184)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주 예수님, 당신은 교회를 파견하여 세상의 빛,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모든 사람이 바라보도록 빛을 내는 등붙이 되게 하셨나이다. 예수님, 교회를 통해 퍼져 나오는 빛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사랑과 평온한 마음으로 찬미하고 기도하며 당신을 기다리는 충실한 신부처럼 늘 성실하게 깨어 있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교황 · 주교 · 사제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공동체와 수도회가 신랑이신 당신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기다리는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당신을 기다리게 하소서. 이 세상 곳곳에 있는 교회가 끊임없이 당신의 오심을 노래하며 성령의 힘을 받아 이렇게 외치나이다.
0 오소서, 주 예수님. 당신 교회 안에,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어서 오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55)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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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고 이어서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제자들은 주님께 거저 받은 권한과 능력을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데 거저 사용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한과 능력의 은사는, 그들이 완수하여야 할 직무적 사명과 긴밀히 연관됩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권한,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은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 있습니다. 저마다 지닌 은사(카리스마)와 재능(달란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 은사와 재능은 그 사람의 사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고유한 하느님의 선물로 서로 봉사하며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모든 선물은 그 자체로 선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명이 되지만, 가끔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높이는 데 그것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선물을 사용하는 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은사에 생명을 주고 그 은사가 참됨을 증명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선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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