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에 관한 시모음 3)
석양의 얼음공주 /김상미
나는 그가 좋아 세상 물정에 어둡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 는 나를 한 마리 새하얀 양으로 그려주는 그가 나는 좋아 가시 많은 장미꽃보다 헐벗은 카우보이 같은 잭 런던의 강철군화를 벽에 걸어주고 아양 떨고 매달리고 침 흘리는 개새끼들을 저 멀리로 차버리는 그가 나는 좋아 호시탐탐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애인이 되고 싶어 불타는 권총 한 자루와 날렵한 잭나이프를 가슴에 숨기고 보이는 대로 그의 여자들에 게 뜨거운 피 맛을 보여주는 나를 향해 던지는 그의 야릇한 천만 불짜리 윙크가 나는 좋아 그는 세기의 소매치기 집단 페이건보다 더 빠르게 내 마음을 훔치고 카사노바보다 더 빨리 나를 군중 속으로 밀어내지만 나는 뒤집기 게임의 명수 그의 수법을 쭉쭉 빨아 당겨 멋진 복수를 꿈꾸는 얼음공주 그가 달콤새콤하고 쫀득쫀득한 손길로 나를 어루만질 때에 도그가 세기의 영웅처럼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우아하게 자동차 문을 열어 그 안에 탄 여자들을 보여줄 때도 나는 앙증맞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겉으론 환하게 속으론 새파랗 게 칼을 갈지 물론 그는 모르지 모르면서도 힘껏 가속페달 을 밟으며 음산한 엑스터시 협곡을 향해 신나게 질주하는 그 그는 꿈에도 모르지 얼음은 녹을 때 더 치명적이고, 더 아리고, 더 정직해지고, 더 뜨겁다는 걸 죽을 것 같은 쾌감이 크면 클수록 내가 더 자주 더 빨리 활활 타오르는 불꽃들을 비웃는 얼음공주로 변해간다는 걸 비웃음은 붉은색으로만 치장된 화려한 매장 어떤 것을 골라도 아주 지루하고 건조 해지지 담배 피는 비루먹은 개처럼 역겹고 추해지지 온갖 감 정이 넘쳐나는 문체 뒤에 숨어 있는 심장의 메마름* 나는 그 서늘한 메마름으로 서서히 내게서 그를 죽일 거야 새하얀 양, 가시 많은 장미, 헐벗은 카우보이, 달콤새콤하면서도 쫀 득쫀득한 손길, 텅 빈 새파란 하늘, 그 모든 것을 발갛게 물 들이며 죽어가는 저 잔인한 석양처럼!
*프란츠 카프카의 글 중에서 변용
얼음물고기 /신동옥
물고기 또는 물고기라는 투명한 이름들
물고기 또는 물고기의 몫으로 마저 불러주어야 할 믿음들
파들대는 등지느러미를 새처럼 날갯짓하면서도 앞을 내다보아야만 한다는 건
한 줌 허락된 기포 속에서 남은 숨을 들이켜는 일
얼고 춥고 머나먼 강가에서
지쳐 오들오들 떨던 아가미를 감싸던 작은 비늘들은 어디까지 떠내려갔나?
더 얼마나 난폭한 꿈에 시달리다 쌔근쌔근 숨이 잦아들까?
비늘 하나 떨치지 않고 물길을 거슬러 헤엄쳐 마침내 물길이 되어 얼어붙는 순간
저 강바닥 물속에도 햇빛은 들고 얼음은 얼겠지
얼음의 죽음 /마경덕
노점상 여자가 와르르 얼음포대를 쏟는다
갈치 고등어 상자에 수북한 얼음의 각이 날카롭다
아가미가 싱싱한 얼음들, 하지만 파장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라지는 얼음의 몸, 한낮의 열기에 조금씩 각이 뭉툭해진다
질척해진 물의 눈동자들
길바닥으로 쏟아지는 땡볕에 고등어 눈동자도 함께 풀린다
얼음은 얼음끼리 뭉쳐야 사는 법
얼음공장에서 냉기로 꽁꽁 다진 물의 결심이 풀리는 시간,
한 몸으로 들러붙자는 약속마저 몽롱하다
서서히 조직이 와해되고 체념이 늘어난다
핏물처럼 고이는 물의 사체들
달려드는 파리 떼에
모기향이 향불처럼 타오르고 노점상은 파리채를 휘두른다
떨이로 남은 고등어, 갈치 곁에 누워버린
비리고 탁한 물
이곳에서 살아나간 얼음은 아직 없었다
노점상은 죽은 생선에 자꾸 죽은 물을 끼얹는다
얼음 궁전 /김종제
영하로 내려간 집이
봄으로 녹아버리기 전에
한두 달이라도 들어와 살라는
당신의 몸 속
얼음 궁전으로 간다
나도 한때 얼음이었던 적이 있어서
그저 알몸으로
벽을 열고 미끌어져 들어가면
그 오래 전에 들어가 살았던
지하의 아득한 방이다
무지개 등불이 반짝이는 정원에서
온갖 얼음의 열매가 열렸다
얼음새들이 날아다니며 지저귀고
색색의 얼음꽃이 활짝 피었다
당신이 던진 눈빛에
나도 순식간에 얼어서
몸 나누며 사랑한 내가 깨져 나간다
부서진 내 얼음 조각을 들고
당신은 탑을 세운다
수 천개의 저 탑 중에
내가 당신을 살릴 기도였다
내가 당신을 부활시킬 피였다
내가 얼음이 되어야
햇살 따스한 봄이 되는 것이라고
나를 얼음으로 만들었다
당신이 다 녹아 사라지기 전에
얼음 궁전으로 쳐들어간다
커피 잔에 얼음을 녹이며 /하영순
바람 솔솔 찾아드는 창가에 앉아
커피 잔에 얼음 동동 띄워
내려 쬐는 강렬한 태양을 식혀 본다
억겁의 세월
너와 난 무슨 연으로
푸른 숲 다 두고 내 창가에서 그리도 구슬픈가
맴맴 매미!
넌 어찌 휴일도 없는지
하루는 놀고 하루는 쉬는
별 의미 없는 휴일이 새삼 감회가 깊다
언제이던가 휴일이 되면
시집갈 날 받아 놓은 것처럼 가슴 설레던 때가
내게도 있었지
지금은 연휴가 되면 대문을 바라보며
내려 감는 내 눈
꼴 상스럽고 부질없는 일이다
잔 속에 얼음이 녹아들듯
굳었던 마음을 녹이는
일요일 오후 한나절. 시간은 흐른다 강물처럼!
버려진 방죽처럼 살얼음 얼어 /장진숙
살을 태우고 뼈를 갉아대던
탈진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달이 떠오른 것을 알았다
칠흑의 어둠을 뚫고 둥근 달이
휘청이는 그림자를 휘감았다
유난히 빛나는 별이 보인다
내 항상 밤길 급히 달려갈 때
어두운 골목길 지쳐 돌아올 때
위로하며 동행하던 별
갈대숲을 지나온 서늘한 바람이
희디흰 비명을 쓸어안는다
황량한 들판의 버려진 방죽처럼
살얼음 얼어 오래도록
휘영청 밝은 달과 빛나는 별 하나 품고
지독한 한파 묵묵히 견뎌야한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의 방죽
풀리는 날 까지
어지러운 시절을 뗏목처럼 띄워 두고
말없이 기다리자
시린 마음 펄럭이며 바람이 분다
살얼음 /유일하
차갑게 실신한 너와나
얽히고 얽혀서
짜 맞춘 우리사이
쩍쩍 갈라져도
또다시 얽히어
밤이면 티 맑게 또 만나
두텁게 넓혀가는 것
붓 칠하듯 그려가는 사랑
내일이 사그라져도
또 그려가는 우리사이
살. 살. 살.
이어 가는 것
또 영그는 이슬 꽃
우린 영원한 예술가
그리다
그리다
못 그리는 그날
우린 깨어지는 것
깨어져도
깨어져도
또 다시 이어가는 것
얼음의 도가니 <3> /강연옥
자신의 가시가 호랑이 발톱보다 강하다며
씨앗을 품지 않는 <어린왕자>소행성의 장미
나는 늘 깨어있는 가시이다
억압을 욕망하는 욕망으로 호흡하며
손에 닿는 데로 색을 버무리는
분탕질에 피어나는 노을은
뾰족탑 십자가 성스러움에 내려앉은
화려한 분노이다
절정에 다다르지 못해
자신을 묶지도 풀지도 못하는 노을 바라보는
어린왕자의 아픔이
어스름 저녁 노형성당 종소리로 울리면
혼돈의 사유를 지우는 어둠이 내려앉는다
사랑에 묶여 괴로워하는 한 세상도
결국 사랑으로만 풀어야함을 깨달으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는 난 얼음의 도가니다
* 노형성당 :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성당
* 시 제목은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에서 따옴
얼음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 /김내식
산이 산을 이고
북두칠성을 마중하는
강릉시 구정면 칠성산 중허리에
법왕사 주지 스님
신도를 태우는 소형 버스에
도자의 삽날 달고
눈을 업으로 밀어가며
사바와 선계를
오르내린다
배고픈 작은 새와 다리 긴 고라니도
눈 쌓인 비탈엔 먹을 게 없어
인근 마을 가까운
야산으로 이동하고
구름만 기웃대는
텅 빈 겨울 산
눈 뭉치를 벙거지 쓴 청솔들은
팔다리 휘어지는 천형을 풀어주는
빗금 친 황혼 햇살도
달가운 눈빛이다
머리에 내린 폭설
염색하여 젊은 줄 착각하는 나는
버리고 살 나이에 채우던 마음 밭이
하얗게 비는 게 좋아
모처럼 눈길 따라
오르는데
이미, 하늘을 한 바퀴 돌아
성불을 이룬 눈은 물이 되어
개울 바닥 얼음 속으로
또르르 통통
목탁소리 내어가며
낮은 곳
목마른 자를 찾아
바람을 타고 가는 솔 향 함께
저만치 내려간다
얼음의 집 /윤꽃님
레테의 강을 건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간다
그 망각의 강물을 마시며 우리는
누군가에서 또 누군가로 헤엄쳐간다
만약 그 강물이 얼어붙는다면
어느 날 얼어붙어 마실 수가 없다면
우리는 수많은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가게 될까?
우리의 두뇌에 금이 가듯
얼어붙은 강에 금이 간다면
그 금간 상처도 생생하게 살아있게 될까?
봄날처럼 그 얼음이 풀려
다시 강물이 흐르고,
그 강물의 후손의 후손이 계속 흐르면
우리는 다시 그 강물을 마시고
망각의 강을 건널 수 있을까?
사랑은 스스로 얼어붙어 스스로 금이 간다
사랑은 스스로 금이 갔던 상처를 쓰다듬지 않는다
다시 레테의 강물이 흘러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서서히 망각의 하구에 이른다 해도
사랑의 DNA는 기억하고 있다
두뇌와 마음과 심중이 얼어붙어
마침내 쩍 갈라졌던 순간을
얼음집 /우당 김지향
- 문이 없다
출입구가 없는(물로 지은)
투명 유리상자 속에
그녀는 있다
속살로 짠 스타킹 속에 다리를 꼬고 앉아
스프를 먹고 있는, 커피 스푼으로
휘젓고 있는
그녀 스프엔
잘게 바스러진 햇살의 하늘이
찰랑 찰랑 멱을 감고 있다
하늘 바닥엔 한 마리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긴 목의
오리가 뭉툭한 손으로 하늘을 헤집고
깊이 깊이 들어간다
손이 조금씩 작아진다 손톱만 남기고
손은 아주 없어진다
스프잔을 비운 그녀가
어깨 너머로 긴 손가락을 뻗쳐
딘·쿤츠의 SF 한마당을 집어들었다
한 권의 딘·쿤츠엔 한 궤짝의
탁한 삶이 몽땅 잠입해 있다
삶 한 개비만 꺼내 잘근잘근 씹는다
-유리상자 손잡이를 만지면 출입문이 지워져 버림
-처음부터 출입문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음
-출입문을 열고 나오려면 삼층천 세계로 증발될 것
그녀는 딘·쿤츠의 삼엄한 경계령 목록을
눈으로 짚어가며 한 귀 한 귀 먹어치우고
출입문을 찾아 일어선다
그녀 몸놀림에 따라 유리상자 전체가
출입문이다가 아니다가 한다
몇 만 볼트의 전기 이빨로 깨물어도
뚫리지 않는 얼음 유리벽
밖에선 구세기의 추억을 담은 가랑잎이
바삐 가는 사람들의 가슴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사람들은 가랑잎 한 갈피씩 품 속에 접어넣고
멈추지 않는 시간의 낚싯대에 코가 꿰어
낯설게 낯설게 저물어가는 중이다
(아무데도 출입문이 없는 유리상자
창 밖에도 똑같은 유리상자 뿐인 세상),
높이 걸려 하늘의 주름 속으로
몸을 감추고 있는 낮달의 반쪽을 보며
그녀는 갇힌 삶을(반쪽 뿐인 삶을)
사랑하려고, 사랑하려고 주저 앉는다.
얼음 속 물소리 /김내식
산이 산을 이고 북두칠성을 마중하는
강릉시 구정면 칠성산 중허리에
법왕사 주지 스님
신도를 태우는 소형 버스에
도자의 삽날 달고
눈을 업으로 밀어가며
사바와 선계를 오르내린다
배고픈 작은 새와 다리 긴 고라니도
눈 쌓인 비탈엔 먹을 게 없어
인근 마을 가까운 야산으로 이동하고
구름만 기웃대는
텅 빈 겨울 산
눈 뭉치를 벙거지 쓴 청솔들은
팔다리 휘어지는 천형을 풀어주는
빗금 친 황혼 햇살도
달가운 눈빛이다
머리에 내린 폭설
염색하여 젊은 줄 착각하는 나는
버리고 살 나이에 채우던 마음 밭이
하얗게 비는 게 좋아
모처럼 눈길 따라
오르는데
이미, 하늘을 한 바퀴 돌아
성불을 이룬 눈은 물이 되어
개울 바닥 얼음 속으로
또르르 통통
목탁소리 내어가며
낮은 곳의 목마른 자를 찾아
바람을 타고 가는 솔 향 함께
저만치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