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풍물지(朝鮮風物誌)』삽화 속 기산풍속도
홍상희 I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Ⅰ. 머리말
흔히 기산풍속도로 불려온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는 현존 작품 을 통해 볼 때, 대개 188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원산, 부산 같 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대량 생산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개항장 풍속화’, ‘수출화’라고도 불린 다. 그런데 1888년 W. R. 칼스가 펴낸『조선풍물지』삽화를 위 시해서 1907년 한국을 방문한 헤르만산더 화첩, 1910년 간행된 中村金城의『朝鮮風俗畵譜』같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기록물들 속 그림들의 소재뿐만 아니라 화면 구성 등에서 기산풍속도와 동 일하거나 매우 유사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어 흥미를 끈다. 이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조선 풍속’을 표상하는 특정 소재들이 있 었으며, 이것들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제국주의를 앞세운 열강의 나라들로부터 온 이방인들의 기록 을 통해 우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 보 곤 한다. 그러나 이들에 의한 그림, 사진, 문자에 의한 기록물들 은 그들이 본 조선의 특정 부분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 또는 사진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해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조선인의 삶과 풍물 을 주제로 한 기산풍속도 역시 당시 개항장을 드나들던 외국인 들이 남긴 여행기와 더불어 당대 사람들의 조선 풍속에 대한 인 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스펙트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국인에 의해 남겨진 여행기와 그림, 사진 등에서 조선 풍속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반복적이거 나 동일한 것을 접하게 되면서“근대 창출된 조선 풍속의 이미지 는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 또는 누구를 위해 어떻게 재생되고 변 용되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답을 찾고 자 우선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국인들에 의해 집필된 여행기와 사진 및 그림 자료 등 각종 기록물들 속에 형성된 조선 풍속 인 식의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여 행 중 김준근의 풍속화를 수집하여 자신의 여행기에 삽화로 활 용한 칼스의『조선풍물지』의 삽화와 현재 전시 및 도록 등을 통 해 소개된 기산풍속도의 여러 예들과의 비교를 통해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국인들에 의해 인식되고 만들어진 조선 풍속 이미 지의 표현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조선 풍물지』에 실린 삽화를 주제에 따라 운송수단과 나들이 모습, 생 업활동 모습, 놀이하는 모습, 부정적이거나 기이한 모습 등으로 나누어 각 장면의 동일 소재에 대한 이미지 표현 양상에 대해 비 교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기산풍속도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판매되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 풍속을 표상하였던 이미 지는 과연 무엇이었으며, 동일 소재 또는 이미지가 어떻게 재생 하고 변용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근대 조선 풍속 이미지가 형 성되는 데 있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을 위시한 기산풍속도의 역할과 의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Ⅱ. 19세기 말 20세기 초 내한 서구인의 조선 풍속 인식의 양상
우리나라는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한 朝日修好條規[강화도 조약]의 체결을 시작으로, 같은 해 부산항, 1879년 원산항, 1880년 인천항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그리고 이어 1882년 미국, 1883년 영국 및 독일, 1886년 프랑스 등 서구의 여러 나라들과도 차례 로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조선은 정치, 경제적으로 열강의 각축 장이 되었다. 특히 외국 선박이 드나들었던 부산, 원산, 인천 등 은 다양한 인종, 풍속, 문물들이 출입하는 문화교류의 장소가 되 었다. 이 시기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자의나 왕의 요청 으로 왔는데, 교사, 선교사, 외교관, 의사, 상인 등 다양하였다. 직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방문의 주된 목적은 순수 관 광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수개월 또는 수년간 체 류하면서 우리나라의 주요 지역을 여행하고 문자, 사진, 그림 등 다양한 기록물들을 남겼다. 이들의 여행기에는 근대 이행기 조 선의 풍속과 풍물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어, 당시 외 국인들의 눈에 비춰진 조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김준근이 원산, 부산 같은 개항장에서 활약했던 시 기인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중심으로 당시 기록물에 남겨진 조 선 풍속 이미지의 형성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개항을 시 작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방문하였는데, 『조선풍물지』삽 화와 기산풍속도의 관계를 살펴보기 앞서 이 시기 조선을 방문 한 서구인들의 여행기를 통해 당시 이방인의 조선풍속에 대한 관 심 정도와 인식, 그리고 기산풍속도와의 접촉과 활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별표1에서 볼 수 있듯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에 들어 온 서구인들의 여행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현재의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은 물론 관서ㆍ관북지방 을 위시한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였는데, 함경도 및 평안도의 오지에서 경주, 송도, 금강산 등 현재에도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 는 주요 명승지까지 선교 활동과 여행, 조사 등을 목적으로 다양 한 지역을 방문하였다.
대부분의 여행기가 H. B. 헐버트, J. S. 게일, A. H. 새비지 랜도어, I. B. 비숍처럼 여러 차례 방문하였거나 H. N. 알렌, O. N. 데니처럼 장기간에 걸쳐 체류한 이들에 의한 기록물이라 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선 당시 여행기를 남긴 서 구인들이 조선의 풍속과 풍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으며, 이러한 그들의 경험과 인상이 여행기 속에 풍부하게 기록되었음을 미 루어 짐작하게 한다. 1880년에 발표된 독일인 E. J. 오페르트가 쓴『금단의 나라 조선』에서 1911년 출판된 E. G. 캠프의『조선 의 모습』에 이르는 각종 行記속에는 대부분 조선의 풍속에 대 한 글뿐만 아니라 관련 사진 및 그림 자료 등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이러한 여행기는 자국의 사람들에게 당시 조선에 대한 각 종 정보를 제공하여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우리나라를 방 문하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W. R. 칼스의『조선풍물 지』(1888)를 소개한『네이션 Nation』지의 서평과 저자의 서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책은‘금단의 나라’이자‘은자의 나라’인 조선에 들어가 그 국민들과 함께 살아 본 영국인이 쓴 최초의 글이어서 흥 미롭다 … 그는 그가 목격한 사실과 현상을 주의 깊게 천착 하고 있다. 그의 꾸밈없는 서술은 아직도 불쾌한 호기심의 대 상으로 남아 있는 한 나라에 대하여 우리에게 값진 지식을 제 공해 줄 것이다.”『( 네이션』
“조선은 지난 몇 년 사이에 유럽인에게만 개방되었지만, 새로 운 분야의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 1882년 W. E. 그리피스 가 쓴『은자의 나라 한국』만이 6페이지에 걸친 자료의 출처를 통해 조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시했다. 그 이후 조선에 왕 래한 외국인들에 의해 많은 문헌이 발간되었다. 공식적인 보 고서들과 여러 잡지, 학회지의 기사들, 그리고 신문에 조선 사 람과 그들의 관습에 대해 소개되었다. … 이 책이 담고 있는 문제들의 몇몇 중요한 부분들은 이미『한국청서』와 왕립지리 학회에서 전에 발행된 논문, 그리고『필드』의 기고문에 실렸 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전에 쓰여진 문헌들의 목적은 영국에 서 조사된 모든 문제들을 은폐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나는 이 책이 여러가지 점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이 책 이 조선에 대한 관심을 끄는 데 도움을 주고, 인종의 분포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에 의해 연구될 가치가 있어 보이는 조선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 관습에 대한 흥미를 제공하리라는 희 망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풍물지』)
조선에 대한 관심이 비록‘불쾌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표현되 었지만,『 조선풍물지』같은 당시 여행기들을 통해 조선의 희미한 존재감이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인들의 조선 풍속에 대한 관심은 여 행기의 목차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A. H. 새비지 랜도어의『고 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895), W. R. 칼스의『조선풍물지』 (1888), G. W. 길모어의『서울풍물지』(1892)는 그 대표적인 예 로, 글 및 그림 목차 구성만 보아도 당시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들의 조선 풍속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여행 기들은 세부 목차와 그림 및 사진 등의 소재에 있어 다소간의 차 이는 있지만 조선 풍속에 대한 중복된 내용이 반복되고 있어 눈 길을 끈다. 이는 서로 다른 이들이 다른 목적과 의도를 갖고 조 선을 방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 여행 기를 남긴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한 조선 풍속의 이미지가 어 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조선 풍속 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여행기를 집필하였음을 반증해 주는 대목 이라고 하겠다. 이는 동일 이미지 또는 동일 소재의 사진자료가 외국인들의 각종 여행기와 사진아카이브에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새비지 랜도어의『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글 목차 구성을 예로 들면, “조선행 선상에서 보고 들은 얘기들, 제물포에서, 서 울의 풍물, 한국인의 차림새, 여성, 어린이와 놀이, 시골의 풍경, 유적, 주거, 결혼, 초상화 그리기, 왕실, 문화, 종교, 刑制1ㆍ2, 軍 制, 서울의 화재, 북한산성, 성품”등 대부분이 조선의 풍속 및 풍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칼스의『조선풍물지』에 실린 그림 목차의 예를 살펴보면, “가마, 마님과 여종, 아낙네, 물장수, 거 리에서 싸우는 모습, 銀櫃, 상주, 고관의 행차1ㆍ2, 계란 장수, 나 무꾼, 조정 대신, 악사, 논에 물대는 모습, 그네, 여행객, 원두막, 팽이놀이, 도자기1ㆍ2, 여인의 나들이, 거리의 풍경, 유기 공장, 활터, 연날리기, 여자 악사, 얼음낚시, 물방앗간, 부엌, 노상강도, 왕족의 행차, 기생”등이다.
이 두 여행기를 위시해서 별표로 정리한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국인들이 남긴 여행기에 등장하는 조선 풍속의 소재들, 예 를 들면 한국인의 차림새, 여성, 어린이와 놀이, 결혼 등은 서 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을 비롯한 각 박물관 및 미술관 등에 소장 된 기산풍속도의 내용과 중복된다. 이러한 조선 풍속의 소재들 은 그것이 글로 표현되었건 그림 또는 사진으로 표현되었건 간 에 이방인에 의한 시선이 반영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 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국인들의 시선에 포착된 조선 풍속 의 이면에는 그들의 이국적 취향과 조선을 타자화하는 오리엔탈 리즘, 새롭게 변화하는 조선의 모습이 아닌 전근대적 조선의 재 현이라는 공통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다.
장옷을 쓰고 나들이하는 여성의 모습, 엿장수의 모습, 줄을 타 고 있는 광대의 모습, 걸식하는 거지들의 모습, 개울가에서 빨래 하는 모습 등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 속 인물과 풍 물들에 대한 내용은 낯선 곳의 인상을 포착하고자 한 당시 이방 인들의 이국적 취향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기생, 갓 수리공, 물장수, 맹인 점장이 등 특정직업군의 모습을 통해 조선의 풍속 을 대변하는 소재로 선택한 점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의 기제 속에 서 미개한 모습을 통해 조선을 타자화하고자 한 그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제국주의를 앞세워 여행과 탐사를 목적으로 조선 에 온 외국인들에게 낯선 문화에 대한 이질감은 이국적 취향을 뛰어넘어 오리엔탈리즘으로 경도되었던 것이다. 이는 여행기에 실린 그림과 사진들이 조선인들의 자연스런 생활모습을 포착하 지 않고 재현과 상투적 연출을 통해 마치 실상처럼 만들어진 것 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연날리기’,‘ 옹기장수’처럼 야외에서 촬 영되어야 할 모습이 사진관에서 촬영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 다. 그리고 이러한 재현과 상투적 연출에 의한 사진과 동일 이미 지들은 그대로 기산풍속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 해야 할 점은 인물이나 상황을 보다 편리하게 촬영할 수 있는 사 진관에서 찍어낸 사진들이 신문물을 받아들인 지식인들의 모습 이 아닌 전근대적 조선의 이미지로 재현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의건 타의건 이미 근대화의 길을 걸으며 안팎으로 변화 하고 있는 조선의 모습보다는 전통적인 조선의 이미지를 담고 싶 어 했던 외국인들의 바람이 표현된 것이기에, 당시 그들이 가졌 던 조선 풍속에 대한 인식을 되짚어볼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던 김준근이 수출 화로서 그린 기산풍속도가 활기찬 개항장 풍경이나 외국인과 신 문물을 처음 대면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정형화된 조선의 남 녀노소의 일상생활에 집중하였는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19세기 말 김준근의 풍속화를 삽화로 활용해서 출판된 서양서의 예들은 앞서 살펴본 여행기를 위시한 19세기 말 20세기 초 기록물 들이 조선 풍속에 대한 일정한 표상을 갖고 특정 이미지를 창출해 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준근의 풍속화를 삽화로 사용한 서 양서와 관련된 그의 풍속화를 제작연대에 따라 입수자와 현소장처, 김준근 활동 당시의 입수처 등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산풍속도를 활용한 책들의 저자 중에서 칼스, 바라, 캐븐디 쉬는 직접 조선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김준근의 그림을 사용하였 다. 이에 반해 컬린과 찜머만은 조선의 풍속과 미술에 관한 연구 서를 펴내면서 이미 자국 내 입수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김준근의 그림을 활용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통해 조선에 직접 방문해서 쓴 여행기가 되었건 자국에 이미 유입된 김준근의 풍 속화를 활용한 연구서가 되었건 간에 자료가 된 그의 原畵가 책 의 출판 시기보다 훨씬 이전에 제작되었을 것을 상정할 때 원화 들의 제작 및 유출 시기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개항장을 중심으로 수출화로 제작되었던‘기산풍속도’류의 풍속 화가 활발하게 유통되었으며, 근대 조선 풍속 이미지가 제작자 와 구매자 사이에서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으로 재생되고 변용되 었음을 엿볼 수 있어 이 서양서들은 기산풍속도의 위상과 위치 를 알려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특히 앞으로 살펴 볼 칼스의『조선풍물지』의 서문에는“삽화들은 대부분 元山의 조 선의 화가가 먹으로 그린 그림들의 재현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 가 김준근임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삽화들의 내용과 이미지 표현, 그리고‘元山’이라는 김준근의 활동장소를 통해서 『조선풍물지』의 삽화가 기산풍속도를 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 다.『 조선풍물지』의 삽화들은 운송 수단과 나들이 모습, 물장수, 나무꾼, 유기공장 등 생업활동 모습, 그네, 팽이놀이, 연날리기 등 놀이하는 모습, 거리에서 싸우는 모습, 기타 등의 소주제로 나 눌 수 있는데, 기산풍속도와 소재 및 동일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직접적으로 비교할 만하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는『조 선풍물지』삽화를 보다 주제별로 나누어 본격적으로 기산풍속도 와의 비교를 통해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을 방문한 한 외국 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풍속에 대한 인식과 기산풍속도에 당시 다른 기록물을 통해 어떻게 재생, 변용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Ⅲ. 운송수단과 나들이 모습
‘가마’를 탄 모습은 서울역사박물관본을 비롯해 각 소장처의 기산풍속도뿐만 아니라‘조선 풍속’을 다룬 사진이나 여행기에서 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이다. 이는 서양의 운송수단과는 다른 가마의 독특한 외관과‘신행’,‘ 고위 벼슬아치들의 탈 것’이 라는 조선 특유의 전통적인 이미지의 중첩과 함께 낯선 곳을 여 행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당장 이동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 었을 것이다. 이는 칼스의『조선풍물지』를 비롯한 여러 여행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산등성이를 넘어갈 때 몇 명의 일본인 일행을 보고 놀란 일이 있는데, 한 사람은 가마를 타고 또 다른 사람은 붉 은 빛깔의 안장을 씌운 조랑말을 타고 있었다. 가마 안의 의 자는 발을 올려놓을 곳도 없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옛날 한 덩치 큰 영국인이 처음 가마를 타자 가마꾼들 이 그의 발을 꽉 잡아 거의 꼬다시피 해서 가마 안에 밀어 넣 어 몹시 놀랐다는 말이 생각났다.”『( 조선풍물지』
“유럽인에게는 생활필수품이 되어 버린 교통수단이나 안락한 운반 수단이 전혀 없기 때문에 육로로의 여행은 열흘이나 걸 린다. … 언뜻 보면 사치스럽고 화려하며 위엄이 느껴질지 모 르나, 실상은 겉만 번지르르한 불편한 교통수단이다. … 비좁 은 상자 속에 들어앉아 온몸이 오그라붙는 듯한 고통을 참아 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내 기억 속의 조선, 조 선 사람들』
『조선풍물지』에 실린 삽화 <가마>는 지붕이 亭子모양을 한 보 교로, 두 명의 가마꾼이 가마를 메고 있는 모습이다. 기산풍속도 중에 직접적으로 비교할 만한 여러 예가 남아 있는데,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본의 <시집가는 모양> 장면의 일부분과 직접적으로 비교할 만하다.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본은 신부가 탄 사인교 가 마 뒤에 전통 혼례에서 신부의 단장과 그 밖의 일을 도와주는 여 성인 手母가 탄 가마가 함께 그려져 있다. 이 手母가 탄 가마와 인물의 표현이『조선풍물지』의 삽화와 매우 흡사하다. 가마 지붕 의 호리병모양의 꼭지와 휘장이 아래로 늘어지며 생긴 주름의 모 습 등은 세부적인 표현까지 닮아있다.
보교는 대관들이 출퇴근할 때나 그 자녀들이 탔던 가마인데, 기산풍속도에서도 자주 그려졌던 것 같다. 직접적으로 비견될 예 를 살펴보면, 필자미상의 프랑스 기메박물관본과 독일인 헤르 만 산더가 수집한 화첩에서 보교를 소재로 한 예를 찾을 수 있 다. 이 두 작품은 가마꾼의 윗저고리 색만 다를 뿐 호리병모양 의 꼭지와 휘장 및 주렴의 모양과 색, 아래로 두 줄씩 양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휘장의 주름 표현 등 동일본 내지는 제작 시기 가 늦은 헤르만 산더 수집본이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류의 기산 풍속도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을 상정해도 좋을 만큼 매우 흡 사하다. 그리고『조선풍물지』의 삽화와 가마의 방향이 다른 것 과 휘장 한 가운데 마치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둥글게 공간 표 현이 된 것 외에는『조선풍물지』삽화를 위시한 기산풍속도류 세 본 모두 가마의 모양과 인물 표현 등이 흡사하여 동일 이미지의 기산풍속도를 본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만하다.
덧붙여 신부가 탄 사인교 가마의 경우는 호랑이 가죽을 가마 지붕에 덮어씌운 표현만 제외하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 한국 기독교박물관 매산 김양선본 등과 닮아 있어‘가마’를 소재로 한 기산풍속도가 다양한 화면으로 변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풍물지』에 실린 가마의 또 다른 예로는‘고관의 행차 1ㆍ2’ 라는 제목으로 늙은 재상이나 고위 관료들이 행차할 때 탔던 軒과 籃輿의 모습과‘왕족의 행차’라는 제목 있다. ‘軒’과‘籃輿’의 경우는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본, 기산풍속도로 추정되고 있는 기메본, 헤르만 산더 수집본 등에서 비견될 만한 예를 찾을 수 있어 기산풍속도에 그려진 가마의 이미지가 지속 적으로 재생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가마’와‘가마꾼’의 이미지는 당시 조선 을 방문한 칼스를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전통혼례와 운송수단을 나타내는 조선 풍속의 하나의 표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준근이 기산풍속도 제작시 외국인들의 취향에 부합하기 위해 사인교, 초헌, 남여, 평교자 등 다양한 형태의 가마를 소재로 하 였을 당시의 제작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가마를 이용하지 않은 나들이하는 모습 역시『조선풍물지』에 삽화로 실려 있다. 첫 번째로 <마님과 여종>은 장옷을 쓴 마님과 보따리를 들고 따라 나선 여종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선의 여 성들이 장옷을 입고 외출하는 풍습은 외국인들에게 마치 아랍문 화권의 여성들이 차도르를 쓴 것과 같은 매우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던 듯한데, 각 소장처의 여러 기산풍속도와 더불어 여 행기, 사진 등에서도 자주 다루어졌다.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쓰 고 외출하는 조선 여성의 낯선 풍습은 가슴을 드러낸 채 가사일 에 바빴던 하층 여성들과 달리 몸종을 데리고 길에 나서는 상류 층 여성의 표상이었다. 칼스는『조선풍물지』에서는 조선의 여성 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큰길에서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서니 처음으로 우리는 몇 명 의 여자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대부분 머리 위에 녹색 장 옷을 썼고 장옷의 주름진 부분이 얼굴 위까지 내려 왔으며 눈 만 내놓고 있었다. … 신분이 낮은 다른 여인들은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며 집 문 앞에서 서성거리거나 집안일을 하고 있었 다. 장옷을 가리지 않은 그들의 얼굴은 천연두를 앓은 흔적과 중노동의 비천한 대우를 받은 빛이 역력하다. 어깨 위로 입는 짧고 꽉 끼는 옷은 젖가슴을 드러나게 했고 그들의 누추한 옷 과 모양새 없고 불결한 곳에서 사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조 선 여인들에 대해 좋지 못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외에도 장옷에 대해서는 새비지 랜도어의『고요한 아침의 나 라』, 비숍의『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등을 비롯한 여러 여행기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새비지 랜도어의 글을 인용하면,
“하층 계급은 예외이긴 하지만, 대체로 어여쁘다고 알려진 조 선의 여성들은 격리되어 생활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외출이 거 의 허락되지 않는다. 외출할 때 그들은 몰타(Molta)의 여성들 이 쓰고 다니는 것과 매우 흡사한 모양의 희거나 푸른색의 장 옷으로 얼굴을 가린다.”
헤르만 산더 수집본의 경우는 장옷, 쓰개치마, 삿갓 등 여성들 이 외출할 때 신체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였던 세 가지 모두가 한 화첩에 다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곡식을 이는 켜처럼 큰 삿갓을 쓰고 나온 여성의 모습을 그린 <해쥬녀인늘삭각쓰고가는 것>의 장면은 헤르만 산더가 수집한 <평양의 여성이 쓰는 모자> 라는 제목의 사진과 거의 동일한 모습이어서 그가 화첩을 주문 제작할 때 그의 수집품들 중에 있었던 사진이나 그림 등이 활용 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외국인들은 사회 분위기상 외출이 매우 어려운 조선 상류층 여성들의 폐쇄적인 상황을 온 몸을 덮어 쓰는 ‘장옷’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하류층의 여성일 경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조선풍물지』의 <여인의 나들이>라는 제목의 삽화는 패 랭이를 쓴 두 남성 중 한 명은 등에 봇짐을 이고, 다른 한 명은 긴 곰방대를 문 여성을 업고 길을 재촉하듯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눈만 남기고 온 몸을 감싸는 장옷을 입어야만 했고, 밤에나 잠깐 자유로운 외출이 가능했던 당시, 긴 곰방대를 문 젊은 여성이 남성의 등에 업힌 채 나들이를 한다는 건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제목은 <여인의 나들이>지만, 이는 유랑 생활을 했던 사당패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사당은 하급계층 을 상대하는 매춘부를 일컫는다. 거사는 사당과 부부관계를 맺 고 사당을 업고 다니며 옷과 화장품을 대어주고 밤에는 매춘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관계가 외국인에게는 낯선 것을 뛰어넘어 매우 해괴한 풍속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소재로 한 예를 기산풍속도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특히 서울역사박물 관의 <遊行賣淫>, 김양선본의 <負花娘去>, 스왈른본의 <거사사 당업고가는모양> 등은『조선풍물지』삽화의 표현과 흡사한 동일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장면 역시 기산풍속도의 이미지를 재생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칼스가 경기도 북부 지역을 여행하는 장면에 삽입된 <여행객> 이라는 제목의 삽화는 갓을 쓰고 부채를 든 남성이 봇짐 위에 아 이를 업고 앞서고 아내로 생각되는 여성이 뒤따르며 어딘가 가 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아버지의 등에 업힌 아이는 뒤에 있 는 어머니에게 뭔가 이야기하듯 뒤돌아보고 있다. 아내는 먼 여행길을 가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 걷는 데 거추장스럽지 않도 록 치맛자락을 왼편으로 돌려 끈으로 질끈 묶고 물품이 담겨 있 는 큰 상자를 머리에 인 채 한 손은 상자에, 다른 한 손은 앞서 가는 남편의 봇짐을 살짝 짚고 있다. 이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만 한 매우 흡사한 화면구성을 보여주는 예를 기산풍속도에서도 찾 을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본의 <夫婦行商>, 김양선본의 <博物 商夫婦>, 스왈른본의 <박물쟝사>는 그 대표적인 예로,『 조선풍물 지』와 달리 부부 모두 지팡이를 들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동일 이미지에서 비롯된 장면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부부행상을 소 재로 한 기산풍속도의 이미지가 매우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동일 이미지가『조선풍물지』에서는 <여행객>이라는 제목의 삽화 로 재생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Ⅳ. 생업활동 모습
『조선풍물지』의 삽화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물장 수, 나무꾼, 논에 물대기, 유기공장, 계란장수, 물방앗간 등 생업 에 관련된 내용을 담은 장면들이다. 우선 <물장수>라는 제목의 삽화부터 살펴보면, 상투를 틀어 올린 한 명의 남성이 두 팔을 벌려 균형 잡힌 모습으로 물동이가 달린 물지게를 지고 어딘가 를 가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에 물을 공급하는 전문 물장수가 있었는데, 보통 아침, 저녁으로 두 번씩 물을 길어다 배달해 주고 물값을 받아 생계의 수단으로 삼 았다고 한다. 물장수라는 소재는 기산풍속도에 자주 등장하는데, 같은 내용을 다룬 예로는 서울역사박물관본의 <汲水軍>, 김양선 본의 <汲水>, 스왈른본의 <물장샤> 등이 있다. 이 세 본에는『조 선풍물지』와 달리 두 명의 급수꾼이 등장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한 명은『조선풍물지』에서처럼 앞을 향해 있고, 다른 한 명은 마 치 물지게를 멘 뒷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뒤를 향해 있는 점 이다. 『조선풍물지』에 삽화로 실린 급수꾼은 이 세 본의 앞을 향한 급수꾼과 흡사한 표현을 보여줘서 이 삽화 역시 기산풍속 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Ⅳ. 생업활동 모습
물장수와 더불어 나무꾼 등 기산풍속도에는 지게를 이용해서 생업활동을 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서울역사박물관본에 서는 <옹기행상>이라는 제목으로 지게 가득 옹기를 싣고 행상하 는 부부의 모습이, 스왈른본에서는 <부샹>이라는 제목의 동일한 옹기행상 이미지가, <모군모양>이라는 제목으로는 다리가 짧은 지게를 지고 작대기를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募軍의 모습이, 기메본의 경우 옹기행상 2점을 비롯하여 생선장수 등 4점이나 지게를 이용한 생업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온타리오박물 관본의 경우도 옹기행상 1점을 비롯하여 쌀가마니를 진 모습, 갈 퀴ㆍ낫ㆍ도끼를 지게에 달고 나무하러 가는 모습, 굴장수의 모 습 등 총 6점의 지게를 이용한 다양한 생업의 장면이 들어있다. 특히『조선풍물지』의 <나무꾼> 삽화는 동베를린미술관본의 <나 무하여 오는 모양>과 유사한 표현을 보여준다. 동베를린미술관 본의 경우 두 사람이긴 하지만 손에 작대기를 들고 지게 가득 나 뭇가지와 갈퀴, 낫, 도끼 같은 도구들을 실은 채 산에서 내려오 는 모습이『조선풍물지』에서도 매우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지게꾼은 외국인들이 첫 발을 내딛은 개 항장을 비롯해서 시장이건 마을에서건 길을 가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소재였다. 어린 소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키 보다 높이 물건을 쌓아 지게를 진 모습은 외국인들에게 매우 이 국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여행기를 비롯한 당시 기록물을 통해 지게를 이용한 생업의 장면과 지게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을 살 펴볼 수 있다.
“그들은 등에 지는 이상한 선반으로 물건을 날랐다. 이들은 짐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축까지도 그 선반으로 나른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내가 이처럼 인력에 의한 운송 수단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조선처럼 그것의 중요성이 강조 될 만한 나라를 일찍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국토의 대 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 변변한 길 또한 거의 없 는 이 나라의 실정이 인력에 의한 운송 수단의 소형화와 다 양화를 가져왔다. 자동차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말 또한 거의 모두 정부 관리들을 위해 그 사용이 제한되어 있 기 때문에, 모든 운송품들은 자연히 상인들의 등짐을 통해 운 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 종단기」)
지게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게를 지 고 생업활동을 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외국인들의 문자 기록뿐만 아니라 그림과 사진 자료로도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우선『조선 풍물지』의 삽화처럼 나뭇가지를 비롯하여 옹기, 짚단, 곡식, 생 선, 닭장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물건을 높이 쌓아 올린 지게 꾼들을 어디서고 흔히 볼 수 있었기에 조선인의 생업활동을 표상하는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교통 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운송수단의 낙후성, 행상하는 백성들의 미천한 모습 등 조선의 비문명화의 표상으로서도 자주 거론되었 을 것이다.
농업과 관련해서『조선풍물지』의 <논에 물대는 모습>은 역시 기산풍속도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서울역사박물관본과 김 양선본의 경우는 모두 <田舍>라는 같은 제목으로 동일 이미 지이며, 기메본의 경우에는 1점은 앞의 두 박물관본과 좌우 방향 이 바뀌어 있을 뿐 역시 동일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메본에는 녹로 없이 두 명의 농부가 두레에 양쪽으로 끈 을 매어 물을 퍼서 논에 물을 대고 있는 다른 표현의 이미지도 들어 있다.
조선후기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논농사에서 물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위의 그림 모두 한 명의 농부가 용두레를 이용해서 짚으로 만든 거적 뒤의 논으로 물을 퍼 올리고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준다.『 조선풍물지』의 경우 물을 퍼 올리는 장면을 설명이라도 하듯 농부가 용두레를 쥐고 있는 상황을 앞에서 포착한 모습으로 그린 반면, 서울역사 박물관과 김양선본은 용두레로 물을 퍼 올리는 힘이 들어간 양 팔의 모습을 강조하듯 측면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기산풍속 도에는 이처럼‘논에 물대는 모습’외에도‘소를 이용한 밭갈이 모습’,‘ 씨 뿌리는 모습’,‘ 풀 베는 모습’,‘ 모내기 모습’,‘ 가래 질하는 모습’,‘ 타작하는 모습’등 농사와 관련된 이미지들이 자 주 등장한다. 이는 아직도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전 통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조선에 대해 타자화된 시각을 갖 고 있던 제국주의를 앞세운 열강들에게는 산업기반이 전무한 힘 없는 식민지로서의 이미지를 전달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수공업과 관련해서『조선풍물지』의 <유기공장>의 삽화를 살펴 보면, 한 사람은 틀에 감긴 가죽 끈을 번갈아 잡아당겨 줄대를 돌리고 있고, 한 사람은 갈이칼로 그릇의 형태를 잡고 있는 모습 이 표현되어 있다. 이 장면은 얼핏 보면 기산풍속도에 등장하는 목기 제조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목기 제조와 관련해서는 서울 역사박물관본의 <木器製造>, 스왈른본의 <퉁그릇 깎고>, 함부르 크민족학박물관본의 <목헤파는모양ㆍ갈이쟝이>, 기메본의 <목긔 갈이쟝이> 등 여러 본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졌던 소재이다.
칼스는『조선풍물지』에서 황해도와 평안도를 여행할 때 납천 이라는 마을을 방문하고 그 곳이 놋쇠공들의 거주지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부분에 이 삽화를 실었는데, 흡사한 표현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목기 제조 장면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놋그릇을 만드는 모 습으로 소재를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유기공장>처럼 수공 업에 관련된 장면은 기산풍속도에서 농사와 관련된 장면만큼이 나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널빤지를 자르는 목공의 모습’,‘ 금 은을 세공하는 모습’,‘ 망건을 만드는 모습’,‘ 가죽신을 만드는 모습’,‘ 나막신을 만드는 모습’,‘ 갓을 만드는 모습’,‘ 대장간 모습’, '독 만드는 모습', ‘활 만드는 모습’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 이다. 수공업에 관한 것은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물품들을 만드는 모습을 담은 점에서 당시 조선의 풍속뿐 만 아니라 산업경제를 읽어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산업혁명이 라는 역사적으로 큰 흐름의 변화를 겪고 생산원료와 물품 판매 시장 확보를 위해 앞을 다투어 식민지를 개척하였던 제국주의 열 강들의 시각에서 기계식에 의한 대량생산이 아닌, 서너 명이 옹 기종기 모여 앉아 작업하는 가내 수공업의 모습은 정겨움 뒤로 비문명화와 미천함의 표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조사차 방 문한 이방인에게 이러한 모습은 조선의 실정을 알리는 자료로 좋 은 소재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Ⅴ. 놀이하는 모습
『조선풍물지』에는 그네타기, 팽이놀이, 활터, 연날리기 등 흔 히 민속놀이 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삽화로 실려 있다. 기산풍 속도에는 이들 소재를 비롯하여, 제기차기, 공기놀이, 널뛰기, 쌍 륙, 바둑, 장기 두는 모습, 씨름, 윷놀이 등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다. 생업활동을 할 때가 아닌 조선인들의 생활 모습을 담으려 는 의도에서였을까? 조선의 풍속이라는 명제 하에 전통놀이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은 매우 지대하였던 듯하다.
당시 사진 또는 풍속엽서에는 조선의 전통놀이를 하는 아이들 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가 실제 들판에 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은 것이 아니라 연 출 사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연날리기의 경우 하늘 높이 연을 날리기 위해서는 확 트인 넓은 공간이 필요 하다. 『조선풍물지』에 실린 <연날리기> 장면은 동베를린미술관 본의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 높이 떠 있는 방패연의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두 작품은 등장인물의 위치가 다른 것을 제외하 고, 댕기머리를 한 아이와 갓 쓴 어른이 각기 방패연을 날리고 있고, 그 주변에 구경하는 2명의 아이들이 있는 등 전체적인 화 면구성이 동일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 울역사박물관본을 비롯해서 김양선본, 스왈른본 등 다른 대부분 의 기산풍속도에 등장하는 연날리기 장면에는 연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김양선본에는 연줄조차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 세 본의 이미지 표현은 거의 흡사한데, 가운데 아이가 연의 얼레를 들어 연실을 조정하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고 양쪽 에 각기 한 명씩의 아이들이 앉아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이와 거의 흡사한 사진을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에 근무하였던 하 야시 타케이치(武一)가 촬영한 것을 바탕으로 1892년 일본에 서 간행된『朝鮮國眞景』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사진은 1892년 첫 방한한 이폴리트 프랑뎅의 사진아카이브에서도 살펴볼 수 있 어 이 사진이 외국인들 사이에서 조선 풍속의 자료로 수집되었 음을 엿볼 수 있다.
연날리기 사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네 명으로, 등장 인물의 수만 다를 뿐 앞서 언급한 기산풍속도처럼 연의 모습이 표현되지 않은 채, 한 어린이가 얼레를 들고 가운데 서 있으며, 주변의 아이들은 마치 하늘에 연이 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이 사진이 주문에 의해 연출된 것이라는 점은 아이들이 날리는 연을 쳐다보듯 허공을 응시하고는 있지만,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시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프랑뎅의 사진아카이브에는 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연날리기 외에도 남사당놀이, 돌치기놀이 등의 장면에도 등장하고 있어 이 사진들이 누군가에 의해 연출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 진관에서 촬영된 사진은 여러 외국인들의 사진첩과 여행기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내용도 아이들의 놀이뿐만 아니라‘상복을 입은 노인’,‘ 경비대장’,‘ 금관조복’,‘ 옹기장수’,‘ 서당의 훈장’, ‘장옷 입은 여인’,‘ 엄마와 아기’,‘ 엿장수 소년’,‘ 젖가슴을 드 러낸 여인’,‘ 술 마시는 남성들’등 다양하다. 이러한 소재들 은 기산풍속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들이다. 이는 김준근 의 수출화로 그려진 기산풍속도가 외국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소 재를 잘 파악하고 그려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기산 풍속도의 소재들이 직접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하였다 하더라도 이미지 표현에 있어서는 직간접적으로 사진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다시 조선 풍속을 주제로 제작된 사진에 영향을 미치는 등 기산풍속도와 사진과의 관계가 쌍방향적인 영향 속에서 형성되 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사진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해 내기 어 려운 부분들이 기산풍속도에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재현될 수 있었기에 외국인들은 사진을 수집하는 한편, 기산풍 속도를 사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1880년대부터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에 의해 운영된 사진관 을 중심으로 제작된 이러한 조선 풍속 이미지들은 풍속 엽서로 도 제작되었다. 이는 일본을 위시해서 서구로도 광범위하게 유 통되었다. 사진관에서 재현된 조선 풍속의 이미지들은 대체로 근 대 이전의 조선의 모습을 담고 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아이들을 동원하여 전통놀이라는 이름 아래 사진관에서 작위적으로 만들 어진 전근대적 조선 풍속의 이미지들은‘미지의 세계’조선을 소 개하는 풍속 엽서로까지 제작되면서 조선의 낙후성과 비문명화 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해 내었던 것이다. 물론 이 사진들 이 외국인들에게 낯선 조선을 이해하고 관심을 갖게 하는 데 다 소의 역할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기록물 들이 조선에 대해 아주 단편적인 것만을 나열하는 전달자로서 왜 곡된 시선을 심는 데에도 일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투전하는 모습과 싸우는 모습, 기생들과 어울려 노는 한량의 모습, 도살꾼 이 개를 끌고 가는 모습 등 조선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장면들이 기산풍속도에 자주 등장하였다는 점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Ⅵ. 부정적 또는 기이한 모습
앞서 살펴본 이미지들 외에『조선풍물지』에는 싸우는 모습, 기 생, 상주 등의 조선 풍속 이미지들이 삽화로 등장한다. 싸우는 모 습, 기생 등은 조선 풍속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조선의 부정적인 모습, 선입견을 심어주는 이미지의 표상으로서 그려졌던 것 같 다. 상주 같은 경우는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모습으로 비춰 졌던 듯 기산풍속도뿐만 아니라 사진자료로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면 각각의 장면을 기산풍속도와 비교하며 살펴보자. 『조선 풍물지』에는 <거리에서 싸우는 모습>, <거리의 풍경>이라는 제 목의 삽화가 2점 있다. 조선인들끼리 싸우는 모습은 스왈른본에 도 <쌈하고>, <쌈하난모양>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조선풍물 지』의 <거리에서 싸우는 모습>은 갓을 쓴 사람들이 갓과 두루마 기를 벗어 던지고 서로의 상투를 쥐고 싸우는 모습이고, <거리의 풍경>은 가족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아버지로 보 이는 남성이 한 손에는 방망이를, 한 손에는 딸로 보이는 젊은 여성의 댕기머리를 쥐고 있고, 그 젊은 여성은 땅바닥에 누워 손 사래를 치고 있다. 그 뒤로 어머니로 보이는 늙은 여성이 이 둘 을 말리고 있는 모습이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스왈른 본의 경우 등장인물의 수와 화면구성은 다르지만, 『조선풍물지』 에서처럼 모두 상투를 쥐고 싸우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칼스는『조선풍물지』에서“사람들이 싸우기와 돌팔매질을 좋아 하기 때문에 평양은 위험한 곳이라고 나는 알고 있었지만, 적대감 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당시 돌싸움 의 전통이 남아 있던 조선의 풍속을 이야기하는 한편, 당시 조선 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조선인의 성향이 싸우기 좋아하는 민족 이라는 선입견과 편견이 이미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칼스를 위시한 외국인들의 인식은『조선풍물지』의 <노상강도>의 장면에 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는『조선풍물지』에서“주막에서 우리는 여행자들이 길가에 횡행하는 산적들에게 강도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갓을 포함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것까지 빼앗긴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강도짓이 극도로 잔인했다고 표현했 다.”면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부분에 <노상강도>라는 제목으로 칼 과 창을 든 험상궂게 생긴 두 명의 남성과 봇짐을 내려놓고 줄행 랑을 치고 있는 한 명의 갓 쓴 남성의 모습을 삽화로 실었다.
『조선풍물지』의 <기생> 삽화는 두 기녀가 모두 머리에 戰笠을 쓰고 허리에는 전대를 두르고 마주 서서 버선발로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이다. 기생은 빨래, 절구질, 다듬이질, 바느질, 실뽑기, 길쌈 등을 하는 하층민의 여성을 표현한 장면만큼이나 기산풍속 도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서울역사박물관본의 <娼妓劍舞>를 위시해서 함부르크 민족학 박물관본의 <기생검무하는모양>, 스왈른본의 <기생검무추고>, 김 양선본의 <劍舞妓> 등 춤을 추는 기생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 장한다.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본처럼 북, 장고, 해금, 피리 및 태평소 한 쌍의 전통적 악기 편성법으로 이루어진 三絃角의 반 주에 맞춰 검무를 추는 모습을 한 화면에 담는 경우보다는 대개 는 서울역사박물관본처럼 삼현육각의 모습을 생략한 채 두 명이 마주 보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기산풍속도에 는 기생의 춤추는 모습뿐만 아니라 뭇 남성들과 골패하는 모습,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 술상을 차려놓고 질펀하게 노는 모습, 한량들과 나들이하는 모습, 한량들과 생황과 해금을 연주하는 모습 등 기생들의 다양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 한 기생의 모습은 당시 사진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재생되었는데, 특히 풍속 엽서의 단골 소재였다. 하층민 여성들의 고된 일상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기생의 모습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이 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이방인들이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조 선의 여성은 대개 기생이었으며, 또한 여성보다는 남성 외국인 들이 더 많이 조선을 방문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조선 여성은 여행기에서건 기산풍속도에서건 장옷을 뒤집어쓰거 나 빨래하는 하층민 여성과 함께 기생의 이미지로 표상되었던 것 이다.
『조선풍물지』에 실린 <상주>의 모습과 거의 흡사한 이미지가 기산풍속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상례에 관련해서 喪人이 地官 을 모시고 산으로 가는 모습을 그린 <喪人求山>, 喪中에 시묘살 이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모습을 그린 <孝子居墓>, 짚 신, 밥, 반찬, 돈 등을 올린 상을 차리고 죽은 이의 흐트러진 혼 을 위로하는 <終命招魂>, 가족들이 머리를 풀고 곡하는 모습을 담은 <初喪> 등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에만도 상례에 관련된 장 면이 꽤 많이 포함되어 있다. 덧붙여 김양선본, 스왈른본 등 다 른 여러 기산풍속도에도 상주에 관한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다. 당시 외국인에게 서구의 풍습과는 다른 조선의 상례 풍습과 함께 삼베옷을 입은 상주들의 모습이 독특해 보였던 것 같다. 칼 스는『조선풍물지』에서 상주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였 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 사람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의상과 관습에서 현격한 차 이점을 보였다. 가장 놀라운 모습 중의 하나는 삼베로 만든 상 복을 입은 사람인데 새끼줄이나 거친 끈으로 허리를 동여매었다. 머리엔 가볍고 가늘게 짠 바구니 모양의 모자를 쓰고 그 밑 의 머리는 완전히 가렸다. 두 개의 막대기 위에 삼각형 모양 의 삼베 천을 붙인 작은 가리개를 입 앞에 들고 있어서 얼굴을 더욱 감췄다. 아무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들도 거 의 말하지 않았다. 마치 구경꾼들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상 주는 관심을 두지 않고 터벅터벅 걸었다.”
칼스가 상주에 관해 서술한 내용은 그대로 삽화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조선풍물지』의 삽화와 거의 흡사한 이미지가 헤르 만 산더가 수집한 사진 속에서도 찾을 수 있어 거친 삼베옷을 입 고 큰 삿갓을 쓴 상주의 모습이 이방인들에게 조선의 이국적 취향을 드러내는 데 좋은 소재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조선풍물지』에 등장하는 삽화를 중심으로 당시 기록물 과 함께 기산풍속도를 비교하며 소재와 화면구성 등을 비교하고, 특정 이미지가 표상하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19세기 말 20 세기 초 기록물에 등장하였던 조선 풍속의 이미지는 비록 조선 을 직접 방문하고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며 경험한 이들에 의한 기록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택한 소재와 표현방식은 그들이 갖고 있던 조선에 대한 기본적인 시선, 서양과 동양 = 문명과 야만을 통해 타자화된 조선의 모습이라는 제한된 틀 속에서 이루어졌음 을『조선풍물지』에 실린 삽화들의 면면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이 김준근이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기 산풍속도를 통해 이미지화되었으며, 직접적으로『조선풍물지』의 삽화를 비롯한 외국인의 기록물뿐만 아니라 사진과 풍속엽서에 까지 재생, 변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Ⅶ. 맺음말
근대 조선 풍속 이미지의 재생과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항장을 중심으로 외국인에게 판매되었던 기산풍속도 이미지를 중심으로 칼스의『조선풍물지』와 비교 분석해보았다. 『조선풍물지』삽화들은 소재의 유사성을 넘어 기산풍속도의 이미 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때로는 동일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생하 고 때로는 화면구성상에 변화를 주어 변용시켰음을 살펴볼 수 있다.
‘개항장 풍속화’,‘ 수출화’로 일컬어지는 김준근의 기산풍속도 는 기존의 연구를 통해 급변하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사 의 전개 속에서 조선말기 풍속화의 새로운 맥을 만들어나가며 조 선시대 풍속과 풍물의 이모저모를 담은 이미지의 집합체라는 점 에서 높은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에게 판 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량 생산된 점에 주목하면, 기산풍속도 소 재의 선택에 있어 외국인이 선호하는 주제를 바탕으로 구성되었 을 내용상의 제한된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순 수 감상용 회화가 아니었던 기산풍속도가 제국주의를 앞세운 열 강들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게 자료수집을 위한 시각매체의 역 할을 하였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의 풍속과 풍물을 타 자화한 이들의 시선은 결국 기산풍속도에 반영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외국인들이 방한 기념으로 남긴 여행기와 그림 및 사진 자 료 등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다. 결국 개항기 일본을 비롯한 열 강들의 제국주의적 발상에 의한 조선 풍속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이방인들에게 조선 풍속의 종합선물세트 역할을 하였던 기산풍 속도의 탄생에 일조하였던 것이다. 기산풍속도에 등장하는 조선 풍속들은 김준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하였겠지 만, 간간히 비교한 사진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사진 으로 이미지화된 것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제국주의를“식민지와 식 민지를 지배하는 군인, 대포들에 관한 것만이 아니고, 관념과 형 식, 이미지들과 상상에 대한 것”이라고 정의한 것에 부합한다. 즉 기산풍속도가 조선시대의 풍속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민속학적 자 료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한편, 근대의 기록물로서 당 대 사람들의 의식과 인식을 바탕으로 한 급변하는 시대의 내용을 담는 데는 근원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기산풍속도가 개항 이후 변화하는 조선의 모습을 담기보다는 전근대적인 소재 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기산풍속도의 이미지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타 자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 풍속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 며, 이는 칼스의『조선풍물지』같은 기록물들을 통해 재생되었고, 헤르만산더의 수집본 화첩이나 中村金城의『朝鮮風俗畵譜』같은 기록물을 통해 변용되었던 것이다. 즉 조선 풍속이라는 광범위 한 소재와 이미지 표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조선 풍 속에 대한 이미지들은 기산풍속도를 바탕으로 흡사한 화면 구성 속에서 동일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이는 역으 로 당시 이방인들에게는 민족지적 역할을 한 기산풍속도가 근대 조선 풍속 이미지의 재생과 변용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반 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