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에 관한 시모음 4)
얼음집{2} /김지향
~복사인간
여기서 비스듬히 누운 길 안내판을 따라
새참 먹을 시간만큼만 비스듬히 가면
그 집은 있었다
그 집에선
뼈들이 부딪치는 독한 음악이
머리칼을 일으키며 으스러진다
우르르 쾅, 음악이 일어날 때 마다
집 전체를 채운 눈뿐인 컴퓨터엔
꼬리 긴 기호가 입을 실룩거리며 튀어나오고
무인 카메라가 문 두들기는 자를 안아 넣는다
잠자는 나무처럼 모로 누워
모니터 키만 누르고 있는 그 아이는
마음이 없다 나이도 없다
몸에선 풀내가 흙내가 불똥내가 나기도 한다
아이의 뇌세포 기억장치를 돌려본다
앞으로도 뒤로도 마음대로다
아, 그던데 언젠가 우리 집에 살았던
그 사람의 신상명세서가 ,그때 그 사람이
손으로 적었던 삶의 궤적이 가족사가
그 아이의 기억장치를 통해
스크린처럼 모니터 화면에 찍혔다 사라진다
그때 소주잔을 들이키고 허름한 옷가지 둘러멘 채
길에서 밤을 밝힌 주벽까지
모두 불러와 컴퓨터에 모아놓고
이제보니 사람은 안보이네
날렵한 손가락만 소리가 탁,탁, 부러지는
모니터 키 앞에 남겨두고
사람은 투명유리가 되었나
하늘로 땅으로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그 사람의 완전자유가
투명인간으로 복사 되었나
(내 기억에도 복사된 그 아이는
옛날 우리 집에 분명히 살았었다)
오늘도 그 집에선 녹아 없어질 얼음 사람을
‘비밀이야, 비밀이야, 말하는
컴퓨터 화면이 연거푸 새로 만들어
다락 속에 감추고 또 감추고 있었다.
얼음 인간 /김종제
얼음이 녹으면서
사체 한 구가 드러났다
그곳은 빙하가 깔려있었고
만년설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옛날에는 고기 잡던 강물이 있었고
나무들 푸르른 산이 있었다고 했다
그곳에 잠깐 소풍을 나왔다가
발을 헛디딘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던졌을 것이라고
사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추측을 했다
나중에 몇몇 증거로 밝혀진 사실이지만
사내가 죽은 후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고
폭설이 몇 달 쏟아졌다고 했다
피 빠져나가기 전에
살 썩어 흩어져버리기 전에
순식간에 얼음이 된 저 사내
얼음의 혀와 눈을 가진 차가운 저 사내
현세의 인간이 아니었다고 한다
철기시대의 늪지대나
이집트 사막의 지하동굴보다 오래된
선사시대의 유물을 가지고 있었다
죽기 전에 저 사내가
말라비틀어진 꽃을 손에 지니고 있었다
얼음으로 뒤덮히기 전에
불 같은 사랑을 품었는지
뜨거운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자
찬물 흐르는 자리에서
붉은 꽃대가 쑥 밀치고 올라왔다
겨울얼음이 얼어버린 냇가 /정세일
겨울얼음이 얼어버린 냇가에
누나는 우리집 빨래를 가지고 갑니다
한쪽 얼음을 깨어놓고 넓적한 돌을 놓은곳에서
겨울 빨래를 하는 누나의 빨래방망이소리는
강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로
겨울깊은 잠이 들려고 하는 냇가건너 오두막집
지붕위에 있는 모자같은 눈송이들을 흘려
내리게 하고 있습니다
겨울 얼음이 누나의 하얀 마음처럼
아침햇살처럼 빛나는 곳에서
누나는 강들에게 속삭이는 이야기로
강들으 언가슴을 녹이고 있습니다
입으로 손을 녹이는 호호 부는 소리에
강속에 잠겨있는 돌들도 자신들도 추울세라
가슴에 흐르는 물을 이불처럼 끌어당겨 살며시
덮어보고 있습니다
겨울얼음이 얼어버린 냇가에서
누나의 마음은 언제나 얼음처럼 맑았습니다
겨울 물흐르는 소리가 그리도 마음이
따듯한 것을 알고 있는 누나는
빨래를 할 때면 언제나
강물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으니까요
어린 내가 누나를 부르려 강가에 가면
누나는 겨울 물소리를 들려주려고 언제나
빨래 방망이로 겨울 강을 두둘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누나가 겨울 강의 마음을 어루만지땔마다
손도 빨개지고 볼도 귀도 빨개지는 모습을
지켜볼수가 있었습니다
가을호수에 얼음 구름 /이영지
햇볕이
한가로이
내리는 가을호수
그림자 만들기의 내기를 하는가봐
구름이 거울속에서 얼음궁전 짓는다
그
안에
학한마리
얼음이 미끄러워
날다가 내려앉다 오르며 미끄럼을
타는듯 떴다 앚았다 얼음이듯 춤으로
고기가 물속에서 장단을 맞춰가는
때마다 동그라미 물들이
춤을춘다
지금막
학한마리가
얼음딛고 물차며
얼음옷 /김윤자
누가 널더러
왜 그리 차가우냐고 묻거든
삼월에 눈 뜬
매화꽃처럼 그냥 웃거라
왜 그리 두터우냐고 물을 때도
말없이 드러누운
고산의 산그르메처럼 그냥 웃거라
하얀 침묵으로
죽음처럼 고요해도
너는 겨울의 어머니인 것을
너를 덮고 누운 대지가
너로 인해 허문 등성이를 메운 산하가
너의 따슨 품에서 새근거리며
우주를 꿈꾸고 있는 것을
그 자리에 다 놓고
빈 걸음으로 떠날지라도
가슴을 울리던 생명의 박동소리
그 한줄기 행복에 그냥 웃거라
개울 얼음 /손계 차영섭
얕은 물에 얼음이 앉고
깊은 물엔 차마 무서워
접근을 못 한다
흐르는 물엔 얼음이 흘러가버리고
잔잔한 물엔 살포시
얼음이 엉덩이를 붙인다
얼음이 처음 정착할 땐 애로를 느끼고
일단 정착하면 겹 붙이기를 한다
추위가 흐르는 물에 헤엄치다가
돌멩이라도 있으면 얼른 붙잡고
집을 짓는다
얼음은 물 위에 떠서 수상집이 되고,
그 집 속에서 물고기들이 산다
물 위에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얼음이 쉽게 건축을 한다.
강이 얼면 고무얼음이 되어 출렁이고 /정세일
겨울이 오면 강바닥이 얼음이
얼어서 우리는 언제든 오후가 되면
고무 얼음을 타러 강가로 갑니다
겨울 오후가 되면 강을 자신의 갈라지는
얼음을 거미줄처럼 얽어 매여서 고무 얼음이 되어서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겁없이 걸어가면
출렁 출렁 거리는 강의 가슴을 밟고 가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을 수가 없습니다
흔들거리는 두려움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강을 건너가는 날은
누나와 나는 함께 손을 잡고
고무 얼음을 살며시 밟으면서 한 걸음씩
강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잡은 채
서로 발걸음을 조심거리며 강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겨울강가 그것도 꽁꽁 얼은 가슴이 풀리면
우리는 늘 강가에서 고무 얼음을 타면서
서로의 두근거리는 가슴을 멈추지 못해
누나와 나는 서로 손을 굳세게 잡곤 했습니다
물도 깊고 강언덕을 먼 곳에 있는데도
어린 나는 누나의 손을 잡으면서 무서움을
이기며 강을 건너가곤 하였습니다
우리의 가슴이 강처럼 꽁꽁 얼어서
가슴도 새 하얗고
물소리가 늘 가슴에 들리던 그때는
누나는 나의 늘 두근거리는 나의 두려움을
언제나 두손을 잡으면서
고무 얼음을 타면 나에게 늘 용기를 주곤 했습니다
고무 얼음은 흔들거리기만 한뿐
깨지거나 갈라지지 않는다고 늘 나에게 용기를 주었지요
얼음고기 /김귀녀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잠자리에 누우니
슬픈 울음소리 내 귀에 들려온다
골바람이 바다를 찾아
동쪽으로 내려오는 동막골 저수지
폭설에 살아남아
서걱 이는 갈대숲에
새벽꿈을 꾸고 있는
맑고 투명한
빙어 눈물
지난 저녁, 그 전부를 삼키고 말았다
때마다 구워내던
갈치, 꽁치, 고등어의 함성 소리도
늦은 밤
뒤늦게 가슴이 젖는다
오! 주님
나를 용서 하소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합리화 하려던 나를 용서 하소서
얼음강 /황인숙
한 겨울에는 강물이 언다
한낮에는 햇빛 떠오르면
눈부시다 강위에서는
아이들이 스케이트 타며 즐겁고
강 밑에는 송사리가 붕어가 잉어가
헤엄치며 낚시꾼들은 얼음을 깨고
낚시를 하면 팔뚝만한
고기들이 딸려 나와 팔딱 거린다
낚시꾼들은 입을 떡 벌리고
딸려 나온 고기가
낚시꾼의 입 으로
빨려들어 갈 거 같다
얼음 /김병훈
얼음은 녹아보는 게
유일한 꿈이자 사랑이다
얼음은 온몸이 눈물이다
얼음은 온몸이 사랑이다
얼음은 온몸으로 시를 쓴다
얼음처럼 사랑하다, 죽으리라
얼음처럼 시 쓰다, 죽으리라.
얼음골에서 견디다 /김세영
적도의 심장이 화차처럼 이글거려도
내 몸이 녹아내리지 않는 것은
북해의 냉류가 등줄기를 냉각코일처럼 감고 내려와
골짜기에 얼음골을 이루고 있음이다
산짐승의 울음소리에 달뜨지 않는 것은
정수리 위 오로라의 서기瑞氣가
온몸을 감싸고 있음이다
열기의 박동소리가 능선의 나뭇잎을 흔들어도
뜨거운 핏물이 윗계곡의 바위를 달구어도
암반의 고드름은 흰 건반처럼 가지런하다
저물녘 암벽의 견고한 그림자로
골짜기 저수지의 얼음판 위로
별빛의 징소리를 내며 건너오고 있다
열대야의 밤에도 남극의 펭귄처럼
불면의 맨발로 빙판 위에 서서
몽당날개지만 파닥이며 그를 기다린다.
얼음 이야기 /김남조
서양의 사랑은
활활 불타서 재를 남기고
동양의 사랑은
서로 스치며 녹아
물이 되어 하나에 이른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남, 북극의 만년설은
깜짝 놀라는
선연한 청옥빛인 걸
조금 부수어 팔기도 하는데
이를 수입한 나라들에선
작게 썰어
칵테일잔에 띄운다 한다
보통 얼음보다
네 배를 더디 녹으며
수정주사위 같고 신기하여
사람들은 술도 잊은 채
지켜본다던가
광석이면서
본질은 물이라
차갑고 투명한 물의 곤충들이
빽빽이 붐비며 꿈틀대고
실오리만한 균열에도
몸을 푸는 물방울들이
작은 운하처럼 운집하리라
소리없이 움직이는
공장 같으리
두 얼음 세 얼음이
스치고 녹아 물이 되어
끝내 하나에 이르듯
우리도 그리 된다면 좋을 것을
....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