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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묵상글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 내가 뜻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으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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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가 뜻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으로
안토니오는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정적인 평가의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있는 곳에 만족치 못하고 부적응한 변덕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긴 것은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성덕과 열성 때문이었습니다.
더 잘살아보려는 거룩한 원의 곧 뜻에 따라 옮긴 것으로
그뿐 아니라 성인들 가운데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그의 뜻이었다면 그의 뜻이 아닌 것이 그의 일생에 더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일생은 뜻하지 않은 일이 많았던 한 생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한 생을 요약하면
뜻하지 않았던 한 생인데
하느님 뜻이었던 한 생입니다.
자기 뜻에 따라 작은형제회 회원이 되었고,
자기 뜻에 따라 모로코로 순교하러 갔지만
그의 뜻은 병으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향 포르투갈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배는 풍랑으로 인해 고향이 아니라 이탈리아로 갑니다.
이 풍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곳에서 조용히 은수자로 살고자 하였는데
참석한 서품식 강론자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안토니오가 강론하게 됐고 이로 인해 설교자가 됩니다.
이 갑작스러운 일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아무튼 그가 뜻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설교자가 되고, 관구장도 되고, 프란치스칸 최초의 신학 교수가 되었는데
그 이후 그의 삶은 서른여섯의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이었습니다.
흔히 열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불에 타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가요 신학자였지만 오늘 지혜서의 말씀처럼
기도에서 얻은 지혜로 설교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나는 기도를 올려서 지혜를 받았고, 하느님께 간청하여 지혜의 정신을 얻었다.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주겠다."
이것은 또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신학 교수직을 허락하며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나의 주교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습니다.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았고,
그 영의 불이 활활 타올랐으며 그래서 기도의 영으로 가르치고,
헌신의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 ‘뛰어난 설교가’요 ‘곤경 중의 전구자’로 인정합니다.
지금 치면 대학자가 강단에만 서지 않고 서민들 가운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 뜻이면 가리지 않고 무엇이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게는 너무도 존경스럽고 닮고 싶은 것인데 여러분에겐 어떻습니까?
내가 뜻하지 않은 그러나 하느님께서 뜻하신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을 안토니오에게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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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혹시 레밍(lemming)을 아십니까? 어느 정치인이 우리나라 국민을 빗대서 ‘레밍’이라는 표현을 써서 거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나그네쥐라고 불리는 이 레밍은 자살하는 쥐로도 유명합니다. 일정 수 이상의 개체가 밀집하면 메뚜기 마냥 갑자기 행동 양식이 바뀌어서 떼를 지어 무작정 몰려다니는 기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이가 바닥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행동이지만, 한번 떼를 짓는 순간 무작정 앞을 향해 직선으로 우르르 몰려가기만 한다는 게 이상한 점입니다. 이러다 보니 땅끝 해안 절벽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우르르 떠밀려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살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가 미화되어서, 개체군의 밀도가 높아지거나 먹이자 부족해지면 늙은 쥐들이 후손을 위해 스스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단지 습성이었고,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뒤따르는 다른 쥐에 밀려 떨어질 뿐이었습니다.
고귀한 동물처럼 생각했지만, 사실 레밍은 군중심리로 인해 비이성적, 비합리적 행동을 생각 없이 집단으로 하다가 파국적 선택으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때로 남들처럼 살려고 합니다. 나만의 삶이 아닌 너의 삶, 그리고 그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나답게 살지 않을 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작정 앞으로만 갈 뿐입니다. 혹시 레밍처럼 절벽 아래까지 무작정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남들의 삶이 세상의 뜻만을 따르는 삶입니다. 남들처럼 풍요와 안정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는 나만의 삶을 용기 있게 선택할 수 없게 됩니다. 끔찍한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잘 아는 율법의 내용을 뛰어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살인해서는 안 되나.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율법 내용의 준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서도 안 되고 또 ‘바보!’라고 말해서도 안 되며, ‘멍청이!’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아닌, 어떻게든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나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남들처럼만 살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남들도 다 그렇다면서 그렇게만 살게 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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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결정했어도 행동하지 않았다면 결정한 게 아닙니다(토니 로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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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 5,20)
우리는 여전히 산상 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나라’와 관련짓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의로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룸은 산상설교의 핵심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 앞세워 “의로움”을 촉구합니다. 그그리고 이 설교의 중심인 6장에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들의 의로움에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갈라 3,11),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여섯 가지 대당 명제를 통해 제시하시는데,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옛 율법의 ‘살인’을 구체적 행동의 결과로 드러난 살인만이 아니라, 원리상 살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면적이고 근본적인 동기까지도 포함시키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시키십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물론, 모든 ‘성’(화)냄이 살인인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화’냄도 있고, 교정을 위한 ‘성’냄도 있고, 단순한 습관이나 짜증의 ‘성’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회서>에서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고 했듯이, 의도되지 않더라도 “혀”로 인하여 죽는 이들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율법의 근본정신이 “화해와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 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자 되기를 바라십니다. 동시에, 형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이라는 말은 자신만이 아니라 형제를 위하여 화해와 사랑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카인에게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8)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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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준비합니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 “능가하지 않으면!”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1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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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1세기에 여전히 종교는’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종교의 발전 과정에서 학자들은 ‘자연, 신, 인간’의 흐름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의 엄청난 힘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이때 생겨난 종교는 자연물을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큰 바위, 높은 산, 오래된 나무와 같은 대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인간보다 힘이 센 동물을 숭배하는 모습입니다. 곰, 호랑이, 사자, 코끼리, 늑대와 같은 대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발전하고, 능력이 발전하면서 ‘신’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단군신화가 있습니다. 민족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정하였고, 신을 경배하였습니다. 이런 신화의 시대가 발전하면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생겼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 유일신의 시대는 신분이 정해진 시대입니다.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사회였습니다. 성주나 왕이 종교를 선택하면 백성들 모두가 같은 종교를 믿는 사회였습니다. 이 신화와 신의 시대가 2,000년 넘게 이어왔습니다.
르네상스, 산업혁명, 과학의 발전,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이제 ‘인간’ 중심의 시대가 왔습니다. 자연과 동물을 숭배하던 인간은 신을 숭배하였고, 신을 숭배하던 인간은 이제 인간의 능력과 인간이 주체가 되는 세상을 열었습니다. 어떤 동물도 인간과 대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차지하던 자리에 인간의 과학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면서 인간은 누군가의 간섭과 지배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국가였던 곳에서도 비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 종교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비신자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가 가지는 힘은 ‘친교, 공동체, 조직’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지갑을 들고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1인 가구의 비중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고독하고,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영적인 체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지식, 윤리적인 실천은 여전히 종교가 가지고 있는 매력입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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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화해’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화해는 서로를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용서는 이전에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용서는 이전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타임머신처럼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용서는 무엇일까요? 저는 용서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용서는 이전의 일이 더 이상 나에게 분노와 미움으로 남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꼭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과 같은 것이 바로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묶여있으면, 그 사건에 잡혀 있으면 우리는 영원히 분노와 미움이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실패라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로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로 화해하라는 말은 이전의 일에 묶여있지 말고 서로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것이고 용서를 베푸는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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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지 마라
대부분의 구기 종목에는 ‘선’이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는 선이든 보이지 않는 선이든 ‘선’이 있습니다.
만약 그 선을 넘는다면 지게 되는 것이고 점수를 상대에게 주게 됩니다.
비단 운동경기만 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선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다투고 있습니다. 그 다툼은 점점 격해집니다.
참다못한 한쪽 사람이 상대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둘을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은 말합니다.
‘가족은 건드리는 거 아닌데….’
즉 가족은 보이지 않는 ‘선’인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는 선이 있습니다. 친구 간에도 선이 있으며 가족 간에도 선이 있고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선이 있으며 형제간에도 선이 있습니다.
아무리 편하고 친하다 하더라도 그 선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 선을 ‘평화의 선’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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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의로운 삶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 의로움
“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성도들은 춤추며 즐기게 하소서.”(시편132,9)
제가 강론을 쓰면서 참 많이 등장하는 말마디가 “참”이요 “참으로”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도 “참 의로운 삶,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 의로움”으로 정했습니다. 유난히도 우리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말마디같습니다. 참을, 진리를 추구하는 타고난 정신을 지닌 한국인들같습니다. 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 봤습니다.
“순우리말로 진실, 사실이라는 뜻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참말이냐 거짓말이냐’ 등의 예문이 있다. 접두어로는 ‘진실하고 올바른’ 혹은 ‘품질이 썩 우수한’, ‘먹을 수 있는, 맛이 좋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참기름, 참나무, 참꽃, 참교육, 참군인, 참사람등이 있다.”
새벽 일어나 우선 열어보는 것이 교황님의 홈페이지입니다.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 제목은 ‘성령이 성서를 살아 있게 하고 능동적이 되게 한다’ 였습니다. 성서대신 사람을 넣어, ‘성령이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능동적이 되게 한다’ 즉 참사람이 되게 한다로 읽어도 좋을 것입니다. 또 2025년 희년을 맞이한 바티칸 메디아 주제도 멋졌습니다.
“관광객에서 순례자로: 자신을 변형되도록 하라!”
(From Tourist to Pilgrim: Let yourself be transformed!)
깊이 새겨야 할 중요한 말마디에는 영어나 한자를 병기하게 됩니다. 흔히 믿은 이들의 여정을 순례여정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관광객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순례자, 진리의 순례자로 살아갈 때 참삶의 실현이겠습니다. 마침 다산의 말씀도 참삶에 대한 지침처럼 보입니다.
“동물은 오늘을 살기에 일희일비하고, 인간은 오늘을 쌓기에 일취월장한다.”
“안목이 짧은 사람은 오늘 뜻대로 안되면 울고, 내일 뜻에 맞으면 생글거린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참을 추구하는 이들이 참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은 우리의 성소도 관광객이 아닌 참된 순례자의 진지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서두 말씀에서 착안된 참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 의로움입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제자들의 충실성을 뜻합니다. 그러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것과는 달리 새로운 충실성, 더욱 새롭게 되고 절박하게 된 충실성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곳곳에서 이런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ㄱ)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5,10ㄱ)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3,15ㄴ)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6,1ㄱ)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6,33ㄱ)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마태21,32ㄱ)
정적이 의로움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양되고 업그레이드 되는 동적인 의로움으로,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닮은 성인들처럼 진리의 근원인 하느님께 가까이 이를수록 이런 의로움이겠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6개의 대당명제를 제시하시며, 그 첫째가 오늘의 “성내지 말라”입니다. 200주년 성서와는 달리 새번역 성서는 “화해하여라”입니다. 화해하니 요즘 한창인 개망초 들꽃들이 연상됩니다. 화해라는 멋진 꽃말에 개망초꽃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저는 “성내지 말라”가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성내지, 화내지 말아야 합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이들이 자주 화내는 사람입니다. 어느 지도자를 보면 자주 격노했다는 보도를 보는데 지도자로서는 참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성내는 것 반대로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온유한 삶입니다. “살인해서는 안된다”라는 계명을 한층 깊이있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에 이어지는 형제에게 바보라고, 멍청이라고 말하는 자에게 격렬한 혐오를 표현합니다. 형제들에 대한 이런 이성을 잃은, 형제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막말은 그대로 간접적 살인에 버금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노나 비난은 살인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여차하면 살인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쇄신, 마음의 뿌리로부터의 변화를, 정화를 요구하는 의로움입니다.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들과는 화해후 예물을 바치라는 요구, 고소한 자와는 얼른 타협하라는 권고 역시 삶의 지혜이자 참된 의로움의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두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이요, 이처럼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혼자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살핀다는 신독(愼獨)의 수행과 습관도 참으로 필요함을 느낍니다.
바로 이런 참된 의로움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듯이 가뭄해소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간절한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의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이 하느님을 감동케 하며, 엘리야 이런 마음은 다음 동작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엘리야는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릅 사이에 묻었고, 무려 시종에게 일곱 차례까지 묻습니다.
“올라가서 바다쪽을 살펴보아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시종의 대답입니다.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삶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킨 엘리야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주님의 손이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뛰아가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오늘 기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의 한생애가 참 극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얼마나 치열한 진리 추구의 의로운 삶인지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포르투칼 리스본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 태어났지만 15세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참사회원으로 입회하나, 소박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복음적 생활 방식과 순교에 크게 매료되고 감화받은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에 입회했고,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습니다.
모로코로 파견된 안토니아는 심한 병으로 회항하여 귀국길에 오르던중 항로에서 벗어나 시칠리아 섬에 도착했고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어 그는 프란치스코회 설립자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났거 그의 인정을 받아 프란치스코 회원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게 됩니다. 당대 설교가로서 성 안토니오를 능가할 자는 없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성인을 ‘성경의 보물창고’, ‘신약의 방주’라고 불렀습니다.
성인은 이례적으로 35세로 선종한 후 다음 해 1232년 5월30일 스폴레토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12세는 거의 700년후 1946년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합니다. 안토니오는 젊은 프란치스코회 수사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특히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이미 탁월한 의로운 삶을 살았던,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다가 승천한 엘리야요, 하느님의 불꽃같은 치열한, 의로운 삶을 살다가 35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회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탁월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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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께
가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에게 가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을
만나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을 만나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과
화해하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과 화해하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과
함께하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과 함께하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을
사랑하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을 사랑하시게나
하느님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으니
하느님과
살고픈 사람아
먼저 사람과 사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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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교사의 잘못이 가르침을 더럽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전통을 세운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율법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해치면 사람들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교사의 학식이 작은 죄 한 가지로라도 더러워지면, 그들은 가장 높은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교사가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도 잘못을 저질러 자신이 가르치는 의로움을 해친다면, 의로움을 가르치는 일이 그에게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합니다. 참행복은 여러분이 말로 가르치는 것을 행실로 실천할 때 주어집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무엇보다도 사람은 늘 하느님을 추구하는 자, 하느님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끊임없이 자라고 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람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러한 확장이 끝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영적으로, 우리는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영적인 음식은 먹으면 먹을수록 더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과, 하느님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엑카르트의 지혜문학 주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엑카르트는 본 설교의 본문을 지혜문학에서 따왔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분으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알고 계시다 ...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
그래서 피조물 속에는 멸망의 독소가 없고
지옥은 지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덕스러운 자들은 지옥을 모르며
의인은 죽지 않는다(지혜 1,7.13-15)(185)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항상 깨어 있으라
1918년 성탄 전전날 프란치스코 소년은 중병에 걸렸다. “스페인 감기”라고들 하는 이 유행병이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일어나 전 구라파를 휩쓸어 겨우 대전쟁이 끝난 유럽은 이 병으로 또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특히 더 심했다. 마을마다 성당에서는 죽음을 알리는 조종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염려하여 조종 없이 장례식을 할 정도였다.
재난은 산토스의 집에도, 마르뜨의 집에도 닥쳤다. 특히 마르뜨의 집안은 불쌍해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버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가족이 차례로 병상에 들게 되었다. 꿋꿋한 마누엘 베드로는 친척들과 친절한 이웃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전가족의 간호를 하였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다 동원하여 정성껏 돌보았다. 제일 먼저 병에 걸린 사람이 프란치스코였다.
파티마의 세 어린이 중에서 제일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아이가 프란치스코였다.
교회 당국에서 발현과 그것을 본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귀여운 프란치스코가 이미 3년 전에 사망한 뒤였다. 3년이란 세월은 긴 것이다. ‘떠난 자는 날로 잊혀진다’는 금언대로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지나간 과거 안에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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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저는 나이 들어가는 게 참 좋습니다. 아직도 욱하는 성깔은 여전하지만 나이 들수록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고 느껴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나서지 말고, 나대지 말며 보고도 못 본 척하라!’라고 다짐했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런 성향을 제 아버지로부터 받지 않았을까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순전히 나쁜 놈만은 아니듯이 저의 아버지도 좋은분이셨고, 교회나 지역 사회에서 인정받으셨던 분이셨습니다. 누구 못지않게 잘 참긴 하셨지만,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으로 뭔가 수틀리면 화를 잘 내셨습니다. 참는 게 좋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으면 병이 된다.’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면서 자신 안에 억압하거나 투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마치 땅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참지 말고 받아 드리길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화가 나면 화를 표현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건강하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화가 나면 그 화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들으려고 해야 하며, 분노를 건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상대방에게 표현할 수 없다면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하고 가르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결정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으며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신뢰하면서 제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주님의 가르침은 우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참된 의로움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기들만 의롭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로움은 위선이고 독선이라고 주님께서는 비판하십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의로운 척하는 것이며 그렇게 의로운 척하는 것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께서는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과 직관을 통해서 참된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3, 6.7.9) 결국 오늘 우리가 살고 실천해야 할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율법에 따른 의로움은 신념이었지 믿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체험이고 이를 바탕으로 주님이신 예수를 믿고 따르며 주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의로운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구원되는 것이라 믿었기에 모든 과거의 것들을 쓰레기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의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되는 까닭’은 살해당한 사람은 물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자 거부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포함한 죄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는 힘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죄란 하느님=타인=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파괴이며 단절입니다. 죄란 단지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죄를 범할 때 우리는 단지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나 규범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는 것입니다. 아울러 죄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인해서는’ 아니 되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 있는 다른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죽이는 살인과 같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는 어떤 누구를 무시하거나 멸시할 권한은 없으며, 타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은 곧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며 반항과 같기에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강하게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깨어지거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우리의 의지만으로 할 수 없으며, 화해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화해의 회복을 이루는 가장 바람직한 길은 용서이시며 화해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도움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예물을 봉헌하기 이전에 주님께 대한 사랑의 헌신은 바로 형제와 화해하고 다시금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며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리고 잘못했다 하더라도 용서하며 살아갑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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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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