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고백
유병덕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울 회원
행정학박사, 평생교육사, 자산관리사
충청남도 복지보건국장, 공주시 부시장 역임
서재에 커튼을 올린다. 빌딩 숲사이로 울긋불긋한 빈계산이 고개를 내민다. 애인처럼 색조 화장을 곱게 하고 반긴다. 빈계산은 계룡산의 호위무사 같다. 삶이 바빠서 계룡산까지 멀리 가지 못하는 이를 가까이에서 맞이한다. 머지않아 산에 둥지를 틀 나이라 빈계산 품으로 이사 왔다.
예전엔 몰랐다. 등산하려면 계룡산으로 가야만 하는 줄 알았다. 시내버스 노선을 찾아보아도 빈계산이 보이지 않아서다. 주말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구름처럼 몰려온다. 주차장은 장날처럼 북새통이다. 젊은이는 빈계산 봉우리를 동네 마실 다녀오듯 하고, 힘부친 어르신이나 아이들은 계곡의 호수 주변을 사부작사부작 거닌다. 평일에도 삼삼오오 찾아와서 맛집이나 카페에 머물며 담소를 나누는 명소다.
자세히 보니 빈계산은 아기자기한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있다. 숲속에 부는 바람은 어머니의 숨소리 같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언제 들어도 편안하고 마음에 위안을 준다. 나지막한 봉우리는 정겹게 어깨동무하고, 오가는 이에게 길을 내준다.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외로운 날은 다정한 연인과 손잡고 가볍게 금수봉에 오르고 싶고, 힘이 넘치는 날은 혼자서 고독을 즐기며 가파른 도덕봉을 오르고 싶다.
자주 만나면 정이 드는 법이다. 빈계산에 오르다가 정이 들었다. 산자락 끄트머리에 조그마한 농사처를 마련하고 마음속으로 구름카페라고 이름 지었다. 시대가 변해도 자연은 솔직하다. 노후에 농부로 살면서 마음을 닦아볼 심산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턱대고 땅을 파고 거름을 깔고, 심었다. 농작물이 가뭄을 타도 물 주는 방법을 모르고, 하우스에 온도가 올라가도 낮출 줄 모르니 답답한 노릇이다. 초보라 뭐든지 서툴다. 애지중지하던 채소가 서툰 농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스스로 숨을 거둔다.
첫해 농사는 망쳤다. 허탈한 마음으로 빈계산에 오른다. 산행길이 인생길 같다. 높든 낮든 정상에 오른다는 게 쉬운 일 아니다. 산에 오르다 보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 인내를 발휘하는 이만이 정상을 밟아볼 수 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올랐으나 기쁨도 잠시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걱정이 태산이다. 빈계산 숲이 흔들리고 있다. 산자락에 푸르던 소나무밭이 잘려서 나가고, 높은 건물이 들어선다. 가까이 있는 구름카페가 사라질까 두렵다. 하늘로 치솟은 소나무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지난 일은 빨리 잊는 게 상책이다. 수많은 이와 어울려 지내다가 현직에서 물러나니, 낯선 무인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다. 인생 백세시대라고 노래하는데 갑년부터 하릴없이 홀로 지내려니 난감하다. 그래서 마련한 농지다. 육묘장을 찾아다니며 오이, 고추, 상추, 참외, 토마토 … 승용차 뒷자리에 가득 싣고 왔다. 이웃에 사는 이들이 농사를 망쳤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다. 비닐하우스 속에 멀칭을 벗겨내고 새것으로 다시 입힌다. 농사가 쉬운듯하면서 까다롭다. 비닐 멀칭 구멍도 제각각이다. 작물에 따라 구멍 내놓은 자리가 다르다. 그들이 진짜 농부다. 한나절 복닥거리더니 일이 끝났다. 먼저 주인이 농원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 모양이라며 스프링클러로 물 주는 방법과 비닐하우스 속에서 온도 관리하는 요령을 자세히 일러 준다.
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다. 푸른 채소가 잘 자란다. 큰 하우스 속에 푸르름이 그득하다. 한 동이 아니라 두 동이나 된다. 식구가 단출해서 먹는 게 없다. 대부분 인근 어려운 이웃과 나누었다. 오이, 고추, 상추 등 상자에 담아 건네니 잘 길렀다고 칭찬이다. 어설픈 농부가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라 훈장을 받은 것보다 마음이 뿌듯했다. 더 잘 길러 볼 심산으로 인근 아파트 공사장에서 터파기한 흙을 가져왔다. 오래된 잿빛 땅에 붉은 흙을 펴니 생기가 돈다.
세상사 공짜는 없는 것 같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다. 수확한 농작물을 선사한 게 보험처럼 느껴진다. 발 벗고 농사일을 도우러 온다. 객토한 땅을 깊이 갈아서 엎어야 한다며 기계를 들이대는 이, 땅을 갈다가 기계발에 돌멩이가 걸린다며 주워내는 이, 작물이 크려면 물이 잘 빠져야 한다고 고랑을 내는 이 등 고마운 이들이다.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다.
곱게 화장한 빈계산을 바라보니 시상이 떠오른다.
‘아름답네요/붉은 단풍이/첫사랑처럼/꿈속에 보았던 가인인가요/이 마음 훔치어 가네요.’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은 순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상에 젖는다. 붉게 물들었던 단풍이 지니 초라하게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마치 곁에서 북적대던 이들이 떠나고 외로이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처럼 허허롭다. 젊은 날 곱게 물든 단풍이 한 잎 두 닢 내려놓으며 몸짓하는 의미를 몰랐다. 갑년이 되어서야 모든 만남은 헤어짐이 정해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갑년의 고백이다. 인생은 회자정리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자신이 된다. 서운한 게 있다. 미처 늙지 못한 마음이다. 이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구름카페에서 담담하게 삭풍을 맞고 싶다.
첫댓글 지식이 짧아 甲年 의미를 찾아보니, 61세 환갑의 또 다른 말이더군요.
인생의 시작을 빈계산 밟으며, 푸른 채소의 성장을 바라보시는 모습이...후덕함을 느낄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편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갑년의 고백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에 공감합니다. 저는 올해가 갑년입니다.
산의 모양이 암탉과 같다고 하여
"빈계산牝鷄山"이라고 이름 붙였다죠
이맘때 병아리를 거느린 암탉은
부지런하고 강한 모성을 발휘합니다
텃밭가꾸기에 재미를 붙이면서
때로 빈계산을 오르내린다면
능히 자족할만할 갑년일 듯합니다
졸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