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유배지에서
강화도 나들길을 걸으면서 부딪치는 의문 가운데 하나가 왜 이토록 순박한 섬이 지난 역사에서 유배지로 이용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유배의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도 주로 권력다툼에서 쫓겨난 임금과 왕족이 대상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이나 송강 정철처럼 중책을 맡은 벼슬아치들이 권력에 밉보이는 경우에도 멀리 변방이나 외딴 섬으로 귀양 보내곤 헸지만 강화도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유배지 중에서도 등급이 높았다는 뜻일까요.
‘강화 도령’이라고 불리는 철종만 해도 사도세자의 핏줄을 이어받은 왕족이었습니다. 집안이 모반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이곳에 유배되어 농사를 짓다가 엉겁결에 임금 자리에 오른 경우입니다. 현재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용흥궁(龍興宮)이 그가 열아홉 살에 궁궐로 들어가기까지 다섯 해 동안 머물렀던 거처입니다. 그의 외척이 살았던 ‘철종 외가’도 거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선원면에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강화도 옆에 위치한 교동도에 유배됐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배 여드레 만에 사약을 받아 서른여섯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내놓게 됩니다. 둘째 형 수양대군이 단종의 지지 세력을 제거하면서 동생에 대해서도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을 씌운 것이지요. 이밖에 고려 희종 임금도 무신정권의 중심인물인 최충헌 일파에 밀려 영종도를 거쳐 교동도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강화도나 교동도가 이처럼 유배지로 떠올랐던 것은 과거 왕조의 도읍이던 한양이나 개경과 가깝기 때문에 감시하기 쉬운 데다 섬이라는 제약으로 인해 도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섬 전체가 유형생활을 치르는 감옥이었던 셈입니다. ‘절도안치(絶島安置)’라는 형벌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다로 사방이 가로막힌 섬에서 외롭게 지내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형벌이라 하겠습니다.
조선 임금 가운데 희대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연산군이 유배된 곳도 교동도였습니다.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망 배경과 관련한 앙심으로 무오사화를 일으켰고 다시 갑자사화까지 일으켜 궁중을 핏자국으로 물들인 주인공이었습니다. 유생들을 쫓아낸 성균관에서 술판으로 기생들과 놀아났으며, 신하들의 간언을 틀어막기 위해 사간원과 홍문관을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러한 패악 끝에 중종반정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연산군이 유배되어 머물렀던 거처는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일반 민가와는 약간 떨어진 위치로, 지금은 그 자리에 볏짚으로 지붕을 올린 네 칸짜리 황토집이 구경거리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조차도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둘러 바깥출입을 금지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을 받았다니, 하루아침에 중죄인으로 전락한 참담한 심정을 떠올리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소가 끄는 평교자에 태워져 여기로 호송되기까지 길거리에서 백성들의 갖은 조롱도 쏟아졌겠지요.
현재 교동도에는 연산군의 자취가 이곳 말고도 두 군데나 더 전해집니다. 강화도 방면으로 교동대교를 건너가기에 앞서 도로 바로 왼쪽에 위치한 신골 동네가 그 하나입니다. 연산군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얘기가 주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며 집터도 남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화개산 반대쪽인 교동읍성 바닷가 언덕의 부근당(扶芹堂)에도 연산군 화상이 지금껏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근당 앞에 세워져 있는 설명문에 따르면 연산군의 원혼을 달래려고 마을 주민들이 얼마 전까지도 격년으로 당굿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것도 처녀들이 등불을 치켜 들도록 하는 처녀봉공 등명(燈明) 의식이 따랐다고 하지요. 사실은, 화개산 북쪽 기슭 지금의 유배처에도 비슷한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산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오는 길목에 커다란 느티나무를 볼 수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나무에 제사를 드려 원혼을 달랬다는 것입니다.
연산군은 이곳 유배지에서 역질을 앓다가 서른한 살 나이에 마지막 숨을 거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아마도 화병이었겠지요. 죽고 나서 근처에 묻혔으나 그 뒤 부인 신(愼) 씨의 간청으로 경기도 양주로 이장되었습니다. 지금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묘소입니다. 묘소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표석 이외에 아무런 장식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폐위된 신분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이제 교동도 화개산에는 봄기운이 한창입니다. 머지 않아 진달래와 개나리가 무리지어 피어나 산기슭을 온통 빨갛고 노랗게 물들일 것입니다. 뻐꾸기, 소쩍새도 골짜기마다 우짖겠지요. 연산군의 넋이 아직도 이 골짜기를 배회하고 있다면 지금은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펌] / 필자소개; 허영섭(경향신문・한국일보 논설위원 역임,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저서 3권) / 2017년 03월 22일 (수) 00:02:51
광대나물 (꿀풀과) Lamium amplexicaule L / 2017. 3. 10. 안산 풍도에서 / 박대문(환경부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 역임, 시집 3권)
일본쌀
한국쌀도 꽤 좋은데 왜 일본쌀이 더 맛있다고 할까. 도쿄나 오사카에선 어느 식당엘 가나 밥맛이 좋다. 편의점도시락 밥맛도 웬만한 우리 식당보다 낫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게 ‘갓 도정한 쌀’로 밥을 짓는 것이다. 일본엔 즉석도정전문점이 곳곳에 있다. 그 쌀로 밥때에 맞춰 갓 지은 밥을 먹는 게 당연히 맛있다. 또 하나는 햅쌀이다. 쌀을 찧은 뒤 7일 후면 산화가 시작되고, 15일이 지나면 맛과 영양이 줄어든다. 수분함량도 16%인 햅쌀 때 맛이 최고다.
우리 쌀은 모양이 온전한 완전미 비율이 80%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일본쌀은 대부분 90% 이상이다. 깨지거나 흠이 있는 쌀은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작 방식도 다르다. 우리는 질보다 양을 중시한다. 수확량을 높이려고 질소비료를 많이 준다. 그러면 쌀의 단백질 함량이 늘어나 밥맛이 떨어진다. 일본의 고시히카리, 히토메보레, 청무 같은 품종의 질소 사용량은 낮다. 단백질 함량이 적으니 밥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수확한 벼를 건조하고 저장, 가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단계적인 유통 절차를 밟는데 우리는 대부분 미곡종합처리장에서 품질이나 품종 구별없이 섞는다. 일본은 벼 투입구부터 달리해 섞이는 걸 방지한다. 보관할 때도 그냥 상온이 아니라 기간별로 현미를 저온저장하는 등 품질관리를 철저히 한다. 일본 곡물검정협회는 판매업자의 의뢰를 받아 생산이력과 제조과정 등을 담은 인증서를 발행한다. 이 마크의 소비자 신뢰는 대단하다. 쌀을 구입할 때 가장 먼저 ‘인증’ 마크를 보고 선택한다.
그런데 우린 소비자에게 바로 전달되는 최종 유통과정에서도 쌀을 섞는 꼼수를 쓴다. 상품과 하품을 섞은 채 하나의 상품으로 속여 파는 것이다. 몇 년 묵은 정부미를 햅쌀에 섞은 게 아주 싼 값에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품종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정부가 일괄구매하는 수매제도도 문제다. 원산지를 속이는 ‘가짜 경기미’ 또한 해마다 발각된다.
이러니 밥맛 차이가 크다. 일본에선 젊은층 사이에서도 선물용 ‘큐브 쌀’이 인기를 끈다. 2명이 1회 식사하기 좋은 300g을 주사위 모양으로 진공포장한 것이다. 연인들도 화이트데이에 사탕보다 쌀을 선물하면서 ‘둘이서 쌀밥을 먹자’는 마음을 전한다. 쌀이 좋고 밥맛이 좋은 덕분이다. 일본쌀은 해외에서도 비싸게 팔린다. 홍콩에서는 같은 고시히카리 쌀이라도 미국 캘리포니아산의 1.6배, 중국산의 2.5배에 거래된다. 엊그제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일본쌀 도입 100주년 기념회까지 열렸다.
[펌] / 출처; 한경닷컴 / 고두현(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2017-03-21 22:54:12
‘뉴스 문맹’ 탈출
1517년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독일 비텐베르크 성 성당 문에 내붙였다. 당시 교회의 면죄부 대량 판매를 논박한 이 대자보로 종교개혁의 불꽃이 타올랐다. 루터는 박해를 피해 숨어 있는 동안 라틴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독일어 성경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덕분에 널리 퍼졌다. 복음(福音⋅GOOD NEWS)이 인쇄혁명을 타고 평민들에게 전파된 것이다.
▷권력자들은 새로운 정보, 즉 뉴스를 독점하려 한다. 뉴스의 확산이 권력을 위태롭게 한다고 믿어서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기원전 213년 책을 불태우고 이듬해 유학자 460여 명을 생매장한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최초의 사상 통제로 꼽힌다. 나폴레옹은 황제로 등극한 뒤 73개나 되던 파리의 신문을 4개로 쳐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적대적 신문 4개가 총검 1000개보다 더 두렵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부정확한 미디어’라고 공격하는 뉴욕타임스는 되레 구독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거짓말을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고 포장하는 대통령 측에 맞서 ‘뉴스 문맹’을 퇴치하자는 독자들의 제안으로 ‘대학생 신문구독 스폰서 운동’을 벌여 한 달 만에 390만 달러(약 44억 원)나 모았다. 진실을 우습게 아는 트럼프 시대, 세상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신문을 온라인으로 전파하기 위해 후원자들은 130만 명의 1년 구독료를 기꺼이 기부했다.
▷글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있어야 문맹이 아니다. 이를 문해(文解⋅Literacy)라고 한다. ‘뉴스 리터러시(News Literacy)’도 마찬가지다. 가짜 뉴스와 팩트, 뉴스와 오피니언, 편견과 공정함의 차이를 분간해야 뉴스 문맹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모바일이 결합해 온갖 뉴스가 24시간 넘쳐흐르는 지금처럼 뉴스 문맹 탈출이 절박한 때가 없다. 전례 없는 한국의 조기 대선은 역설적으로 뉴스 문맹을 탈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펌] / 출처; 동아닷컴 / 이진(동아일보 논설위원) / 2017-03-22 04:28:36
구관이 명관?
우리 의식 속의 미국은 어느 날 갑자기 100% 변모했다. 미국은 6⋅25 동란 때 피 흘려 싸워서 한국을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해주고 막대한 원조로 붙들어 세워준 나라, 국산 새 제품보다 훨씬 예쁘고 따듯한 옷을 구호품으로 보내주는 나라였다. 그러다가 창졸간에 음흉한 제국주의자, 우리나라를 악랄하게 종속화해 산송장을 만들고 말 나라로 바뀌었다.
그 후 미국은 한국에 한없이 얻어맞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미국은 맞기만 했다. 학생들이 자기네 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비록 불행한 사고이지만 본질은 과실치사인 효순⋅미선이 사건을 두고 마치 모든 한국인에게 확대될 기획 살인이기라도 한 듯 저주를 퍼부어도, 미국이 광우병 소고기를 팔아 우리 국민을 다 죽이려 한다며 몇 달이나 증오의 굿판을 벌여도, 길가는 미국인에게 침을 뱉고 성조기를 짓밟고 태워도 맞기만 했다. 미 정부 차원의 항의도, 시위 주동자를 처벌하라는 요구도 없었다. 우리 역시 미국은 대국이니 때리면 당연히 맞아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국보 제132호 서애의 친필로 쓴 징비록. /조선일보 DB
우리의 반미주의자들은 이런 미국의 행동을 요즘 한국의 '사드' 도입을 저지하려고 중국이 벌이는 조폭적인 행패와 비교해 보았을까?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화 저지가 1차적 목표였지만 어쨌든 우리나라를 보전해 주고 막대한 원조를 주면서도 '동맹국'으로 대등하게 대우했다. 반면 중국은 6⋅25 때 백만 대군을 보내 한국을 쓸어 없애려 했던 나라다. 그런데도 한국은 1992년 수교 후 이웃으로 중국의 경제 개발을 도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칭 신형 대국이니 G2니 하며 우리를 짓밟고 능멸하려 든다.
임진왜란 당시 체찰사 류성룡은 명나라 지원군의 식량을 조달하느라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의 노심초사를 명나라 장수들도 알고 측은히 여겼다. 그러나 명의 이여송 제독은 군량미 문제로 그를 꿇어 앉히고 문초했고, 임진강을 두고 대치한 명군과 왜군의 강화를 막기 위해 류성룡이 임진강 배를 모두 없애버렸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그를 명 진영에 불러들여 곤장 40대를 치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하고만 있지 않는 미국'은 우리의 반미에 어떻게 대응할까? 어떤 경우라도 중국처럼 야만적이진 않을 테니 그로써 위로를 삼을 수 있을까?
[펌] / 출처; 조선일보 / 서지문(고려대 명예교수) / 2017.03.21 03:03'
매화(매실나무)
거짓으로 뇌를 속이는 사회
점잖아 보이는 사람도 소싯적 친구를 만나면 본색이 나타난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집단 기억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만남이 유쾌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친구들과 ‘기억’에 대해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혈기 왕성한 중고등학교 시절 껌 좀 씹어 보고 주먹질 한 번 안 해 본 사람이 누가 있으랴만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리에 없는 A군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와 주먹을 몇 번 주고받았던 이야기가 나왔는데 누가 먼저 싸움거리를 만들었냐가 논란이었다.
친구들은 얘기가 다 달랐다. A와의 친소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다. 결국 자리에 없는 친구들에게 전화까지 걸어 이야기를 맞춰 보니 나와 친했던 이들의 기억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 나쁜 녀석이 쓸데없는 것만 기억한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나름 ‘카메라’같이 선명한 기억력을 자랑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사실 뇌과학과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기억은 카메라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기억은 조작될 수 있고 특정 암시가 반복되면 없던 사실까지 자세하게 기억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나타난다. 사람이란 존재가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반복해 받으면 자신의 진짜 기억이라고 굳게 믿는 피암시성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말 영국 워릭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경험하지 않은 사건을 반복적으로 상상하도록 한 결과 절반 이상이 ‘거짓 기억’을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는 ‘가짜 뉴스’들이 집단 기억을 왜곡시켜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도 이달 초 ‘페이스북과 가짜 뉴스, 친구들이 당신의 기억을 어떻게 포장하는가’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로 이 문제를 다뤘다.
과학자들은 반복해서 가짜 뉴스에 노출될 경우 인간의 뇌는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뇌 신경망도 비슷한 내용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변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군다나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가짜 뉴스들은 더 쉽게 개인의 기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가짜 뉴스’의 유일한 해독제는 개인의 신념과 정반대의 정보도 꾸준히 접하는 것이다. 올바른 정보를 바탕으로 한 집단기억과 신념은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집단기억은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 가짜 뉴스는 집단기억을 왜곡시켜 하나로 만들려는 전체주의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평균과 표준편차를 벗어나는 생각은 불순하다 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난 돌에 정을 때리는 우리 사회는 가짜 뉴스가 확산되기 좋은 최적의 환경이다.
거짓은 항상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거짓으로 뇌를 속이는 사회는 뇌과학 입장에서 보면 ‘정보 마약’을 지속적으로 집단에 주입하는 건강치 못한 사회다.
[펌] / 출처: 서울신문 / 유용하(서울신문 사회부 기자) / 2017-03-21 19:32
안창호 재판관, 격정에 못미친 교양
근거 없는 성현의 말 인용… 맥락 어긋난 플라톤 인용
안 재판관, 보충의견에서 부족한 교양수준 드러내
탄핵은 옳지만 논리도 맞는지 헌재 스스로를 돌아보라
안창호 헌법재판관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결정문에 단 보충의견을 읽으면서 헌법재판관의 교양 수준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옛 성현의 말, 플라톤의 ‘국가론’, 성경의 아모스서에서 한 구절씩을 인용하고 있다.
안 재판관이 언급한 옛 성현의 말은 ‘범금몽은하위정(犯禁蒙恩何爲正)’이다. “지도자가 위법한 행위를 했어도 용서한다면 어떻게 백성에게 바르게 하라고 하겠는가”라고 풀이하고, 대통령의 법 위반 행위는 일반인의 위법보다 더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금몽은하위정’은 옛 성현의 말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지난해 12월 탄핵정국에, 한 신문사의 주필을 지낸 사람이 그 신문에 연재한 글에 중국 춘추전국시대 재상 관중(管仲)의 말로 소개한 것이다. 풀이도 안 재판관과 똑같다. 그러나 관중의 언행을 기록한 관자(管子) 어디를 뒤져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글쓴이에게 전화를 걸어 전거(典據)를 물었으나 회피하는 답변만 들었다.
할 수 없이 관자를 완역한 교수에게 물었다. 그는 그런 말은 없다고 했다. 다른 문헌에 혹시 그런 말이 있지 않을까 중국어 사이트까지 검색하는 수고를 자처해 해준 뒤 찾지 못했다는 전화를 해왔다. 헌법재판소는 안 재판관이 전거가 불명확해 옛 성현으로 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그러나 그 뜻이 통하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관자에 범금(犯禁)이란 말은 자주 나온다. 그러나 법가(法家)적 성격이 강한 관자에서 범금은 지도자가 아니라 백성의 위법을 이른다. ‘범금몽은하위정’을 관자의 뜻에 따라 해석하면 ‘백성의 위법을 지도자가 봐주면 어떻게 백성을 바르게 하겠는가’로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안 재판관은 또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통치하는 것이 쟁취의 대상이 되면 이는 동족 간의 내란으로 비화하여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다른 시민들마저 파멸시킨다”는 구절을 인용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권력공유형 분권제로의 개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언급했다.
국가론의 이 구절은 권력 독점의 경계로 삼기에는 맥락이 크게 어긋나 있다. 플라톤은 철인(哲人)들이 통치하는 국가를 이상으로 제시한 반(反)민주주의자다. 인용 구절은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등장하는 국가론 7권에 나오는 말로, 동굴 밖의 밝은 세상을 보고 온 철인들 대신 어두운 동굴 속에서만 산 백성이 통치를 하겠다고 나서면 국가가 파멸한다는 뜻이다.
안 재판관은 정치학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이 차지하는 위치를 잘 모르는 듯하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사회의 제1의 적이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전체주의 국가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포퍼의 비판은 과장된 면이 있지만 국가론의 정치적 함의가 대개는 불쾌하고 때로는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틀림없다.
안 재판관은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는 성경 구절도 인용했다. 좋은 말이지만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나라의 헌재에서 특정 종교의 경전을 인용한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안 재판관이 다수 의견에 묻혀있을 수 있는데도 굳이 보충의견을 달겠다고 고집해 전거가 불명확하거나, 맥락과 동떨어진 인용을 한 덕분(?)에 재판정 법대에 근엄하게 줄지어 앉은 헌법재판관의 교양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내게는 이것이 흥미로웠다.
18세기 말 영국 사상가이자 의원인 에드먼드 버크는 인도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를 탄핵소추하는 장문의 글을 남겼다. 미국이 헌법을 만들 때 탄핵 사유에서 ‘실정(失政⋅maladministration)’을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배제하고 ‘중대한 범죄와 비행(high crimes and misdemeanors)’을 넣은 것은 동시대 버크의 영향이다. 읽는다면 관자나 플라톤보다는 버크를 읽었으면 한다.
헌재가 바다 건넌 탄핵심판을 탱자로 만든 측면이 있다. 국회가 소추한 탄핵 사유인 뇌물죄와 강요죄를 헌법의 재산권 보호 위반으로 바꾸도록 한 것이 그렇다. 어느 나라든 공직자가 뇌물죄 강요죄로 소추되면 그걸 놓고 유무죄를 판단하지, ‘일부러’ 바꿔 덜 명확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뇌물이라고도 강요라고도 하지 않고 막연히 재산권 침해라고 하면 누가 살아남겠나. 탄핵은 결론은 맞지만 풀이가 엉망인 해답이었다.
[펌] / 출처; 동아닷컴 / 송평인(동아일보 논설위원) / 2017-03-22 03:00:00
朴의 실패에서 못 배운 文의 완장부대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5월 청와대에서 “이러다간 대통령직을 제대로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말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당시 5⋅18행사추진위원회 간부들과 만나 한총련의 5⋅18 시위와 전교조의 연가투쟁에 불만을 쏟아내며 한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4일 두 번째 대국민 담화에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고 했을 때 나는 노 대통령의 이 말이 문득 떠올랐다.
生則死로 결국 무너져
언뜻 들으면 대통령 자리를 내놓겠다는 말 같지만 내심은 대통령직을 결코 내려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에게 내치(內治)를 맡기겠다는 얘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 국정 운영의 중심은 대통령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한 담화문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네 번의 기회를 모두 놓쳤다. 새해 첫날 청와대 상춘재에서 출입기자들을 모아 놓고 “(뇌물죄 의혹은) 완전히 엮은 것”이라고 강변했다. 특검 수사가 옥죄자 1월 25일엔 ‘정규재TV’ 인터뷰에서 “경제공동체라는 말을 만들어 엮어도 너무 억지로 엮은 것”이라고 다시 억울함을 호소했다. 진실 규명은 뒷전인 채 장외 여론전에만 매달렸으니 불타는 민심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다. 헌재가 대통령 파면 사유의 하나로 지목한 특검 조사와 헌재 출석 문제에 대해선 “전례를 남겨선 안 된다”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참모들은 하나같이 입을 닫고 말았다.
헌재의 탄핵심판 심리가 이어지는 동안 청와대 참모들은 보이지 않았다. 핵심 측근인 이정현 의원과 유정복 인천시장 등과 수시로 논의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 바로 전날 탄핵이 기각될 것이라는 보고를 청와대 수석이 올렸다니 주변에 변변한 참모 하나 없었던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사즉생(死則生)의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다. ‘차떼기 당’이란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쳤고, 괴한에게 칼을 맞고도 “대전은요?”라고 선거를 먼저 걱정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했을 때 깨끗하게 승복하고 이명박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그랬던 그가 청와대에선 생즉사(生則死)라는 잘못된 길을 걷다가 여기까지 왔다. 국민들이 실망한 것은 “내 책임은 하나도 없다”는 대통령의 태도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에 집착하는 모습에 국민은 고개를 돌렸다. 친박(친박근혜) 패권주의는 정치 불신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어두운 그림자’ 어른거린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청와대 1년을 옆에서 지켰던 사람이다. 권력의 무서움과 비참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대세론에 취한 문재인 주변에 당장 권력을 잡은 듯 완장부대가 득실대는 것은 어두운 그림자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내각에 “부역행위를 저지르지 말라”고 대놓고 협박하는가 하면 ‘윤병세 졸개들’이라는 험악한 말이 민주당 국회의원 입에서 나왔다. 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2012년 대선 전까지만 해도 “정치할 생각은 없다”던 문재인이 이번엔 “3수(修)는 없다”며 권력 의지로 넘쳐난다. 선하던 인상이 독하게 바뀌었다고 인상을 평하는 사람도 있다. 주변 사람들이 자꾸 떠나는 것도 좋지 않은 신호다. ‘박근혜의 실패’에서 대선주자들이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누가 청와대를 가더라도 국민들은 비참한 대통령의 말로를 다시 봐야 할지 모른다.
[펌] / 출처; 동아닷컴 / 최영해(동아일보 논설위원) / 2017-03-22 03:00:00
감나무꽃
다시 ‘내일은 어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박근혜는 탄핵돼 과거가 됐다
실패한 전 대통령과 다를수록 성공할 대통령이 될 거란 믿음은 초점주의의 착각이다
전임자 미워해 그 반대를 찾으면 다시 그를 미워하는 악순환이 된다
“Every nation gets the government it deserves(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말이다. 정확히 따지면 약간 차이가 있지만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딱 그 수준에 맞는 리더를 가진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흔히 인용된다. 이 명언은 현재 많은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결국 탄핵되었고, 국민의 다수가 그 탄핵에 찬성했다 하더라도 그가 과반이 넘는 득표로 당선된 합법적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때는 박 전 대통령이 국민 수준에 딱 맞아서 당선되었고, 4년 만에 국민 수준이 갑자기 높아져 지금은 높아진 국민 수준에 못 미쳐 탄핵되었다고 이해하면 될까?
박 전 대통령을 잘 모르고 찍었다고, 마치 감쪽같이 속은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도 많다. 정치인들마저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탄핵을 당한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유일하지만, 한국 역사에서 직선 대통령 대부분이 임기 말에 최악의 지지율로 국민들의 미움을 받은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영삼 71%에서 6%로, 김대중 71%에서 24%로, 노무현 60%에서 27%로, 이명박 52%에서 23%로. 우리의 모든 대통령은 한결같이 국민을 속이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일까, 아니면 우리 국민은 모든 대통령에게 속을 정도로 멍청한 걸까? 그렇다면 이것 또한 국민 수준에 딱 맞는 대통령들을 가져왔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면 우연일 리는 없다. 대선이 채 50일도 안 남은 이때 또다시 미워하게 될 대통령을 뽑지 않으려면 지금 그 원인을 고민해 봐야 한다. 한국의 모든 대통령이 임기 초에는 사랑받다가(당연히 그래서 당선됐을 것이다), 한결같이 임기 말에 미움을 받는다. 그런데 그 미움받은 내용을 보면 제각각 모두 달랐다. 그러니 그 원인이 계속 바뀐 대통령들에게만 있을까? 차라리 그들을 계속 뽑아 온 국민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그리고 솔직히 인정해 보는 건 어떨까? 물론 그 모든 비극의 책임을 국민이 떠안고, 전 대통령들에겐 면죄부를 주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유권자인 국민이기에, 지금까지 자신의 투표행위를 스스로 분석하고 개선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제안이다.
인간의 사고에서 구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한계는 초점주의(focalism)다. 사람들은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관련된 판단에서도, 한두 가지의 요인만을 고려해 편향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끝도 없는 옥수수밭으로 둘러싸인 미국 중부 거주민들에게 캘리포니아에 가서 사는 삶을 상상해 보라고 하면 엄청나게 행복한 삶을 예상한다. 아름다운 해변과 따사로운 햇볕, 그리고 피크닉과 다양한 야외운동을 상상한다. 하지만 실제 미국 중부와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행복도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사실 캘리포니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하루에 8시간 이상 실내에서 근무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싸우고 경쟁하고 노력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 해변과 햇볕은 삶의 극히 일부분인데도 중부 사람들은 그 영향을 과대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들이 임기 말에 한결같이 미움받는 원인 중에 바로 초점주의가 있다. 딱 전임자 같지 않은, 전임자가 미움받은 이유의 딱 반대인 대통령을 찾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다.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는 너무나도 다양한 능력과 자질이 필요한데도 전임자의 단 몇 가지 실패 요인에 매달리는 것이다. 마치 그 실패 요인만 없으면 당연히 나머지는 모두 다 갖추어졌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부족한 면이 드러나면 마치 몰랐던 것처럼, 속았던 것처럼 배신감을 느끼고 실망한다. 그래서 임기 말에 대통령은 국민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달걀과 닭 중에 무엇인 먼저인지가 헷갈리는 것과 같다. 전임자를 미워해서 그 반대를 후임자로 찾고, 그래서 다시 그 후임자를 미워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됐다. 이미 과거가 된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 다르면 다를수록 더 성공할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초점주의의 착각이다. 모든 전문가가 얘기하듯 한국은 국내외적으로 너무나 심각하고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수많은 자질의 통합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다음 대통령은 미래를 책임지지 과거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게 아니다’가 아닌 ‘이렇게 하겠다’는 대통령이 필요하지 않은가. 지난해 1월 새해를 준비하는 중앙시평의 제목이었다. ‘내일은 어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펌] / 출처: 중앙일보 / 허태균(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 2017.03.22 02:31
'Bassin d Argenteuil' / Claude Monet(1840~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