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관한 시모음 34)
눈 내리는 아침에 /추창호
눈 내리는 아침에 손을 펴 눈을 받는다
거기 협곡의 깊은 손금이 있다
쌓이는 눈보라
깊고 긴 협곡을 지나는 기관차
철로는 한 사내의 울음소리처럼 철커덕거렸다
열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협궤열차 한 대
철로는 설원지 눈들의 신처럼
폭설의 열차를 지배한다
어느 멸족의 종족이 남긴 전설인가
겨울새들의 노래로만 가 닿는 목초지
기관차는 구전의 그곳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문득 날아오르는 날갯짓의 막막함
열차는 멈출 듯 헉헉거리며
철로 밖으로 미끄러진다
탈선은 항상
여기까지만 이란 말로 유혹하지만
몇 량의 짐칸에는 버릴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걸 알면서
삐걱거리는 무게를 끌고 간다
툭툭 눈을 털자 붉은 황무지
무수한 선들을 쥐고 나는 겨울 눈밭에 서 있다
혹한의 손금은 협곡으로 내려앉고 거기
숨 막히게 달려가는 협궤열차 한 대
어디 평원의 귀착지가 있을까
걸을 때마다 내
낡은 구두 뒷굽이 심하게 철커덕거린다
눈 나린 길 /박남수 (1918~1994)
겨울 밤, 눈 나리는 밤
하아얀 눈을 밟으며 밟으며 가신 이가 누구일까
머얼리 발자최 조고만 발자최 건넌 마을로 건너갔고나
한 줄기 입김에도 흐려지는 유리창 앞에
호올로 호올로 금붕어처럼 직히며
흰 눈 나려, 나려서 쌓이는
이 아츰 우편배달부가 지날 상한 아츰
행여 돌아올 리 없을 이
그이를 그리 그리며
내 마음은 자릿자릿 설였다
태고 적 서름이 서린 이 아츰에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이 가신 길에
어찌하여 조고만 발자최에 슬픈 전설을 맺으려는 걸까
눈의 향기1 /송정숙(宋淑)
낡은 버버리 깃을 세우고
굵은 눈송이들이 허공을 휘감으며
춤추고 있는 가로등 아래
홀로 기대여 서 있는 한 남자
눌러쓴 올풀린 니뽄모자 채양아래
하얀 눈이 쌓인다
멈추어 버린 허공속에 밤은 깊어가고
기다림의 시간들은
쌓이는 눈속에 깊히 깊이 묻혀만 간다
그는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눈 내리는 창가에서 /강대실
가벼워지고 싶다
가벼워야 내려앉을 수 있다면
나도 저 희뜩거리는 눈처럼
가볍디가벼워져 눈꽃으로 내려앉고 싶다
보고 듣고 시 쓰고
하루하루가 수없는 두레박질,
매양 비워내기 연습이련만
한 눈금도 기울지 않는 가련한 세월
키 낮추고 몸집 줄이고
겹겹이 둘러쓴 인두겁 벗어야겠다
심보를 씻고 양심 헹구고, 욕심으로
뒤틀리는 창자 말끔히 비워내야겠다
허공을 바람의 무게로 날아
시려운 가슴에 꽃이 되고 싶다
쓰레기 같은 세상 순백으로 칠하고 싶다
순수한 내 빛깔로 평천하하다가
어느 순간 소리소문도 없이 스러져
아래로 아래로 스며들고 싶다.
방부제 같은 눈이 내린다 /이상국
내려앉을 곳 없는 새들은
끝없이 하늘을 떠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쓰러뜨리고도
굴뚝처럼 깊어가는 겨울
얼어붙은 길과 나라 위로
흩어져간 발자국 덮으며
눈이 내린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 묻은 위로
방부제 같은 눈이 내린다
눈을 보면서 /김해화
아가 눈 내린다
세상에
하얗게 하얗게 눈 내려
눈부시게 세상에 쌓인다
아가 저 눈 빛 온통
니 깨끗한 가슴으로 스미어 들어가는구나
아빠 눈 봐
쌓인 눈처럼
눈부시게 웃는 우리 아가
눈 보아라
따뜻한 아파트 사람들 아파트 창문 열고
추운 철거 대상 지역 사람들
단칸방 방문 열고
공장에선 어미가 일터 창문으로
공사장에선 아비가 젖어 드는 온 몸으로
바라보는 눈
아가 눈 보아라
저렇게 고운 세상
그러나 아가 이 아비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저기 저 길 위에 녹아 질벅이는 눈
온 세상 사람들 감쪽같이 속이고는
시커멓게 녹아 세상 더럽히는
눈 같은 사람들
온 세상 하얗게 눈 내리는 지금도
세상은 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단다
아가 눈 보아라
온 세상 뒤덮어 오는
저 감쪽같은 거짓 보아라
눈 내린 세상 바라보면 /세영 박광호
하얗게 눈 내린 세상 바라보면
포근하고
아늑함을 느낀다
허물을 덮은 용서
아픔을 감싼 사랑
메마름에 녹아 스미는 희생
사랑을 깨우쳐 주고
순결을 상징하며
세상을 덧칠하여 참세상 열라한다.
눈 /류종호
어디서
백조의 꿈이
있었나 보다
못올 것처럼
왔다가도
이 맘때면
기다려지는 것
소리없이
사랑하자기에
어디서
백조의 울음이
있었나 보다
눈이 오는 줄도 모르고 /조재영
- 손선생님께
눈이 오는 줄도 모르고
다락방에서 혼자 퍼즐놀이만 했습니다
나무들이 말을 걸어오는 줄도 모르고
퍼즐상자 모서리가 닳도록
만지작거리기만 했습니다
맞추지 못해 내던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묵은 책들 사이 오래된 말씀들이 흘러나와
부서진 퍼즐상자를
토닥이곤 했습니다
그런 저녁이면 꿈을 꾸었습니다
모든 꿈들이 말씀 속에 들어와
길을 내었습니다
꽃과 나무를 키웠습니다
나무들이 눈 위에 쓰고 간 말들을
지우며 눈이 내렸습니다
다락방 구석 누런 한지창이
하얗게 떨고 있었습니다
다시 퍼즐상자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커다란 산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노새 한 마리 산 하나 넘고 둘 넘어
걷고 있었습니다
눈이 오는 줄도 모르고
타박타박 제 발자국을 만들며
퍼즐상자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눈이 내려요 /고운 허기숙
창밖에 하얀 눈이
펄펄 내립니다
하얀 세상에 앙상한
나뭇가지만
깨끗한 옷을 입습니다
하얀 길에 발자국
남기며 뒤돌아보니
또 다른 내가 있네요
그대와 함께라면
따뜻한 손잡고
사랑의 길 만들어
걷고 싶습니다
두 사람이 한곳을
바라보며
자연의 하얀 세상에
안기고 싶습니다
짦은 시간이라도
행복한 미소지으며
그대와 함께라면
참 행복하겠습니다
사랑의 광야에 내리는 눈 /고정희
아아 그윽해라 눈이 내리네
님 그리운 날 눈이 내리네
평화롭게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어둠의 들녘 저편
우리들 부끄러운 기억을 덮고
우리들 고통스러운 상처를 덮고
우리들 슬픔의 집을 덮어
백리에 뻗은 백두 벌판
사랑의 광야에 이르네
아아 부드러워라 눈이 내리네
님 보고 싶은 날 눈이 내리네
포근하게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사랑의 광야 저편
우리가 가야 할 언덕을 덮고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을 덮고
우리가 건너야 할 강을 덮어
천리에 굽이치는 백두 난봉,
사랑의 숲을 만드네
]아아 이뻐라 눈이 내리네
님 만나러 가는 날 눈이 내리네
속삭이듯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기다림의 광야 저편
살아있는 날의 가벼움으로
죽어있는 날의 즐거움으로
마음을 비운 날의 무심함으로
우리를 지나온 생애를 덮어
만리에 울연한 백두 영혼,
사랑의 모닥불로 타오르라네
눈은 길의 상처를 안다 /이민아
무제치늪* 골짜기에 사나흘 내린 눈을
녹도록 기다리다 삽으로 밀어낸다
사라진 길을 찾으려 한삽 한삽 떠낸 눈
걷다가 밟힌 눈은 얼음이 되고 말아
숨소리 들려올까 생땅까지 찧어본다
삽날은 부싯돌 되어 번쩍이는 불꽃들
성글게 기워낸 길 간신히 닿으려나
내밀한 빙판 걷고 먼 설원 헤쳐가면
삽 끝은 화살 같아져 모서리가 서는데
결빙에 맞서왔던 삽날이 손을 펴고
쩌엉 쩡 회색하늘에 타전하는 모스부호
마침내 도려낸 상처 한땀 한땀 기워낸다
눈이 오면 /안경애
눈이 오면
나도
하얗게 쌓이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 듯
처음으로
두 발자국 나란히 남겼을때 같이
시나브로 기억을 풀어
그리는 그림처럼
천천이 아주 천천이
내리는 눈 사이로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새들의 발자국 같은 사랑 이야기
눈길을 걸으며
그리움 하나 만들수 있다면
어색한 미소까지
하얀 대지 위에
눈꽃으로 피다 지고 싶습니다
눈의 나라 /김후란
겨울이면 나는 눈의 나라 시민이 된다
온 세상 눈이 다 이 고장으로 몰린다
고요하라 고요하라
희디흰 눈처럼
차고도 훈훈한 눈처럼
고요하라는 계율에 순종한다
사랑을 하는 이들은
안개의 푸른 발
이사도라 단칸의 맨발이 되어
부딪치는 불꽃이 되기도 한다
겨울이면 나는 눈의 나라 시민이 되어
유순하게 날개를 접는다
그러나 이따금 불꽃이 되고
허공에서 눈물이
되려 할 때가 있다
슬픔이 담긴 눈송이들끼리.
눈이 내린다 /강희정
눈이 내린다
하늘이 열리고 펑펑 내린다
눈 맞은 달도 희고 그대와 나도 희다
눈앞에 모든 것이 거듭나나니 그대도 순결하고 나도 순결하다
간밤 남쪽으로 가지 못한 기러기
눈 위를 서성거린 종종 발자욱 그 위로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하여
그대 보고픈 내 마음
눈처럼 쌓인다 소리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