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축복
□ 본문 : 창세기 46장 1-7절
애굽을 향해 가던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기 전에 브엘세바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 땅의 남쪽 경계입니다. 지난주에 ‘이것이 예배다’라는 제목으로 야곱이 드린 예배의 세 가지 의미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예배는 은혜의 감사입니다. 예배는 전적 의탁입니다. 예배는 순종의 결단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런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배의 축복을 주십니다.
1. 예배자의 이름을 불러주신다.
2절 말씀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시며 야곱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도 보통 사랑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이 곤고할 때가 있습니다. 외롭고 허무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마음이 차가워지고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삶에서 예배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도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주일만 아니라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예배를 드리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까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예배였습니다. 죽은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야곱아 야곱아’ 하며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예배는 마당만 밟는 예배였습니다. 이들의 예배에는 회개도 없었고 순종도 없었습니다.(사1:13-20)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예배였습니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야곱아 야곱아’ 하며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아무리 지치고 낙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고 그래서 홀로 버려진 것과 같은 고독 속에 있어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위로를 받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다시 일어날 힘을 얻습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거칠고 악한 소리, 무례한 소리를 듣고 삽니다. 마음 아프지만 교회 안에서도 그런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잠언 12장 18절 말씀처럼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로 인하여 마음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삽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상한 마음이 치유 받고 회복됩니다.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아, 이제는 끝이구나.’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 절망 속에서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걱정과 두려움이 떠나갑니다. 절망 속에서 새로운 소망이 생깁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축복으로 어떤 고난과 시험도 이겨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고후4:8,9)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지가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예배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어려운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일이 어찌 어렵고 특별하겠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전 마당만 밟고 있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드려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육신의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은 죄가 있다면 회개합시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예배합시다. 감사함으로 예배합시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전적 의탁의 예배를 드립시다. 순종의 결단의 예배를 드립시다. 무엇보다도 사모함으로 기대함으로 예배드립시다. 그러면 이 예배시간에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주 음성 외에는 참 기쁨 없도다
날 사랑하신 주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찬446,1)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찬442,1)
2.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3절, 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말씀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예배의 두 번째 축복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은 두려웠습니다. 130세에 정든 고향을 떠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땅으로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70명의 가족이 애굽 땅에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8:13,14)
분명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의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을 떠나는 야곱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분명하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애굽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당분간 애굽에서 살겠지만, 야곱의 자손은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고 그리고 반드시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에게 주신 가나안 땅의 약속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애굽에 가서도 변함없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약속의 멈춤이 아니라 변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도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예배를 통해 말씀하시고,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멈춤처럼 보이고 변경처럼 보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약속과 정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럴 때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확신과 평안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제 이 말씀이 들립니까? 바로 예배시간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통해,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까?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119:105)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혼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예배의 축복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어느 길이 하나님의 뜻이고 어느 길이 자신의 생각인지가 분별됩니다. 이 길이 맞나 저 길이 맞나,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나 더 이상 갈등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면 마귀의 거짓을 깨닫습니다. 마귀의 각본이 보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속아 잘못된 길을 선택해서 방황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 서울신학대학 총장이었던 최종진 목사님이 재일한국인선교사연합회 정기 세미나에서 종말의 시대에 사단의 네 가지 무기에 대해서 강의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종말의 시대에 성도들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네 가지 무기의 첫 번째가 복음에서, 삶에서 십자가를 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위한 희생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누릴 부활과 영광만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고 고난 뒤에 영광이 있는데, 십자가 없는 부활을 고난 없는 영광을 기대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 성공과 부요함에 있으니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설령 이해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두 번째 무기가 주일성수를 우습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의 94%는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실재로 주일을 성수하는 사람은 10% 미만이라고 합니다. 오래전 자료이니 지금은 더 하겠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천도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예배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예배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의 축복을 회복해야 합니다. 한 사람도 성전 마당만 밟고 끝나는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예배시간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모든 방황이 끝이 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평강의 길, 승리의 길을 걸어가기를 축복합니다.
3. 예배의 축복을 물려주라.
1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런데 왜 야곱은 다른 곳이 아닌 브엘세바에서 예배를 드렸을까요?
창세기 21장 33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거할 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고, 믿음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브엘세바는 예배의 땅입니다. 브엘세바는 가장 귀한 순종으로 예배하는 땅입니다.
창세기 26장 23절∼25절 말씀입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이삭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기근으로 이삭은 두려웠지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블레셋 그랄 땅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의 시기로 그랄 땅에서 쫓겨납니다.(26:16) 그때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삭이 처음으로 예배의 제단을 쌓은 곳이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예배의 땅입니다. 브엘세바는 두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예배드렸던 것처럼 이삭도 브엘세바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예배의 축복을 이삭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이삭이 브엘세바에서 예배드렸던 것처럼 야곱도 브엘세바에서 예배드립니다. 아브라함이 예배의 축복을 이삭에게 물려주었던 것처럼, 이삭도 예배의 축복을 야곱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예배의 축복을 물려받은 야곱은 아브라함처럼 순종의 결단으로 브엘세바에서 예배드립니다. 이삭에게 예배의 축복을 물려받은 야곱은 이삭처럼 두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브엘세바에서 예배드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브엘세바의 예배를 통해 부모세대와 다음세대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바로 예배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예배의 축복 말입니다.
※ 저는 할머니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예배의 축복을 물려받았습니다. 방학이 되면 주로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그때는 새벽에 교회에서 종을 쳤습니다. 초종이 울리면 할머니가 일어나서 새벽예배에 갈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재종이 울리면 집을 나섭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할머니가 늘 부르시던 찬송이 338장이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기 원합니다
할머니의 찬송소리가 지금도 저의 귀에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할머니가 저에게 물려주신 브엘세바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늦게 예수님을 믿으셨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교회에 나가셨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쉽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가정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예배에 기도에 생명을 거셨습니다. 예배의 힘으로 기도의 힘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이겨내셨습니다. 이것이 어머니가 저에게 물려주신 브엘세바입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브엘세바의 축복을 생각하면서 이런 마음이 듭니다. 나는 자녀들에게 브엘세바를 물려주고 있나 하고 말입니다. 자녀들이 저를 보면서 저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예배가 감사이고, 예배가 전적의탁이고, 예배가 순종의 결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자녀들이 저의 예배를 보면서 예배가 축복이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위로받고 힘을 얻고 기뻐하는 것이 예배구나 고백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자녀들이 저의 예배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평안과 용기를 얻는 것이 예배구나 고백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아이들에게 예배가, 예배의 섬김이 감사와 기쁨이 아니라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목사 딸이니까, 목사 아들이니까 당연히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봉사가 상처가 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저희 집은 종종 주일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그때 주선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 오늘 피곤했다.’ 주일에는 저보다 주선이 더 피곤한 것 같습니다. 물론 피곤하겠지요. 그런데 피곤함을 뛰어넘는 예배의 기쁨과 감격과 보람은 모르고 그저 힘들고 피곤함으로 끝나는 예배가 아닌가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내가 브엘세바의 축복, 예배의 축복을 물려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자녀들이 볼 때, 부모인 우리들의 모습이 사모함과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아니면 아무 기대감도 없고 사모함도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심지어는 어쩔 수 없이 드리는 예배,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맡은 일이 있어서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 억지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예배드리는지 자녀들이 다 압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힘들면 오늘은 예배 쉬세요. 목사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배의 축복으로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가득합니까? 아니면 불평과 짜증으로 가득합니까? 혹시 집에 가서 예배시간에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판단하고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모습을 보며 자녀들이 한 마디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그럴 거면 차라리 예배드리지 마세요.’
우리 아이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부모세대의 예배를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얼마나 많은 갈등을 할까요? 이것이 예배일까? 저러면서까지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그래도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런 예배라도 드려야 합니다. 그런 예배를 통해서도 성령님은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배라고 해서 그런 예배조차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을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배를 드리는 부모세대는 다음세대에게 브엘세바를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예배의 축복을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다음세대가 브엘세바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가장 큰 방해물은, 예배의 축복을 잃어버린 부모세대일 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이 가슴 아픈 메시지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예배의 축복을 회복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브엘세바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다음세대의 예배를 보며 꾸짖거나 낙심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행복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음세대도 브엘세바의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예배의 축복을 회복하고, 예배의 축복을 다음 세대에 물려줍시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