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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닷컴] "세계부정부패선수권 대회하면 MB 싹쓸이"   2011-09-26 (월)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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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 "국립대 돈 주고 강연요청, 동대는 이틀전 취소"
동국대 대각전 앞 노천법회 500명 참석, 종단 대학 MB 신랄 비판 
 
 
 2011년 09월 25일 (일) 13:41:06 이혜조 기자 reporter@bulkyo21.com 
 
명진 스님이 법회를 갑자기 취소하고 노천법회마저 저지한 동국대를 향해 쓴소리를 했다.

25일 오전 9시께 동국대 일부 직원들이 명진 스님의 법회를 막았다. 수시모집 실기시험에 방해를 준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동국대는 정각원 법회를 거부했고 단지불회 회원들은 정각원이 아닌 교문 아래 대각전 앞 노천을 법회 장소로 정하고 속속 도착하는 불자들에게 바뀐 장소로 안내했다.

그러자 대학측 일부 관계자가 이마저 불허하면서 약간의 실랑이가 일었으나 법회는 10시 정각 삼귀의 반양심경 봉독, 청법가에 이어 명진 스님이 1시간30분가량 법문을 하면서 큰 무리없이 진행됐다.

 
"본인들이 허락한 장소를 불과 3일전에 취소하다니. 내가 무슨 폭력적인 방법으로 한 것도 아닌데 참으로 시대가 거꾸로 흘러간다. 80년대 전두환 정권도 이러지는 않았다. 지난 8일 국립 충북대에서는 내 강연을 들어야 학점을 주는 법회를 마련해줬다. 강연료도 주고, 마치고 교직원들이 따라나와 밥을 사겠다고 하더라.

그런데 사립대, 종립대인 동국대는 이사장이 스님이고 총장이 봉은사 불자다. 곰공히 생각하니 메이저 언론의 주필이 최근 불교신문에 원택 스님과 대담한 적이 있다. 주필이 내게 전화해 참 괴이한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 '나는 불교를 몰랐는데 명진 스님 때문에 알게 됐다. 명진 스님 손에 이끌려 봉은사를 가게됐고 108배, 300배 하면서 불교를 알게됐다. 고 했더니 인터뷰후 불교신문 기자가 전화로 우리 신문에서는 명진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어서 그 말은 빼겠다고 하길래 이유를 물어봐도 말못할 사정이 있다고만 하더라'고 했다. 귀신이 하는 짓인가. 자승 원장이 직영에 대해서도 '말 못할 사정이 있다. 귀신이 한 짓 같다'고 하더니"

동국대의 '말 못할 사정'이 도대체 뭔가?

명진 스님은 불자들은 끊임없는 성찰 속에서 한국불교의 갈 길을 생각해야 한다고 설했다.

"1945년 해방 뒤 미군정시절 기독교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모든 재정을 병원 학교 복지시설에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 기독교의 발판이 됐다. 한국사회를 기독교화했고 기독교 인재를 배출했다. 요즘 불교가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당하는 꼴을 보면서 '거룩한 부처님깨 귀의합니다~'이런 노래나 하고 있으면 될까.

전국의 특정종교 관련 지명 바꾸라는 것이 행안부의 지시다. 2008년 범불교도대회 직후 150억 예산의 원효대사 성지순례길 발표하고선 지난 7월에 없애 버렸는데 한마디 말로 못하는 게 총무원장이다. 한국사회가 기독교 편향으로 흘러가는데 한마디 못하고, 내가 (법회)말하는 장소 거부하고, (불교신문)언론에 내 이름도 못나가가게 하는 것은 어디서 배워 먹은 것인지. 왜 알아서 기나. 정각원 빌려주기로 해놓고 취소한 것도 '말~ 못할 사정'인가"

명진 스님의 발언은 저축은행사태를 비롯한 MB정권의 각종 부정부패 의혹 사건으로 이어졌다.

"금융감독원이라는게... 정치하는 X같은 놈의 새끼들이 말이야. 서민들이 새벽시장에 나가 배곪아 가며 허리 휘도록 한 두 푼 벌어 이자로 여생보내겠다며 맡긴 돈으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놈들이다. 그걸 왜 비판 안하나. 위키리크스에도 폭로됐다. 내 동생은 뼈속까지 친미라고... 그런데 알고보니 뼈속까지 비리다.

부정부패비리가 이렇게 심할 줄 몰랐다.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MB를 찍어 대통령 만든 여러분들이, 국민들이 반성해야 한다.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보면 국가가 아니고 도둑놈 집단이다. 돈 쌓아놓고 좋은 집에 살면서도 도둑질을 하다니. 금융감독원은 금융사기원이다. 권불 5년인데 이제 4년 지나고 벌써 한나라 내부 싸움 터져나온다. 패가망신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불교적으로 지혜를 얻는 방법을 궁구해야 한다."

세계부정부패선수권 대회하면 MB가 휩쓸 것

명진 스님은 곽노현 교육감에게 1억 원을 줬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안 줬다"고 확인했다.

"처음 조선일보 기자가 전화로 검찰 여권에서 곽노현의 1억 원이 스님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고 하길래 내가 무슨 돈이 있나 말이 안된다고 했다. 그러가 순간 지혜가 발동해 있어 보이는 게 좋다, 알아서 판단하라 말했다. 내가 (조선일보 기자를)엮었다. 그 다음달 또 전화가 와 (조선일보 기자가)아무에게도 내가 줬다는 얘기하면 안된다. 곽도 받았으면 정말 나쁜 사림이라고 하더라. 다음날 가평 운악산 등산 후 MBC, 한겨레, 경인방송 등 몇 군데서 전화왔다. 전부 법조출입기자들이다.

내가 곽 교육감과 최근 통화하면서 자신있게 사표내지 말라고 할 때는 뭔가 있지 않았을까 유추했던 것 같다. 그는 양심적인 기독자다. 조용기류와는 다르다. 목사 보다 훨씬 양심적인 기독교인이다.

여기 용산참사 전재숙 보살도 와 있지만... 지금 아들은 감옥에 있고 남편은 당시 돌아갔다. 봉은사 천일기도 당시 추석 설 때 여러분이 가져온 약값 등 모은게 3년 동안 1억2천만원이다. 그 중 1억을 드렸다. 경기도는 무상급식한다고 할 때 공개적으로 모금해 9천만원 줬다. 해고자들 도운 것도 그런 차원이다. 해고란 삶의 터전을 없애버리는 것 아니냐. 이런 세상은 안 된다. 그런데 가서 돕고 바른소리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 남의 장례식장 가서 '긍낙왕생'이라고 쓰고 '안중근씨'라고 부르는 참으로 무식하고 무치하고 무능한 MB보다야.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을 보면서 세계부정부패비리선수권 대회 열면 MB가 메달 휩쓸고, 깨지지 않을 기록 세울 것이다 생각했다."

명진 스님은 법회가 끝날 때즘 대각전 앞에 도착한 정각원장 법타 스님에게 "1987년 개운사에서 DJ초청 강연을 성사시키고 난 주지를 그만뒀다"며 "뭐가 두렵냐. 중노릇 왜 하느냐"고 따졌다. 법타 스님은 웃으면서 명진 스님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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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명진스님 “곽노현에게 1억 안 줬다” [하니Only] 허재현 기자

등록 : 2011 09 21 16:39 | 수정 : 20110921 18:07 한겨레신문

“기자들이 자꾸 확인 전화…검찰이 또 엉뚱한 피의 사실을 흘리는 듯”

“개 같은 일 자꾸 하면 검찰청 앞에 개장수 모으겠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도 “비슷한 전화를 기자들에게 받았다” 의혹 제기

명진스님은 정말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에게 1억원을 주었을까.

명진 전 봉은사 주지가 최근 언론사 기자들이 잇달아 전화를 걸어와 ‘곽노현 후원 의혹’을 해명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두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명진스님은 21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자꾸 기자들로부터 ‘곽노현 교육감에게 1억원을 주지 않았느냐’는 확인 전화를 받고 있다”며 “검찰이 또 엉뚱한 사람을 향해 피의 사실을 흘리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명진스님은 “일주일 전 조선일보 김아무개 기자에게 전화를 받아 ‘곽노현에게 돈을 주었냐’는 질문을 받았다. 워낙 황당해서 농담조로 ‘(내가 돈이) 있어 보여서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거의 확신하는 듯 기자가 계속 물어보기에 짜증이 나서 ‘알아서 판단하라’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명진스님은 이후 조선일보 종합편성채널 쪽이 봉은사 관계자에게 ‘봉은사에서 거액의 돈이 빠져나갔었는지’ 묻는 확인 전화를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명진스님은 “20일에는 문화방송의 강아무개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봉은사에서 거액의 횡령을 해 김상곤, 박원순, 곽노현에게 돈을 줬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고 했다”고 전했다. 명진스님은 전화를 걸어온 기자들이 검찰 출입 기자여서, 검찰이 기자들에게 관련 의혹을 흘리는 것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명진스님은 같은 날 경인방송의 기자로부터 비슷한 전화를 또 받았다.

 

이런 의혹들에 대해 명진스님은 강하게 부인했다. 명진스님은 “나는 그런 돈을 줄 만한 능력이 없다. 내가 비록 김상곤 교육감과 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 해고자 가족 등에게 돈을 준 적 있지만 모두 신자들의 성금과 ‘스님은 사춘기’ 책 인세를 모아서 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명진스님은 “검찰이 이런 말들을 자꾸 흘리는 것이라면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이러한 짓은 개 같은 일이기 때문에 자꾸 계속되면 내년에 전국 개장수 오토바이를 검찰청 앞으로 불러 대기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편, 이름 밝히기를 꺼린 서울시 교육청의 한 관계자도 “최근 비슷한 전화를 기자들에게 받았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이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2주전께 조선일보와 한국방송 기자들로부터 ‘곽노현에게 1억원을 준 사람이 맞냐’는 질문을 받았다”며 “검찰이 기자들에게 무슨 혐의를 자꾸 흘리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명진 스님은 25일 서울 장충동 동국대 정각원에서 열리는 대중법회에서 이와 관련한 입장을 표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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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 입이 참 거치네!

“개 같은 검찰… 개장수 오토바이 검찰청 앞에 대기시키겠다” 라이트 뉴스 김남균 기자

승려 명진(前 봉은사 주지)이 곽노현 서울교육감에게 ‘1억’을 준 당사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물론 명진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 21일 한겨레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자꾸 기자들로부터 ‘곽노현 교육감에게 1억원을 주지 않았느냐’는 확인 전화를 받고 있다”며 “검찰이 또 엉뚱한 사람을 향해 피의 사실을 흘리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전화를 걸어온 기자들이 검찰출입 기자라며, 따라서 검찰이 기자들에게 이러한 의혹을 흘리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런 돈을 줄 만한 능력이 없다”고 했다.

 

다만 “내가 비록 김상곤 교육감과 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 해고자 가족 등에게 돈을 준 적 있지만 모두 신자들의 성금과 ‘스님은 사춘기’ 책 인세를 모아서 준 것”이라고 했다.

 

특히 “검찰이 이런 말들을 자꾸 흘리는 것이라면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이러한 짓은 개 같은 일이기 때문에 자꾸 계속되면 내년에 전국 개장수 오토바이를 검찰청 앞으로 불러 대기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명진은 오는 25일 장충동 동국대 정각원에서 열리는 대중법회에서 이와 관련한 입장을 표명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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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 "내가 곽노현에게 1억 줬다고?"

"검찰이 흘리지 않고서야... 회계처리상 불가능" 2011-09-21 15:08:47

 

명진 스님이 21일 자신이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게 1억원을 줬다는 의혹이 검찰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며 검찰을 질타했다.

 

21일 <불교닷컴>에 따르면, 명진 스님은 이날 <불교닷컴>과 통화에서 "최근 두 명의 기자로부터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게 선거 기간 중 돈을 건넨 사실이 있냐는 문의 전화가 왔다"며 "모두 법조 출입기자들이어서 곽 교육감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흘리지 않고서야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겠느냐"며 배후로 검찰을 지목했다.

 

명진 스님은 "이어 <문화방송> 강모 기자가 전화로 '스님이 곽노현에게 1억 원을 줬다는 얘기가 파다한데 준게 사실이냐'고 물었다"며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도 봉은사 주지 시절 금전적으로 도와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명진 스님은 "강 기자에게 '(돈이) 있어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준 것처럼 흘려도 된다'고 얘기했다"며 "그런데 어제(20일) 다시 사실여부를 묻는 확인전화를 한 것 보니 내가 준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더라"고 덧붙였다.

 

명진 스님은 곽노현 교육감과는 후보시절 한두 번 만나고 몇차례 전화통화를 한 게 인연의 전부라며 1억 지원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명진스님은 "알고보니 곽 교육감은 기독교더라. 진보는 기독교 믿으면 안된다. 난 기독교를 싫어한다. 부처님이 무명이라고 가르친 것을 이들은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않느냐. 불교는 진보가 안될 수 없다. 부처님 말씀마저 의심하고 부정하며 끊임없이 각성을 요구하는 것이 불교"라며 "그런 곽 교육감을 내가 도왔겠는지 생각해보라"고 반문했다.

 

명진 스님은 "개인적으로나 봉은사 주지로서 복지시설·시민단체 등은 도울망정 개인에게 줄 여력도 없고 회계처리상 불가능하다"면서도 "'1억 보시'의 진실과 사태를 둘러싼 입장을 25일 대중법회에서 밝히겠다"고 말했다. 명진 스님은 오는 25일 장충동 동국대 정각원에서 열리는 대중법회를 가질 예정이다.

 

명진 스님은 "검찰이 이 사실을 흘린 게 사실이라면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추잡스럽고 비열한 방법으로 몹쓸 사람 만드는 행위를 그만둬야 한다. 내년에 전국 개장수 오토바이를 검찰청 앞으로 불러 대기시킬 것이다"라고 힐난했다.

 

검찰은 이날 오후 곽노현 교육감을 구속기소하면서 박명기 교수에게 건넨 2억원 가운데 1억원은 곽 교육감의 부인과 처형을 통해 마련하고 1억원은 지인에게 빌린 것으로 잠정 결론내렸다고 밝혀, 명진 스님에 대한 자금 제공 의혹 제기가 황당한 추측으로 끝났다.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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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종교ㆍ학술 [Why] [이한우의 聽談]

前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기사 입력 : 2011.05.14 03:06

 

"좌파? 난 스님파… 그냥 어려운 사람 편들어 주자는 것"

"자기가 물 떠먹던 우물에 침 뱉고 떠난 사람 믿지 않아"

길가다 억울하게 맞는 사람 있으면 막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좌파라 손가락질해도 감수

봉은사 재정공개 등 개혁실험… 다른 절들, 뒤에서 비난하기도

 

6살에 어머니 잃고, 高3 때 절에서 공부하다 출가 결심

성철 스님 처음 만나 인사도 않고 한참 째려보니

"이노무 자슥, 니 눈병 났나”웃으며 받아주셔

떠돌며 수도하다 월남전까지… 동생 죽던 해 계 받아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9일 오후 충청북도 제천 월악산 중턱의 암자로 스님을 찾아갔을 때 하늘은 당장이라도 폭우를 쏟아 부을 듯 검게 흐려 있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했다"고 하자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해서 내가 잠시 멈춰 놨다. 내가 그 정도 공력은 된다"며 스님은 초면인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명진(明盡ㆍ61), 그 이름만으로도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사건이 되고 큰 논란을 부르는 인물이다. 지난주 보수성향의 한 지인이 "지금쯤 명진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재미있을 것"이라며 인터뷰를 주선할 의사를 밝혔다. 거절했다. 가끔 언론에 등장하는 유쾌하지 못한 뉴스들을 통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만나봐라, 괜찮은 분이다"며 거듭 권유했다. 명진 스님을 잘 아는 또 다른 보수성향의 지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결사 반대였다. "그런 사람 뭐 하러 인터뷰 하냐? 완전 좌판데."

 

고민 중일 때 책 하나가 배달돼 왔다. 명진 스님이 최근에 쓴 '스님은 사춘기'라는 가벼운 제목의 작은 책인데 재미있어서 쥐자마자 단숨에 다 읽었다. 하긴 그동안 '운동권 스님'이란 이력 말고 그의 과거 행적이나 생각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知彼知己(지피지기)…. 인터뷰를 권했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처님 오신 날과 관련된 질문은 안한다, 개인 명진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것이다, 본인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질문도 맘껏 하겠다, 이 세 가지를 받아들이면 하겠다."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스님 쪽에서 좋다고 하셨다."

 

▲ 월악산 산중 암자에서 만난 명진 스님은 친북좌파논란에 대해 "원래 나는 좌파라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힘들게 사는 사람 편드는 게 좌파라면 좌파일 텐데 북한 지도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어떤 체제건 국가지도자는 자기 국민을 굶겨서 천민취급을 받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고 명확하게 정리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어머니의 자살, 동생의 죽음

 

―책에 "내가 여섯살 때 어머니는 세상을 버렸다"고 썼다.

 

"자살하신 거다.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불화와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삼베옷 입고 대나무 지팡이 짚은 채 화장터로 걸어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부산 당감동 화장터에서 어머니는 한 줌 재가 되어 나의 고향 당진에 묻혔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상실감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죽는 건 뭘까, 사람은 왜 살까'를 묻게 했다."

 

―상황이 문제아 내지 반항아로 이끌었을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러셨나 싶은게 있다. 초등학교 시절 외갓집에 가면 귀한 외동딸을 잃은 외할머니는 나와 네살 아래 동생을 앉혀 놓고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에미는 너희 애비 때문에 죽었다. 크면 꼭 에미 원수를 갚아야 한다.' 또 친할머니는 내가 동생과 놀고 있는 것을 보시면서 늘 혼잣말로 '쯔쯧, 독한 것, 저 어린 것들을 놔두고 죽어?' 은연중에 내 마음 속에서 '어머니는 자식을 두고 죽은 독한 사람, 아버지는 커서 원수 갚아야 할 사람'이 돼 버렸다. 마음이 이렇다 보니 늘 나는 굉장히 불행한 사람이라는 피해의식으로 가득했다."

 

―아버지하고 사이도 안 좋았겠다.

 

"동네에 무슨 사고가 났다하면 범인은 십중팔구 나였다. 감당이 안됐던지 아버지는 동생이 있는 할머니댁으로 보냈다. 초등학교 때 여섯 번 전학을 다녔고 중학교도 두 군데 다녔다. 전학 많이 다녀본 사람은 안다. 왕따가 되거나 악바리처럼 굴어 짱이 되거나. 난 늘 '죽으면 그만이지'하는 생각으로 뭉쳐 있었기 때문에 싸웠다 하면 죽기 살기로 싸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땐가 내가 훔치지도 않은 돈을 내가 훔친 걸로 아신 아버지가 매질을 했다. 그래서 축대에 서 있는 아버지를 밀어뜨리고 나도 마포대교 아래 벼랑천으로 뛰어든 적도 있다. 뱃사공이 건져서 살긴 했지만."

 

―듣고 보니 요즘 '잘' 싸우는 게 좀 이해는 된다.

 

"욱 하는 기질에다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직선적 성격이라서. 죽기를 각오했으니 겁도 없고. 하하하."

 

―하나뿐인 남동생은 어떻게 죽었나.

 

"내가 제대하니 동생이 입대하겠다고 했다. 동생은 배문고 밴드부에서 바순을 불며 악장 노릇을 했다. 당시 해군군악대는 해외에서 운동경기가 있으면 지원을 나갔기 때문에 내가 해군을 권했다. 그런데 입대 한달 만에 충무 앞바다에서 훈련받던 배가 전복돼 훈련병 316명 가운데 16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1974년 2월의 일이다. 손윗사람의 죽음은 그저 슬플 뿐이지만 손아랫사람의 죽음은 애간장이 녹는다고나 할까? 장례 때문에 진해에 일주일 머무르면서 지나가는 해군만 보면 다짜고짜 달려가서 두들겨 팼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다른 생각 없이 한평생 중노릇 하는 것도 동생이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출가

 

―스님이 될 운명이었나 보다.

 

"서울공고를 다녔는데 3학년 여름방학 때 출가했다 환속한 사촌형님이 '대학 보내줄 테니 절에 가서 공부해라'고 해서 무주구천동 설천면에 있는 관음사라는 절에 가 있었다. 그때 해인사에서 왔다는 젊은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너무나도 기품이 있었다. 그 스님과 이야기하던 중 벼락 맞은 느낌이 왔다. 세상사를 모두 다 안들 나를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스님의 말씀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원래는 그 길로 출가를 하려 했는데 아버지가 혹시 돌아올 경우에 대비해 고등학교는 졸업하고 출가를 하건 뭘 하건 하라고 해서 고등학교는 마쳤다."

 

―그리고 출가했나.

 

"그 사촌형님께 출가의 뜻을 말하자 해인사 성철 스님 앞으로 소개장을 써주었다. 당시 절집에는 '북 전강 남 성철'이라는 말이 있었다. 북쪽에서는 전강(田岡 1898~1975)스님이, 남쪽에서는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이 가장 훌륭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해인사 정문 앞에서 소개장을 찢어버렸다. 취직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생사(生死)를 타파할 도를 구하러 가는 놈이 소개장을 들고 가다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고, 건방지다는 소리 많이 들었겠다.

 

"지금 송광사 방장(方丈)으로 계신 보성스님이 그때 행정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며칠도 안돼 '이래 건방진 행자 필요 없다. 가라'고 호통을 쳤다."

 

―성철스님은 언제쯤 처음 뵀나.

 

"행자 생활 보름쯤 됐을 때다. '기왕 도를 구하러 왔으면 이기든 지든 제일 센 사람하고 붙어 봐야지'하는 생각으로 다짜고짜 스님이 계신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시자(侍者-일종의 비서)스님이 가로막았다. 승복도 아직 입지 못한 속복(俗服) 행자가 큰 스님을 만나겠다고 하니 기가 찼겠지. 논산 훈련소 훈련병이 육군 참모총장 만나겠다고 한 셈이었으니까. 나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맞서는 바람에 큰 소리가 났지. 그때 문이 열리면서 억센 진주사투리가 들려왔다. '뭐꼬? 와 이리 시끄럽노. 니 뭐하는 놈이고.' 나는 인사도 않고 성철스님을 째려보았다. 누군가 처음 봤을 때 기 싸움에서 안 지려고 상대를 빤히 꼬나보는 습관이 나온 거다. 그런데 스님이 웃으시며 '이노무 자슥, 니 와 그리 빤히 쳐다보노? 니 눈병 났나.' 그 길로 성철스님의 눈에 들어 백련암에서 행자 생활을 하게 됐다."

 

―당대 최고의 스님 밑에 있어 많이 배웠을 것 같은데.

 

"당시 보통 10년씩 행자 생활을 할 때였는데 1년도 안돼 계(戒)를 주시겠다며 원일(圓日)이라는 법명도 지어주셨다. 장삼도 맞춰놓고 계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계를 받기로 한 닷새 전 새벽 백련암을 떠났다. 당시 구도심이 너무 뜨거웠는지 성철스님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도(道)가 뭐길래.

 

"가는 곳마다 도 닦는 스님들을 만나 보았는데 눈에 들어오는 도인은 없었다. 그래서 솔잎만 먹으면 도인이 된다는 말을 듣고 솔잎만 먹는 생식을 했더니 몸만 엉망이 되고 공부는 되지 않았다."

 

그렇게 떠돌다가 군에 입대했고 말년 병장을 두들겨 패서 감옥과 월남 중 하나를 택일하라고 해서 그는 월남전에 통신병으로 '참전'하고 돌아왔다. 동생의 죽음은 그 직후에 있었고 동생이 죽던 그해 10월 법주사 주지 탄성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마침내 행자에서 스님으로 '승격'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간 스님생활은 단조로웠다. 이 선방 저 선방 찾아다니며 '죽음'과 '나'를 화두로 40안거를 했다. 유신독재도 그와는 무관했고 80년 광주의 비극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것들은 그저 속세의 일일 뿐이었다.

 

▲ '운동권 명진'.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에 끌려가는 명진 스님(오른쪽) /고명진씨 제공

 

◆ 운동권 스님

―언제 어떤 계기로 소위 '운동권'에 눈을 떴나.

 

"1984년 해인사에 머물 때였다. 지명수배 된 운동권 청년 한 사람이 숨어들어왔다. 그는 광주항쟁의 비디오를 갖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럴 때 종교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해인사로 숨어드는 수배자들이 늘어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점 점 나는 사회 참여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 매를 맞고 있거나 굶주림에 떨고 있다면 아무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떻게 했나.

 

"바로 뭘 어떻게 한 건 아니고. 사회 과학 쪽 책도 좀 읽고 수배자들과 대화도 나누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고 고민도 좀 했지. 소위 '의식화'훈련을 받은 셈이라고 할까."

 

―본격적인 운동권 스님이 된 것은 1986년이던데.

 

"그해 여름인가 대구 민통련 사무국장 권오국씨가 5·3 인천사태로 수배되어 해인사로 피신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스님, 감옥에 가면 독방을 주는데 공부하기 아주 좋습니다'고 말하는데 귀가 번쩍 뜨였다. '독방이라고?' 무문관(無門關-닫힌 수행공간)이 따로 없겠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주 감옥가고 싶어 안달이 났어. 아마도 사회참여의 고민은 깊어가고 불교공부는 안될 때라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원하던 감옥은 언제 갔나.

 

"그해 가을에 갔다. 9월 7일 해인사에서 승려대회가 열렸다. 불교재산관리법 철폐와 부천서 성(性)고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는 집회였는데 2000여명의 스님들이 모였고 내가 사회를 봤다. 그때 금산사의 한 스님이 부엌칼로 손가락을 자르고 하얀 천 위에 '불자여, 눈을 떠라!'고 썼다. 순간 참석한 스님들이 모두 흥분해 대회는 과격한 시위로 바뀌었다. 그때 열아홉 명이 구속되고 여러 사람이 수배가 됐는데 나는 그 구속도 안 되고 수배자 명단에도 없었다. 속된 말로 '쪽' 팔렸다. 그 다음 달 서울 조계사에서 10·27 법난 규탄대회를 하게 되었는데 누가 그랬다. 대회 위원장을 맡으면 무조건 잡혀가 삼년쯤 감옥에 산다고. 그래서 위원장 맡았는데 조계사는 경찰들이 봉쇄했어. 그래서 봉은사로 몰려가서 선불당을 차지했지. 그게 나와 봉은사의 인연이다. 다음날 가두시위에 나섰다가 결국 경찰에 붙잡혀 '닭장차'에 실려갔지. 두 달 살다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나왔다. 그때 내 담당변호사가 조영래 변호사다. 조 변호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감옥 나와서는?

 

"졸지에 '불교 운동권 스타'가 됐더라구. 난 원래 해인사 선방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중앙승가대 학생들이 와서 개운사 주지를 맡아달라고 했다. 처음엔 거절했는데 주변 스님들이 한국불교를 바꿀 생각이 있으면 맡아보라고 해서 1987년 3월 개운사 주지로 갔다."

 

이때 이미 명진스님은 봉은사 주지 때 보여준 파격의 씨앗을 슬쩍 드러냈다. 부처님 오신날에 다는 등(燈)값에 차별을 두는 관행을 없애버렸다.

 

"등을 다는데 빈부가 어디 있는가. 절에서 등 값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산을 해보니 그 전해와 별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운동권이 된 스님은 점점 정치에 얽혀 들어간다. 그것은 어쩌면 불교의 초라한 자화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절이 군홧발에 짓밟혀도 정권에 항의 한번 제대로 못하는 불교의 처참한 모습이 자존심 상하고 가슴 아팠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은 우리 수행자들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사나 신부들보다 더 격렬하게 사회의 불의에 항거하며 뛰어다녔다."

 

그는 누구보다 불교를 사랑했다. 사회와 역사에 눈을 떴다고 했지만 사회와 역사에 눈을 뜨고 보니 초라한 불교의 위상이 드러난 것일까? 그는 사회운동에 회의가 들었다고 했다. '내가 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깎았던가?'

 

경상북도 문경 봉암사로 숨어든 것도 그 의문을 풀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훗날 조계종 종정이 되는 서암스님을 모셨다. 그런데 당시 봉암사는 108평짜리 새 법당을 짓고 있었다. 싫었다. 성철스님이 그리웠다고 했다. 백련암에 가서 면담을 신청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후 한동안 그는 용맹정진에 들어간다.

 

◆정치와 종교, 혹은 불교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1994년 의현스님의 삼선에 반대하며 '개혁파' 스님들이 개운사에서 단식을 했다. 다행히 분위기가 개혁파에 쏠리며 4월 10일 총무원측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국승려대회가 열렸다. 그날 나는 대중연설을 맡았다. 그런데 대회 끝나고 스님들이 각자 절로 돌아가 버리면 모든 것이 원위치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 종단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저는 불문(佛門)을 떠나겠습니다. 다시는 이 가사를 입지 않겠습니다'며 가사를 벗어 원로스님들 앞에 놓았다. 참석했던 많은 스님들이 울고 있었다. 결국 의현스님은 물러났고 종단개혁의 발판이 마련됐다."

 

―제3자 입장에 보면 불교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부끄럽다. 개혁만 하면 잘 될 줄 알았는데 좀 지나고 보니 한 명의 의현이 사라지고 25명의 의현, 100명의 의현이 불교를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위로부터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봉은사 개혁실험은 그때부터 생각한 것인가?

 

"불교 내부에서 기풍을 바로잡아야 불교가 바로 선다는 생각을 했다. 운동권 중 시절에도 사회과학을 통한 불교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반대였다. 불교 자체를 깨끗하게 함으로써 중생도 구제하고 사회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일관된 생각이었다."

 

―천일기도와 재정공개는 아무래도 충격적인 조치였다.

 

"사실 큰 절의 주지는 할 일이 많아 천일기도를 하면 안 된다. 그러나 윗분들한테 돈 안 갖다주고 포교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에서 천일기도와 재정공개를 했다. 신도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등록신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2006년 취임 당시 80억원 대이던 예산은 2010년 136억원 대로 늘었다. 불전함에는 1년에 십 몇 억원의 돈이 쌓였는데 신도들에게 열쇠를 맡겨버렸다. 그전까지 그 돈은 주지의 용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이 많이 생겼을 텐데.

 

"겉으로는 다른 절들에서도 칭찬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부 뒤에서 나를 때려죽일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다. 정치권력에 밀린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봉은사 주지에서 쫓겨난 게 다른 절들의 시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문제의식은 좋았지만 해결책은 미숙했던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불교계의 강남좌파', '불교계의 노무현' 등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 봉은사 주지 시절인데.

 

"난 좌파적 우파이지 정통 좌파는 아니다. 굳이 말하면 스님파다. 대한민국 주류 사회의 중요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것을 나는 외면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나를 좌파라고 손가락질 한다면 감수하겠다. 길가다가 억울하게 얻어터지는 사람이 있으면 막아줘야 하는 것 아니겠나."

 

―여러가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기질이 통하는 것 같다.

"노통이 초단이면 나는 입신의 경지에 든 사람이지. 내가 이명박 대통령 비판을 많이 하는데 언론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그러는 거다. 도올(김용옥씨)이 그러데. 한국불교 1700년 역사상 임금이건 대통령이건 정면으로 최고 권력을 가장 많이 비판한 중이 바로 나라고. 나야 가족이 있나 지킬 게 있나, 나 같은 사람이라도 할 말은 해야지."

 

―이명박 대통령이 왜 그렇게 못마땅한가?

"불교계 입장에서 보면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다.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한다. 잘못했으면 정직하게 사과하고 바로 잡아야지 너무 뻔뻔하다. 그에 비하면 박근혜 전대표는 진정성이 있다. 나는 좌고 우고 떠나서 진정성 있는 사람이 좋다."

 

―정치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묻자. 손학규 민주당대표와도 인연이 깊다.

 

"이런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난 그 사람 안 믿는다. 자기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정당을 떠나면서 '유신 잔당'이라고 비난했다. 그냥 박근혜가 너무 강해서 한나라당에서는 가망성이 없어 떠난다고 했다면 나는 지금도 그 사람 지지했을 거다. 그런데 자기가 물 떠먹던 우물에 침 뱉고 떠났다. 차라리 야권에서는 문재인처럼 진정성 있는 인물을 발굴해서 박근혜에 맞서야 한다."

 

3시간 반이 흘러도 이야기는 시작인지 중간인지 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끊어야 했다.

 

―여전히 봉은사 주지 자리에 대한 미련이 있나.

"지금도 주말이면 많은 봉은사 신도들이 이 먼 곳을 찾아온다. 그때마다 미안하다. 이부장, 특종 하나 줄까.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그때는 봉은사 주지보다는 조계종 총무원장 꼭 해보고 싶다. 원래 종정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힘이 없더라. 불교를 바꾸려면 총무원장 자리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선거를 통해 뽑는 총무원장 자리는 관심 없다."

 

―선거가 아니면 무슨 방법이 있나.

"나야 모르지."

 

암자를 내려오면서 든 의문 하나. 명진 스님은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까?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자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민주당 지지율이 한나라당 지지율을 처음으로 앞섰다는 여론조사 결과였다.

'민족21' 명진스님 “조선일보가 국정원 기관지로 전락”

국정원 수사· 보도 반박…“총련 관계자 방한 때 왜 체포 안했나”

미디어 오늘 조수경 기자 | jsk@mediatoday.co.kr 입력 : 2011-08-04 15:48:36

 

'민족21'이 최근 자신들을 겨냥해 벌어지고 있는 국정원의 수사와 조선일보의 보도에 대해 정면 반박하고 나섰다. '민족 21'의 발행인인 명진스님은 4일 장충동 만해NGO교육센터 대교육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정부가 민족21에 얼토당토 않는 올가미를 씌우고 있다”며 수사기관과 언론의 공안몰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명진스님은 이번 국정원 수사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보복수사라고 반박했다. 명진스님은 “민족21이 북 공작기관의 지령을 받아 활동해왔다면 민족21과 수십, 수색 번 협의하고 허가를 내준 정부 역시 북 공작기관의 지령에 놀아났단 말이냐”며 “공안당국이 공작원이라고 주장하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 관계자가 네 번이나 남측을 방문하는 동안 왜 체포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민족21'에게 지령을 내린 주체가 수시로 바뀌고 있는 수사 내용에 대해서도 명진 스님은 “(공안당국은) 민족21이 지령을 받았던 시점이 2006년이라고 하는데 지령을 내린 정찰총국은 2009년에 만들어진 조직”이라며 “한마디로 민족21에 지령을 내린 기구가 북한에는 없다”고 꼬집었다.

▲ 명진스님, 국정원 수사 관련 긴급 기자회견(사진출처=뉴시스)

 

민족21 측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민족21은 방북, 방일 취재 시 통일부에 사전 승인 및 사후 보고 절차를 철저히 거친 점 ▲민족21이 지령을 수수했다고 하는 상부선이 계속 바뀌고 있는 점 ▲국정원이 민족21이 정찰총국의 누구로부터 어떤 지령을 받아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점 ▲국정원이 민족21에 지령을 내렸다고 지목하는 총련의 조모 국장은 서울에 4차례나 다녀간 매우 공개적인 인물이란 점 등을 들어 공안기관의 수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명진스님은 또 조선일보 등의 언론이 검증 없이 국정원이 흘린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쓰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명진스님은 “적어도 이번 민족21에 대한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의 보도 태도는 기초적인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몰상식한 행태이며, 공안기관의 브리핑을 앵무새처럼 읊음으로서 스스로 붓의 역할을 저버린 서글픈 보수언론의 자화상”이라며 “언제부터 조선일보가 국정원의 기관지가 됐느냐”고 말했다.

 

명진스님은 “조선일보의 기사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란 6하원칙 중 ‘누가’에 해당하는 민족21밖에 없다”며 “발행부수 1위 자랑하는 조선일보가 황색 신문, 찌라시만도 못하는 기사를 실어서 한국사회의 사상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고 힐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정창현 민족21 대표도 조선일보가 민족21이 북한 노동당 225호의 지령을 받았다고 보도했다가 단 하루 만에 취재원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채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았다고 보도한 점과 조선일보 기자가 닫혀 있는 민족21 사무실을 열고 무단으로 촬영한 점을 들어 조선일보를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1일자 기사 <北지령 지하당, 인천 구청장 8명 중 3명 포섭 노렸다>에서 “북한 노동당 대외연락부의 후신인 ‘225국’의 지령을 받고 10여년간 암약해온 간첩단 ‘왕재산’ 사건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며 “공안당국은 지난 6일 월간지 ‘민족21’의 편집주간 안모(43)씨와 부친 안모(78)씨, 편집국장 정모씨 등 3명의 집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한 뒤 최근 소환조사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3일자 기사 <민족21, 천안함 폭침 주도한 北정찰총국 지령받아>에서는 “북한 간천답 사건을 수사 중인 공안당국은 월간지 ‘민족21’ 관계자들이 북한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아 활동했다는 단서를 확보, 수사를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2일 알려졌다”고 전했다.

 

▲ 조선일보 1일자 기사

 

▲ 조선일보 3일자 기사

정 대표는 일부 언론에서 전하고 있는 민족21이 2006년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신문발전기금을 받았다‘는 보도에 대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정 대표는 “신문발전기금의 1차 배상기관으로 선정된 것을 사실이지만 ‘사옥을 가진 언론사’여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하지 못해 결국 받지 못했다”며 “민족21이 그나마 정부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은 것은 이명박 정부가 제공한 콘텐츠사용료가 전부”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또 ‘민족21이 다른 곳으로부터 지령을 받다가 2009년 이후부터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북한처럼 기관이기주의가 만연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총련을 담당하는 기구가 북한 노동당 225국이기 때문에 공안당국이 민족21이 총련과 조선신보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225국에 포섭된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적어도 수사방향은 맞을 것”이라며 성토했다.

 

이날 명진스님 등은 “민족21은 만일 공안당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족21이 북 공작기관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면 민족21을 즉각 폐간하고 발행인인 본인은 법적 책임을 다 질 것”이라며 “그러나 이것이 그 동안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해온 본인에 대한 보복적 수사이거나 공안당국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부당한 수사라면 이를 주도한 국정원은 즉각 폐원을 하고 책임자인 원세훈 원장은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밝혔다.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서도 “8월 3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무책임하게 공표해 민족21의 명예를 훼손한 조선일보 등의 언론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정원은 지난달 재일공작원과 일명 ‘왕재산’ 간첩단에 포섭돼 활동했다는 이유로 민족21 사무실과 전·현직 편집국장의 자택을 압수 수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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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스크랩 명진스님-송중12회 한기중 기사
다니엘 추천 0 조회 268 12.08.03 14:02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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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08.03 14:07

    첫댓글 OTLl 제가좋아하는 명진스님이예요 참고하세요 고구마님

  • 12.08.03 15:11

    네~~
    감동했습니다~~ ^ ^*

  • 12.08.04 09:12

    명진스님은 우리 아저씨인데~~~~~~~~

  • 작성자 12.08.04 14:36

    선배님네 집안은 종교적지도자분들이 마니 있군요 명진스님(한기준) 한두현 목사 한상현 동대문 천사~~

  • 12.08.04 23:28

    명진스님은 정치적 발언을 너무 쎄게 하므로 눈총을 받기로 유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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