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네
나는 지금 40대 남제자가 준 그의 자전적 장편소설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다.
그러니까 보름 전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대학 후배이면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던 옛 직장 동료 국어과 여교사를 만났다.
그녀는 반색을 하면서 물었다.
“그 유명한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을 아세요?”
“몰라, 우리나라 소설가가 어디 한두 사람이야?”
“선생님 제자라는데도 모르세요?”
사연인즉 며칠 전에 그녀가 몸담고 있는 동국대부속중학교에서
그 학교 출신 소설가를 모시고 문학 강연회가 있었는데,
한 학부모가 질문을 했단다.
“어떻게 해서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까?”
작가의 대답이, 중학교 2학년 때 ‘김경남’이라는 국어 선생님이
하루는 자기를 불러서 일기를 잘 썼다고 칭찬하시면서 학교 신문에
실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셨고, 그 글이 신문에 실렸으며,
또 교내 백일장 때 쓴 글이 ‘가작’으로 뽑혀 상도 탄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글 솜씨를 인정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듣고 나니 미안했다. 그 제자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며 들먹이는데
나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그런 내용도 기억하지 못해서이다.
글을 잘 썼던 학생은 따로 불러다가 칭찬을 해주거나,
잘 쓴 글을 낭독해주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교사의
한 마디 말이 제자의 인생길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슴이 뿌듯해져왔다.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작가 이철환의 삶과 문학을
조금이라도 알고 가야 예의인 것 같아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이철환’, 그의 이름은 굵은 고딕체로 방방 뜨고 있었다.
인물, 카페글, 블로그, 이미지, 웹문서. 동영상, 뉴스, 지식,
게시판에도…….『연탄길』, ‘이 세상에 자전거 길도 있고,
자동차 길도 있고, 아스팔트길, 빙판길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연탄길이람?’ 하면서도 읽지도, 보지도 못한 책의 제목에서
고된 삶과 서민의 애환이 묻어남을 느꼈다. 1,2,3,4편이 나오도록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360만 명의 심금을 울렸을까?
그의 가난은 글을 낳았고, 그의 아픔은 감동적인 글을
낳았던 것 같았다. 그의 글은 얼음 같은 인심, 쇠붙이 같은 세상,
레이저 광선 같은 세태와, 내가 창이 되면 네가 방패가 되고,
네가 창이 되면 내가 방패가 되어야 하는 이 생존경쟁의 시대에서,
얼음과 쇠붙이와 레이저 광선을 녹이고, 창과 방패를 버리게 하는
역할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자랑스러워졌다. 어려서는 교사 한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더니, 어른이 되어서 수백만 인간의 영혼을 감동시켰으니
그가 얻은 명성은 필연이며 유명 작가라는 세간의 인증은
어찌 당연한 찬사가 아니겠는가.
가을이 스러져 가는 11월 초순, 드디어 만났다. 34년 만에, 28살의
처녀 선생과 15살의 앳된 남학생이 61살의 노교사와 48살 장년의
나이로 대면한 것이다. 내 근무처를 찾아온 철환을 태우고 분당의
한 음식점에서 따뜻한 밥을 함께 먹었다. 고된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맑은 눈동자와 선량하고 겸손한 표정에서 그가 인생을
얼마나 정갈하게 살아왔고, 그의 영혼이 얼마나
순결한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율동공원을 거닐며 과거와 현실과 문학과 삶을 이야기했다.
헤어질 때 그는 최근에 펴 낸 『눈물은 힘이 세다』라는 소설 한 권을
내게 주었고, 나는 이순 나이에 펴낸 첫 수필집 『종이 속 영혼』
을 건넸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오늘, 나는 그의 제자라도 된 것처럼 그가 준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였다.
“겨울은 눈 내리는 밤으로 깊어지고 생(生)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
그날 나를 만나 내 눈을 바라보며 그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 때 저를 불러 일기를 보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너의 글에는
진실이 있다’라 고 하셨습니다.”
‘진실이라, 그래, 이 잘난 선생은 다달이 받은 월급으로 밥걱정 없이
살면서, 소질도 없고 50대에 등단한 주제에 수필을 쓰네, 평론을 하네
하면서 되지도 않은 글을 긁적이고 있을 때, 전업 작가인 너는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영혼의 글을 썼구나.’
제자는 유명작가, 스승은 무명작가. 그래도 스승이랍시고 목에 힘을 주고
제자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무어라도 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옛날처럼 글을 잘 썼다, 못 썼다 할 수도 없고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었다.
“정치에 이용당하지 말고, 이념에 휩쓸리지 말고, 진정한 문학 냄새가 나는
좋은 글을 써라. 가슴으로 글을 쓰고, 그 영혼의 향기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지침서 같은 글을 계속 써라.”
수필가 '김경남' 님의 수필집에서...
경북 영덕읍 출신/재경 향우인
조지훈 님의 '주실마을'을 찾아서...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승 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시인의 고향 "주실마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속하는 주실마을은 북쪽으로 일월산이 있고,
서쪽에는 청기면, 동쪽은 수비면, 남쪽은 영양읍과 맞닿아 있다.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마을은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와 개화 개혁으로
이어진 진취적인 문화를 간직한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이다.
주실마을은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이 마을 한복판에 널찍이 자리 잡고 있고, 옥천종택(玉川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월록서당 등 숱한 문화자원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주실마을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주곡리이며, 1630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주곡리 보다는 주실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주실은 한양조씨들이 모여 사는 동성마을이며, 이 마을의 조씨를 흔히
주실조씨라고도 한다. 주곡리는 본래 주실이라 불리던 곳과 또 다른 자연
마을인 감북골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입구에는 당제를 지내는 당나무와 조지훈의 시비가 있다.
마을 입구 두곳에는 수령 400년과 500년을 자랑하는 소나무가 있다.
마을의 중앙으로 일월산 동쪽에서 발원한 장군천이 흐르고 있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음지마와 양지마로 나누어진다. 음지마는 청기방면으로 장군천
왼쪽에 있는 마을로 1998년 현재 약 10여호 정도, 건너편 양지마에는 40여
호가 살고 있다. 조전이 입향할 당시에는 음지마에만 살았지만 점차
양지마까지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양지마 앞에는 인근에서 쉽게 보기
힘든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면적은 약 만평 정도 된다. 고추는 영양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인 동시에 지역민의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는 작물이며,
주실마을의 경우에도 논농사와 고추 재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그의 문하생들이 세운 시비에는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
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어 눈길을 잡는다.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중략)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
조지훈 선생이 태어난 호은종택은 조선 중기인 인조 때에 지은 것으로
한국전 때 일부 소실되었던 것을 1963년 복원하였다. 언뜻 보기에도
고고한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듯한 이 호은종택은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 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가에는 조지훈 선생이
태어난 태실이 그대로 남아있고 인근에는 어렸을 적 수학했던
월록서당도 그대로 있다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 ‘삼불차(三不借)’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 재물을 빌리지 않음)
둘째는 인불차(人不借 ;양자를 들이지 않음 않음)
셋째가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음)로
원칙을 370년간 지켜온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조지훈도 삼불차 집안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라나
‘지조론’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굳세게 명가의
지조를 지켜오면서 박사만 14명 배출시킨 주실마을이다
"지훈 문학관"
조지훈 시인의 생애를 둘러볼 수 있는 주실마을에서는 지훈문학관
뿐만 아니라 매년 지훈예술제도 시행하고있는데 올해로 6회를 맞는
지훈예술제는 2012년 5월19일~20일 이틀동안 주실마을에서 개최된다.
조지훈의 사상과 지조를 계승, 발전시키고 영양을 문향의 고장으로
알리고자 기획된 행사로 전시, 공연, 체험 등 다양한 행사들이
마련되어있으니 문학도 즐기고 멋진 주실마을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호은종택-조지훈 생가"
이 집은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이며, 대표적인 한국 현대시인이고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의 본관은 한양이고 본명은 '동탁'이며 '지훈'은 호이다. 선생은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등을 남겼다. 그는 시인이자 국문학자로서
유명한 것은 물론 지조 있고, 풍류 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주곡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이
조선 인조 때 지은 것이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집으로 정침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에는 선생의 태실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고 솟을대문이 있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 복구되었다.
길 건너편에서 바라다 본 '주실마을' 전경
"주실마을 전경"
가운데 기와집이 몰려있는 곳에 종가인 호은종택이 있다.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은 와혈의 형상을 띠고 있으며, 매를 날려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록서당"
이 건물은 조선 영조 49년(1773)에 옥천 조덕린(1658~1737)의
손자인 월하 조운도( 1718~1796)가 발의하고 한양조씨, 야성정씨,
함양오씨 등이 주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이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석학과 명현들이 배출되었다.
한양조씨는 원래 영양에 입향한 후 원당리(영양읍 하원동)에 살다가
호은공 조전선생이 주곡동으로 옮겨간 뒤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과 학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호은선생의 아들 정형선생은 1630년(인조8年)에
진사하고, 증손 호봉 덕순선생과, 옥천 덕린선생의 형제가 숙종조에
대과하여 호봉은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고, 옥천은
승지로서 성학과 문장으로 당시 남인의 사표가 되었다. 그러나 옥천
선생의 손자 월하 조운도 선생과 만곡 조술도선생이 서당이 없어 학자의
수업에 지장이 있음을 크게 개탄하고 월록서당을 영건하게 되었다.
월록서당은 영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한 후 서당으로서 본군에서는
처음이며, 일월산록에 간좌곤향으로 위치가 한적하고 집이 4칸 겹집으로
넓고, 앞으로는 장군천이 남쪽으로 흘러 서당 앞을 돌아서 낙동강의
원류를 이루었으며, 주봉인 일월산이 뻗어내려 만장광경을 이루었으니
그 전망이 화려하며 수석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유생들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앞으로는 독산과 멀리는 흥림산이 안대를 이루고 있다.
서당의 중간은 마루이고 양쪽이 방인데, 왼쪽은 존성재,
오른편은 극복재라는 편액이 불어 있으며, 대산 이상정의 서당기와
천사 김종덕과 간옹 이헌경의 시판이 새겨져 있다. 이 서당은
월하와 만곡을 위시하여 향내 후진양성은 물론 동남문풍의
중심이 되었다.
서당의 현판은 숙종조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 선생의 친필이다.
"옥천종택"
이 집은 17세기말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조씨 옥천
조덕린(1658~1737)의 고택이다. 조덕린은 조선 숙종 17년(1671)에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와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이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과 글을 읽는 별당인 초당과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채는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ㅁ자'형 뜰 집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이는데 다만 안방이 동쪽에 오고
사랑방이 서쪽으로 배치된 점만이 다르다.
집의 평면구성에 좌우가 바뀐 이 같은 형식은 18세기부터 안방과
부엌이 서쪽으로 배치되는 평면구성으로 통일되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 살림집은 지붕을 박공으로 처리하는 등 상당히 오래된 건축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초당은 전형적인 서당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사당은 18세기말 건물로서 일반적인 형식에 속한다.
이 집은 경북 북부지방의 폐쇄적인 “ㅁ자형 뜰 집”의 민가(民家)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주실마을의 상징인 '문필봉'/단아한 모습은 '문필봉'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주실마을 앞의 '문필봉'은 수많은 학자를 배출한 원천이다.
문필봉 옆의 "연적봉""
붓처럼 생긴 "문필봉"
호은종택의 대문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아주 인상적인
봉우리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눈이 부실 정도의 봉우리다.
정신이 번쩍 나게 한다. 바로 문필봉(文筆峰)이라서 그렇다.
집터나 묘터의 정면에 위치한 산을 안산(案山)이라 하는데,
홍림산이라고 불리는 문필봉이 호은종택의 안산에 해당된다.
이 문필봉이 왜 눈부신가 하면, 그 모습이 너무 문필(文筆)
처럼 뚜렷하고 대문의 정면 일직선상에 교과서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문필봉은 글씨 쓰는 붓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쉽게 말하면 정삼각형 산이다.
삼각형 모양의 산은 오행으로 따지면 목형(木形)의 산이다.
풍수가에서는 문필봉이 정면에 있으면 공부 잘하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본다. 문필봉이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하면 그 기운을 받아 사람도 역시
문필가나 학자가 된다고 신앙하는 것이 풍수이다.
‘천지여아동일체 아여천지동심정(天地與我同一體 我與
天地同心正, 천지와 내가 한 몸이요, 나와 천지가 같이
바른 마음)’이라는 한자 문화권의 세계관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신앙은 납득이 간다.
주실마을의 상징인 단아한 모습의'문필봉'
첫댓글 상세한 내용입니다. 모르는 부분을 많이 알았습니다
송청어른 더위에 잘 지내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