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19:16]
그 날에 애굽인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흔드시는 손이 그 위에 흔들림을 인하여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의 흔드시는 손 - `손의 흔들림'에서 애굽인들은 전투를 지휘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모습을 본다. 과거에 자신들이 겪었던 하나님의 손의 능력 즉, 열 재앙이나 갈대 바다의 갈라짐 등을 결코 잊을수 없는 애굽인들로서는 이 전투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볼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두려음과 떨림은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사 19:17]"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모략을 인함이라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리라..."
유다의 땅은...듣는 자마다 떨리라 - 유다의 하나님에 대한 에굽인들의 공포가 너무나 지대하므로 그들은 심지어 유다의 땅에 대한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를 생각할 때 그들은 필경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가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모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날에 애굽 사람들이 두려워 떨 것이다'로 요약되는 16절과 본절은 1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의 에필로그를 구성하는 한편, 18절에서 시작되는 애굽인들의 변화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축복의 이유를 설명하는 프를로그로서 작용한다.
[사 19:18]"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
그 날에...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 선지자는 두려움의 정점에서 애굽이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말한다. `다섯 성읍'은 이 사실을 보증해주는 전조로서 주어진다. 이`다섯'이라는 숫자는 많은 것 가운데서 지극히 적은 것을 뜻한다. 그러나 분문이 후대의 역사적 사건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현대의 학자들은 언급된 `다섯 성읍'이 포로 귀한 이후 애굽 땅에 건설될 유대인 거류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어떤 이는 그 거류지들의 구체적 지명까지 제시한다. 본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향한 애굽인들의 회심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할진대,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한리라 - 장망성, 곧 `장차 망하리라고 예정된성'은 히브리어로 `이르 하헤레스'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무오한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의심하고 있다. 왜냐하면 애굽의 회심과 그로 말미암는 복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본문에서 `장망성'이란 단어는 문맥에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난점을 피하기 위하여 칼빈은 `장망성'이라 지명된 한 성이 구원받을 다섯 성읍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여섯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가운데 하나가 그러한 이름을 가질 것을 분명히 말한다. 델리취는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려한다. 즉 장망성이 다섯 성읍 가운데 포함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장차 망하리라고 예정된 성읍'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장차' 우상 제단들을 파괴시킬 `성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본문에 우상 파괴에 대한 어떤 암시도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하헤레스'가 `하헤레스'의 오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약 15개의 히브리어 사본들과 심마쿠스역, 탈굼역 벌게이트역 등에 이 단어는 `태양의 성읍'로 표기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인, 태양신을 섬기던 바로 그 우상의 성읍조차 하나님께 돌아와 가나안 방언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될 것이다'현재로서는 이 해석이 가장 타당하게 여겨진다.
[사 19:19]"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애굽 땅 중앙에는...기둥이 있을 것이요 - 어떤 이들은 본문을 B.C. 2세기의 상황과 결부시킨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유다의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4세가 고국에서 도망하여 애굽으로 망명하였을 때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애굽 왕 필로메토르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것과 똑같은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간청하여 허락받았는데, 이때 그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제시한 성경 구절이 바로 본문이었다고 한다.
그 신전은 레온토폴리스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애굽에서의 유대인의 행위를 말하지 않고 다만 애굽인들 스스로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오니아스의 왜곡된 해석과 본문의 참된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제단'과 '기둥'은 족장 종교의 흔적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며', 야곱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응답으로서 돌을 쌓아 `기둥을 세웠다'. `제단'은 하나님께 대한 구약 시대의 예배 행위를 대표하는 말이며, `기둥'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처럼 애굽도 장차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헌신을 표시하기 위하여 제단과 기둥을 세울 것이다.
[사 19:20]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의 연고로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한 구원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 애굽의 중앙과 변경에 세워지는 제단과 기둥은 그 자체로 애굽 땅에 여호와를 경배하는 이들이 있다는 한 `표적'(오트)이 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신을 애굽에 드러내시는 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연합의 결과로 애굽인들은 한때 그들을 징계하셨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도움을 간구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마치 사사 시대에 구원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심같이 그들을 구원하실것이다.
요컨대, 본문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애굽을 이스라엘과 똑같이 대우 해주신다는 것이다. 오스발트가 잘 관찰한 바와 같이, 19절이 창세기의 분위기를 연상 시킨다면, 본문은 사사기에 매우 흡사하다.
[사 19:21]"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그 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애굽에 편만해질 것을 말한다. 이 지식은 전절의 구원의 경험으로부터 주어지는 체험적 지식을 가리키는데, 이 점에서 그것은 그들이 열 재앙의 쓰라린 과거 속에서 간직하였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사도 야고보가 말한바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심을 귀신들도 믿고 떠는 정도에 불과한 반면에, 미래의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기초하고 그와 친밀하게 교제하고 동거하는 정도에 까지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