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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가족여행]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경북 문경
문대식 추천 0 조회 77 19.12.23 03: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박열(朴烈)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이야기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에 걸린 박열의 초상]

 

 

함창초등학교에서

 

  함창(咸昌)초등학교는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내에 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상주시이지만 문경시의 중심지인 점촌(店村)과 붙어 있습니다. 2005년에 세운 학교의 비석에 개교 95주년이라 했으니, 이 땅이 식민지배에 놓인 1910년에 함창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열었나 봅니다.

 

  이 학교를 찾은 이유는 우리에게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박열(1902~1974)의 숨결을 느껴보기 위함입니다. 박열은 10살이던 1911년부터 15살이던 1916년 3월까지 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서당에 다니던 그가 식민정부의 교육제도를 찾았습니다. 아버지(朴芝洙)는 4살 때 돌아가셨으니 형님(박정식)의 의지였겠죠. 지금의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있는 집에서 학교를 다니기는 너무 먼 거리입니다. 학교 부근에서 어머니와 살지 않았을까요?

 

  학교 공부를 아주 잘 했나봅니다. 시골 함창에서 초등학교(보통학교)를 나와 서울의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들어갔으니까요. 사범과를 다녔으니 교사가 꿈이었나 봅니다. 18살이던 1919년. 3.1운동의 참여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습니다. 시골 소년의 꿈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함창초등학교 운동장.  4년을 뛰어놀았을 운동장입니다. 오늘날 농촌의 현실이 그렇듯 학생은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노는 토요일 오후라서 학교는 문을 닫았고 운동장엔 아이들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1949년 8월. 박열은 졸업 후 33년만에 이 학교를 방문했나 봅니다. 22년 3개월동안 감옥생활 후 석방된 박열은 일본에서 조선인거류민단 단장을 지냅니다. 건국 전 두 차례(46년 12월과 47년 4월)나 이승만을 만났습니다. 결국 이승만이 원하는대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지지하게 됩니다. 학교 방문하기 2년 전에 일본에서 결혼(박열 47세, 부인 29세)한 아내 장의숙도 함께 했겠죠.

 

  그러나 한국전쟁은 또 인생을 바꾸어 버립니다. 전쟁 발발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 박열은 인민군에 잡혀 북으로 갔습니다. 그후 그의 삶은 모릅니다. 1974년 1월 7일. 그가 74를 일기로 죽었다는 확인 외에는.

 

 

  [어린이들은 이 세분의 동상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와 이순신, 세종대왕이 나란히 세워졌습니다. 세종대왕은 이순신에게 가운데 자리마저 내놓았습니다. 품격도 없이 세워진 싸구려동상 앞에서 돈이나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을까요? 세 분은 5만원, 5백원, 만원권의 주인공들입니다.]

 

 

유년을 보냈던 저부실

 

  탄광이 문을 닫아 지금은 폐선(廢線)이 된 문경선의 신현역과 마성역사이를 나란히 달리는 3번 국도의 옛길을 가다보면 마성면 오천리에 박열의 집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이 마을은 걸음마도 못하던 박열이 이사와서 유년시절을 보낸 곳입니다. 철없던 시절(4살, 1905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보았을 겁니다. 2년동안 서당을 다니면서 글을 깨치던 곳입니다. 박준식(朴準植)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은 곳이기도 합니다. 10살 때, 보통학교를 다니려고 떠난 이후 가끔씩 찾았던 저부실이었겠죠. 18살 때 일본으로 떠난 이듬해, 가족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박열에겐 유년의 기억만을 남긴 장소였겠죠.

 

  마을 입구의 숲에 시비 하나가 서 있습니다.

 

  이 담뱃집에서 왼쪽으로 돌아 버섯재배하는 비닐하우스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산 밑까지 가야 합니다. 마을 사람에게 몇 차례를 물었습니다.

 

  '박열의사 기념공원'입니다. 태극문양이 새겨진 우뚝솟은 돌대문과 뒤에 보이는 기념관이 눈에 거슬립니다. 아나키스트답게 공원을 꾸며줄 수는 없었을까요? 아나키스트를 흔히 '무정부주의자'로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표현한 '자유주의자연합'이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요?

 

 [다시 지은 박열의 생가]

 

  3.1운동으로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퇴학당한 박열은 그해(1919년) 10월 일본 동경으로 떠납니다. 유학에 필요한 경비는 지원을 받지 못했겠죠. 맏형은 어머니를 모시고 처자식도 있는데 동생의 동경 유학 경비까지 댈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고학을 했겠죠. 그 때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교유하고 생각을 같이하는 조선사람들과도 만났나 봅니다. 거기에는 박열보다 4살 많은 조봉암(1898~1959)도 있었습니다.

 

  스므살 되던 해(1921년) 2월. 두 살 어린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4~1926)를 만납니다. 아나키스트들의 잡지 <흑도>를 만들고 흑도회를 만들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나 봅니다. 22살이던 1923년 9월 1일. 동경이 있는 칸토(關東)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자연의 재난에 망연자실하던 일본인들은 그 울분을 조선인에게 돌립니다. 6000명이 넘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폭력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9월 3일. 대지진의 자연재앙과 민족차별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박열은 일본경찰에 붙들립니다. 일본 경찰은 공안범죄를 조작하나 봅니다. 50일이 지난 후 박열은 일본의 왕을 죽이려 했다는 대역죄 혐의로 구속 기소됩니다. 죽기를 작정한 박열의 담대한 행위가 시작됩니다. 1926년 2월의 첫 공판을 앞두고 박열은 일본의 법원에 대단한 요구를 합니다. 자신이 조선 복장을 입고 재판 받게 해 달라. 조선어를 쓸테니 통역을 준비해 달라는 등의 요구를 합니다. 조선인 아나키스트에 죄를 뒤집어 씌워 칸토지진의 공황을 이용하려 했던 일본의 조작된 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사법부를 투쟁의 장으로 이용합니다.

 

  이 때, 조선인 유학생 회장이던 조헌영(1901~1988. 조지훈시인의 아버지)이 조선의복을 구해 감옥에 넣어 줍니다. 박열보다 한 살 위의 조헌영도 한국전쟁 때 북으로 납북됩니다. 박열과 조헌영은 북에서 다시 만났겠죠. 1974년 박열이 먼저 죽기 전까지 두 사람의 얘기가 북에는 남아있지 않을까요?

 

[뒷줄 가운데 조동탁(지훈)의 형 동진이 입고 있는 옷이 박열이 재판 때 입었던 옷이랍니다. - 경상북도 영양군 주실의 지훈문학관 자료]

 

  거칠것 없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결혼(1924년)을 합니다. 그리고 1926년 2월 26일의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감옥안에서 청년 박열은 3월 법원에 혼인계를 제출해 법적으로도 부부가 됩니다. 이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고 박열은 지바형무소로 이감되고 맙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 일본인 아내는 죽어서 조선인 남편의 고향에 묻혔지만, 남편은 48년이나 더 살다 죽었어도 곁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땅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박열이 다른 형무소로 이감된지 100여일 후 가네코 후미코는 23살의 젊은 나이로 자결했습니다. 동지이자 남편을 멀리 두고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참 불우했습니다. 이모와 가출한 아버지. 매일 다른 남자를 집으로 불러 들이는 어머니...... 결국 가네코 후미코는 10살 때(1912) 조선땅 충청북도 청주 부용면에 사는 고모집으로 옵니다. 밥은 해결되었지만 학대를 받았나 봅니다. 17살 때 다시 일본으로 갔지만 삶이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박열을 만났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겠죠. 그 짧은 행복이 끝났을 때, 죽음 외에는 희망이 없었을 겁니다. 화장된 후미코의 유골은 문경 팔령에 묻혔다가 200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답니다.

 

[박열기념관] 찾아오는 이도 거의 없나 봅니다.

 

  옛집 뒤의 조그만 동산. 어린 소년이 놀던 장소였겠죠. 정자를 세우기 보다는 계단길만 있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이 동산에 올라 어릴적 집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박열을 상상해보는 맛이 아쉽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 참 어렵고도 모를 일입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 이 산하에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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