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대설에 관한 시모음 16)
폭설 /이문재
소나무숲이 도리질을 한다 며칠 만인가 동남쪽 하늘이 열린다.
아주 먼 데 갔다가 돌아오는 듯 영(嶺) 너머에서 해 넘어온다.
하늘 아래 첫 동네 솔숲 아래로 후두둑 젖은 눈 떨어진다.
발 묶였던 전신주 다시 대열을 갖추고 미시령은 바리케이트를 치운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솔숲은 몇 번씩 몸서리를 친다.
수삼 년 베트남 처녀랑 알캉달캉 살다가 다시 홀로된 박씨
우당탕탕 트랙터 몰고 나간다 허리까지 찬 눈 치우러 나간다.
눈 치워놔야 차 들어온다고 부릉부릉 덜컹덜컹 눈 치우러 나간다.
매 한 마리 하늘 아래 첫 동네 하늘 꼭대기에 박혀 있다.
폭설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때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국지성 폭설 /정다인
휘갈겨 쓴 이 눈발은 누구의 서체입니까 웃자란 불빛과 건물들이 엉켜 치렁거립니다 나는 이미 멀리 와 버렸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린 새의 동공이 사그락사그락 내려 쌓입니다 내 뒤로 늙은 나무의 가지가 툭툭 부러집니다
지지직거리는 실금들이 귓속으로 휘몰아칩니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나는 누구의 이명입니까
폭설 속으로 걸어가 스스로를 밀렵하는 겨울 산짐승의 허기가 나를 끌고갑니다 비척거리며 주저앉은 절망이 나의
문맹입니다 아무것도 나를 빠져 나갈 수 없는 어둠입니다
쏟아지는 것들의 영혼에 몸을 묻습니다 더운 마음처럼 끓다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의 껍질은 쓸쓸해서 구겨버린 폐지입니다 그 위에 하얗게 열린 새의 눈이 쌓이고 또 녹습니다 천천히 흘러내리는
공중입니다 서서히 물이 차는 잠입니다
나는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나는 또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대설주의보 /최성호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폭설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떼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폭설3 /이영옥
아들이 군인이 되어 돌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입대할 때도 나돌던
군대 가서 죽으면 개죽음이라는 말을 명찰처럼 달고 왔다
군대 갔다 오면 철든다는 것은 흰 눈을 보고 검은 눈이라고
어떤 분노도 담지 않고 복창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철렁철렁 쇳소리를 내는 군화는
위계질서로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발은 그 안에서 다른 방향을 참고 있었다
아들이 귀대를 했다
침대에는 군대에서 세상을 배웠다는 실용서가 발가벗고 있었다
며칠 후 보던 책을 찢은 선임에게 대든 아들이
각 잡힌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밤새 기합처럼 눈이 펑펑 쏟아졌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들은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씩씩한 소리를 냈다
공중전화가 뚜뚜 신호음을 흘리며 멀어졌다
유리창이 펄럭거렸다
아무리 쓸어내도 그대로인 눈처럼
알 수 없는 깊이를 품은 지점이었다
폭 설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 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랑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폭설 /이재무
하느님도 가끔은 어지간히 심심하셔서 장난기가 발동하시나 보다.
지상에 하얀 도화지 한 장 크게 펼쳐놓으시고서 인간들을 붓 삼아 여기저기 괴발개발 낙서를 갈기시는 걸 보면.
그리고는 당신이 보시기에도 그 낙서들 너무 심란하고 어지러우면 한 사흘 뒤 햇살이나 비 지우개로 박박 문질러 말끔하게 지우시는 걸 보면.
대설(大雪) /初月 윤갑수
파르르 떠는 문풍지
소리한 밤 새도록 울다
지쳤는지
잦아든 문밖에는
하얀 눈발이 소곤대듯
어둠을 사렸다
시루에 백설기 쪄내듯
금세
소복이 쌓인 가루를
말아 쪄내니
마당엔 금세 질퍽한
눈雪물 바다라.
폭설 /유희경
하얀 눈길 위로 간신히 늙은 사람들 걸어간다 초조해지는 이 밤에 나는 곱창을 구우며 한 사내의 첫사랑과 밤을 새워 그가 썼던 한 통의 편지를 읽는다 그는 한때를 글썽이고 도축된 기억 위로 수증기가 자욱하기만 하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기침을 뱉으며 언 손으로 쥔 계이름을 생각한다 비스듬한 지금, 나는 이 모든 것이 노래 같다 바깥은 여전히 청춘의 겨울이 쏟아낸 삼킨 것들
하얗다 아직의 시간 속으로 우리라는 초췌한 이름 눈 덮인 오늘 밤은 거대한 동굴 같기만 하다 침묵을 지키고 뜨거워지는 낮을 대하자니, 문득, 눈이 쌓인 다음 날에 내가 아프다
대설 /草岩 나상국
남한강 기슭을 헤매던
칼바람이
북서풍에 휩쓸려
탄금대 아래
남한강 시-퍼런 강물 속으로
떨어져 나리고
때 없이 오락가락 하던
조각구름도
비늘처럼 부서져
황쏘가리 등에 업혀
빠르게 빠르게
거친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남한강 시퍼런 바람....
여주 신록사 절벽 난간에
기대어 잠시 머물던
햇살도 산산이 조각으로 부서져
강물의 비늘이 되어
강물을 박차고 오른다
동안거에든
노스님의 검정색
털고무신 아래
하얗게 하얗게 부서져
겹겹이 쌓이고 쌓이어
끊지 못한 연들이
발목을 잡고 수북이 덮는 밤
남한강 댓바람 울음소리
산등선을 타고 올라
놀란 산 까치가 날아든
광화문 사거리
산 까치의 깃털이
무더기로 부서져 나려
거대한 빌딩 숲의
검은 그림자를
이불처럼 하얗게 하얗게
덮고 또 덮는다....
가을 폭설 /문정희
네가 돌아왔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다
깊이 숨긴 손을 힘들게 꺼내더니
침묵 속으로 도로 집어넣는다
가을 폭설이다
너를 만나려고 나무 계단을 오를 때면
고양이처럼 삐걱이던 열망들
미처 제 이름을 찾지 못해
안개처럼 떠돌다 말라 버린 첫사랑이
파란만장과 전전긍긍을 돌아 돌아
여기 돌아왔다
곧 다시 날아갈 듯 가벼운 날개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네가 눈부시게 쌓였다.
백 년만의 폭설 /최효열
북풍은 늘어진 전깃줄을 타고 물어뜯을 듯
허연 이빨을 드러내 으르릉거리며 눈을 날린다
물끄러미 창문 너머 풍경을 보다가
냉장고 문을 열고 소주병을 찾아든 이른 가을 잎
목구멍에서 싸늘한 한기를 한 모금 토해내고
몸져누운 지 수년의 늦가을 잎 옆에 가만히 눕는다
그리고 가벼운 무게를 팔베개에서 가늠한다
나는 살며시 젖가슴에 남은 손을 얹는다
당신의 싱겁다는 듯이 흘리는 미소
그곳에는 화롯불에 밤 익어가던 긴긴밤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에 귀를 세우던 아이가 있어요
참으로 아늑해요
그러나 당신의 말라버린 젖가슴이 서럽게 해요
어쩜 그것은 마른 게 아니라 비워내서 그럴 거에요
모든 걸 비워낸, 텅 빈 공간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하지만 당당하시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새순처럼 솟아나는 기억과 나뭇잎처럼 떨어져 가는
추억 사이에서 어깨를 들썩이는데
한숨처럼 들려오는
"아비 취했는가?" 라는 소리가 슬프고도 참 따뜻하다
어머이, 우리들의 젊은 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지난가을 들국화 향기는 여전히 코끝에서 맴돌아요
그러고 보면 늙어 간다는 것은 서러운 것만 아니에요
늙어가지 않는다면 어찌 백 년의 거리를 잴 수 있겠어요
밖에는 이미 한 생애를 넘어선 눈, 눈이에요, 눈!
폭설 /진 란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새벽을 열고 저 먼 빛으로부터 몰려오더니
죄가 있는 곳마다 무릎 깊이로 푹푹 쌓였습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으로 눈먼 자들도 살아있음을 알게 하시고
남산 너머 우뚝 선 바벨탑들도 목이 붓고 따갑도록 웁니다
세상에 나앉은 모두 하얀 히잡을 둘러쓰고 낱낱이 자백합니다
새벽부터 오후 늦도록 계속되던 개벽의 시간
튤립나무 빈 꽃받침에 이팝을 고봉으로 쌓는 동안에도
담장을 넘은 욕망들이 영하 십사 도의 낙타무릎으로
당신 앞에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수많은 파닥임입니다
그렇게 환한 대낮에 함박나비족들이 침공하였습니다
아바타들은 백기를 들고 숨을 죽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