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신앙(1) 겸손
2020년 1월 26일 / 마태복음 11:28-30
리더일수록... / "인생의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 리더일수록 책임이 많고 짐이 무거운 법이다. 그렇다. 위대한 리더는 커다란 대가를 지불하기로 결단한 사람이다. 리더는 자신에게 맡겨진 무거운 짐과 사명의 잔을 기쁨으로 마시는 사람이다. 꿈꾸는 자는 짐을 짐으로 여기지 않는다. 짐을 통해 체력을 단련하고 자신의 한계를 넓혀나갈 뿐이다. 그래서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는 것이다. 황성주의《10대, 꿈에도 전략이 필요하다》중에서 -
역기 선수도 무거운 것을 거뜬히 들면 '장사'라고 합니다. 금메달도 따고 챔피언도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무거운 것을 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예입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사명으로 여기고 기쁨으로 마실 수 있는 사람, 그가 리더입니다. 그 짐이 무거울수록 '위대한 리더'로 사람 앞에 서게 됩니다.
교육이란 말은 교(敎)와 육(育), 과목을 배우는 것과 기름, 즉 인격 양육을 함께 받는 것을 합친 말이다. 인간은 본래 가능성만 가진 미완성품으로 태어난다. 성장 과정에서 몸도 자라고 지식, 지혜도 자라고, 인격도 자라간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예수께서는 키와 지혜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으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지덕체(智德體) 삼박자를 갖춘 인간으로 자랐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성품이 본래 선한가(性善說)? 악한가(性惡說)?’라는 논의로서는 해결책이 없다. 인간은 오직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신의 수련과 자유 결단에 따라 동물, 인간, 천사, 악마도 될 수 있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별종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증거이다. 그러니 사람은 반드시 지덕체 3박자로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성장과 성숙은 다르다. 성장(growth)이 사람의 양적인 변화로 몸이 커가고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장은 우리말로 ‘자란다’라고 표현한다. 이에 비해서 성숙(maturation)은 사람의 질적인 변화를 말한다. 사고의 깊이가 쌓여가고, 마음의 폭이 넓어가고, 인격이 고상해져 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숙은 우리말로 ‘무르익는다’라고 표현한다.
유대 탈무드에서 / 사람은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다. 아이로서 나이를 먹을 따름이다 / 아이들이 성장해서 키도 다 크고 배울 것도 다 배워 알아도 성숙하지 못하면 여전히 아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 얼굴에 깊이 주름이 패인 아이, 수염을 기른 아이, 지팡이를 짚은 아이들이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성장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성숙해야 한다. 벼가 다 자라도 알곡이 누렇게 무르익어서 고개를 숙여야 추수를 할 수 있다. 사람도 성장할 뿐 아니라 성숙해야 사람구실을 한다. 어른다운 어른,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성장과 신앙성숙은 다르다. 신앙성장이란 신앙의 외적인 변화를 말한다. 신앙에 관해 아는 것이 늘어난다. 교회생활에 이력이 붙는다. 점점 직분도 높아간다. 이에 비해서 신앙성숙이란 신앙의 내적인 변화를 말한다. 신앙인격이 원숙해진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게 된다.
신앙이 성장했다고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성장했지만 신앙이 성숙치 못한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볼 수 있다. 교회생활 오래해서 직분은 남보다 높고, 맡은 일은 많은데 그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닌 나부터 신앙성장과 또 다른 신앙성숙에 대한 바람이 있어야 한다. 신앙성숙을 위한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 알의 겨자씨처럼 신앙이 성숙하게 자라서 열매를 맺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신앙성숙의 요건
어거스틴은 신앙성숙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묻는 사람에게 첫째가 겸손이라고 답했다. 둘째는 무엇이냐 묻자 둘째도 겸손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셋째는 무엇이냐고 묻자 역시 셋째도 겸손이라고 답했다.
그렇다. 신앙성숙의 우선적인 덕목 즉 요건은 바로 겸손이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겸손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겸손은 비굴함이 아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 밑에서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며 굽실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자기 보신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비굴함은 결코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자기학대도 아니다. 겸손은 자기 가장(假裝)도 아니다. 자기를 낮추는 모습으로 자기를 들어내고자 하는 교묘한 위선을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자기 가장 역시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진정으로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그렇다고 겸손이 누워서 떡 먹기 식으로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배우라고 하신 것이다.
■ 전북 김제군 금산리에 가면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금산교회는 건물이 ‘기역자(ㄱ) 형’ 교회로 유명하다. 남녀 석을 구분하기 위해 예배당을 기억자로 지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이 교회는 초창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 선교사가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 그 마을의 유지요, 재력가요, 한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조덕삼씨와 그 집에서 마부로 머슴 생활하던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됐다. 양반과 머슴이 함께 교회생활을 했던 것이다. 교회가 성장해서 장로를 선출할 때 머슴인 이자익은 피핵되고 양반이던 조덕삼은 떨어졌다. 주인이 얼마나 창피하겠는가? 또 얼마나 질투심이 생길까?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이 훌륭하다고 높이며 잘 도와서 교회를 섬겼다. 다음해 이 조덕삼은 장로로 피택되어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은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을 선임 장로로 섬기며 교회를 잘 섬겼다. 후에 조덕삼은 자기 돈으로 이자익을 신학공부를 시켰다. 목사가 되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후에 이 이자익은 목사가 되고 나아가 교단의 총회장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한 번도 힘든 총회장을 13회, 33회, 34회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한국교회 유래가 없는 것이다. 이 가문에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 조덕삼씨 손주가 바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이다.
진심으로 남을 인정해 주고 높여주고, 자신을 바로 깨닫고 낮출 줄 아는 것 이것이 겸손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바로 알 때 비로소 겸손은 시작됩니다.
덴마크의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단독자라고 했다. 여기서 단독자란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존재를 말한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들은 모두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된다. 그 때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끼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여기서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참다운 겸손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 기도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끼면서 자신을 티끌과 같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겸손이 바로 여기에 기초를 둔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겸손이 시작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깨닫고 난 뒤에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도 바로 깨닫게 될 때 참된 겸손을 드러낼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나는 모든 사도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입니다.’라고 자신을 고백했다(고전 15:9). 자신도 사도인데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를 깨닫고 나니 사도 중에 정말 작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라고 고백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사도라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믿는 성도들 반열로 내려간다. 그리고 ‘나야말로 그런 일을 할만한 자격도 없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라고까지 했다. 더 나아가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딤전 1:15)고 자신을 고백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성도의 반열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죄인의 반열로 더 내려갔다. 그리고 말하기를 죄인들 중에서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말씀들이 이어져 있었다.
고전 15:10 / 그나마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나는 이 자비와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엡 3:9 /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세상을 세운 계획대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나를 쓰신 것입니다.
딤전 1:16-17 /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크나큰 관용으로 감싸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나 같은 것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7)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 영원무궁토록 함께 하소서!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결코 죽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일한 분입니다. 아멘.
위의 3구절 모두가 자기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요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께 빚진 자로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즉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영적을 비롯한 질적 차이를 뼈저리게 느낄수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도 점점 바로 깨닫게 된다. 욥처럼 ‘내가 정말 별 것이 아니로구나!’ 이런 점을 깨닫게 된다. 이런 영안(靈眼)을 비롯하여 지안(智眼)으로 보니 자신도 나은 점이 있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나보다 낫게 여겨져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남에게 주면 너희는 그것을 다시 얻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대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눅 6:37-38)라는 말씀을 이해하게 되면서 더욱 겸손하기 위해 애를 쓰며 기도하게 된다. 이럴 때 참다운 겸손이 꽃을 피우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단계에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연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칠 때 주님이 타셨던 나귀가 자기보고 환호하는 줄 안다면 착각이다. 자기는 단지 주님께서 타신 나귀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이 누구인 줄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게 되고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 네덜란드 출신의 코리텐 붐이라는 할머니는 나치의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동적인 간증으로 세계적인 영적 부흥을 일으켰던 분이다. 한 번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저들이 큰 은혜를 체험했다. 간증이 끝날 때 청중들이 기립하여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때 이 코리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기자가 물었다. “코리 여사님 기쁘지 않으십니까?” 이 때 코리 여사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귀가 착각하면 쓰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첫 아담의 후손이다. 우리의 존재 뿌리가 바로 아담이기에 우리 안에는 아담의 성품이 가득 담겨져 있어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시키며 자신을 의인이라고 착각한다. 한 마디로 아담의 성품을 말 한다면 바로 교만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남들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이런 교만이 아담의 성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태어날 때 주어진 존재로 태어난 것처럼 이 교만 역시 내 안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뿌리로부터 교만의 양분이 올라와 커져만 가고 있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라는 존재 뿌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둘째 아담의 성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을 구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정말 섬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섬기셨고, 병자들을 섬기셨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찾아가셔서 기꺼이 친히 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드시는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오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셨다. 이 모든 행동은 종들이 하는 행동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련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라고 하셨다. 종이 섬기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충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섬기면 그것이 겸손이다. 선생님이 섬기면 그것이 겸손이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내 안에 겸손과 온유를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예배당을 지어 놓았는데 그곳에 들어가는 문은 아주 작아서 서서 들어갈 수 없다. 작은 어린이나 걸어서 들어갈까 어른들은 반드시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다. 이 문을 겸손의 문이라고 부른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데 어떻게 일어서서 교만하게 들어갈 수 있을까? 반드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인 자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겸손한 자만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랍비가 말하기를, “진리는 길에 널려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때 옆에 있던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그렇게 흔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랍비는 다시 대답했다. “그거야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돌을 주울 수가 없단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이같이 겸손할 때에 주님과 만날 수 있다. 겸손할 때에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신을 나타내고, 톡톡 튀게 자신을 자랑해야 쓰임 받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고 겸손한 자를 들어서 사용하신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기적이다.
■ 2008년 6월 뉴저지 주 해켄색 시에 살던 앤 몬테사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84세). 아들 4형제가 모두 큰 고등학교의 교장들이다. 14년 전에 사망한 남편도 교장이었다. 4형제 교장들이 모여 어머니를 회상하였다. 그들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네 개의 가치관을 확실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남을 존중하고, 열심히 일하고, 이웃을 섬기고,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바른 말, 옳은 행동을 말로 가르치지 않으시고 자신이 그렇게 사시는 것을 평생에 걸쳐 보여 주셨습니다.”라고 둘째 아들 찰리가 술회하였다. “어머니는 우리가 집에 돌아갔을 때 언제나 집에 계셨고 두 팔을 벌려 안아 주셨습니다.”라고 넷째 아들 로이가 말하였다. “어머니는 정말 겸손하셨습니다. 남들에게 자기 자랑 하시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맏아들 죠셉이 회고하였다. 본을 보임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친 어머니였던 것이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보통 수준의 지도자이고 본을 보여 가르치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이다.
결 론
믿음과 겸손 / 믿음이란 하나님 앞에서 겸손의 자세이다. 믿음이란 사도가 되기 전 혈기가 많던 사울처럼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지혜롭다 여기던 삶에서 이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잠 3:5-7 / 얘야, 너는 또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네 잔꾀를 하나님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6)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분을 생각하여라. 그분의 뜻을 늘 되새겨 보란 말이다. 그러면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분이 가르쳐 주시리라. 7)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스스로 경험이 많다고 으스대지 말아라. 오직 여호와만을 진실되이 모셔라. 또한 못된 짓만 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아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인생을 살아왔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라고 했듯이 교만한 자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고 스스로 사는 자이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사는 인생은 겉보기에 성공 같아 보여도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된다. 믿음이란 자신의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겸손한 자는 크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사는 자이다. 그러기에 겸손한 자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힘쓴다.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 같아서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나날이 푸르리니 하는 일마다 끊임없이 번창할 것이다.
예수님께 배움 / 배운다는 것은 아직 내게 지혜가 없고 지식이 없음을 인정하고 지혜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우리 인생은 배움에서 시작되고 배움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오늘날 많은 지식을 배움으로 인생이 풍요하게 됨을 경험하게 된다. 특별히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배움의 영역이기도 하다. 인생의 행복과 성공은 좋은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29). 예수님이 무거운 죄짐을 지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배우도록 초대하셨다. 예수님에게서 지혜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배우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차원의 지식이고 지혜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뛰어난 지혜의 말을 합니다. 그렇다 해서 그것이 이 세상의 지혜나 또 이 세상에서 곧 망해 버릴 집권자들의 지혜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지혜입니다. 우리를 하늘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계획은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미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우리를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고전 2:6-7). 주님께 진리를 배울 때 세상 어느 누구보다 더 탁월한 지혜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몸은 그 어떤 스승보다도 더 깊은 깨달음을 얻고 나이 많은 이들보다도 더 깊은 주님의 명령 따라 살고자 한 까닭에 깨달음을 얻습니다.”(시 119:99-100).
예수님께 배움은 주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그가 나보다 지혜로우시다는 것, 그분이 전지하시고 나를 아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그가 아심을,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고 무엇보다 그분이 축복으로 이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위대한 스승이시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인생을 지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자신의 약함이나 어리석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스승이 있고 그분이 우리를 지도하고 가르치신다. 겸손히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그분이 지도해 주실 것을 요청하자. 무엇보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인격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단지 인생의 성공 비결이 아니라 주님의 인격과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