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쓰개 ‘구인 따까리’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쓰개 시리즈 4회)
친애하는 외동향우회 카페 회원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참으로 수고들 많았습니다. 신묘년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온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영지7회, 외중7회 괘릉리 출신 이 용 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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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따까리’라는 말이 있다. ‘따까리’는 우선 모자를 이르는 외동읍 사투리다. 그리고 당시의 ‘따까리’에는 중고등학생들이 쓰는 '교모(校帽)', 대학생들이 쓰던 '사각모', 그리고 군인들이 쓰는 '군모(軍帽)'가 있었다.
특히 군용모자를 ‘구인 따까리’라고 했는데, 필자들이 어릴 때 애용(愛用)되었던 ‘구인 따까리’에는 군용 방한모(防寒帽)와 작업모(作業帽), 철모(鐵帽)와 ‘화이바’가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인’이란 ‘군인(軍人)’을 말한다.
학생들의 ‘따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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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먼저 ‘따까리’의 뜻을 알아본다. ‘따까리’는 표준어(標準語)로 ‘뚜껑’이라는 말인데, 군대에서는 ‘반합(飯哈)’ 안에 딸린 작은 반찬 그릇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반합’이란 직접 밥을 지을 수 있도록 알루미늄으로 만든 밥그릇을 말하는데, 주로 군인이나 등산객들이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이 잘못 파생(派生)되어 군대에서는 “상관(上官) 밑에서 뒤치다꺼리를 하다”라는 뜻으로 지휘관(指揮官)을 모시는 사병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교(將校)는 반합 전체이고, 당번병(當番兵)은 그 반합 속에 보이는 노란 뚜껑 같은 ‘반찬통’이라는 것이다.
반합과 반합 ‘따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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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는 지휘관의 전투화(戰鬪靴)나 전투복(戰鬪服), 소지품을 닦아준다고 해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쓰지 않아야 할 표현이다.
엄연히 당번병(當番兵)이라는 말이 있는데, 굳이 나쁜 어감을 주는 말을 쓸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마개’나 ‘뚜껑’, ‘지붕’ 따위를 ‘따까리’라고도 한다. ‘병마개’는 ‘빙따까리’, ‘지붕’은 ‘집따까리’라고 하고, 장독의 뚜껑을 ‘장도가지 따까리’라고 한다.
각종 ‘따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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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에서는 또 예외적으로 처녀의 ‘처녀막(處女膜)’을 ‘따까리’라고도 한다. 그래서 여성이 결혼(結婚)을 하거나 남성과 처음으로 성관계(性關係)를 가지는 것을 “따까리 뗀다”라고도 한다.
“오널 날새도 좋고 하이 ‘장도가지 따까리’ 마캐 뱃게 나라(오늘 날씨도 좋고 하니 ‘장독 뚜껑’을 모두 열어 놓아라)”,
“저 가시나 설치고 댕기는 거 보이 아매도 ‘따가리’ 띠진지 오래 대실끼다(저 계집애 설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아마 ‘뚜껑’ 떨어진지 오래 되었을 것이다)”라는 용례(用例)들이 있다.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또 콧구멍에 코의 진액(津液)과 먼지가 섞여 말라붙은 ‘코딱지’를 ‘코따까리’라고도 한다.
“아이고 저기이 머 아까버가주고, ‘코따까리’로 더덕더덕 부체가주고 댕기노(아이구 저 것이 뭐 아까워서 ‘코딱지’를 더덕더덕 붙여 가지고 다니나)”라는 용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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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 따까리’ 얘기를 시작한다. 얘기의 순서는 무게가 무거운 순서대로 철모(鐵帽), 화이바, 방한모(防寒帽 ; 개털모자), 작업모(作業帽 ; 전투모)의 순으로 엮어본다.
먼저 철모(鐵帽) 얘기다. 보병의 상징인 철모는 전투(戰鬪) 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병사(兵士)들이 착용하는 군용 모자를 통칭하는 단어다.
그 시절 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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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모의 기원은 그리스 아테네가 자랑하던 창보병(槍步兵)이 착용한 안면보호구(顔面保護具)로 알려져 있으며, 현대의 철모와 형태는 다르지만 로마시대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보급·사용하기 시작했다.
중세시대(中世時代)를 거치면서 철모는 갑옷의 한 부분으로 통합됐고, 사용 목적도 본래의 용도로 되돌아가 재질(材質)도 일반금속에서 벗어나 다양한 합금(合金) 재질이 조금씩 사용되기 시작했다.
철모 쓰고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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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보병화기(步兵火器)의 발전과 기동력이 중시되면서 무게 때문에 보병의 기동(機動)에 방해가 되어 철모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듯했으나, 화포(火砲)의 발달과 함께 다시 전장(戰場)에 등장했다.
근대적(近代的)인 철모는 1914년 프랑스 육군이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다음해 영국 육군이 채용(採用)하면서부터 점차 각국에 보급됐다.
그시절 철모와 화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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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마다 모양·재질(材質) 등에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1㎏ 안팎의 무게에 장갑(裝甲)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니켈·망간·크롬·실리콘 등이 포함된 특수합금(特殊合金)을 재료로 사용한다.
퇴역한 그 시절 고물 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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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철모는 소화기(小火器)의 탄환·폭탄·포탄의 파편·암석 등이 관통하지 않도록 상당한 강도(强度)의 방어력과 역학적 각도(角度)를 갖고 있고, 상당히 가볍게 만든다.
지금은 금속재질(金屬材質)로 제작하지 않기 때문에 철모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으나 세계 각국의 군대는 관습적(慣習的)으로 철모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지금의 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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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에는 멀쩡한 철모들이 오일장에서 거래되기도 했었다. 총탄이 관통하여 구멍이 뚫렸거나 찌그러진 것도 있었지만, 어떤 것은 신품이나 다를 바 없는 것도 팔리고 있었다.
녹 쓴 그 시절 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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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영세민(零細民)들은 이 철모를 구입하여 ‘똥바가지’를 만들어 쓰기도 하고, 세수 대야 대신 사용하기도 했었다. 어떤 이들은 솥 대신 조리용(調理用)으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철모 똥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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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현장(戰鬪現場)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갇힌 피난민(避難民)들은 미군들이나 국군들이 씌워주는 철모를 쓰고 참호에 대피(待避)하기도 했었다.
6.25 당시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철모를 쓰고 대피하는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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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화이바’에 대한 얘기다. 외동읍(外東邑) 사투리 ‘화이바’는 표준어 발음으로 ‘파이버(fiber)’를 말하는 것으로 ‘파이버’는 섬유(纖維)나 섬유질을 말하기도 하고, 철모 밑에 받쳐 쓰는 섬유질로 만든 모자를 말한다.
머리를 보호하는 장구(裝具)의 뜻으로 사용되는 ‘화이바’라는 말은 fiber helmet의 일본식(日本式) 준말이다.
주로 군대(軍隊)에서 사용되는 철모 속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헬멧을 말한다. 이하에서는 그냥 ‘화이바’로 통일한다.
그 시절 ‘화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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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철모(鐵帽) 또는 ‘화이바’ 하나만 쓰고 다닌다. 철모가 ‘화이바’가 되었고, ‘화이바’가 철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군대생활을 하던 1960년대 초에는 무거운 미군철모(美軍鐵帽)와 ‘화이바’를 포개어 쓰고 다녔다. 물론 ‘화이바’도 미제였다.
두 가지의 모자를 포개어 쓴 것은 총알이 철모(鐵帽)를 뚫고 들어오면, 다음 단계의 보호막(保護膜)인 ‘화이바’가 이를 막아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헌병용 화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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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모의 내피(內皮)라고도 볼 수 있는 그 시절 ‘화이바’는 유연하면서도 질긴 섬유재질(纖維材質)로 만들어져 있어 철모를 관통(貫通)한 총알이 ‘화이바’ 표면에 정확하게 수직(垂直)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상 빗나가게 되어 있었다.
철모를 관통한 총알의 입사각(入射角)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매끄러운 ‘화이바’ 표면에서 미끄러지면서 철모와 ‘화이바’ 사이를 핑그르르 돌면서 속도가 급감(急減)하여 총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철모를 뚫고 들어 온 총알의 방향이 틀어져 이중으로 완충효과(緩衝效果)를 얻는 것이다. 요즘의 군용철모(軍用鐵帽)는 ‘파이버 헬멧’과 철모가 따로 분리되는 형태가 아니라 ‘fiber helmet 일체형(一體形)’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화이바 일체형 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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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이 불법으로 연평도에 포격을 가할 때 철모에 불이 붙은
상황에서도 대응사격을 가한 해병장병의 불탄 철모의 모습이다)
‘carbon fiber’로 만든 ‘helmet’은 강도(强度)가 높고 가벼워 그만큼 착용이 용이(容易)하고 안전하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철모를 ‘화이바’라고도 하고, ‘화이바’를 철모라고도 한다.
옛적 시골에는 ‘화이바’로 만든 ‘똥바가지’와 ‘물바가지(가뭄에 웅덩이 물을 푸는 바가지)’가 유행(流行)되기도 했었다.
‘화이바’ 똥바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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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바’뿐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전쟁(戰爭)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생활용품(生活用品)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시절이라 폐기된 군용품은 모두 생활용품으로 사용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못 쓰는 군용품이(軍用品) 거리마다 벌판마다 널려있어 사람들은 이 폐품(廢品)들을 모아 갖가지 용도의 기구를 만들어 요긴하게 사용했었다.
물자(物資)가 귀하던 그 시절, 우리의 어버이들은 전쟁(戰爭)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알뜰히 활용했었고, 미군들이 쓰다버린 군용물자들은 자연스럽게 재활용(再活用)되어 요긴하게 쓰였다.
손재주 하나만으로 쓰레기를 생활물자로 바꾸는 ‘생활의 지혜’를 넘어 ‘생존의 지혜’가 담긴 물건들이었다.
군용 ‘도라무통(드럼통)’을 가지런히 오려내면 교통표지판(交通標識板)이 되었고, 교통정리원(交通整理員)의 발판이 되기도 했었다.
교통정리원의 발판 ‘도라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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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바’는 나무막대기를 연결하면 인분(人糞)을 푸는 ‘똥바가지’가 되었고, 받침대를 달아놓으면 ‘재떨이’로 변했다.
미군(美軍)들이 먹고 버린 ‘코카콜라 캔’과 연유통(煉乳筒)은 기와를 대신하는 철판지붕 따까리로 사용되었고, 호롱불을 켜기 위한 작은 기름통이나 낚시 방울이 되기도 했었다.
코카콜라캔 지붕‘따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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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주가 많은 이들은 일명 ‘삐삐선’으로 불린 군용 전화선(電話線)을 엮어 채반과 휴대용(携帶用) 가방으로 만들어 썼다.
탄피(彈皮)와 포탄 등 무기류도 사람들의 손길을 거치면서 새로운 물건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삐삐선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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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機關銃) 탄피를 얽어 모으면 가게 입구에서 신발의 흙을 터는 발판이 되었고, 방망이 수류탄(手榴彈)으로 불린 중공군(中共軍) 수류탄은 작은 절굿공이로 쓰기에 적당했다.
총알클립으로 만든 흙털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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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가 큰 로켓 포탄 탄피(彈皮)와 스피아깡(군용 지프 뒤에 달고 다니는 예비 기름 통)은 쓰레받기로, 실탄(實彈) 박스는 도구를 넣는 연장통으로 변모했다.
소총(小銃) 탄피는 침구사(鍼灸士)들이 휴대하기에 좋은 침통(鍼筒)으로 쓰이기도 했다.
스파아깡 쓰레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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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당시에는 천이 귀했기에 군에서 사용된 섬유류(纖維類)는 폭넓게 활용되었다. 군복에 색을 들여 일상복(日常服)으로 입는 일은 다반사였다.
두꺼운 군용 천막(天幕)은 돈을 넣는 전대나 낚시가방으로 만들어졌고, 탄띠는 넝마주이 들이 ‘추렁’을 짊어지는 어깨끈이 되었다.
탄피 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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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시골마을 가정에는 두 서너 개쯤 군용물품(軍用物品)이 있었다.
이를테면, 화투장 때리기에 좋은 군용모포(담요), 쌀 됫박으로 쓰는 군용 양은(洋銀) 밥그릇, 쇠로 된 한 말들이 스피아깡, 군용 공병삽과 야전삽 같은 것이 그런 것이었다.
그 중 ‘화이바’는 시골에서는 특히 유용(有用)한 쓰임새가 있어서 주로 ‘똥바가지’를 만들어 썼는데, 뒷간의 똥을 밭에 거름으로 풀 때라던가, 외양간의 오줌을 퍼낼 때 쓰기위해 손잡이 막대를 박아 사용하곤 했었다.
기다란 나무 작대기 끝에 군용 ‘화이바’를 달아매어 똥장군에 똥을 퍼 담거나, 밭에 뿌리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화이바 똥바가지’는 ‘박’을 타서 만든 자연산(天然産) 바가지를 사용한 것보다 질겨서 깨지지 않고 훨씬 오래 쓸 수 있었다.
철모내피 ‘화이바’로 만든 재떨이와 똥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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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년대에는 군용(軍用) 헬멧을 ‘화이바’라는 말 대신 ‘똥바가지’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리고 ‘똥바가지’는 파생(派生)된 의미로 ‘화이바를 쓰는 사람’ 혹은 그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헌병(憲兵), 땃벌떼 짭새, 철거반원(撤去班員) 등을 이르는 경우였다. “똥바가지(하이바) 쉐이들 떴다.” “땃벌떼 짭새들이 출동했다”라는 용례들이 있었다.
조교 화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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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파생숙어(派生熟語)로 “하이바 굴린다”라는 말은 “잔머리 굴린다” 즉, “대가리 굴린다”라는 의미로도 통용(通用)되었다.
당시의 ‘화이바’는 또 시골 청소년들이 ‘감 서리’를 하는데도 유용(有用)하게 사용되곤 했었다.
늦가을 들판의 밭가에 심어놓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감이 새빨갛게 익으면 으슥한 밤에 ‘서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때 감을 쉽게 따기 위해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 내리는 사람은 ‘화이바’를 쓰고 올라간다.
깜깜한 밤이라 어디에 감이 달려 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이 ‘화이바’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 쉽게, 그리고 재빠르게 감을 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감서리용 ‘화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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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바가지’를 쓰고 올라가기도 하지만, 바가지는 잘 벗겨지기 때문에 가급적 ‘화이바’를 쓰고 올라가서 ‘서리’를 하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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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방한모(防寒帽), 즉 ‘개털모자’에 대한 얘기다. 필자들이 초등학교 저학년(低學年)에 다닐 때는 겨울이면 아이들이 모두 담요 같은 것으로 만든 커다란 군용 방한모를 쓰고 다녔는데, 모자챙에는 USA, MP, UN, ARMY 같은 영문자(英文字)가 새겨져 있기도 했었다.
1950년대 어린이 방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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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美軍)들이 쓰다 버린 헌 방한모를 오일장(五日場)에서 팔고 있었기 때문에 초등학생들은 물론 어른들도 거의가 이들 방한모를 구입하여 쓰고 다녔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물자들이 미국에서 무상원조(無償援助)로 받은 원조물품이었기 때문에 모든 포장(包裝)이나 물품의 표면에는 영어로 미국의 물품이라는 표식(標式)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의 방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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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부대나 교과서(敎科書) 뒤표지에도 모두 미국의 원조로 제작된 것이라는 문구(文句)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구제품(救濟品)으로 살아가던 그 시절에는 ‘유엔 죽’이라는 ‘꿀꿀이죽’이 유행할 때도 있었다.
어른들이 미군부대(美軍部隊)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버린 닭다리나 빵조각을 모아 푹푹 끓여서 끼니를 때우곤 했었는데, 이를 ‘유엔 죽’이라고 했었다. 지금도 유행하는 ‘부대찌개’의 원조(元祖)라고 보면 된다.
그 시절 어린이의 방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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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모 얘기로 돌아간다. 일찍 서울에 올라오신 회원님들께서는 지난 1960~70년대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밤 거리에서 텁수룩한 수염에 누덕누덕한 방한모(防寒帽)를 깊숙이 눌러쓴 군밤장수 아저씨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리고 흰 실에 군밤을 5~10개씩 꿰어 사과박스에 올려놓고 연탄불을 쬐며 손님을 기다리던 아주머니들의 초라한 모습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 방한모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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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방한모를 ‘개털모자’라고 했었다. 방한모에 붙인 털이 ‘개털’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개털모자’는 옛적 일본군(日本軍)이 실제로 ‘개털’로 만든 방한모를 착용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시절 국군의 방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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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당시의 중국을 침공하여 만주국(滿洲國) 설립한 후에는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계속 팽창하면서 방한 외투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견과(犬科 ; 개과)의 모피가 방한에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옛적 우리 선조들의 방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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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의 미군(美軍)처럼 비싼 ‘이리 가죽’을 사서 그 많은 양의 외투를 만들 여력(餘力)이 일본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대신 선택한 것이 ‘개가죽’이었다.
일본은 이들 관동군에게 소모(消耗)되는 ‘개가죽’을 대느라 소위 ‘야겐가리(野犬狩)’라는 ‘개사냥 대’를 만들어 거리에서 주인 없이 방황하는 개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군용 ‘개가죽 외투(外套)’를 만들었다.
미군 포로들의 방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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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이때는 멀쩡하게 주인이 있는 개도 많이 희생되었다. 그런데 형형색색에 길고 짧은 ‘개가죽’으로 만든 ‘개가죽 외투’를 입은 일본군(日本軍)의 모습은 아무리 잘 봐줘도 거지와 광대 중간쯤 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후 ‘개가죽 외투’는 점점 줄어들었고, 대신 ‘개털’로 만든 방한모(防寒帽), 즉 ‘개털모자’를 많이 보급하였다.
당시의 ‘개털모자’는 ‘개털’만 쓰는 것이 아니고, 토끼털도 많이 사용했지만, ‘개털’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개털모자’로 일컬어진 것이다.
일본군 개털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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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일본군 ‘개털모자’ 때문에 해방 후에도 겨울철이 되면 오일장에 일본군 방한모(防寒帽)와 비슷하게 디자인 된 ‘개털모자’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6.25 당시 미군(美軍)들의 방한모도 ‘개털모자’로 지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국산(國産) 방한모도 옛적 어른들은 그냥 ‘개털모자’라고 했었다. 그러나 필자가 군생활(軍生活)을 하던 그 당시의 방한모는 ‘개털’로 만들어지지도 않았지만, 인조털로 만든 털도 대부분 빠져있었다.
국산 군용 방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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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2세대를 쓴 방한모로 어떤 건 미군(美軍)이 쓰다만 것도 있었다. 말 그대로 방한모는 털이 부착(付着)되어 따스해야 하는데, 당시의 사병(士兵) 방한모는 그냥 걸치는 것뿐이었지 쓰나 마나였다.
때문에 당시의 장교(將校)들이나, 고급 하사관(下士官)들은 후방에 나가 미제(美製) 방한모를 구입하여 착용하곤 했었다.
당시의 국산 방한모와 미군 방한모
(우측이 당시의 필자 모습이다)
6.25 당시 1.4후퇴로 북한(北韓)에서 남으로 밀려 내려온 피난민들은 어른이든 아이든 주로 ‘개털모자’를 착용하고 있기도 했었다. 물론 평소에 ‘개털모자’를 장만해 놓고 있던 가정의 경우였다.
당시의 피난민 개털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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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작업모(作業帽)’, 즉 ‘전투모(戰鬪帽)’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은 ‘전투모’라고 하지만, 필자가 군생활을 하던 때는 ‘작업모’라고만 했었다.
방탄 헬멧, 즉 철모(鐵帽)를 착용하지 않을 때 착용하는 모자가 ‘전투모’다.
장교들의 경우 예모(禮帽)·근무모(勤務帽)·전투모의 구별이 있지만, 의장병(儀仗兵)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일반 병사가 착용하는 모자는 기본적으로 ‘전투모’뿐이다. 일상생활이나 외출 시 착용하는 것도 바로 이 ‘전투모’다.
1950년 당시의 군용 ‘작업모’
![](https://t1.daumcdn.net/cfile/cafe/1437A44D4D18856A29)
창군(創軍) 초기부터 1967년까지 육군에서는 ‘전투복(戰鬪服)’을 ‘작업복’, ‘전투모’를 ‘작업모’라고 불렀다.
지금도 일선 부대에서 ‘전투모’ 대신 ‘작업모’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육군(陸軍)이 최초로 착용한 ‘작업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야전모(野戰帽 ; field cap)’라고 부르던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그 시절 미군 작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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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원통형(圓筒形)으로 모자 상단의 앞면이 뒷면보다 낮은 것이 특징이다. 1954년에 전투복의 복제(服制)는 변경됐지만, ‘작업모’의 형태는 종전과 변함이 없었다.
1956년 무렵부터 멋을 내기 위해 ‘작업모’ 윗부분에 철사(鐵絲)를 넣어 표면을 빳빳하게 만든 변형 작업모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이것은 정식 제식품(制式品)이 아니라 민간 군장품(軍裝品) 판매업소가 임의로 개조, 판매한 것이었다.
철사 넣은 작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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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복제사’ ‘한국군 복식 변천사’ 등 육군과 국방부(國防部) 연구기관의 자료에는 이 1956년형 작업모에 대해 “당시 한국에 주재(駐在)하던 미 고문관(顧問官)들이 ‘작업모’ 속에 두꺼운 종이를 넣어 빳빳하게 만들어 착용한 것을 보고 흉내 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육군 전투모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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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4월27일 각령(閣令) 700호에 의해 군복 복제가 새롭게 정해졌다. 이때 변형된 ‘작업모’를 정식 제식품(制式品)으로 인정하게 된다.
사제모자(私製帽子)가 제식모자(制式帽子)로 추인되는 특이한 사례였던 셈이다.
1971년 2월25일 ‘전투모’의 다자인을 전술행동(戰術行動)에 편리한 형태로 변경했다.
이때의 ‘전투모’는 앞면을 3등분으로 분할하고 윗부분은 둥글게 봉접(縫接)했으며, 뒷면은 봉제선(縫製線)이 없는 완전한 원통형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1971년형 ‘전투모(戰鬪帽)’는 고대(古代)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착용하던 ‘사모(紗帽)’ 모양을 감안, 디자인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모’는 문무백관들의 상복(常服)인 단령과 함께 착용하던 모자로 평상시에는 흑색으로 쓰고, 국상이 났을 때는 백색 ‘사모’를 썼다.
옛적 우리들 선조들의 사모(紗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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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표면을 비닐 재질의 포직물(布織物)로 만든 ‘사제 전투모’가 대대적으로 유행했었다.
그리고 이런 사제품(私製品)의 범람을 막기 위해 당국에서는 다시 한 번 ‘전투모’의 재질과 디자인을 변경하였다.
1983년 12월3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11314호에 의거, 운동모자 형태의 모자를 ‘전투모’로 채택한 것이다.
이 ‘전투모’의 재질은 폴리에스테르와 레이온 재질의 화섬혼방(化纖混紡)을 겹으로 해 제작한 것이다.
화섬혼방 작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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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여섯 개의 삼각형 조각을 모자의 상단 중앙 부위에서 결합(結合)시킨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모는 1984년 1월1일부터 적용되다가 1990년 11월23일 전투복(戰鬪服)이 얼룩무늬 위장색(僞裝色)으로 변경됨에 따라 형태는 그대로 두고, 색상을 얼룩무늬로 바꾸었다. 이것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얼룩무늬 ‘전투모’다.
얼룩무늬 전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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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모(禮帽)’와 달리 ‘전투모’는 실용성(實用性)에 최우선을 두고 디자인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사제(私製) ‘전투모’가 범람한 과거의 사례를 보면 나름의 멋을 찾으려는 장병들의 욕구(慾求)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실용성에 부정적(否定的)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멋있는 디자인을 창출(創出)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당시에는 오일장에 군부대에서 폐기처분된 군용모자가 즐비하게 출하(出荷)되곤 했었는데, 이마저 구해 쓸 수 없는 전쟁고아들이나 거지들은 길가에 미군(美軍)들이 쓰다 버린 ‘작업모’를 주워 머리 사이즈에 맞게 모자 뒤쪽을 ‘돗바늘’로 대충 꿰매어 쓰고 다녔다.
작업모 쓴 전쟁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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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시의 초군(樵軍 ; 나무꾼)들도 거의가 시장에서 자기 머리에 맞는 ‘작업모’를 구입하여 땔나무를 하러 다녔고, 농사일을 할 때도 줄곧 사용하였다.
필자도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를 졸업하고, 초군생활을 할 때는 항상 군용 ‘작업모’나 방한모를 쓰고 다녔다.
미군(美軍)들의 경우 키는 컸지만, 머리는 대체적(大體的)으로 작았기 때문에 필자들의 경우는 줄이지 않고 그냥 쓸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달리 쓸 모자도 없었지만, 군용 ‘작업모’가 때도 타지 않았고, 휴대(携帶)하기도 편했기 때문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나뭇짐을 지고 가다 쉬어갈 때는 벗어서 깔고 앉는 ‘깔개’가 되기도 했었다.
작업모를 쓴 겨울철 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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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60-70년대에는 ‘넝마주이’들도 거의가 군용작업모(軍用作業帽)를 쓰고 다녔다. 군복(軍服)과 군모착용을 단속할 때는 검정색 물감으로 염색(染色)을 하여 착용했었다.
하루 종일 흙먼지 투성이의 ‘넝마’를 주워 머리 뒤쪽으로 던져 ‘추렁’에 담는 일이어서 검정색으로 염색한 ‘작업모(作業帽)’는 때를 타지 않아 안성맞춤이기도 했었다.
작업모를 쓴 넝마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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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서성거리는 거지아이들도 모두가 ‘작업모’ 차림이었다. 물론 미군용(美軍用)이든 국군용(國軍用)이든 모자가 너무 커서 모두들 머리 사이즈에 맞게 ‘돗바늘’로 대충 꿰매어 줄여 쓰고 다녔다.
겨울에는 ‘넝마’를 주워 팔거나, 동냥을 하여 시장에서 사구려 ‘방한모(防寒帽)’를 사서 얼굴만 겨우 내놓고 구걸(求乞)을 하기도 했었다.
필자들이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에 다니던 시절, 영지저수지 호반 야산(野山)골짜기에 기식하던 문디(문둥이)들도 여름과 봄가을에는 군용 ‘작업모’, 겨울에는 길거리에서 주운 헌 ‘방한모’를 쓰고 다녔다.
철따라 군용(軍用) ‘작업모’와 ‘방한모’를 바꾸어 쓰며 산과 들을 누비던 60여년 전의 그 시절이 이제는 향수(鄕愁)가 되어 밤잠을 설치면서 이글을 쓰게 한다.
배경음악은 기사의 내용과 다소 근접하고, 그 때의 향수(鄕愁)이기도 한 ‘진짜 사나이’를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진짜 사나이
육군합창단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일도 많다만
너와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입으로만 큰소리쳐 사나이라드냐
너와나 겨레 지키는 결심에 살았다
훈련과 훈련 속에 맺어진 전우야
국군용사의 자랑을 가슴에 안고
내 고향에 돌아갈 땐 농군의 용사다
겉으로만 잘 난체 해 사나이라드냐
너와나 진짜사나이 명예에 살았다
멋있는 군복입고 휴가 간 전우야
새로운 나라 세우는 형제들에게
새로워진 우리생활 알리고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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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오님, 추위에 어떻게 지내요? 오늘글에는 사진이 한장도 없네요 사진 있으면 좀더 좋을텐데요...
ㅎㅎ 따까리 노릇 많이 했지요.ㅎㅎㅎ 그래도 구인 따까리 마이 쓰고 다녔지요...귀마개 달린 모자는 정말 따시기도 했지요...
그 시절 생각이 아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