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서 참수당한채 발견된..
미국인 닉버그씨의 부모님들은 정부에서 지원해준다는 보상마저 거절하고
백악관에서 미군의 철수와 이라크내 모든 민간인 신분의 미국인들에 대한
안전을 보장해줄것을 요구하며 지금도 시위를 하고있습니다..
조의금이 이미 10억이 넘은 고김선일님의 친부와 계모..
그리고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협상대표 외삼촌이라는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고인의 명예를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건지요..
욕심을 넘어 추잡한 탐욕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김선일씨를 추모하고 애도해 하시는분들께서는
2002년 6월의 그뜨거웟던 감동과 열광의 도가니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다 고인이 되신..
서해교전때 돌아가신분들...그분들 이름..한분이라도 기억하실런지..
물론 군인의 의무가 나라를 지키다가 죽는다 하여도,
그분들도 군입대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다를바 없는 일반 시민이였습니다.
더군다나 서해교전당시에 전사하신 분들의 시체가 "고속정 357호"에 있던
마지막 모습을 보신 분들이라면,
김선일씨 참사가 뭐가 대수라고...까지 생각되실 겁니다.
그당시 해군정보부쪽에서는 국가에게 계속해서
"북한해군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주의 요망한다"라고 말을하자,
국가에선 "햇볓정책이 활발한상황인데다가, 월드컵이 한창인 현 시점에서,
북한하고 관계 깰일있냐?"는 식으로 답변했습니다.
그리곤 6월 29일.
북한해군은 결국 NLL을 넘어, 결국 전사자 4명, 부상자 19명, 실종자 1명의 결과를 만들었습니
다.
그분들 이름이나 기억나십니까??
직격폭격맞은 357호...
정확히 세발의 85mm포와, 총탄, 기관포탄을 뒤집어쓴 배였지만,
357호 승무원들은 고장난 자동형 40mm주포까지, 수동으로 바꾸어 가면서 싸워내었습니다.
20mm발칸포를 쏜 조천형 중사는 불길에 휩싸여서 전사하였고,
다른 발칸포를 쏘던 황도현 중사는 머리에 직격탄을 맞아 전사하셨지만,
그분들의 시체의 손가락에는 끝까지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려 있었습니다.
375호 정장 윤영하 소령님은 이미 죽음을 앞둔 상태셨고,
부정장님은 양쪽 무릎이 없는 상태에서도 전투지휘를 계속하셨습니다.
29일..진정 인터넷에서 추모의 바다를 이루어야할분들은 바로 이분들입니다..
단돈 3000만원과 훈장쪼가리에 국가와 바로 우리들을 위해 죽는 그순간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으셨던 바로 이분들...
진정한 애국자들을 위해 거대한 추모의 물결이 내일 우리 대한민국을 뒤덮는
그런 2004년 6월29일이길 빕니다..
김선일씨의 죽음은 억울하지만 3천만원 50억? 이건 모르겠습니다.
생명을 돈으로 따질수야 없지요. 하지만 국립묘지 안장.. 이건 아닌것 같네요..
국립묘지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교하신분들이 안장되는곳이죠.
김선일씨는 위험하다는것을 알고서 돈을 벌기 위해 그곳에 가신분이죠.
무능한 정부탓에 억울하게 아까운 생명을 빼앗겼지만 국가와 국민을 위한일을
하다 돌아가신것은 아니죠.. 고인의 명예에 먹칠을 넘어서 X칠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요
그리고 김선일씨 자신의 자기소개서를 보면
청소년 시절 우울하게 보냈더군요
김선일씨 자기소개서 전문 (확대)
저는 남들과 다름없이 1남 3녀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무난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초등학교 2학년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조금씩 불안정한 심리를
가지고 살게 되었고 얼마있지 않아 약 6개월후 아버지께서는 새어머니를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새어머니와 잘 융화되지 못하여서 갈등이 참 많았습니다.
괜히 비뚤어진 마음에 반항심을 가져 말을 듣지 않았고,
자라갈수록 점점 더 심하게 비뚤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도 역시 비뚤어진
마음들을 품게 되었고,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을 하여 입학을 앞둔 무렵 그 당시에
아버지께서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아 등록을 하지 못하게 되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저는 그 이후로 아버지를 더욱더 미워하게 되었으며,
다음해 재수를 하여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을 때는 큰 누나, 작은 누나, 여동생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서 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한 후 3학년이 되었을 무렵, 같은 반의 한 급우(김OO)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게 되었고, 평소에 그 친구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터에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를 따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해 여름방학 즈음에
심OO 라는 또다른 친구를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조금씩 깨우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나서는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살고자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저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내 앞길을
의탁하는 기도를 한 번 해보자 라는 생각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었고,
작정해놓고 기도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약 5개월 간 꾸준히 기도를 한 끝에,
선교사에 대한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주셨고, 좀더 구체적인 비전을 위해서
계속 간구를 하고 묵상을 하던 중 중동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간략하게나마 연유를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을 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마음 속에 없는 이들(영적인 고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복음에서 소외된 지역이 중동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또한 제가 성장해온 배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중동지역
선교사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정에서 저 혼자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힘든 점도 없지는 않았으나
(장손이라서 친척들의 반대까지 심하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감사하게도 지금은
큰 누나와 작은 누나가 예수님을 영접한 상태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계속적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중에 있어 지금은 마음의 문이 많이 열리신 상태입니다.
또한 계획 중에 있는 단계지만, 아랍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하게 되면
영어와 아랍어와 미용기술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으로 다가가고자 합니다.
(미용은 군복무 시절 이발병과 군종병이라는 좋은 경험이 저의 밑거름이 되어,
미용기술을 좀더 배우고자 하고 있습니다.)
아직 아랍지역은 가본 경험이 없기에 이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갈 수 있게
된다면 복음을 좀더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또한
그 영혼들을 좀더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기 위한 좋은 훈련의 시간들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이렇게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