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새 가는 길
- 임희자
산죽 뿌리를 껴안고 겨울 끝을 밀어내는 해가 기어오른
다. 강 둘레를 떠돌던 얼음들이 일제히 구정벼루로 밀려
난다. 교각이 물배를 가르고 들개처럼 질주해간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얼음이 강속에서 쿨룩거린다. 오돌개 뿌
리 우는소리 들리고 치리의 부레 키우는 물소리 들려온다.
아버지 헛기침에도 물 속에 코를 박고 숨을 참아내던 오
리들 꽥꽥거린다. 가슴에 금이 들고 찬바람 불어와 대나
무 감나무 측백나무가 울던 집, 나는 지금 아버지 앞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평사리
- 임희자
해를 움켜쥐고 그는 우두커니 서 있다. 바람이 스쳐지
나간 자리마다 움켜진 흙 한줌 내려놓을 듯 길 여는 일은
너무 무겁다. 길은 그렇게 강바람과 함께 아득한 골짜기
를 돌아 나섰고, 한 시대를 끌어주던 꽃배는 뱃머리를 감
춘 채 떠나고 있다. 벼락바위 바람구멍을 지나 등잔걸이
를 빠져나간 지 이미 오래다. 다시 힘차게 흐를 수 없는
흑백 사진처럼 산그림자만 저녁강 놀처럼 저물어간다. 물
길은 여전히 휘어져 산모롱이를 따라 돌고, 해오라기는
등뼈를 다 들어낸 채 평사리를 넘어간다. 출렁이는 화폭
위에 낙관을 찍어내듯, 물안개가 산자락을 말아 올리며
환한 젖가슴 들어낸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꽃들은 겨우내
몸 안에 품고 있던 어혈을 참지 못하고 가는 길마다 빨갛
고 노랗게 쏟아놓는다.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을 다시 출렁
거린다.
첫댓글 눈 앞이 화안해지는 이 아침의 좋은 시. 임희자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선생님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