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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관능적 쾌락에 대하여. 괴테와 헤겔
(파우스트, 정신현상학)
헤겔의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쾌락과 필연성” 이란 장이 있습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철학 역사에서 가장 어렵고 또 유명한 책의 하나입니다. “쾌락과 필연성” 챕터 역시 굉장히 난해합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헤겔의 사상을 상당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세계 문학의 가장 중요한 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헤겔 역시 괴테를 존경했습니다. 헤겔과 괴테의 관계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신현상학의 “쾌락과 필연성” 챕터만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독일의 괴테는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맞먹는 세계적인 문학자입니다.
헤겔은 괴테보다 어리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헤겔이 괴테의 파우스트를 공부하고 또 여기에 대한 철학적인 진술을 남긴 것은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겔과 괴테. 이들은 철학과 문학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쾌락과 필연성” 장은 비록 그 길이는 짧지만. 문학과 철학의 공통성을 엿볼 수 있는 귀한 문화적 자산이고. 특히 그 내용이 관능적 쾌락과 사랑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입니다. 이 방송은 주로 괴테의 파우스트의 관능적 쾌락 부분을 중심으로 풀어가고 그 후에 헤겔의 철학적인 진술을 간단히 해명할 것입니다.
헤겔의 쾌락과 필연성에서 파우스트를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지성이나 학문을,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선물을 경멸하도다. 악마에게 몸을 내맡긴 이상은 파멸로 다다를 수 밖에 없느니라”. 괴테의 “파우스트” 중에서”. (정신현상학1. 임석진 번역 378쪽)
따라서 이 부분을 토대로 헤겔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것은 지성이나 학문을,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선물을 경멸하도다.”는 부분은 괴테를 직접 인용한 부분이고 그 뒷부분은 헤겔이 자의적으로 첨가한 부분입니다.
괴테의 걸작 희곡 “파우스트”는 학문과 지식에 최고로 통달한 파우스트 박사가 좌절하여 삶의 희망을 잃고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와의 맹서를 통해서 삶의 즐거움과 연인을 찾는다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행복에 대한 댓가로 파우스트 박사는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바치기로 했습니다. 파우스트가 삶의 희망을 잃은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지성이나 학문을 경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고 여러 분야에 걸쳐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홀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파우스트. 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 석사니 박사니 허울 좋은 이름만 들으며 그럭저럭 십 년이란 세월을 위로 아래로 이리저리 내 학생의 코를 끌고 다녔을 뿐. 우리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보니 내 가슴은 거의 타버릴 것만 같다. (...) 그렇다고 재산과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명예나 영화도 누리지 못하니 개라도 더 이상 이 꼴로 살기는 원치 않으리라! (파우스트 1. 정서용 옮김 29쪽)
위의 글을 보면 파우스트는 철저히 공부했지만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즉 학문 연구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재산도 돈도 없고 명예와 영화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개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조했습니다.
이런 파우스트는 신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이는 마치 성경의 욥기와 같은 발상입니다. 단 차이점은 욥기의 경우 마귀는 욥에게 엄청난 시련을 주어 욥의 신앙을 테스트하지만 파우스트의 경우는 관능적 쾌락으로 파우스트의 신앙을 시험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즉 늙은 파우스트를 마술로 젊게 만들고 예쁜 아가씨 마르가레테. (그레트헨)을 제공하여 관능적인 쾌락을 즐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학문에 절망한 파우스트는 이론 대신 육체적인 향락을 통해서 삶의 열정을 회복한다는 것이 악마의 전략이었습니다.
파우스트는 이런 계획을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독백을 합니다. 우선 그는 바그너라고 불리는 제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의 마음 속에 두 가지의 상반적인 욕구가 있음을 토로합니다. 즉 책을 보고 공부하여 느끼는 기쁨과 그와 반대로 애욕에 빠져 관능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구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성과 감성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래적인 양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의 욕구에 대해서 파우스트는 이미 그 한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파우스트는 지성이나 학문을,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선물을 경멸하도다. 라고 토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파우스트. 자네는 한 가지 충동밖에 모르는군. 오오. 또 하나의 충동을 알려고 하지 말게!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여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 하네.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 (파우스트 69쪽)
이성적 욕구를 포기한 파우스트는 이제 감성적인 욕구만을 추구하고 싶어합니다. 그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는 희망을 버리고. 이제는 그 반대로
음탕한 애욕에 빠져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만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상태를 우리 역시 많이 경험합니다. 특히 대학 시절 학문과 이론을 끝없이 추구하기도 하도 또 그 반대로 야한 것을 좋아하고 이성과의 접촉을 통해서 쾌락과 사랑을 추구하고 싶어 합니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단과 대학이나 특정 학과에는 항상 특별히 아름다운 여학생들이 주름잡고 있습니다. ###학과의 OOO하면 다들 감탄을 하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합니다. 대학의 푸른 캠퍼스를 날씬한 여자가 긴 하얀 바지를 입고 지나갈 때 청년들의 마음은 설렙니다. 그러다가 또 도서관에 가서 어려운 학문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봄이 오면 축제 기간에 산으로 올라가는 숲길 사이로 밤에는 남녀의 신음 소리가 들려 오기도 합니다. 이를 알고서도 애인이 없어서 혹은 고시 공부로 바빠 아무 것도 못하고 도서관에 와 있는 남학생들이 많습니다.
이런 상태와 파우스트의 상태는 같습니다. 단 현재 파우스트는 나이가 많아 청춘을 상실하고 죽음의 절망을 느낀 바 있습니다. 그는 당연히 이론과 학문의 쾌락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파우스트 자신의 욕구이기도 하고 또 이를 이용하는 것이 악마의 작전입니다. 이런 관능적인 쾌락을 파우스트는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오, 하늘과 땅 사이를 지배하며 대기 속에 부유하는 정령이 있다면. 부디 황금빛 운무에서 나와(서) 나를 새롭고 찬란한 삶으로 이끌어다오! 그래, 마법의 외투라도 얻을 수 있어서 미지의 나라로 날아갈 수만 있다면! 내겐 그것이 어떤 귀중한 의복보다 아니 임금의 곤룡포보다 값진 것이 되리라.” (파우스트 69쪽)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노력이 아니라 신비적인 환상을 통해서 파우스트는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려 합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일어 날 수 있습니다. 그는 마법의 외투를 얻어서 미지(未知)의 나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이런 희망은 곧 죄값을 가져 온다는 것이 하나의 법칙이기는 합니다. 마약에 빠지는 많은 경우도 이와 비슷한 현상입니다. 마약은 평소 만족보다 훨씬 더 큰 쾌감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악의 유혹은 메피스토펠레스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메피스토펠레스. : 소생은 항상 부정(否定)을 일삼는 정령입니다!
생성하는 모든 것은 멸망하게 마련이니 그게 당연한 것 아닐는지요. 그러니 아예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 편이 낫겠지요. 당신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요컨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제 원래의 본성이랍니다. (파우스트 80쪽)
악마의 본성은 부정입니다. 긍정적인 것을 부정합니다. 선과 악을 거꾸로 봅니다. 우리 모두 착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악마는 악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창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악마는 파괴를 좋아합니다. 남을 돕기보다는 방해하고 때리기를 좋아하고 살리기보다는 죽이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메피스토펠레스”의 근성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늘려 있습니다. 이런 악이 악마의 본성입니다.
악마는 요술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창조력과 유사합니다. 이런 힘 때문에 사람들은 악마의 유혹에 빠집니다. 굳이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이 인격적 능력 혹은 초능력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주변에는 이런 요술 혹은 사기. 범죄성에 유혹되어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 친구여! 당신은 이 한 시간 내에 따분했던 한 해보다 더 많은 관능적 쾌락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귀여운 정령들이 노래하는 것. 그들의 아름다운 형상을 보여주는 것. 그것들은 한낱 공허한 요술놀이가 아닙니다. 당신의 후각도 기분 좋을 것이요. 당신의 입 안엔 달콤한 맛이 감돌 것이요. 당신의 감각은 황홀경에 이를 것입니다. 미리 준비할 것도 없지요. 우리 패거리들이 다 모였으니. 자. 모두 시작하자꾸나! (파우스트 84쪽)
악마의 능력은 관능적 쾌락과 청각, 시각, 후각, 미각 등에 두루 작용됩니다. 이는 단순한 속임수나 순간적인 착각이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전 감각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런 상태의 변화란 천국에 올라간 정도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악마의 유혹은 대단합니다. 당신의 감각은 황홀경에 이를 것이다. 라고 메피스토펠레스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단 여기서 정신적인 쾌락이나 도덕적인 희열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남이나 자식을 위한 희생과 다른이 들이 잘될 때의 기쁨은 없습니다. 공동체의 문제 해결이 가져오는 즐거움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입니다. 이기적인 것 뿐입니다.
그런데 파우스트에게는 아직 이전 시절의 선과 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즉 악한 충동에 따라가면서도 이에 반항하는 양심이 남아 있습니다.
파우스트. 무서운 마음의 혼란으로부터는 귀에 익은 달콤한 음조가 끌어내 주었고. 유년기의 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 내 마음은 즐거웠던 그 시절의 여운으로 속였지만. 나는 저주하노라. 내 영혼을 유혹과 속임수로 사로잡아 이 슬픔의 동굴 속에 기만과 감언이설로 잡아놓는 모든 것을! 무엇보다 우리 정신이 사로잡혀 있는 저 드높은 욕망을 저주하노라!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현란한 현상을 저주하노라! (파우스트 91쪽)
어린 시절이나 성장한 뒤에도 파우스트는 항상 올바르게 살았고 남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그를 존경합니다. 또 그의 제자들 역시 스승을 존경합니다. 아무도 그의 내면의 변화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악마는 그를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려 합니다. 지금 그는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서 온갖 감각적인 쾌락을 맛보며 싱싱하게 살려고 하지만 아직 마음의 한 구석에는 선하고 지혜로웠던 그의 과거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작전에 때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만과 감언이설을 저주합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우리 정신이 사로잡혀 있는 저 드높은 욕망을 저주하노라!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현란한 현상을 저주하노라! 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고통과 절망은 결국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함락되고 맙니다.
메피스토펠레스. : 이 세상에선 내가 당신의 하인 노릇을 하며 당신의 지시에 따라 쉬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그 대신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땐, 당신이 내게 같은 일을 해주셔야 합니다. (파우스트 95쪽)
여기에 대해 파우스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파우스트. : 나, 한가로이 침상에나 누워 뒹군다면 당장 파멸해도 좋으리라. 자네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관능의 쾌락에 농락당한다면. 그것은 내게 최후의 날이 될 것이다. 자, 내기를 하자! (파우스트 95쪽)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음흉한 계획과 자신이 미래에 당할 모욕과 고통을 알면서도 무언가 현실의 변경을 원합니다. 그의 삶은 그토록 지옥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그는 악마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관능의 쾌락에 농락당하다면 자신의 인생을 끝내고 싶어합니다.
악마의 요술과 마법을 통해서 파우스트는 뜨거운 청춘의 충동을 지니고 계획대로 연애를 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귀는 엄청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파는 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파우스트와 악마는 학생을 만나러 갑니다. 그 전에 메피스토펠레스는 이성과 학문을 경멸하는 말을 합니다. 이 부분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인용한 부분입니다.
(파우스트의 긴 옷을 입고) 이성이네 학문이네 하는 인간 최고의 힘을 경멸해 주자. 오로지 요술과 마법을 통해 거짓 정령의 원기를 받게 해주자. (파우스트 103쪽)
이런 악마의 철학은 이론에 대한 경멸심과 연결이 됩니다.
메피스토펠레스. 여보게, 이론이란 모두 회색일세. 푸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지. (파우스트 111쪽)
뒤의 헤겔 부분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론이 모두 회색이란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장을 헤겔은 비판합니다. 이론이 회색이란 말의 뜻은 사람들의 의식 즉 자기의식이 이론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무식을 의미합니다. 헤겔은 이를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봅니다.
이론이 회색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지식과 이론이 있습니까? 경제니 법이니 하는 과목들이나 수학이나 의학 등도 있습니다. 여자 문제나 남녀 관계 혹은 관능적인 쾌락에 대해서도 숱한 책들과 유튜브 방송이 나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모든 이론은 회색일세 라고 호도(糊塗)한 것입니다. 때론 이런 말이 공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숱한 이론과 관련없이 내 눈 앞에는 당장의 행동을 요구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남녀 교제나 외식 선택 등은 순간적인 판단과 충동이 중요합니다. 그 밖에 위급한 순간에도 즉각적인 행동이 요구됩니다. 이런 부분을 인생의 황금나무라고 표현한 듯합니다.
문제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경우 인생의 황금나무를 키우기 위해서는 상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술과 비법을 통해서 거기 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악마의 요술과 환상이 이루어 집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앞에서 파우스트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약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장소는 마녀의 부엌입니다.
마녀의 부엌에서 물약을 마시고 파우스트의 몸은 30년이나 젊어집니다. 파우스트는 이를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나중에 이를 깨닫습니다. 그는 거리로 나가서 마르가레테라는 아가씨를 보자 마자 바로 사랑에 빠집니다. 마르가레테는 그레트헨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파우스트. 아아, 정말 아름다운 소녀로다! 저런 아이를 본 적이 없다. 예의 바르고 정숙한데다가 약간 새침하기도 하구나. 빨간 입술, 해 맑은 뺨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그녀를 잊지 못하겠다! 두 눈을 살며시 내리감는 모습, 내 가슴 깊이 아로새겨지는구나. 살짝 뿌리치는 그 모습, 정말로 날 황홀하게 만드는구나! (파우스트 141쪽)
파우스트의 문제는 이렇게 순진하고 수줍어하며 특히 고해(告解)하기를 좋아하는 신앙심이 깊은 소녀를 즉시 유혹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도덕률을 무시하고 욕정에 빠진다.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립니다.
여기 날 에워싼 것은 마법의 안개인가? 향락의 충동이 물밀쳐와 사랑의 꿈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기분이다! 우리는 바람 부는 대로 희롱당하는 노리개란 말인가? 이 순간 그녀가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나의 무례함을 어떻게 속죄할 것인가? 그토록 대단한 바람둥이가 오, 이다지도 소심해지다니! 어쩌면 녹아서 스러질 듯 그녀의 발밑에 엎드릴 게다. (파우스트 148쪽)
최고의 학자에서 바람둥이가 된 파우스트는 감각과 욕구가 100% 자극되고 그런 상태에서 순진하고 아름다운 소녀 그레트헨에게 완전히 빠지게 되었으나 그녀에게 호감을 줄 방법을 몰랐다. 여기서도 악마의 도움으로 예쁜 상자 (보석함)을 그녀의 방에 던져 놓는다. 그런 과정에서 드디어 파우스트는 그레트헨과 연결이 됩니다. 이런 사정은 아래와 같이 나타납니다.
파우스트. : 어떻게 됐나? 잘됐나? 곧 될 것 같은가?
메피스토펠레스. : 아아, 브라보!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모양이군요? 잠시 후 그레트헨은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이웃 여인 마르테의 집에서 그녀를 만날게요. 그 여편네는 중매쟁이나 뚜쟁이로는 아주 제격인 것 같더군요. (파우스트 163쪽)
이렇게 해서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은 이루어 지게 되고 그레트헨은 아이까지 임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다가 복잡한 사건들이 엉키면서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의 오빠 발렌틴을 결투에서 죽이게 되고 그레트헨은 어머니와 아기를 죽였다는 누명을 덮어쓰고 사형될 운명에 놓입니다. 이런 죄명으로 감옥에 같힌 그레트헨을 구하기 위하여 파우스트는 감옥에 침입하여 그레트헨을 구출하고자 하나 그레트헨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레트헨은 감옥에서도 기도하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녀의 마지막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르가레테. :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아버지여! 절 구원하소서!
천사들이여! 그대들 성스런 무리여, 절 에워싸고 지켜주소서!
메피스토펠레스. 그녀는 심판받았소!
목소리. (위로부터) 구원받았노라!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에게) 내게로 오시오!
(파우스트와 함께 사라진다)
목소리. (안으로부터. 점점 스러지면서) 하인리히! 하인리히! (파우스트 250쪽)
이까지가 괴테의 파우스트 1부를 이루는 내용입니다. 2부는 파우스트가 헬레나라는 그리이스의 미인과 사랑을 하게 되고 더욱 진취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내용입니다.
2.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의 쾌락 이론
헤겔의 쾌락과 필연성 이론은 난해합니다.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철학사적인 지식이 많이 필요합니다. 여기서는 간단한 것 하나만 소개합니다. 그것은 피히테의 지식학 이론입니다. 지식학의 근본은 자아(自我)와 비아(非我)이다. 자아의 존재는 확실하다. 비아(非我)는 자아 외의 모든 것이다. 타자를 말한다. 자아를 통해서 비아를 정립하는 것이 지식학의 목적입니다. 이런
피히테의 철학을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성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이성보다 한 단계 높은 영역을 헤겔은 정신이라고 합니다.
피히테의 자아를 헤겔은 대자존재 혹은 자기의식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자아만이 스스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헤겔의 특징은 대자존재와 타자의 연결을 행동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쾌락과 필연성 장에서는 성욕과 성 행위 등을 그런 연결 행동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성욕이나 관능적인 쾌락 현상을 헤겔은 자아와 비아의 관련성 안에서 관찰합니다. 쾌락은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현상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성은 정신의 도구이자 전단계입니다. 이성이 어린이라면 정신은 어른입니다. 그래서 헤겔은 이성을 정신의 추상(abstraction)이라고도 합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이 정신의 추상이란 말은 쉽게 말하면 동물이나 인간들은 성욕과 본능에 따라 성교를 하지만 이는 결국 2세를 생산하게 되고 종적인 번식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쾌락과 필연성 장의 핵심적 논리입니다.
이런 이성과 정신의 관계를 헤겔은 쾨테의 파우스트 속의 한 구절을 통해서 나타냅니다. 위에서 말한
메피스토펠레스. 여보게, 이론이란 모두 회색일세. 푸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지. 구절입니다.
이를 헤겔은 자기의식이 정신적 실체를 모르고 순수한 대자존재로만 볼 때 지식이나 이론은 회색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즉 이성은 자신의 본능적 욕구에만 매달려 여자를 탐내지만 가정이나 공동체 혹은 민족과 국가 등을 도외시할 때를 말합니다. 이를 헤겔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자기와 자기의 현실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굴레였던 학문.법칙.원리와 같은 그림자는 그 본모습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정신현상학 379쪽)
헤겔은 파우스트 박사가 지식과 학문을 포기하는 과정을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즉 그는 정신이 높은 본질임을 모르고 맹목적인 쾌락의 욕망에 떨어졌습니다. 즉 파우스트는 개별적인 대자존재로 타락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학문과 법칙 같은 이성적인 부분은 이제는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주변에서도 많이 경험됩니다. 예를 들어 그 어려운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된 사람도 술집 같은데 가서 욕구를 마음껏 향락하다가 도가 지나쳐서 불법적인 일을 벌리고 구속 경우입니다.
또 헤겔은 학문, 법칙, 원리 등을 자기와 현실을 연결하는 고리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또한 사람이 밥먹는데 필요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파우스트의 타락은 인간이 가진 본성 중의 하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욕구는 드디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고 향락을 즐깁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목적의 달성은 그 다음 순간에 다른 상태를 가져옵니다. 즉 애인이 되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결혼까지 해야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플레이보이나 순수한 쾌락주의자라고 하면 이런 지속적인 관련성은 싫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이렇듯 자기의식이 그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바로 그 한 가운데서 참으로 목적이란 무엇인지가 분명히 밝혀진다. 자기의식은 자기를 개별적인 독자존재로 파악하고 있지만, 목적을 실현한다는 것은 바로 개별자로서의 독자성을 파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더 이상 이 개별자로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와 다른 자기의식과의 통일이나 또는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로서의 자기가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381쪽)
이 부분을 해석할 때 우리는 헤겔 개인적인 삶도 참조해야 합니다.
알다시피 학문으로 출세를 하지 못한 청년기의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출판할 1807년도에도 무렵 아직도 교수가 되지 못하였고 심지어 나폴레옹의 바이마르 공국에 대한 침략으로 말미암아 시간강사의 직업도 뺏기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하숙집 여주인과 연애를 하여 아이를 낳고 그래서 또 그녀와 결혼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자신의 경험 역시 쾌락과 필연성을 낳게 한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공부를 엄청나게 하고 온갖 철학 논문을 쓴 노총각이 경제적으로도 빈곤한 상태에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하숙집 아주머니와 이성적 관계를 벌인 것입니다. 파우스트 역시 욕망을 추구하다가 여자를 임신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그녀를 감옥에 가게 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위의 인용문을 살펴봅시다. 더 나아가서 관능적 쾌락이나 사랑은 모순을 초래합니다. 아니 사랑 그 자체가 자체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혹은 사랑은 실패한다 라고 합니다. 거의 헤겔과 같은 방식입니다. 즉 나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주체적으로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로부터 사람받기도 원합니다. 이는 내가 그녀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나의 주체성을 상실합니다. 다음의 문장을 봅시다.
타인의 주체성을 존중할 때 ‘우리는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사랑이란 내 주체성을 버리고 타인의 세계로 전락하게 된다. 그때의 감정을 증오라고 한다. 그래서 사랑은 실패하고 만다.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에서 )
사랑은 이런 내부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헤겔의 사상과 상통합니다. 이런 쾌락과 사랑의 모순을 헤겔은 사람의 긍적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구분합니다.
쾌락을 향유한다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이 자기의식으로서 대상화된다는 긍정적인 의미와 함께 자기 자신을 파기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기의식이 쾌락을 통한 자기실현을 오직 긍정적인 의미로만 보려고 하더라도 그의 경험은 의식에게 모순된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니. 개별자로서 현실성을 획득한 자기는 현실성을 결여한 채. 그의 개별성과 비현실의 장에서 공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서도. 이 개별성을 병탄해버릴 만한 힘을 지닌 부정적인 상황의 출현으로 인하여 해체되어버린다. 이 부정적인 국면이야말로 개인에게 본원적으로 갖춰져 있는 본질이다. (정신현상학 380쪽)
위의 어려운 문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욕을 가진 인간(=자기의식)은 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사정을 하게 된다 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화된 자기의식입니다. 쾌락의 욕구는 철저히 주관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사정된 정액은 다시 물질화됩니다. 즉 객관적인 사물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정(射精)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요즘처럼 피임이 없었던 19세기에는 성교는 질 속이나 다른 곳으로의 사정 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헤겔이 말하는 도달된 현실성의 의미입니다. 이를 또한 모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정은 임신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원래의 욕구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향유된 쾌락에 숨어 있는 모순입니다. 이런 경험을 많은 사람들은 하게 됩니다.
요즘 TV에서 유행하는 “고딩엄빠” 같은 방송이 이런 경우입니다.
파우스트 역시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헤겔 자신도 이런 경험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정식으로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야합하는 경우 이런 문제는 반드시 발생합니다. 이를 헤겔은 “개별성을 병탄해버릴 만한 힘을 지닌 부정적인 상황의 출현”이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때 개인은 더없이 빈약한 정도의 자기 실현을 이룬 정신일 뿐이므로 아직 추상적인 이성. (die Abstraktion der Vernunft.)으로서 또는 자기 안의 자기와 타자 안의 자기가 직접적인 통일을 이룬 상태로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본질은 추상적인 범주로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 그리하여 사물의 세계는 단순한 본질존재가 순수한 관계를 전개해나가는 원환으로서 나타난다. 개체성이 이러한 모습으로 실현된다는 것은 개별자가 단일한 자기의식 내에 유폐되어 있던 상태를 벗어나 자기와 맞서면서 자기를 대상 세계에 펼쳐나가려는 추상적인 원환운동. (Kreis von Abstraktion.)을 전개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신현상학 380~381쪽)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식의 탄생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확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추상적이란 말은 아직 태어난 아기를 기쁨으로 맞이하지 못하고 억지로 받아 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즉 아이를 기대하고 성교나 임신을 시킨 것이 아니라 뜻밖에 아이가 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출산이 나와 혈통과 또 더 나아가서 인류의 영속을 취하여 필요한 것인데 향락만 추구하는 자기의식은 이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를 헤겔은 추상적인 범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를 헤겔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존재의 형식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이런 추상적인 전개를 헤겔은 필연성이라고 불렀습니다. 혹은 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추상성이 전개되는 것이 바로 필연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필연성이나 운명이라는 등의 것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 그의 일정한 법칙이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순수한 관념, 즉 단순하고 공허한 가운데 한치의 흔들림 없이 관철시켜나가는 관계야말로 운명의 본모습으로서, 개인으로서는 여기에 생겨나는 사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381쪽)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그런 장면을 보면 위의 문장이 쉽게 이해됩니다. 즉 필연성이나 운명 등은 바로 사랑이나 쾌락의 열정으로 성적인 행위를 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특히 남자의 느낌입니다. 이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건 즉 운명입니다. 뜻밖의 소식입니다. 자연은 성적인 정열을 이용하여 자손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런 일은 특히 동물이나 각종 생물의 경우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피임수술 등이 없었던 예전에는 개인들은 여기서 생겨나는 사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헤겔의 장점은 이런 청춘의 모순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개념화한 것입니다.
3) 아기의 탄생과 대자존재. 즉자존재
싸르트르는 그의 철학을 대자존재와 즉자존재의 두 가지 범주로 형성한 바 있습니다. 즉 사물은 즉자존재이고 인간은 대자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의식이나 정신이 없는 물질적 존재를 즉자존재라고 하고 의식이 있는 인간을 대자존재라고 합니다.
대자존재는 자유를 가집니다. 즉자존재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즉자존재는 본질이 실존에 앞섭니다. 대자존재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사람은 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태어난다 그러다가 물론 목적이나 의미를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의미입니다. 그 반면 볼펜같은 즉자존재는 그 태어난 이유와 목적이 먼저 있고 이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즉자존재의 경우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난 싸르트르의 출처가 되는 헤겔의 경우는 대자존재가 즉자존재로 바뀌고 다시 즉자존재가 대자존재로 바뀐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적인 본능과 아이의 탄생이라는 스토리입니다. 이것이 동시에 쾌락과 필연성 장의 논리입니다. 이를 헤겔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여기서 의식은 일(一)이라는 형식에서 보편성의 형식으로, 절대적 추상성에서 그 반대물로, 타자와의 공동성을 거부하는 순수한 대자존재의 목적에서 그와 정반대의, 이 또한 추상적인 즉자존재의 세계로 이행한다. (정신현상학 382쪽)
여기서 필자는 정신현상학을 번역한 고 임석진 선생의 번역을 일부 고쳤습니다. 즉 위의 문단에서 “순수한 자기 위주의 목적”을 “순수한 대자존재”의 목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Fürsichseins 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추상적인 즉자존재”는 번역본에서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Ansichsein” 즉 즉자존재(卽自存在) 라고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대자존재에서 즉자존재로의 이행이 나와 있습니다. 자기의식을 지닌 어른이 처음에는 단순한 물체 혹은 동물과 같은 인간을 생산한다는 말입니다. 아이를 낳는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고딩엄빠처럼 정욕과 사랑의 결과 전혀 뜻밖의 사건 즉 2세의 출현을 당황하게 바라보았던 자유로운 인간은 그러나 점차 자기의 분신에 대해서 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운명으로 삶을 시작하기에 이르릅니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엄청나게 어려운 철학적인 개념와 이론에 숨겨진 간단한 인생의 비밀입니다. 물론 이는 가장 비밀스럽고 소중한 삶의 계기를 이룹니다. 이를 헤겔은 다음과 같이 결론 짓습니다.
쾌락이라는 자기의식의 형태는 여기까지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는 것은 필연의 운명 속에서 실존적인 자기상실에 당도하여 결국 운명을 자기와는 절대적으로 소원한 존재라고 여기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자기의식은 여기서 실은 필연의 운명을 딛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운명의 필연은 온 곳에 펼쳐져 있는 순수한 힘은 바로 자기의식의 고유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자체 내로 복귀하여 운명의 필연을 자기의 본질로 인식하게 될 때 의식은 새로운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결론
현재 한국의 현실은 결혼 기피와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어두워져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떠하든지 이는 부정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출산과 가족없이 사람은 순수한 자유, 즉 자기의식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더 높은 단계로의 생활은 힘들 것입니다. 이를 헤겔은 보편적인 자아로의 상승으로 봅니다. 파우스트 역시 이런 경험을 통해서 공통적인 삶의 형태를 맞이했습니다. 파우스트와 정신현상학 모두 관능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의 추구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세계로 나아가는 삶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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