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이윤, 景宗
노론 시대의 소론 왕, 비운의 삶을 살다
시 대 : 조선 |
출 생 :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
사 망 : 1724년(경종 4) 08월 25일 |
본 명 : 이윤(李昀) |
본 관 : 전주(全州) |
목차접기
- 노론의 견제 속에 왕위에 오른 장희빈의 아들
- 경종과 소론의 반격, 신임옥사
- 노론과 소론의 갈등 속에 의문사하다
- 경종의 가계도
노론의 견제 속에 왕위에 오른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8일에 숙종과 희빈 장씨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숙종은 오래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자 매우 기뻐하며 서둘러 원자에 책봉했다.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왕비가 아닌 궁인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원자 책봉을 반대했으나 숙종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이다.
경종은 1690년(숙종 16)에 3세의 나이로 세자에 올랐다. 그가 세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비호 세력인 남인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종이 세자에 오르면서 인현왕후의 폐위로 공석이었던 왕비의 자리는 생모인 장씨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몰락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장씨는 희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1701년에 희빈 장씨가 죽자 경종은 세자의 지위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남인을 몰아내고 집권한 노론은 세자가 죄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내심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을 새로운 세자로 세우려 했다. 거기에 어느새 마음이 변한 부왕 숙종의 냉대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 때문인지 세자는 몸도 마음도 쇠약해져만 갔다. 만약 소론이 세자의 비호 세력을 자처하지 않았다면 자리를 보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에도 숙종은 병신처분을 통해 소론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히고 이어 정유독대를 통해 노론과 정치적으로 결탁했다. 그 결과가 세자의 대리청정이었다.
5년 동안 병마에 시달려 온 끝에 안질이 더욱 고통스러워서 물체를 보아도 더욱 희미해 수응(酬應)하기가 점차 어렵게 되었으니 국사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국조(國朝)와 당나라 때의 고사에 의거해 세자에게 청정(聽政)하게 한다. - 《숙종실록》 권 60, 숙종 43년 7월 19일
숙종이 하교를 내리자마자 노론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세자의 대리청정을 지지하고 나섰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세자 교체를 주장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꼼수에도 끝내 세자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종이 대리청정을 하는 3년의 시간 동안 딱히 흠이 될 만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1720년 6월에 숙종이 병으로 죽고 세자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경종에게는 2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워낙 병약했던 탓에 자식은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인 단의왕후(端懿王后, 경종 즉위 후 추봉)는 심호(沈浩)의 딸로 1696년(숙종 22)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718년(숙종 44)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세자빈에 책봉된 두 번째 부인 선의왕후는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730년(영조 6)에 죽었다.
경종과 소론의 반격, 신임옥사
숙종의 병신처분 이후 조정의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한 노론은 힘없는 경종을 압박했다. 경종이 생모 희빈 장씨의 추숭 문제를 거론한 소론계 유생 조중우(趙重遇)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노론의 위세에 눌린 결과였다. 그들은 한 발 더 나아가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시역한 죄로 사사당한 사실을 명문화하자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기어이 경종을 죄인의 자식으로 낙인찍어 왕으로서의 권위와 정통성마저 흔들겠다는 의도였다. 경종과 소론의 입장에서는 치가 떨릴 일이었다.
이렇게 경종과 소론의 원한이 깊어 가는 중에도 노론은 공세를 멈추지 않고 숙종의 둘째 아들이자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의 세제 책봉을 서둘렀다. 경종이 즉위한 지 겨우 1년이 지났을 때였다. 당시 경종비 선의왕후는 17세의 젊은 나이였으나 경종의 몸이 약해 후사를 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선의왕후는 종친 중에서 입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노론은 왕위 계승 구도가 복잡해지기 전에 연잉군을 확실한 후계자로 내세우려 한 것이다. 이른바 신하가 왕을 택한다는 의미의 '택군(擇君)'이다. 결국 조정을 장악한 노론과 대비 인원왕후의 결탁으로 연잉군의 세제 책봉은 논의를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제 책봉 2달 뒤인 1721년(경종 1) 10월, 급기야 노론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는 왕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요구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종은 요청을 받자마자 세제의 대리청정을 허락했다.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십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으니, 곧 선조(先朝)의 진념(軫念)하시는 바였고,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기가 진실로 어렵다. 지난 정유년에 청정의 명이 있었던 것은 조용히 조섭(調攝)하시는 중에 그 조섭의 편리함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내 몸에 이르러서는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등극하고 나서부터는 밤낮 근심하고 두려워해 요즘은 증세가 더욱 침고(沈痼)해지고, 수응이 또한 어려워서 정사가 정체(停滯)됨이 많다. 이제 세제는 젊고 영명하므로, 만약 청정하게 하면 나랏일을 의탁할 수 있고, 내가 마음을 편히 해 조양(調養)할 수가 있을 것이니, 대소(大小)의 국사를 모두 세제로 하여금 재단(裁斷)하게 하라. - 《경종실록》 권 5, 경종 1년 10월 10일
그러나 일이 그렇게 간단히 진행되지는 않았다. 소론이 경종의 마음을 돌리려고 설득을 하고, 성균관과 전국 각 도의 유생들이 대리청정을 환수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부담을 느낀 세제도 환수를 요청할 정도였다. 이에 경종은 본심이 아니었다며 세제의 대리청정을 환수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며칠 만에 경종은 다시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 이번에는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들까지 나서 대리청정 환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경종이 뜻을 굽히지 않자 노론 대신들은 입장을 바꾸어 왕의 명대로 행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趙泰耈)가 경종에게 명을 거둘 것을 극구 청했고, 그러자 노론 대신들은 다시 말을 바꾸어 대리청정 환수를 요청했다. 결국 몇 번의 번복을 거듭한 끝에 세제의 대리청정 문제는 무산되고 말았다.
때를 기다렸던 소론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계속 입장을 바꾼 노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던 소론에게는 노론을 몰아내고 국면을 전환할 절호의 기회였다. 결국 왕에 대한 불경과 불충을 이유로 노론 4대신이 위리안치된 것을 비롯해 50~60명에 이르는 노론 신료들이 처벌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은 더욱 위기에 빠져들었다.
역적으로서 성상(聖上)을 시해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로써 혹은 독약으로 한다고 하며, 또 폐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해 종사(宗社)를 안정시키소서. - 《경종실록》 권 6, 경종 2년 3월 27일
목호룡이 역적으로 지명한 사람은 정인중(鄭麟重), 김용택(金龍澤), 이기지(李器之), 이희지(李喜之), 김성행(金省行) 등으로 모두 노론 명문가의 자제이거나 친척이었다. 목호룡은 원래 종실인 청릉군의 가노였는데, 풍수를 배워 지관으로 이름을 알린 후 김용택, 이천기 등과 교류한 인물로 이들의 모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소론의 실력자인 김일경(金一鏡)의 주도 아래 이 고변으로 인한 화는 관련자는 물론 노론 전체로 확대되었다. 위리안치되었던 노론 4대신이 사사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되었다. 신축년(1721)과 임인년(1722) 두 해에 걸쳐 노론이 화를 입은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신임옥사'라 일컫는다. 이는 정권을 잡은 노론에 대한 소론의 대반격으로, 평소 노론에 대해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던 경종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노론과 소론의 갈등 속에 의문사하다
신임옥사로 소론은 노론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소론이 득세한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소론의 지지자인 경종이 재위 4년 만인 1724년(경종 4) 8월 25일에 죽었기 때문이다. 경종은 짧은 재위 기간 내내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고, 죽기 며칠 전부터 위독한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경종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있었다.
특히 죽기 전 날 세제 연잉군이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죽었다는 점에서 장안에는 독살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의가에서는 게장과 생감은 함께 먹으면 안 되는 음식으로, 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잉군이 실제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것이 경종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면,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했던 노론 사이에 충분한 정쟁거리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결국 이 일은 노론의 '택군'으로 왕으로 옹립된 연잉군에게도 커다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경종은 숙종의 사랑을 받던 어린 시절에는 매우 총명하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런데 생모의 비극적인 죽음과 마음이 변한 숙종의 냉대 그리고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노론 대신들의 압박으로 인해 몸과 마음에 병을 얻었다. 정적이었지만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연잉군에 대해서도 형제로서의 의리를 지켰다. 신임옥사 당시 소론 강경파들은 연잉군의 처벌을 주장했지만 경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종은 즉위 후 세자 시절에 얻은 병증이 더욱 심해져 경연도 오랫동안 하지 않고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노론에 의해 기록된 일부 문헌에서는 경종을 마치 미치광이 임금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이것은 경종이 왕으로서 자질이 부족함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내용일 것이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 삶을 마감한 경종의 능은 서울시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懿陵)이다.
경종의 가계도
제20대 경종(景宗, 1688∼17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