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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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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상화는 복건(幅巾)에 학창의(백색 천으로 만들고 옷 가장자리에 검정 비단으로 선을 두른 선비들의 웃옷)를 착용하고 공수(拱手) 자세를 취한 송시열의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 반신상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문인으로서 정치적으로 기복이 심한 삶을 영위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했던 거유(巨儒)로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면서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들을 길러낸 인물이다. 따라서 사후 그를 추모하여 받드는 수많은 사우(祠宇)가 다수 건립되었는데 그 중 위판(位板, 위패라고도 함)이 아니라 영정을 봉안했던 영당(影堂) 및 사당(서원 부속)만 해도 적지 않은 수에 이른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송시열 상(宋時烈像) 역시 이러한 영당이나 사당에 봉안되었던 초상화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239호 송시열 상(宋時烈像)을 보고 베껴 그린 이모본(移摸本) 가운데 비교적 우수한 편에 속하는 이 그림은 안면 처리에 있어서는 안색을 짙은 살색으로 칠하고 안모(顔貌)의 울퉁불퉁한 외곽과 이목구비를 규정하였으며 윗 눈꺼풀은 가는 묵선으로 처리하고 어두(魚頭)와 어미(魚尾) 부분 안쪽으로 붉은 기운을 약간 집어넣어 노인의 충혈된 눈을 묘사하였다. 얼굴의 주름살을 선묘(線描) 위주로 처리하고 법령과 볼 부위의 주름진 곳에는 회색 선염(색칠할 때에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차 엷게 칠하는 일)을 짙게 넣었으며 귀의 굴곡진 부분에도 선염기를 삽입하였다. 의복의 외곽선과 의습 처리에서는 선염기 없이 선으로 그은 다음 외곽선과 주름선을 따라 희게 하이라이트를 주어 입체적인 느낌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전체적인 형식에 있어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239호 송시열 상(宋時烈像)과 형태와 규격이 같으나 전체적인 기법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본보다 거칠게 처리되었고 제작시기도 조선조 후기에서 말기 사이로 내려오지만 조선 후기에서 말기로 내려오는 시기의 기법적 변화를 볼 수 있는 자료로도 일정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이라는 인물이 지니는 인물사적 자료로서의 가치와 조선조 유학자의 풍모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복건 부분에 박락이 상당 부분 보이지만 얼굴 부분과 의복 부분은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69호
의성만취당
의성만취당에 대한 설명입니다.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김사원(1539∼1602)이 선조 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세운 건물이라고 한다. 이름은 김사원의 호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몇 차례 보수를 거쳤고
지금 있는 건물은 영조 40년(1764) 넓혀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옆에 부속 건물이 붙어 있어 건물 평면이 T자형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지만
부속 건물은 단순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임에도 조선 중기의 건축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송광사오백나한전목조석가여래삼존상및권속상일괄
(松廣寺五百羅漢殿木造釋泇如來三尊像및眷屬像一括)
전라남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사(松廣寺)의 나한전에 모셔진 불상으로, 삼존상 3구, 16나한상, 500나한상, 제석상 1구, 동자상 2구,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등 모두 526구이다.
본존불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놓여 있는데, 얼굴은 원만한 편이며 양쪽 귀는 짧게 표현되어 있다. 정제된 얼굴 표현에서는 근엄함과 자비로움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두꺼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고, 왼쪽 어깨에서 내려진 옷주름은 왼쪽 팔에 걸쳐 무릎을 덮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얹어놓았고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이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 나한상, 인왕상, 동자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최근에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효종 7년(1656)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500나한상 중 일부는 후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새로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을 비롯하여 나한전 내의 불상들은 비교적 작품성이 뛰어난 귀중한 자료이다.
종 목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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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춘당문집책판 및 춘정집책판 (春堂文集冊板및春亭集冊板) |
분 류 |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
수량/면적 | 177매 |
지정(등록)일 | 1979.12.29 |
소 재 지 | 경남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1119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변용희 |
관리자(관리단체) | 변용희 |
설명 조선초기 문신 춘당 변중량의 문집과 그의 아우 춘정 변계량의 실기책판으로 500년전에 배나무로 판각한 것임. (1) 춘당집 책판 춘당집 책판은 변중량의 시문집을 목판으로 2권 1책으로 순조 23년(1823)에 간행되었고 서문은 조인영이 썼음. 변중량은 변계량의 형으로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사위로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제거 당했음. 시에 능했으며 지금은 없어진 가조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음 (2)춘정집 책판 문집은 춘정 변계량의 문하인 판승문원사 정척이 수집 편차한 것을 세종의 명에 따라 집현전에서 교정하여 원고를 만들었음. 목판은 그 문인인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권맹손이 세종 24년(1442)에 밀양에서 처음 간행함. 춘정집은 원집이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4권까지에는 사 ·시이고 5권에는 기 ·서 · 잡저 · 설, 6권에는 봉사 · 상서, 8권에는 대책 ·교서 9권에는 표전, 10권에는 청사, 11권에는 책문, 제문, 축문, 12권에는 비지 · 명발 등이 실려있음. 변계량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문과급제 후 여러 벼슬에 이어 대제학을 20여년간이나 지냈음. 문장과 시에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음. 춘당문집책판장판각 원경 춘당문집책판 및 춘정집책판 |
종 목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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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선암사 원통전 (仙岩寺圓通殿) |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
수량/면적 | 1동 |
지 정 일 | 1990.02.24 |
소 재 지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 (죽학리)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선암사 |
관 리 자 | 선암사 |
설명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지은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통일신라 경문왕 1년(861) 도선국사가 세워 선암사라 이름지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고려 선종 5년(1088)에 의천이 새롭게 고쳐 세웠으나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버렸다. 그 뒤 여러 스님이 건물들을 세우고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 원통전은 조선 현종 1년(1660)에 경준, 경잠, 문정대사가 처음 지었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고쳐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24년(1824)에 다시 고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설치한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기둥 사이에는 꽃받침 모양의 재료를 놓아 그 위쪽의 재료들을 받치고 있다. 건물 앞쪽으로 기둥 2개를 내어 건물 평면이 T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보조 기둥(활주)이 지붕 추녀 부분을 받치고 있다. 선암사 원통전은 아담한 크기의 건물로 사찰건축에서 보기 드문 T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어 주목 받는 건물이다. 선암사원통전 선암사 원통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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