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내게 넘 화려한 날이었다. 아직 많은 장면들이 간단없이 오버랩된다. 대개.. 싱그럽고 자유로우며 안락한.. 느낌들로. 제3회 미켈롭 울트라 오픈 3,4 라운드. 내가 처음 필드에 나갔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주차장에서 서둘러 걸어나와 처음으로 갤러리가 되는 순간, 몹시 설레었다. 그동안 내게는 너무 친숙한 LPGA 선수들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날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9번홀을 가로질러 첫번째 홀. 맨 처음 마주친 얼굴은 로라 데이비스였다. 우선 그녀의 훤칠하게 키에 놀라고, 성큼성큼한 그녀의 걸음걸이에 압도당하고 한마디로 거칠 없는 당당함, 보무도 당당한 여전사의 느낌이었다. 내가 알던 뚱뚱한 여인이 전혀 아니었다.
그녀에게 우리가, 아니 골프가 등수를 매기지만
그런 것 따위는 내게 아무 상관없다고 할 것만 같다.
그녀를 보며 얼핏 스친 느낌 하나, 저 여인은 혹시 남자 아니었을까? 바람을 휙 일으키며 뒤돌아 걷는 저 여인의 거칠 것 없음이라니. 동시에 골퍼로 살아가는 일은 자유가, 아닐까.. 그녀는 바로 저런 느낌 때문에 골퍼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화면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18번째 홀, 관중석에 앉아보았다. 마침, 장정의 모습이 보인다. 당당한 체구의 여전사들 틈에 자그마하고도 단단한 여인, 블랙앤화이트로 갖춰입은 그녀의 패션은 오늘따라 왜 그리 앙징맞은지. 그녀가 젤 멀리 온 시켰다. 그리고 롱펏이 들어갔다. 갤러리들의 환호와 박수. 예술이다. 바로 이맛에 그 고통을 견뎌내는 거겠지. 잠시 선수가 된 기분이다. 갤러리들은 참 에누리가 없다. 박수 리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는 절대로 박수에 후한 법이 없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7.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hEU0%26fldid%3DLGbT%26dataid%3D169%26fileid%3D1%26regdt%3D%26disk%3D32%26grpcode%3Dilovewashington%26dncnt%3DN%26.jpg) 18번 홀 모습
오늘 36홀을 돌아야 하는 선수들.. 나도 18번 홀 관중석을 빠져나와 1번 홀로 향한다. 장정 선수가 드디어 나타난다. 사인이라도 받아볼까 하며 기웃거리던 우리.. ㅎㅎ 줄줄이 선수를 둘러싸는 스탭들을 보니 질린다. 오늘 안에 경기를 끝내려면 한시도 지체가 없어야 한다는 일사불란한 결의.
그녀는 간결하고도 부드러운 샷을 가졌다. 하지만 거리에는 손색이 없다. 그녀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그녀의 전체적인 실루엣을 찬찬히 훑어본다. 음, 저 든든한 엉덩이에서 나오겠지.. 하다가 혼자 웃는다. 참 튼튼하게 생겼다. 긴 바지로 감춰진 다리도 튼튼하겠지.
선수들의 복장이 넘 자유롭다. 옷에 칼라가 달려 있을 일도, 배꼽을 감출 일도, 트레이닝 복을 벗을 일도 없다. 한 캐디는 선수에게 잽싸게 간이의자를 꺼내준다. 다른 선수들이 스윙하는 동안 그 선수는 훼어웨이에, 그 의자에 앉아서 숨을 고른다. 그러는 동안 이곳저곳에서 캐디와 선수가 계속 속삭이며, 수첩들을 꺼내보며 간간이 미소를 날린다.
그들은 경기의 흐름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그저 물 흐르듯, 그러나 쏜살 같이 진행된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은 충분히 더디게 사용한다. 여러 차례의 연습 스윙. 그럼에도 긴장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많은 궁리와 화, 감정들이 안으로만 흐르지 결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흐를 뿐이다. 유유히.. 놀랍게도 뭔가 긴장감있게 변하는 것은 스코어 보드뿐이다. 1등을 제외한 선수들의 이름이 수시로 뒤바뀐다. 한 선수가 골프채를 발로 찬다. 그녀의 순간의 감정들은 화로 가득차 있겠지만 갤러리인 나에겐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돌아간다. 늘 그곳에 그런 그림이 있었던 것처럼.
나탈리 걸비스는 참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아는 그녀는 몇 년 전 루키 시절을 보낸 새내기 선수. 반쯤 벗고 모델로 등장한 적이 있고 티비 광고에서도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오늘은 흰색 셔츠, 흰색 미니스커트, 흰색 리본으로
금빛 머리를 묶은 그녀는 말 그대로 요즘 여자아이다.
(난 금발의 소녀들만 보면, 졌다! 는 느낌이 든다.
백인종의 인종학상의 백미는 바로 이 금발이 아닐까..난 생각한다.)
구리빛의 늘씬하게 뻗은 다리,
근육으로 뭉친 양팔 그리고 어깨.
건강미로 다져졌지만 여성성을 잃지 않은.. 오늘은 스코어도 좋다. 내내 2등 주변을 오간다.
1번 홀에서 그녀의 티샷을 지켜보았다. 내가 그녀보다 좀 낮은 곳에 앉아서일까. 완벽하고도 유연하게 돌아가는 어깨, 곧게 펴준 왼팔, 임팩 순간 잡아두는 어깨, 클럽 헤드와 볼이 정확하게 90도로 조준되는 느낌. 순간 미동 없이 단단하게 딛고 서 있는 두 다리. 공이 ‘짱’하고 맞는 순간, 이건.. 한마디로 예술이다. 키는 좀 큰가? 큰 키 만큼이나 긴 팔, 긴 다리. 그만큼 커지는 스윙 아크. 순간 작렬하는 클럽헤드와 볼. 별안간 내 몸에서 전율이 인다. 인간이란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다. 어떻게 저런 폼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러는 동안 얼마나 몸이 혹사당했을까? 얼마나 고된 훈련의 결과일까....
많은 프로 선수들의 티샷을 지켜보는 내가 받은 전체적인 느낌은, 모든 샷이 직선 혹은 수직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강한 깨달음이다. 정조준,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동작. 이런 걸 기계라고 할 거다. 그걸 유지하려면 마음도 기계가 되어야 한다.
강렬한 느낌을 준 또 한명의 선수. 소피 구스타프슨. 그녀는 오늘 내가 본 최고의 여전사다. 그녀의 둥그렇게 굽은 강인하고도 두둑한 느낌의 등판을 보는 순간, 잘 빠진 남자 수영선수가 생각났다, 물찬 제비.. 그녀는 막 헬스클럽을 빠져나옷 듯, 꽉 조이는, 무릎께까지 오는 검정색 반바지 차림이다. 그 바지의 디자인과 색깔이 더욱 강인한 느낌을 준다. 그녀가 샷을 시작하는 순간, 내몸에서 또 전율이 인다. 정말이지 강인한 남성이 풍기는 마초를 뿜어내는 샷이다. 너무 완벽하다. 이렇게 준비된, 근육질의 건장한 선수들이 차곡차곡 늘어난다, 골프에서도. 그 틈에 낀 우리나라 선수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7.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hEU0%26fldid%3DLGbT%26dataid%3D169%26fileid%3D2%26regdt%3D%26disk%3D19%26grpcode%3Dilovewashington%26dncnt%3DN%26.jpg) 소피 구스타프슨
김미현은 아기 같다. 조금 지쳐보이는 표정, 치마 밑에 얌전하게 드러난 가냘픈 양 다리, 그리고 또 얌전하게 목 부분까지 채워져 있는 연한 주황색 조끼의 매무새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그녀의 티샷이 높게 뻗어 날아가 안착한다. 박수 소리가 이어진다. 같은 팀 세 선수에 비해 손색이 없는 거리다. 저 자그마한 몸에서 나오는 결연한 의지라니. 부드러운 외모에 숨어 있는 강인함이라니..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요즘 힘을 잃어가는 박세리를 생각하니 김미현이 더 빛이 난다. 떡대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운동, 그것이 골프의 또 다른 매력일까.
새댁 한희원도 보았다. 조용하지만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내곁을 스쳐간다. 조금 웃을듯말듯한 얼굴로. 좀 지쳐있다. 이 두세홀만 지나면 그녀의 오늘 36홀의 여정이 끝난다. 정일미, LPGA에 온 이후 거의 컷통과를 못해본 그녀. 이번엔 아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이번에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번엔 그녀가 해냈다는 것이. 한국에서도 몇 번 지켜봤지만 그녀는 참 곱다. 특히 눈이. 그러나 샷은 남성적이다. 어느 홀에선가 곁으로 지나가는 그녀를 보았다. 화이팅!! 내 입에서 절로 그말이 나온다. 씽긋 웃는 그녀. 그리곤, “아무말도 묻지마” 불쑥 그러는 거다. 돌아보니 내 옆에 그녀의 코치인 듯, 혹은 친구인 듯한 남자가 서 있다. 암말두 하지말라는 거다.. 말하면 잔소리다, 너무나 알만하다, 그 심정^^.
김주미 선수를 유심히 보았다. 우선은 그녀의 빨강색 티셔츠, 그리고 재미나게 디자인된 아마도 아이보리색 바지 때문에. 이전 지산 리조트 소속이었나? 그녀의 백에 그런 로고가 씌여 있다. 그 글씨가 몹시 반갑다. 차례를 기다리며 연습 스윙하는 그녀. 스윙의 군더더기가 없고 참 안정돼 있다. 키도 크고 표정도 참 밝고 예쁘다. 한국의 요즘 어린 선수들은 공통적으로 참 곱고 체격조건도 좋다. 우리나라의 또 다른 변모와 파워가 느껴진다. 앞으로 더 잘할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한다.
안시현도 보았다. 엘로드 로고가 선명한 티셔츠. 셔츠의 스트라이프, 코디한 바지도 멋지다. 우리나라 브랜드란다. 얼굴도 곱다. 처음 본 그녀의 얼굴은 불퉁해있었다. 다음 홀 팅 그리운드에서 보니 다시 밝아져 있다. 어린 선수들에게 감정 관리란 참 힘들 것이다. 그래도 좀 따라붙어 주길 바랬는데..
박지은, 박희정은 안타깝게도 자세히 못 보았다. 후에 박지은은 배탈 때문인지 화장실을 여러 번 왔다갔다 했다는 야기를 우리 일행으로부터 들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화이널, 36홀의 긴 장정에서, 배가 탈이 난다면? 골프는 오늘같이 바람과, 의도적으로 힘들게 디자인된 코스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그날의 몸과 마음의 컨디션과 싸우는 독특한 스포츠다. 생각할수록 어려운 운동이다.
소렌스탐, 그녀의 팔뚝을 보고 우선 놀란다. 생각보다 훨씬 든든하다. 체격도 당당하다. 멀리서 이홀 저홀 살펴보다, 가장 많은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곳엔 소렌스탐이 있었다. 오늘 잘 안 풀리는 듯, 특히 평소 자로 잰듯한 퍼팅이 번번이 그녀를 시험한다. 이번에 이기면 6번째 연속 우승 신기록이라는데, 아무래도 부담이 큰 듯, 첫 번째 라운드에서부터 5오버로 시작했다. 그녀의 스윙은 익히 보아온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수많은 갤러리들이 지켜보는 중에 우승에 대한 부담감과, 자기가 소위 여제인데.. 왜 이 모양인가 라는 자책, 미스 샷에 대한 자기분노와 자기연민을 이기는 것.., 그래도 그녀는 몹시 듬직했다.
묵묵하게.. 여제다웠다.
집에 돌아와 그녀의 인터뷰를 읽었다.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던 그녀, 이번엔 맨 꼬마리에 그녀의 인터뷰가 나온다. 인터뷰어가 묻는다. 아이언을 바꾼 게 어떤 영향을 준 게 아닌가, 라고? No, I'm not going to find any excuses for it. It was totally me. I just didn't putt very well. I missed a few shots out there, a few mistakes.
변명은 안 한다. 그리고 다음을 기대한다. 삶은 계속된다.
so here we go. I mean, I am not complaining by any means. Right now I just feel a little frustrated about the last few days. But life goes on and it's a new tournament next week and hopefully I can read those greens.
아이고, 감상이 넘 길어진다. 이쯤에서 마무리지어야겠다. 19번째 홀에서 미켈롭 울트라 맥주와 바비큐 버거 커피 한잔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더더욱 잊을 수 없는 것, 윌리엄스버그, 킹스밀 골프장의 하늘, 바람, 그리고 그날을 위해 최선을 다해 가꿔온 잔디 위를 맨발로 걸어다닐 때의 느낌들, 그리고 유유자적 간이 의자를 어깨에 메고 다니다 맘에 드는 곳에 자리를 틀던 미국 할머니 갤러리들이 주던 자유로운 느낌들..이다. |
첫댓글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쓰세요. 에구 저는 답글 이라도 멋있게 쓰고 싶은데... 포기해야 겟지요.
읽는 사람도 갤러리가 되어 필드에 나가 있는 느낌.... fantastic!
무리를 해서라도 따라갔었어야 했었네요.....
변명은 안하고, 삶은 계속되는군요... 그리고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