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 효령대군과 청권사
서울의지하철2호선방배역옆에는청권사(淸權祠)라는사당이있다.태종의두번째아들효령대군(孝寧大君:1396~1486)을모신사당이다.효령대군사후에바로조성되지는않았고,숙종대에양녕대군을모신사당인지덕사(至德祠)를조성한것을전범으로삼아영조대인1736년에조성하였다.위치는효령대군의묘역이있던곳이었다.
‘청권’이라는이름은『논어』권18「미자(微子)」의‘신중청폐중권(身中淸廢中權)’에서따온말이다.주나라태왕의세아들중둘째인우중(虞仲)의‘처신이청도(淸道)에맞았고,스스로폐한것이권도(權道)에맞았다.’는고사를효령대군에비유한것이다.정조때인1789년에사액을받았고,이후헌종과고종연간에사당을보수했다는기록이있다.정조는편액을하사하면서,‘우리왕가에효령과양녕두대군이계셨네/오랜후세에오히려감회가있는데/...길일을가려서편액을내리고/근신을보내어잔을드리게하네/라는제문을내렸다.
효령대군의이름은보(補),초명은호(祜)다.효령대군은‘효령’이라는군호에서드러나듯이어려서부터아버지태종과어머니원경왕후에대한효성이지극했다.태종이“효령과충녕이조석으로드나들며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는잠자리를보아드리고,아침에는문안을드림)했다.”라고표현한것이나,변계량이“효령대군은온아하고문명한자질을가졌고효제(孝悌)와충신(忠信)의행실에독실하며,...자신의몸가짐을겸손하게해털끝만큼도교만한기색이없으니,그처럼훌륭할수없다”라고한것은효령대군의인물됨을잘보여주고있다.
1418년8월충녕에게왕위를물려주고상왕이된태종은중국사신의접견과같은중요행사에효령대군을꼭배석시켰다.세종또한불교에깊은관심을보인형을인정하고그의자문을받았았다.효령대군은세종부터성종까지왕실과국가의원로로서최대의예우를받으며평안한일생을보내다가1486년(성종17)5월11일91세를일기로사망했다.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기타5. 자손
1.개요[편집]
조선전기의왕족.태종과원경왕후민씨의 차남. 그러나요절한 형이 3명이 더 있으니 태어난 순서대로 하면 5남이다.[4] 양녕대군의 동생이고세종의 작은 형.이름은이보(李補),[5]50만전주 이씨효령대군파의 파시조이다.
2.생애[편집]
왕자인 대군 시절에 특별히 사건은 없는 편인데 태종 10년(1410) 인녕부(仁寧府) 행수(行首) 이호(李護)가 효령대군에게 청탁하여 호조의벼슬을 얻었다가 태종에게 들통이 난 사건이 있다. 태종은 "어린아이를 통해(효령대군은 당시 14살) 이름을 얻으려 했으니 죄를 주어야 하지만 이름을 얻으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죄를 묻지는 않고 파직만 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효령대군을 두고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나와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온화한 성품으로 태종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나 위아래로형과동생이 임팩트가 강하고[6]효령대군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아들이었는지 부모와의 관계를 보여주는에피소드는 거의 없는 편이다. 아래 일화와 태종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우애깊게 지내라고 강조한 일화가 거의 전부. 그 밖에 효령대군의 가신과 가노들이비리를 저질러서 문제가 된 사건이 조금 등장하는데 가노 등이 주인의 뒷배경을 믿고 잘못에 연루되는 일은 조선시대 왕자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폐세자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자 갑작스럽게책을 펴고공부하는 척했지만 형양녕대군이 "헛짓거리 그만하라!"하며 꾸짖었다고 하는데, 딱히정치적 배경이 없던 효령대군이 정말로왕위에 욕심을 낸 정황은 없을뿐더러 양녕대군이 누구를 훈계할 처지도 아니었고 효령대군도 파는분야가 워낙 매니악해서 그렇지 공부에 관해서라면 하는 척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효령대군은 말년에 다른 형제들보다 오래 살아종친의 높은 웃어른으로서 영향력이 커졌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양녕대군의 모습은 전형적인한량이고 효령대군은 정치에 큰 뜻이 없는 인물로 보여지는데 야사에서는 오히려 둘의 성격이 정반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신기한 점이다. 야사에 의하면 효령대군은 번뇌(괴로움)를 씻기 위해절에 들어가서 북 가죽이 늘어지도록 북을 쳐댔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효령대군 북 치듯 한다."라는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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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타[편집]
초상화가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조선 전기 인물 중 1명. 부드러워 보이는 인물됨과는 달리 제법 덩치도 있고수염도 야성적이다. 할아버지이성계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듯하다. 초상화에서태종,세종,양녕대군의 얼굴도 추측해볼 수 있는데 태종이 일찍 죽은 넷째 아들성녕대군을 두고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라고 회상하는 기록이 있으며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얼굴이 너무 닮아서 양녕대군이 장난을 칠 때 "나 효령이다!"라고구라(사칭)를 쳤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들과 할아버지이성계, 큰아버지이방의, 조카수양대군의 초상화로 추리해 보면 정종, 태종과 세종의얼굴도 저 초상화와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5.자손[편집]
장수한 탓에 자손이 대단히 번성했는데 아들이 7명.[30]
차남 서원군 이친의 아들인 회의도정(懷義都正) 이추(李菆)의 사위는,세종대왕의 차녀인정의공주의 차남 안온천(安溫泉)이다.
7남 안강도정(安康都正) (1430∼ ?) 휘는 간(?), 대군의 7남이며 어머니는 평해손씨(平海孫氏)로서 낭장(郞將) 증병조판서유례(有禮)의 증손녀이고 군수 증 찬성 밀(密)의 손녀이며 인효(仁孝)의 딸이다. 1444년(세종 26) 창선대부 안강정(安康正)에 제수된 후 1476년 3월 9일, 1478년 3월 19일, 1479년에성종이 효령대군 저택에 거둥하여 위로 잔치를 베푼 자리에 입시하였다. 1489년(성종 20) 12월 16일 문소전(文昭殿)에 입직할 때 수복노(守僕奴)끼리 싸우고 또 지의(地衣)[31]를 태운 일을 계달(啓達)[32]하지 않은 책임으로 직첩(職牒)이 회수되었으나 곧 환급(還級)되고 명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배위는 진주 류씨(晋州柳氏)와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으며 아들 습계군(習溪君) 효의(孝議)는 1493년(성종 24) 윤 5월 9일에 실시된 종친시예(宗親試藝)에서 차석을 차지하였고, 손자 종성령(鍾城令) 구(球)는 주기학파(主氣學派)의 선구자인 화담(花潭)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스승이 주창한 그 학설을 계승하여 체계화하였으며 증손 정랑(正郞) 해구(海龜)는 1559년(명종 14)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합격했다. 현손완흥군(完興君) 원영(元榮)은인조반정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현손전풍군(全豊君) 신(愼)은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각각 녹훈되었다.묘는 실전되었고 1981년경기도 평택시현덕면 덕목리 광덕산 을좌에 설단하였다가 1989년 경기도양주군백석면 방성리 산192번지 을좌에 천단(遷壇)하였고 단비(壇碑) · 상석 · 석등 및 문인석이 있다.
딸은 3명[33]인데 손자가 33명, 손녀가 24명, 증손자가 109명이었다. 게다가 50살을 넘긴 둘째, 넷째, 여섯째를 먼저 보냈다.
효령대군의후손인 효령대군파는 현재전주 이씨내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명종이후 적통이 끊겨덕흥대원군의 3남인선조로 후사를 이었고 종래에는강화도로유배가 있던 왕손인철종으로 대를 이었던 후기 조선왕실상황과 대조해서 보면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후 조선 왕실에 효령대군의 핏줄이 섞였고 이들의 후손들이 왕통을 이었으니 조선 후기의임금들은 효령대군의 후손이라고 봐도 된다. 효령대군의 3남보성군이합의 외손들이 3차례나 왕실 직계와 혼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성군은 아들을 총 7명을 두었는데 그 중 2남 율원군 이종의 증손녀가 청릉부원군 심강과 혼인하여 낳은 딸이명종의 왕비인순왕후 심씨이다. 즉, 인순왕후는 효령대군의 외5대손(현손녀의 딸)이다. 그리고 4남 평성군 이위의 손녀가 구순과 혼인했고 그 손녀가인헌왕후 구씨로인조의 생모이다. 즉, 인헌왕후는 효령대군의 진외6대손(현손녀의 손녀)이다. 또한 7남 동양정 이서의 증손녀가 김한우와 혼인하여 낳은 딸이 선조의 후궁인빈 김씨이다. 즉, 인빈 김씨는 효령대군의 외5대손(현손녀의 딸)이다. 그러니 정리하자면인순왕후와인빈 김씨는 10촌 자매 지간이다. 그리고 인순왕후의양자이자 인빈 김씨의 남편 선조는 저 둘과 13촌 지간이며[34] 인헌왕후는 저 둘과 11촌 지간이다.
그런데인헌왕후의 남편인정원군은인빈 김씨의 3남이다. 그러니정원군과인헌왕후는 12촌 남매 뻘이다.[35]그리고 이들의 후손들로 조선왕조최후까지 왕통이 이어지니[36]그 중심에는 효령대군의 혈통이 존재하는 셈이다.
효령대군 공식 홈페이지인청권사에 따르면 효령대군의 후손은 무려 50만 명으로전주 이씨내에서 20%를 차지하고 있다. 효령대군파 내에서 가장 번창한 율원군(여양군-전성군)[37]계로 이것만 따지면 10만 명으로 효령대군파 내에서 20%를 차지한다.
유명한 인물로는숙종시절 청백리로 유명하고백성들에게 칭송받는 이형상이 있었고 과거이승만정권 시절의 2인자이자사사오입 개헌,3.15 부정선거로 악명 높은이기붕(18세손)이 있다.[38]이외에도 전아나운서겸국회의원이었던이계진(본인은 항렬자를 쓰지 않았으나 할아버지가 효령대군 21세손 항렬자인 '廷'자를 사용해서 이름이 이정현(李廷賢)이며 아버지가 효령대군 22세손 항렬자인 '揆'자를 사용해서 이름이 이문규(李文揆)이므로 효령대군 23세손이다.)과 현직인천광역시 서구국회의원인이학재(20세손)도 효령대군의 후손이다.[A]
유명연예인으로는 개그맨이수근, 개그맨이휘재, 개그맨이혁재, 배우이성재, 배우이정재, 가수이상은, 가수이수만,이만희-이혜영부녀,이경규,이순규 [40], 가수 겸 배우이준호, 인터넷방송BJ슈로제(이가을)가 있다.
효령대군파 종회는방배동과무교동에 빌딩을 보유하고 시세는 약 1천억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