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6주년 기념 2021. 8. 15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11-20
<광복 76주년을 맞으며>
오늘은 제76주년 광복기념주일입니다(만세 3창 – ‘대한 독립 만세’).
지난 주간 저는 두 가지 기쁜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나는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가 대부분의 경제지표에서 일본을 따라잡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입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과 일본은 1995년엔 각각 26위와 4위를 기록했지만, 2020년에는 한국이 23위, 일본은 34위로 한국이 일본을 역전했다고 밝혔습니다. S&P, 무디스, 피치 등 3대 국제신용평가기관에서도 2021년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일본보다 2단계 높게 평가했습니다.
또한 각국의 물가와 환율 수준을 반영한 1인당 구매력도 2018년 한국(4만3001달러)이 일본(4만2725달러)을 추월한 이후 추세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제조업 경쟁력에서도 일본을 추월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올림픽 개폐회식을 보고 온 송승환 씨는 문화적으로 이미 우리나라가 일본을 추월했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온 일본의 수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기초과학기술, 소재, 부품, 원천기술 등에서 아직 큰 격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역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적자의 폭도 커지고 있습니다. 해외직접투자 역시 일본의 4분의 1에 불과합니다(한국 325억 달러, 일본이 1157억 달러로 여전히 3.6배 가까이 차이).
그러나 역사상 식민 대상이었던 나라가 그 나라를 지배했던 나라를 추월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에 일부분에서라도 이런 역전을 이루어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감동입니다. 앞으로 더욱 일본을 능가하는 나라로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올해 광복절을 맞아 서거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지난 1943년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서울에서 5000㎞ 떨어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묻혔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해가 광복 76돌을 맞는 15일 밤 서울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는 1868년 평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냥꾼으로 활동하던 그는 포수들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며,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대담무쌍한 활동을 벌여 ‘날으는 홍범도’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1910년 이후 그의 항일 무대는 간도와 연해주였는데, 1920년 독립 무장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독립세력의 거점이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압박이 강해지자 홍 장군은 독립군 세를 키우기 위해 러시아 영토로 이동했다가 한인 무장세력 간 분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중, 1937년에는 스탈린 정권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홍 장군 등 9만 6천여 명의 고려인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당했습니다. 홍 장군은 그곳에서 힘든 말년을 보내다 75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은 그동안 정부의 숙원이었는데, 김영삼 정부 시절 1995년 한 차례 봉환이 시도됐지만, 북한이 카자흐스탄 정부에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란 점을 들어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동포들이 선뜻 유해 봉환에 나서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장군의 존재가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에서 ‘정신적 구심점’ 구실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크즐오르다에 장군의 묘역을 조성한 뒤 ‘민족 지도자’로 기려왔습니다. 카자흐스탄 정부 역시 1994년 ‘홍범도 장군 거리’를 선포할 정도로 장군을 존중해 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유해 봉환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끝에,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6월 7일)을 기해 홍 장군을 모시기 위해 노력해왔으나 안타깝게 코로나 상황으로 봉환이 연기되어 오다가 이번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15일(2021. 8. 15) 저녁 고국에 도착하는 홍 장군의 유해는 16~17일 국민추모 기간을 거친 뒤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선조들의 항일 정신을 되새기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들을 예우하는 것은 나라의 기초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입니다.
오늘 광복 76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깨닫고 뒤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신명기 – 모세의 설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40년에 걸친 미디안 광야 생활을 거의 끝내고,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주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압 광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모세가 행한 설교 모음집입니다.
여러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상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제 40년의 연단이 시간이 채워졌으니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신1:8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이 얼마나 흥분되는 말씀입니까?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들이 거쳐 온 미디안 광야의 40년은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고생길이었습니다. 늘 생존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는 늘 부족했습니다. 수많은 부족과 부딪치고 싸우는 중에 많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40년이 지나는 동안, 출애굽 당시에 스무 살 이상 되는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들이 가나안 입성 후에 그들이 변질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이스라엘 백성을 한데 모아놓고 반드시 지켜야 할 내용을 설교했고, 이를 기록한 것이 ‘신명기’입니다. 모세의 유언 같은 말씀입니다.
<광야 40년의 의미>
모세는 먼저 지난 광야 40년의 고난의 의미를 절대 잊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과거의 고난의 시간은 그냥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걷게 하신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함입니다. 즉 그들의 교만을 꺾기 위함입니다. 광야 40년은 그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자신들의 노력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교훈을 주시기 위해 보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이나 유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아니었다면, 그 시간까지 살아 있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시지 않으셨다면, 애굽의 군사들에 의해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터뜨려 주시지 않으셨다면, 험하고 간조한 길을 가는 도중에 목이 말라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벌써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200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식량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적들을 막아 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방 민족의 칼에 다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장대를 세워주시지 않았다면, 불뱀에 물려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40년을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생존해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건강도 챙기고, 보험을 들면 생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시나요? 그런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보장된다고 해서 우리의 생존이 보장되지도 않습니다. 우리 생존의 근거가 우리 안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밥과 사과도 우리 몸 안에서 자라는 게 아닙니다. 밖에서 자란 걸 우리가 먹을 뿐입니다. 좀 더 크게 보면 지구도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태양에 기대 있습니다. 태양도 더 근본적으로 우주에 기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의존해 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 과정을 통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40년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의 세월은 고난의 시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신 8:15-16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광야 40년의 고난의 시간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만나가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만나’는 준비된 음식이 다 떨어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더 이상 음식을 구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입니다. 내일 내릴지 안 내릴지 모릅니다. 그냥 하루 먹고 살아남을 만한 양식입니다. 저축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출16:18)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둘 수 있는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만나 사건은 생존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시험입니다. 생존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시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통해 자신들의 생존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만나 영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만나 영성’을 깨달은 사람은 이제 모든 삶의 조건을 풍요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가 잘되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모든 조건이 만나보다는 좋기 때문입니다. 이 ‘만나 영성’을 깨달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복을 얻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민족의 36년의 식민지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시간 낭비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교만을 꺾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기간 한국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기간이었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해방을 가져올 수 없음을 알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해방을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또 그 당시 교회도 독립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민족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동행자였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은 뜻있는 사람들과 지식인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성도들이) ‘식민지 고난의 36년’을 잊지 말고, 이 기간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민족으로(영적 이스라엘)로 세워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일본은 우상 숭배의 민족). ‘고난을 복으로’ 승화시켜가야 합니다.
또 우리 개인적으로도 고난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회입니다. 다윗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 71절)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인격이 연마되고 신앙이 빛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에게 있어 과거 광야 40년의 연단 기간은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민족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귀한 경험이 시간이 지나 잊혀지거나 무시되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래서 하나님을 잊지 말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11절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4절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8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짧은 본문에서만 3번이나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입니다. 남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과거 조상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하나님’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세대가 바뀌어도 하나님은 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목적입니다. 역사를 기억함으로 자신의 고백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 되어야 합니다. 바로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꾼으로 세워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만드는 원인>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만드는 원인’이 있습니다.
12-14절a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17절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가나안에서 먹고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며, 소와 양이 많아지고 재산이 증식되고 소유가 풍부하게 되면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소유와 교만과 하나님 망각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유가 늘어나면 교만해진다는 게 옳은 말일까요?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부유해지면 나태해지기 마련입니다.
도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야구 국가대표팀이 여러 가지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절실함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출국 전부터 여러 가지 구설에 올랐습니다. 호텔 방에 여자들을 불러 술을 먹고... 다음 날 경기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중 한 여성이 코로나에 걸리면서 그 사실이 들통이 났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그중 두 명은 도쿄올림픽에 참가할 국가대표선수였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 자격을 반납했습니다만, 이 사례를 통해 야구 대표팀의 정신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경기가 역전된 상황에서 강모 선수의 껌 씹는 장면 분노에 불을 붙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 배가 부르고, 안정되고, 힘이 생기면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17)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만나 영성’이 필요합니다(교만을 막는 영성). 어떤 모든 삶의 조건 속에서도(풍요롭든지 궁핍하든지)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는 영성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부유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도, 성도들의 삶도 풍부해졌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교만해질 수 있기에 성도들은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잊게 되면 다가오는 두려운 결과>
오늘 말씀의 결론은 섬뜩합니다.
19-20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을 떠나면 멸망한 다른 민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좀 잘살게 되었다고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쫓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제76주년 광복기념주일을 맞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남기신 경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광야의 삶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명령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복을 받는 비결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의 36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민족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민족도 부유해졌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도 그 당시에 비하면 부유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풍요에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의존하지 않고, 교만해지지 말고, 자신의 삶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신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은혜 아래 ‘구원의 복’을 누리시는 사도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