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메지 城 역사
건축 시기엔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아카마츠 가문이 전국시대에
쌓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가
되었는데 히데요시는 본거지를
오사카 성으로 옮기고 히메지를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
측근 키노시타 이에사다 등에게
맡겼다.
에도 막부 시대에는 히메지번의
중심지가 되었다. 히메지 성은
간선도로인 서국가도(西国街道)를
감제하고 서국의 도자마
다이묘들을 감시하는 요충지였다.
<다이묘→다이묘(大だい名みょう)는
중세 일본의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인
이케다 테루마사의 이케다 가문,
도쿠가와 가문의 대표적인
후다이 측근들인 혼다,
사카키바라, 사카이 가문,
쇼군의 친족인 마츠다이라 가문 등
여러 가문의 다이묘들이
히메지성의 성주를 맡았다.
히메지 번은 에도 막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번주 가문이 자주
바뀐 번 중 하나였는데,
히메지가 워낙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히메지
번주가 될 때마다 막부가
다른 곳으로 전봉시키고
나이가 찬 다른 다이묘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절에는
검은 색 성이였으나
이케다 가문이 부수고 현재의
새하얀 히메지성을 지었다
대천수 옆의 망루 중 하나가
센히메의 화장료(지참금)으로
지어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집간 딸을 과부로 만든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혼다가와 재혼시키면서
미안한 마음에 지참금을 왕창
주었다고 한다.
사실 이 히메지 성은 도쿠가와
막부의 중추였던 에도(도쿄)로
통하는 중요 방위 거점 가운데
하나로서 건축된 성으로, 따라서
큰 손상을 입을 기회가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케이스라고 한다.
특히 격동의 막부 말기에
히메지 영주였던 사카이 가문은
막부 편에 섰기 때문에 토막파와의
일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는데
영주가 에도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동안
성에 남아있던 가신들의 결정으로
토막파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바람에 전투 없이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 에도 시대부터 히메지 성은
막대한 무게로 인해 지반이
침하되면서 기울어지게 되었고,
기둥과 들보 등이 변형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지반의
침하를 막기 힘들었고,
히메지 성은 50만석 규모였던
이케다 시절에 큰 틀이 완성된
거성이었기 때문에 15만 석 정도의
히메지 번을 소유한 다이묘들은
히메지 성의 유지에도 예산이
빠듯하여 작은 수리를 하며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히메지 번은 상습적인 재정난에
시달렸고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으로
자주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
1874년 폐성령이 내려서 히메지 성도
민간에 팔려 해체될 뻔 했지만,
해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작업에
들어가지 못했고, 결국 그의 소유권은
무효가 되었다. 히메지 성은 육군으로
넘어가 보병 제10연대가 히메지성에
주둔하게 되었고, 이때 대부분의
성채를 철거당하고 화재로 소실된
건물도 있었다.
1877년 남아있는 성에 대한 보존
움직임이 일었고, 1년 뒤 육군의
건축을 담당하던 부서의 나카무라
시게토 대좌가 상부에 요청해
나고야 성과 히메지 성의 남아있는
건물들에 대해서 보존하게 된다.
그러나 육군의 예산으로는
이 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지역 유지들이 메이지 정부에
탄원하여 국고 보조금을 지원받아
"메이지 대수리"라 불리우는
대대적인 수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성이 기울어 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1934년에 니시노마루에 있는
와타리 망루가 비로 인해 석축 등이
붕괴된 것을 계기로 "쇼와 대수리“
라고 불리우는 대규모 수리가
시작되었다. 우선 천수각을 제외한
나머지 부속 건물들을 수리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이 한참인
1944년 이르러 쇼와의 대수리는
중지된다. 미군의 대규모
폭격을 하던 시기에는 히메지 성의
대외 인지도가 없었던 터라
미군에서 지정한 폭격 금지
대상(문화사적) 리스트에도
포함되지 않아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할 위기에 놓였었다. 그러나
야간 폭격이 끝나고 날이 밝은 뒤에
보니 거의 손상을 입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어 주민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어루만져 주더라는
일화도 있다.
사실 소이탄 폭격을 받았지만
아성 망루에 떨어진 소이탄이
불발탄인 덕에 파괴를 면했던
것이었다.
1950년부터 쇼와 대수리는
재개되었고, 1955년에 이르러서
천수각를 제외한 모든 건물의
수리가 완료된다. 1956년부터
천수각의 해체 수리에 들어갔는데,
천수각의 기울어짐을 해결하기
위해 완전히 건물을 분해한 뒤,
썩은 부재를 교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것이었다. 성이
기울어지는 원인이었던 주춧돌은
제거되고 철근 콘크리트를
새로운 주춧돌로 박아 넣었다.
그리고 썩어버린 서쪽 심주를
교체할 나무를 찾았지만 효고현
가나시타 신사에서 발견된 거대한
전나무 역시 아래는 썩고 위가
휘어 쓰지 못했고, 1959년에
이르러서야 기후현에서 맞는
전나무를 찾았지만
벌목하는 과정에서 부러져 버리고,
할 수 없이 옆에 있던 다른 큰
나무를 베었지만 이동하다 부러졌다.
그래서 효고현에서 발견된 나무와
기후에서 발견된 나무를 이어 서쪽
심주를 만들었다. 다만,
원래 서쪽 심주 역시 2가지 나무를
엮어 만든 것이었다.
또한 건물을 짓누르는 주요 원인인
기와의 무게를 줄여 총 무게가
6200톤에서 5700톤까지 낮아졌고,
내진성을 위해 금속 부재들도 새롭게
사용했다. 그러나 석축은 별 관계가
없어 수리하지 않았다. 천수각의
수리는 1964년에서야 완료되었다.
천수각만 수리하는 데 약
5억 3천 엔이 들었는데, 태평양 전쟁
전의 수리비까지 물가를 고려해
환산하여 합치면 1964년 당시 돈으로
약 10억 엔에 해당된다고 한다.
▲위 사진은 日히메지성
천수각 입니다
서울에서 사진으로 봤을때
신기술로 개축한 건물로 시쿤둥??
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때 美軍이 투하한
폭탄이 불발탄되어 유일하게
살아남아 옛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문화유산 건물이라고 합니다
오늘 日측에서 세계문화 유산
유네스코 등록 30주년 기념
행사하느라 엄청 붐볐는데
세계각국 천수각 방문객이
정말 어마어마 하더라구요
천수각 7층 꼭대기까지 기다싶이
올라가면서 전부 고목으로 지은
보존상태?? 견고함???
日건물이라 자랑하진 않겠지만
건물 자체만 놓고볼 때 세계
문화유산으로는 손색이 없을 듯~~
일본??
목재건물 기술력~~
견고함~~
솔직히 인정할건 인정합니다~~
건축물
대단하더이다~~~
2023.11.11.(토) 오후
고베에서 오사카가는 차안에서
최폴리...
히메지성
유네스코 세계유산등록 제30주년
기념 행사 (2023.11.12.)
지난번 SNS에 항구도시
군산의 밤은 어둡다~~
글을 올렸는데요~~~
일본의 밤도 참 어둡습니다
대한민국 곳곳 멋드러진 가로등
환하고 환상적인 가로등에 비해
고베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고속도로 가로등.
오사카 시내 가로등
주유소 가로등. 건물과 주택에서
발하는 불빛. 홍보간판 등등
너무 어두워 도시 전체가 으째
으스스시~~ 하고
춥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일본의 원전은
세계적인데 왜 이러지???
일본인 특유의
근검절약정신??
암튼 너무 어둡다
자세히 보니 형광램프도 모두 약하다
이유가 뭘까??
자못 궁금한 일본 입니다~~
2023. 11. 11. (토) 오후
오사카 시내 차안에서
최폴리....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해외여행(등산)사진
②일본여행(오사카.교토.우지)2023.11.10.~13
최폴리
추천 0
조회 132
23.11.15 17:09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