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문과 급제자 (초)
ㅡ예양강
ㅡ"이른바 연곡 선생" 논란을 계기로 나름대로 정리해보다가,
지난 연말의 개인적 사정상 중단하였는데,
이미 출간된 <방촌학1,>에서 "연곡선생" 부분이 충분히 논증되었거니와,
여하튼간에 일단 되살려 보았습니다.
ㅡ연곡 선생 논란 쟁점은 "연곡 이원화가 존재했는지, 연곡이 누구인지여부"가 아니라
"관산록에 등장하는 연곡 선생이 과연 누구인지 여부"이겠습니다.
ㅡ"연곡 이원화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촌학1>은 "연곡 이원화가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있는 상태에서
"관산록에 등장하는 연곡 선생, 화지선생이 누구인지"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ㅡ마침 이 코너에 "광(廣)주이씨"분도 참여한 것 같은데,
"장흥지방 광주이씨의 내력" 소개와 더불어 계속 지적`조언해주기 바랍니다.
필자는 이미 오래전에 장흥신문에 <조대기>와 "광주이씨 역량"을 소개하였습니다.
<방촌학1>도 그 당시의 "광주이씨와 장흥위씨간의 사돈관계"까지 언급하면서
광주이씨 집안을 정중하게 조심스럽게 취급하고 있는데,
다만 "관산록의 연곡선생이 누구인지"를 그 책자 방론에서 논증했을 뿐 입니다.
ㅡ아래 자료는 "지 못난 놈이 지 조상 자랑한다"는 우스개 소리를 넘어서서
우리 장흥 땅 장흥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정리해본 글입니다.
많은 제언 바랍니다.
ㅡ방촌학 1, 위의환, 방촌유물전시관, 2009년10월,비매품
1. 기본자료
ㅡ조선시대 문과백서 (上, 송준호·송만오 편저, 2008.4.)
ㅡ장흥읍지`지리지
2,조선초기, 장흥지방의 대과급제자 명단
· 태종 8년(1408) 식년방 - 김원로(金元老), 선산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우의
- 다른 기록에는 ‘거주지 미상’으로도 나타난다.
-<국조방목>에는 '생원 출신, 거주 미상, 관직 감찰'로 나타난다.
세종 29년(1477) 식년방 - 김필(1426~1470), 영광 김씨, 장흥 거주, 부 김경의
- '김필'에 관련된 유적이 ‘장흥 사인암·사인정’이다. 생원시 장원
그 아들이 ‘김괴·김물’이다. <장흥읍지 부산방>편에 나온다.
'김필'은 장흥지방에 낙남하여 오래 거주하지 아니했다.
곧바로 상경하여 재출사하였음을 유념해야한다.
이 부분을 간과하면 장흥지방 선비들간의 교류,사승 관계에 혼선이 있게된다.
cf,김시습(1435~1493)
문종 즉위년(1450) 식년방 - 노자형, 광주 노씨, 거주 미상, 부 노의
- <장흥읍지 용계방>편에 나타난다.
성종5 년(1474) 식년방 - 김괴(1450~1482), 영광 김씨, 장흥 거주, 부 김필
- 예종 원년(1468) '생원시 장원'하고, 그 중간에 '참봉'을 거쳐, 문과급제 하였다.
- 아래의 ‘김물’의 형이고, 그 아들이 "월봉 김광원(1478~1550)'이다.
- 장흥 석대에 '석정' 각자가 있었다. 김괴 역시 요절한 셈이다. 안타깝다.
성종 17년(1486) 식년방 - 이원성(成), 경(慶)주 이씨, 장흥 거주, 부 이정수
- 여기엔 '경주 이씨'로 기재되어 있으나, '광(廣)주 이씨'라 주장되고있다.
다른 기록엔 장흥 이씨 파조로 되어잇다.
ㅡ<국조방목>에는 "진사출신,장흥 이씨,거주 미상,관직 정언"으로 되어있다.
- 이두신의 직손이 아니라서, 이원성이 '장흥 이씨'로 분파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동생이 ‘이원화’이다. 그 아버지 이정수는 <장흥읍지>에서조차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ㅡ이두신과 그 직계는 <장흥읍지 부내방>편에,
이원성`이원화 형제는 <부동방>편에 있다.
· 성종 20년(1489) 식년방 - 김물(勿), 영광 김씨, 장흥 거주, 부 김필
-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는 ‘강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착오일 것 같다.
- 추강 남효온(1454~1492)이 장흥땅을 찾아간, 여러 이유들 중 하나가 될 지 모르겠다.
-<장흥읍지 부산방>에는 "김物"로 나온다.
중종 2년(1507) 증광방 - 이원화, 광(廣)주 이씨, 창평 거주, 부 이정수
- 여기엔 '창평 거주'로 되어있는데, 혹 처가집 거주지일지 모르겠다.
-<국조방목>에는 '유학 출신, 본관· 미상, 거주 미상, 관력 목사'로 나와있다.
병과 26위 합격자이다. 홍언필이 동방 급제자이다.
호-연곡, 자 -화지 이다
-<장흥읍지>엔 형 이원성이 '목사', 동생 이원화는 '사인'으로 바뀌어져 있다.
cf,의문점ㅡ'자 - 화지'에 "화지 선생"이라 부를 수 있는가?
한편, "연곡 이원화"는 그 자가 <화지>인데,
영천 선생이 그 '호'도 아닌, <자, 화지>를 두고 <화지 선생>이라 올려 불렀을까?
ㅡ대저 <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자>를 두고 <ㅡ선생>이라 올려 부르는 법이 우리 장흥지방에 있는가?
ㅡ앞서의 <방촌학1> 책자가 <관산록의 연곡 선생,화지 선생>을 "화지 위유형"으로 보고
"연곡 이원화"로 보지 아니한, 유력한 이유들의 하나이다,
두 사람간의 생몰연대 차이도 물론 있다. ㅡ 한편, <연곡>은 "위유형의 당호"이다.,
지금도 "장흥읍 평화마을"에서는 <위습독(유형) 산정터>를 <연곡>으로 부른다.
중종 14년(1519) 식년방 - 이지분, 광(廣)주 이씨, 거주 미상, 부 이맹균
-<국조방목>에는 '유학 출신,거주 미상, 관직 군수'로 나와있다.
-<장흥 읍지 부내방>편에 , "이두신의 5대손"으로 나온다..
-그 부친 '이맹균'은 <장흥읍지 부내방>편에 "홍치 생원, 관 주부"로 나와있다.
중종 29년(1534) 식년방 - 김삼택, 영암 김씨, 장흥거주, 부 김세정
- 중종38년 식년방의 '김삼달'과는 형제이다.
- <장흥읍지>에는 그 본관 표시가 되지 않고 있다.
중종 35년(1540) 별시방 - 임회, 부안 임씨, 장흥 거주, 부 임경손
- 초시 시험과목으로 갑자기 ‘강경’을 실시하였기에 불과 53명이 참여했었다.
- 안양 '기산 8문장'이다.
- 이때의 동방급제자는 ‘김인후’, ‘고맹영’이었다.
중종 38년(1543) 식년방 ㅡ 장흥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급제한 사례
1) 김삼달, 영암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세정
- 앞서 ‘김삼락’과 형제지간이다.
2) 김희련, 영암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익환
- <장흥읍지>에는 '경주 김씨'로 나타나는데, '영천 신잠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명종 7년(1552) 식년방 - 백광홍, 해미 백씨, 장흥 거주, 부 백세인
-그가 1556년에 졸함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동생 옥봉이 계속 공부못한 이유도 된다.
-장흥지방의 토반화된 집안에서 사실상 최초로 중앙정계(옥당)에 본격 진출하였다.
앞서의 광주이씨와 영광김씨 경우는 이른바 낙남1`2세대라 하겠다.
선조 3년(1570) 식년방 - 정경달, 영광 정씨, 거주 미상, 부 정몽언
ㅡ이충무공 이순신의 종사관, 반곡 선생이다. 임진란 전에 '선산부사'였다.
예양서원에 모셔진 '천방 유호인'의 제자이다.
선조 12년(1579) 식년방 - 정명세(1550~1593), 진주 정씨, 장흥 거주, 부 정희장
-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순사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장흥읍지>에 '송천 양응정'의 제자이다.
'광(廣)주 이씨,초계 변씨'와 더불어 장흥의 '진주 정씨' 역시 재조명될 필요가 크다.
선조 13년(1580) 별시방 - 김공희, 광산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윤
- 안양 기산 8문장의 ‘김윤, 김공희’ 부자이다.
cf,위천우 ㅡ 선조 15년 (1582, 임오 식년방), 본관-장흥 위씨 / 거주지 능주
- 장흥 위씨이긴 하나,징흥사람이라기보다는 능주 거주자이다.
선조 39년(1606) 증광방 - 정명열, 영광 정씨, 장흥 거주, 부 정경달
- 정경달·정명열 부자 합격이었다.
광해 13년(1621) 알성방 - 선세휘, 보성 선씨, 장흥 거주, 부 선봉장
- 광해군이 주관한 ‘이른바 폐모시’의 장원 급제자이다.
- 천관산 의상암의 ‘선세휘·위정훈’의 전설로 남아있다.
- 현재 장흥 지방에서 별다르게 평가` 언급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 인조 26년(1648) 식년방 - 김여원(金汝源), 영광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이
- <장흥읍지 부산방>편에 '김괴'의 현손으로 나온다.
-<국조방목>에는 "거주 장흥, 관직 尙都事'로 나와있다.
3. 쟁점
·1) 대과 급제자 의미
- 생원·진사시를 거쳐 대과 급제로 가는 것이 표준적 진출 방법이었으나,
실제의 사정은 다양했다.
-대과 급제를 하지않고서도, 명성을 얻거나, 판서` 또는 유명인사가 된 경우
-박광전, 백광훈, 송시열,서원리,조정만,위백규...
..(예양서원의 남효온, 김광원, 유호인 ..모두 대과 급제자가 아니다)
2) 관직진출 형태 및 유형
① 관직진출 + 생원·진사
② 관직진출 + 생원·진사 + 문과급제
③ 생원·진사 + 관직진출 → (백광훈)
④ 생원·진사 + 관직진출 + 문과급제 → (김괴)
⑤ 생원·진사 + 문과급제 = 관직진출 → (백광홍)ㅡ표본적 진출방법
3) 기타 여러 사정
-생진시 합격하고서 문과 급제에 ‘10년 여년 또는 남짓’ 소요된 경우도 꽤 있다.
-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 43명,
개인적 사정으로 보아야 할 일이지, 무능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터.
·-문과 급제자가 오히려 문음 출신자보다 늦어지는 경우도 꽤 있었다.
벌열집안 자제 경우는 '대과'를 피해 일부러 "문음"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먼저 "문음"을 선택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중시(重시)"에 응하기도 했다.
·4)지방 거주자는 여러모로 크게 불리하였다.
-"정철, 임제…" 경우는 '서울 출신자'로서 응시하였다.
- 생원·진사의 '서울 거주지' 비율 - 15세기 44%, 16세기 전반 46.15%
- 심지어는 지방 유생의 <별과 (알성시·별시)응시>를 제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 지방 거주자는 통상 <정례적 식년시>를 통해 진출한다.
5)문음(음관,음보)출신의 의미?
-중앙 명문`벌열가 자제들의 통상적인 관직진출 방법에 해당한다.
-전반적으로 중앙관직의 1/3을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 비중은 더 상당했다.
-좋은 집안의 문음이라면 대과급제가 아니더라도 '판서,정승' 에 이른 경우가 꽤 된다.
-판서,'부사'라 하여 언제나 대과 급제자로 충원되는 것이 아니다
지방에 파견되는 부사 경우,
"문과,무과,음관"이 그 고을에 미리 할당된다. 그 기준과 성격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보면, 대략 각 1/3 씩 비율로 부임한다.
·6)원유계자의 문과응시-
7)장흥 지방의 "광(廣)주 이씨" 현황?
- '광주이씨 둔촌공파'와 '광주이씨 십운공파'는 구별된다.
-이두신은 '둔촌 이집'의 둘째 동생되는 '십운공 이자령의 증손'이다. 둔촌공의 직손이 아니다.
- 한편 조선 초기에 유명했던 "둔촌공파, 광주이씨 5극 형제 (이집의 손자 이인손의 아들들)"와 "십운공파 이두신"은 같은 항렬이다.
이두신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두신의 방손'에 해당된다는, '이원성·이원화'가 <광주이씨 대동보>에 어떻게 나오는지는
아직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ㅡ 문중족보 기록? (....2011,3월경에야 처음 보게 되었다)
이들 형제는 '둔촌공파가 중심되어 만든, 광주이씨 문중기록'에 안 나오는 경우도 많다.
<십운공파> 자체도 나중에야 <둔촌공파>가 주도한 대동보에 뒤늦게 편입되었고,
그 중간에 장흥의 광주이씨 일부 후손이 '장흥 이씨'로 분파했기 때문 아닐까?
<십운공파>는 둔촌공파 족보에 '별보'로 있었다.
- 장흥으로 낙남한, 이두신?
-공조판서 이두신 묘소는 '장흥'에 없다., ‘경주’(또는 光주?)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한다.
그 곡절은.......? <실전失傳> 상태라 한다.
결국 이두신 선생은 장흥에 일시 유배왔을지언정 바로 정착 입향은 아니다.
(광주 이씨분의 조언을 당부드립니다)
요컨대,장흥에는 이두신 분의 묘소가 없는 것 같다.
<장흥읍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일부에서 크게 오해하는 사정이 있다.
'이두신'은 물론이고,"그 후손들,이숙경`이발동`이침"은 대과 급제자가 아니다.
ㅡ장흥읍지`지리지 <문과>편에 기재된 것은 착오에 불과하다.
'대과,문과'와 '소과,사마시'가 구별되지 않고 있다.
'이발동'은 '소과' 합격후 무과로 돌아선 것 같다.
ㅡ나중에야 알았는데, <십운공파 족보>자체도 스스로 <서사부사>로 표기하고 있었다)
-여하튼간에 그 일부 후손들,'이숙경,이발동,이침'은 <장흥읍지 부내방>편에 등장한다.
- 이원성......'장흥 이씨'로 나타난다.
- 이두신의 둘째 아들의 후손이라 한다. 즉 그 직손이 아니다.
다시금 "방손"이라는 것이다.
cf, 생진시 통계표에 나오는 '장흥이씨 2명'은 과연 누구일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 이원화
-'이원성'의 동생이다, '호 -연곡'이고, '자 -화지'이다.
<화지 위유형>과 혼선을 빚고있다.
-cf,화지 위유형 .....<방촌학1>에 정리되어있다
<호- 화지, 자 - 자실, 당호- 연곡>,<위습독공>이다.
위유형의 <자 -자실>은 위씨 족보에서 바로 확인된다.
장흥읍 예양강 남쪽 평화마을에 "연곡" 산정(山亭)터가 지금도 있다.
영천 신잠의 '관산록'에는 '위습독 산정'과 그 주인이 나온다.
ㅡ연곡 이원화.
...필자 확인으로는,<눌재집>말고는 당대 전라도 문사의 문집에 나오지 않는다.
,<송흠,송순,임억령,윤구,양응정,백광홍,정철,백광훈>등 ,
그 당대 호남문사들 문집이나 장흥선비들 문집에 '연곡 이원화'는 일절 없었다.
-이원화를 "이른바 기묘명현"으로 보는 일부 주장의 근거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ㅡ 전혀 근거없다.
이원화는 오히려 "기묘사화의 가해자= 남곤,이유청" 쪽의 재등용 요청을 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눌재 선생의 제자 정만종'이 올리는 "파직 상소"의 대상이 되며,
실제로 고령과 무능을 이유로 황주목사직에서 1542년경, 즉 70무렵 전에 체직된다.
(이런 사정들은 영천 신잠의 "장흥 유배기간(1521~1538) 과 관산록" 내용에 배치된다
즉 영천이 장흥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앞의 이원화는 타지에 있었다.
즉 서울이나 타지에서 오랜 관직생활을 계속하고 었었다,
왕조실록도 '이원화'를 두고 "계체직"이라 표현하고 있다).
만약 일부 주장대로, '연곡 이원화'가 만약 장흥 지방에서 오랫 동안 계속 활동하면서
기산 8문장 등 제자를 키우고, 유배객 영천 신잠으로 부터 아낌없는 존경을 받고,
더 나아가 기묘명현에 해당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장흥 향촌 사회에서 그 아래급 인물이라 할,
'월봉 김광원, 천방 유호인' 두 분들을 제치거나, 앞서서 장흥 예양서원에 먼저 추배되고,
장흥 현지 선비들, 전라도 문사들 문집에 단 한 줄이라도 그 기록이 남아있어야 합당한 것 아닐까?
<1747년경 장흥읍지>에야 뒤늦게 그 형제분 이름과 관직이 한두줄로 부정확하게 등장할 뿐
그 이전,이후에는 장흥선비들의 어떤 기록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있다)
ㅡ인터넷에 대충 떠도는 글에 의하면,
"이원화의 손자 사위가 김필의 손자되는 월봉 김광원이다"라는 식이니
도대체 뒤죽박죽 그 갈피를 잡을 수 없다.
- 이지번(蕃)
-<장흥읍지 부서방, 사마>편에 "가정, 진사"로 나온다.
ㅡ아래의 생원,진사 들을 보면, 조선초기 광주이씨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cf,영천 신잠이 1521,12월경 장흥에 유배와서 대면한 "이생원"은 광주이씨 누구일까?
(1)이 비 생원 (선덕 연간,1426~ ) -이 두신 자
cf,(정통1436~ ),(경태 1450~ ),(성화 1465~ )
(2)이맹균 생원 (홍치 연간,1488~ )-이 숙강 자, 이지분 부
(3)이중균 진사 (정덕 연간,1506~ )-이 맹균 제
(4)이지번 진사 (가정 연간,1522~ )-이 중균 자
-영천 신잠 선생(1491~1554)의 장흥 유배기간= 1521,12~1537
8)장흥의 대과 급제자 통계의 의미?
-조선 초기에 가장 많은 대과 급제자를 배출한, 장흥 지방 집안은 ?
-<문과백서>에 의하면, 그나마, "영광 김씨4 > 광주 이씨3, 영암 김씨3"이다.
cf,"광주 이씨 6"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장흥읍지>의 '문과 오독'이라하겠다.
-조선 중기, "성현"이 ‘명문거족 75개 성관’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 '장흥지역 성관'은 하나도 없다. 유념할 부분이다.
ㅡ<장흥 지방성씨와 타지역과의 대과 급제자 비교 통계?>
cf전국 통계 ㅡ
(1)한국학중앙연구원ㅡ전주이씨769,파평윤씨419,안동권씨368,남양홍씨326,안동김씨318....
(2)와그너교수ㅡ전주이씨845,안동권씨361,파평윤씨338,남양홍씨322,안동김씨317,
청주한씨278...
-한편, 조선 후기에는 장흥지방 대과 급제자는 없다.(거의 없다?)
-이른바 낙남계 1,2세대가 아닌,장흥토반 출신이 중앙정계로 본격 진출했던 실제적 현황은
어떠한가?
4,생원시, 진사시 경우
1) 유념할 부분 ㅡ
-생원,진사 합격 자체로 관직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문(대)과 급제를 위한 예비시험이다.
그러나 이른바 양반`선비 신분 증표구실을 하며, 하급관직으로 초입사 진출이 가능해진다.
.
-한편,<생진시> 쪽의 '소과 장원 입격자 441명'이라지만,
그중 '210명'에 한하여 대과 문과급제로 나갔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진사시>는 조선 초기부터 일관되게 시행된 것이 아니라, 세종 시대에 일시 채택되었다가,
단종 때에서야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2)생원`진사시 합격자의 성관별 전국 통계?
-조선초기 대과 급제자 통계와는 "꽤 다른 양상"이 드러난다.
cf,전라도에서 "장흥출신 생진사 비율"이 그리 높지 않음을 유념해둘 만하다.
<배출지역별 전국 총계> ㅡ서울14338, 안동783, 충주624,....
ㅡ(전라도지방) 전주432,남원389,나주323,광주285,장성116,보성104,창평103,영암98,
태인93,고부86,장흥86,담양69,강진58, 해남48,화순47,능주42.순천39,동복37...
-장흥 토성씨,외래 이입성씨 들에 관련된, 성관별 생`진시 전국 통계?
1)<장흥지방 관련성씨 전국통계>ㅡ진주정씨144,수원백씨106,남평문씨80,장흥고씨39,
인천이씨35 초계변씨32,영광김씨26,영광정씨26,장흥위씨26,진원박씨22,장흥임씨21,
보성선씨14...
cf,<장흥본관 성씨통계>ㅡ고39,김1,마3,위26,이2,任21,林3,鄭1,曺1
2)전국성관, 생진시 합격자 비교>
ㅡ전주이씨2719,파평윤씨934,안동권씨909,남양홍씨833,밀양박씨755
안동김씨716,연안이씨614,청송심씨567,경주김씨535,한산이씨519,경주이씨517,동래정씨482,
김해김씨469,전의이씨432,광주김씨411대구서씨393,풍양조씨391,문화유씨386,
광(廣)주이씨376,순흥안씨325,창녕성씨317,기계유씨284,반남박씨283,진주유씨282,
덕수이씨275,해평윤씨271,청풍김씨240,은진송씨219,창녕조씨202,완산이씨202,인동장씨167
죽산안씨120,남원양씨103,......
-(전주이씨 숫자가 월등하게 많은 이유는 '종친 특혜조치'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1, 조선시대 생원진사 연구, 최진옥,1998
Ⅰ. 조선초기 문과급제자 연구, 김창현, 1999.
Ⅰ. 조선시대 과거와 벼슬, 허흥식 외, 2003.
1, 조선초기 광주이씨 인물연구,성남문화원,2005
1, 조선시대 음관연구,임민혁,2007
1,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에드워드 와그너,2007
Ⅰ. 조선시대 문과백서(상), 송준호·송만호, 2008.
Ⅰ. 장흥읍지·지리지 모음집, (1747, 정묘지)
1, 국조방목, 영인본, 소화14년
첫댓글 최근에 이르러 <광주이씨십운공파 소목도-1977정사보>와 <십운공파족보-1998 무인보>를 직접 보게되었는데, 그간의 김,이 두 분 주장과 배치되는 부분 (선대묘소 위치 ,서사부사 문제,,장흥지역 입향조,둔촌공파와 십운공파의 구별, 파보와 합보,대동보의 구별 등등)에 대해 질문드려도 되는지요? 한음 이덕형선생도 십운공파가 아니라 둔촌공파 아닌지요? 따로라도 연락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장흥은 조선조에 이르러 공판 이두신의 낙향으로 광이의 문중이 고을의 유명문중으로 드러났고 이후 사림과의 교유가 두두러졌습니다. 남효온이 쓴 조대기에 보면 광이 이침과 장흥 사림과의 교유내용이 나오는데 그날 모인이들이 당시 장흥 부사 아들 김경회등 선비들이었습니다..이후 광이는 장흥에서 단연의 문중으로 과거 급제자도 많이 나왔습니다.장흥 명문들과 혼맥을 이루었고 임진왜란을 전후로하여 장흥 위씨 문중과도 혼맥을 이룬 것이 보서들을 보면 나옵니다.
ㅡ반갑습니다.
ㅡ직접 연락 한번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앞서의 글 뒤로도 <1724년 광주이씨 족보>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영천 신잠의 관산록>을 제가 가장 먼저 소개했던 것인데,
엉뚱하게도 ..광주이씨 십운과공파,영광 김씨, 장흥 위씨 등이 나서 마치 인물 쟁탈전쟁을 하는 모양새가 돠고말았습니다.
원래 족보 문제는 마치 제사지내는 방법이나 제사상 격식같아서 함부로 드러내놓고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광주이씨분으로 추정되는 분과 그 옆의 조언자의 익명 아이디를 통한 비방 왜곡에 시달리면서 ....그 나름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ㅡ 다산 정약용 선생 집안에 내려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집안에서도 일찌기 족보 전쟁을 했던 것인데..모르면 모르는대로 예전의 일을 존중하라, 새롭게 인물을 만들어내지말라,제대로 모른다고 수치스런 일이 아니다..는 요지였습니다.
ㅡ<장흥지방 이씨>, <장흥지방의 광주이씨>, <장흥지방의 광주이씨 십운과공파> <장흥지방의 광주이씨 십운과공파의 큰집, 작은 집>문제는 그 층위를 달리하는 복잡다단한 쟁점이 있습니다.
서로 연구하는 자세로 실제적인 의견 교환이 있었으면 합니다.
,ㅡ또한 남효온의 <조대기>의 번역문을 장흥신문에 가장 먼저 소개하였고, 남효온의 <장흥우음 21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서의 표제글은 간단히 써놓은 내용이고, 그 후로도 광이분의 공격적 언사에 답변해놓은 제 댓글을 보더라도, 제반 사태의 추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 논전에 관련된 광주이씨 십운과공파분,영광 김씨분 장흥 위씨분의 태도를 계속 지켜봐 온 입장입니다. 그 장흥 위씨분의 책자에 제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책에 관한 광주이씨 십운과공파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 책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내용을 반박하는 논리적 책자를 차분히 펴내면 족할 일입니다
예양강님이 서술하신 내용은 객관적인 것으로 전부 맞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관산록이나 연곡선생의 장흥을 무대로한 학문의 업적과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ㅡ예컨대 이민영 선생께선는 장흥 압강이 장흥 예양강 또는 보성강 지류 정자천인데..그 당시 사재 김정국 선생이 장흥 압강에 유배와서 연곡 이연화 선생과 종유하였다는 그 익명 아이디 광이분의 이야기를 믿고 계시는지요?
얼마전에도 어떤 연구원의 등재자료를 변경신청하여 바꾸고 있던데 ..일반 제3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런 새로운 주장을 펴는 광이분께서 지혜를 모아 차분하게 공개적인 논문을 쓰고서 공개적인 토론에 응하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내용은 그분이 연곡 이원화, 즉 화지 이연화에 대한 분의 연구사실을 개략적으로 알고 있으며
차후 알려드립니다.
ㅡ오늘서야 앞의 이민영씨 댓글을 보게되어 추가 답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