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포
박 순 태
자칭 달인들이다.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불나방처럼 어김없이 찾아든다. 자리에 앉는 즉시 쌓였던 상념들을 날려 보내고 분위기에 스르르 몰입한다. 매사를 이렇게만 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는 방법에 따라 달리 읽힌다.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방추형 짚신벌레 같고, 머리에 인식되는 형상은 뼈대 없이 흐물흐물한 아메바 같다. 마음에 그려진 그림은 몸속에서 해만 입히는 해충을 닮았다. 확대해서 보면 한 장소에서 한 동작으로 한 가지 일만 하는 로봇 같기도 하다.
구성원들의 첫인사다. 왕방울 눈에 황소 머리로 절레절레 흔들면서 입장한다. 식구들 몰래 고양이 발바닥으로 비상구 없는 담장을 넘었다며 전한다. 시간 맞추느라 등줄기는 땀에 젖고 머리끝 쭈뼛 세우며 자동차 페달을 밟았다고 침을 튀긴다. 한술 더 떠 자유가 없다면서 오만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주변에선 입을 비죽거린다. 무릎에 피 말려 앉은뱅이 되려고 발싸심한다며 핀잔을 주는가 하면, 유유자적 태평스럽게 놀아난다거나 청개구리 짓을 하는 자들이라며 손가락질한다. 행하는 자와 보는 자의 인식차가 극과 극이다.
일과의 무게 중심이 한 곳에 몰린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면 우주선 발사 카운트 다운하듯 가슴을 쿵덕대며 시곗바늘에 눈을 붙인다. 해야 할 주된 일들이 뒷전이 되어 구석으로 내몰리고, 전화벨이 울려도 어린애 장난감 소리로 여길 뿐이다. 반갑게 맞아야 할 방문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시큰둥하다. 마음이 뜬구름 되었는지라 눈과 귀와 입은 혹 덩이 돼지감자 모양새이다. 우리의 생각은 오직 하나, 군량미 걱정하는 장수 마음이 되어 손이 지갑으로 향할 때만 제정신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짓을 해도 머릿속엔 우주가 빙빙 돈다. 단순한 행위이지만 집중력, 판단력, 예지력, 지구력은 물론 체력까지 따라줘야 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일곱 장의 장비를 받아들면 날개 펼친 독수리가 되어 작전 계획을 세운다. 상대가 두꺼비 두 장으로 핵폭탄을 연거푸 터뜨릴 때면 단이나 광으로 방어태세를 취한다. 쓰리 고에 대박을 노리려 수소폭탄에 버금갈 성능을 발휘하곤 한다. 상대가 무엇으로 공격을 하느냐를 두고 쌕쌕이가 됐다가 곰탱이로 변하기도 한다. 점쟁이가 되어 고난도 심리 전술로 돌입할 때도 있다. 기도 올리는 수행승 자세로 몰입하니 졸음은 저리 가란다.
개성 따라 연기도 가지각색이다. 일곱 장의 그림에 목숨이 걸린 듯 천둥 번개로 하늘이 갈라지는 모습이었다가, 번개 치기로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얼굴로 변신한다. 함박꽃 피워 오르다 금세 샛바람 맞은 북데기 꼴이 되기도 한다. 일곱 장 그림 따라 가뿐히 달아오르는 양은냄비형과 어깨에 힘이 서서히 들어가는 가마솥형이 있는가 하면, 상대야 어떤 모습을 하든 개의치 않은 채 숨소리 내지 않는 돌부처형도 있다.
더 높은 고지 점령에는 자신의 능력 위에 타의 실수도 따라줘야 한다. 쌕쌕이 별칭을 가진 자가 고성능 장비로 대승을 눈앞에 두고서 설쳐대다가, 느림보 곰탱이 작전에 휘말려 가슴을 칠 때가 다반사이다. 열악한 장비로 눈앞이 캄캄할 때, 옆 사람의 실수가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되어 소크라테스 같은 자를 황홀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맹꽁이 스타일로 놀던 자가 자신이 쏜 유탄에 맞아 네 다리 뻗을 때가 허다하다. 자리 옮기기를 즐기는 점바치는 오늘도 엉덩이에 불이 난다. 허리띠에 손이 가더니 바지를 슬쩍 내리자 몸에 찰싹 달라붙은 빨간 팬티가 나타난다. 온종일 아내의 보물을 지킨 울타리였다. 찌릿한 냄새에 코가 실룩인다. 자정을 넘기고 새날이 되면 가슴은 숯불 위의 콩알이 되건만 엉덩이는 눌어붙은 누룽지가 된다. 이러나저러나 상대의 곡소리가 울리면 곧장 나의 태평가가 된다.
자율이란 말에 모두가 엄지척 한다. 그렇긴 하다. 누구의 지시 없이 시간 맞춰 모여들어 오직 하나의 행위에만 신경을 쏟는다. 자신이 바닥 패를 먹다가 설사를 하여 가슴을 치다가도 투덜댐 없이 스스로 상대에게 패 한 장씩을 대령한다. 승리자의 점수를 미리 계산하여 돈을 건네주기도 하고, 지갑이 비면 스스럼없이 자리를 틀고 내일을 기약하며 일어선다. 모범 납세자이자 페어 플레이어이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집으로 숨차게 달려가서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가져와서는 저 하늘에 계신 우리 할아버지가 나눠 먹으라기에 뛰어왔다며 보자기를 푼다. 거래처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오늘은 급한 일이 생겼다며 다음 날로 넘기기가 허다하고, 멀리서 자녀들이 왔다고 연락이 오면 미팅을 끝내고 가겠다면서 혓바닥을 쭉 뺀다. 인기 있는 예술 공연 입장권이 주머니에서 잠들기도 한다.
구성원들이 연구대상이다. 한 사람씩 놓고 보면 반들거리는 몽돌이다. 다세포 군에서 으뜸의 주인공들이 단세포 구성원이 되려고 발싸심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야 단세포 군들이 방향전환을 했다. 골프채 휘두르며 잔디밭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원에서 바둑돌에 정신을 집중하는 이도 있다. 당구큐대 끝에 혼을 집중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도 있고, 고스톱학교를 그리워하며 카지노장에 원정 가는 이도 있다.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 점 하나 찍으려 글쓰기에 몰두하는 이도 있다. 우산살 펴듯 제각각 또 다른 기호를 찾아 나섰다.
도로변 매연 속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씨앗 맺는 들풀이며, 개미떼가 지렁이를 뜯어 물고 줄행랑치는 모습을 본다. 열악한 주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은 채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에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해 온다. 때늦게 마음의 새순이 돋아나는가 보다. 서산마루에 걸린 해를 바라보니 입맛이 쓰다.
장장 열다섯 해 동안 나는 단세포 무리의 머리였다. 지금, 다세포 군으로 탈바꿈하려 세포 분열하느라 숨이 가쁘다.
첫댓글 당선 축하드립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회장님!
당선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