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 궁궐의 계단
메주 고 제 웅
화엄사 요사채 실내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얘기다. 계단은 층계마다 높낮이와 넓이가 조금씩 다르다. 바닥재를 깔려고 자로 재는 과정에서 셈법이 서툴러 머릿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생각다 못해 본을 뜨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먼저 계단 하나를 종이로 본을 떴다. 나머지 계단은 남는 부분은 가위로 오려 내고 모자란 부분은 다른 종이를 덧대어 다시금 본을 떠나가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본의 모양을 따라 커터 칼날로 모노륨을 재단하면 안성맞춤으로 딱 맞으리라는 생각에 이르자 씻은 듯이 두통이 사라졌다. 마침 정토원의 된장 통 간장병에 부착하던 유통기한이 지난 라벨이 있었다. 폐 라벨을 이용하니 난제가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 입가에 싱긋한 미소가 번졌다. 내심으로‘머리가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야!’ 라고 자위하며 철척(鐵尺)에 커터 칼날을 대고 힘껏 ‘직!’ 그으며 진작 폐기했을 폐품을 신줏단지로 모셨다.
이 모노륨은 H 화학의 제품인데 오래전에 단종 되었다. 하지만 내구성이 좋고 문양도 아름답다. 탁구공 크기의 사각 마름모 문양인데 직 육각과 작은 사각 문양이 안팎으로 연결을 이루어 조화롭기 그지없다. 문양의 선은 흙색이며 선 안에는 주홍색 연황색 그리고 미색이 정연하다. 이 문양을 바라보노라면 보살이 중생을 불도에 이끌어 들이기 위한 네 가지 방법인 보시섭* 애어섭* 이행섭* 동사섭*의 사섭법(四攝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하지만 무늬만 출가 수행자로서 불과(佛果)를 이루지 못한 빈승이기에 사섭법은 꿈나라 얘기다. 더욱이 직 육각 문양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육바라밀도 역시 실천수행하지 못하는 처지이다. 수행자라면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반야바라밀(智慧般若波羅蜜)을 수행해야 하리라. 이 여섯 단계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불과를 이룰 수 있을까? 이 육바라밀의 첫 계단에 한쪽 발이나 올려놓은 것일까, 신도와 세인들에게 스님이라 불리고 있다. 스님이란 사람과 하늘의 스승을 뜻한다. 스님이란 호칭은 언감생심이다. 시주의 은혜에 대한 보답은 고사하고 오그랑장사 같은 삶이 아닐까?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실천수행 방법은 육바라밀이 으뜸이다. 하지만 육바라밀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 것일까?’
화엄사를 창건할 무렵 형편이 몹시 궁했다. 화엄경에서 설한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信爲道源功德母)다.”는 믿음 하나에 모두걸기를 하고 맨손으로 불사에 뛰어들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근근이 법당을 짓고 바닥재는 저렴한 하이펫트 장판을 깔았다. 그래도 큰 절의 나무 마루판 바닥에서 기도를 드릴 때 보다 감회가 깊었다. 어느 날 한 보살님이 법당에 알맞은 모노륨 장판이 있다며 시주를 했는데 마음에 들었다.
이후 법당 앞 동백꽃 꽃잎이 몇 번이나 피고 졌던 어느 날이었다. 전화를 받고 토성동 부산대학병원 장례식장에 갔었다. 화엄사에 몇 차례 다녀간 K 처사가 장례지도사로 초상(初喪)을 집전하고 있었다. K 처사가 “부잣집입니다. 제비(祭費)를 톡톡히 부르세요.”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제(祭)를 지내는데 소요되는 최소 경비만을 요구했다. 그런데 사십구재 중 육제(六祭)를 지내도록 제비를 내놓지 않았다. 제를 마치고 망인의 큰 며느리가 울면서 “부도를 맞아서 가세가 기운 탓에 제비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십구재를 마치게 해주세요.”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것도 한량없는 전생부터 맺어온 인연이었던가? 아니면 전생에 빚을 졌던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나중에 형편이 풀리거든 갚으시길 바랍니다.”라며 도리어 위로했다. 그리고 사찰의 재정으로 장을 보고 함께 염불할 스님도 초청하여 정성껏 사십구재를 지내주었다.
이들 유족이 사십구재를 지내면서 삼 제(祭) 때 벚나무로 제작한 일본산 마루 판재가 있다면서“법당은 아무래도 모노륨보다는 판재가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시주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모노륨을 걷어내고 판재를 깔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안 사실이었다. 그것은 벚나무로 제작한 일본산 판재 마루판이 아니라 강마루라는 제품이었다.
법당에서 걷어낸 모노륨을 거창 정토원에 깔았다. 정토원에서 시인들 모임이 있어 배움 교실로 사용할 목적으로 응접실을 넓히는 바람에 모노륨을 또다시 걷어내어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그 모노륨을 화엄사의 육각전과 산신각에 깔고 나머지를 이번에 계단에 깔았다. 한 계단 한 계단 본을 뜨고 본대로 잘라 시공을 하는데 아무래도 헌 제품이라서 흠집이 많았다. 헌 모노륨을 깔면서 상한 곳은 문양을 맞춘 후 자를 대고 커터 칼날로 겹쳐진 곳을 자르고 상처 난 부분을 들어냈다. 그런 다음 윗부분에 놓인 깨끗한 조각으로 맞추고 본드로 접착하자 감쪽같이 새것으로 변신했다.
누가 봐도 헌 모노륨을 깔았다고 생각지 못할 만큼 깨끗하게 시공되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작업에 몰입하면 몸과 마음은 거울이 되는 것일까? 작업과 염불이 일치되어 염불삼매가 깊어졌다. 그러나 보다 나은 시설을 위해 수명이 다하지 않은 모노륨 바닥재를 들어내고 시주받은 마루판으로 교체하는 소행이 옳은 일일까?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이 흔들리자 깊어졌던 염불삼매에 먹구름이 끼고 심경(心經)이 깨졌다. 깨진 심경의 파편이 내리 뒹굴고 있었다. “아아, 얼마나 참회를 해야 심경은 본모습을 찾고 행위(行爲)마다 도(道)와 부합될 수 있을까?” 아득하기만 했다.
폐품을 재활용하여 계단에 바닥재를 까는 시공이었다. 하지만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다가 계단 끝의 거칠고 날카로움과 미끄럼방지를 위해 논 슬립 패드(non slip pad)를 시공하기로 작정했다. 바닥재 매장에 가서 길이가 180㎝ 되는 것을 이십여 개 구입했다. 제품의 성상이 연질고무였다. 가로로 오목 볼록한 줄이 새겨져 있고 기역 자 모양이다. 가로의 양 끝과 중앙이 주황색인데 계단 끝에 맞추어보니 바닥재의 문양과 썩 잘 어울렸다. 철물점에 가서 오공본드 T601을 구해다가 시험해 봤더니 접착이 잘되지 않았다. 소량이고 듀브에 들어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1kg, 들이의 오공본드 601이 13,900원이었다. 구매하려고 바로 구매를 클릭했더니 회원가입을 요구했다. 회원가입을 하려고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애들한테 부탁할까 생각하다가 큰 철물점에 가면 되지 않을까 싶어 큰 철물점에 갔더니 마침 1kg들이가 있었다. 가격을 물으니 10.000원이다. 인터넷 구입이 결코 저렴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헌 칫솔에 본드를 묻혀 바르니 시공이 순조로웠다. 완공 후 외손녀 일곱 살 수인이가 왔기에 “수인아, 어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궁궐의 계단 같아요.”라는 대답에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대광명전(大光明殿)으로 통하는 통로다. 대광명전은 중생을 니르바나로 인도하는 궁전이다. 부처님께서도 도솔천 내원궁에서 지상으로 강림하셨지 않은가? 폐품일지라도 사물에 대하여 사랑하며 중생을 위해 이행섭하면 사물이 부처가 되어 우리를 보호한다. 다만 우리가 미망에 쌓여 성품이 혼미한 까닭에 사물이 부처임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깨어 있으면 모든 사물이 부처님이요, 진리를 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지 않으랴?
* 보시섭(布施攝) : 사섭법의 하나. 중생이 재물이나 진리를 구할 때 힘닿는 대로 베풀어 친근감을 일게 하여 불도에 이끌어 들이는 방법을 이른다.
* 애어섭(愛語攝) : 사섭법의 하나. 중생에게 부드럽고 온화한 말을 하여 친애하는 정을 일으킨 후 불교의 진리로 이끌어 들이는 일이다.
* 이행섭(利行攝) : 사섭법의 하나. 선행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여 불도로 이끄는 일이다.
* 동사섭(同事攝) : 사섭법의 하나. 부처나 보살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몸을 나타내어 사업, 고락, 화복 따위를 함께 하면서 그들을 진리로 이끌어 들이는 일이다.
* 사섭법(四攝法) : 보시섭, 애어섭, 이행섭, 동사섭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