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림사 제 2권
제 12장 옥소마녀(玉蕭魔女)와 오상공자(五霜公子)
무창성(武昌城) 교외.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며칠째 내리는 눈은 천지(天地)를 온통
은백색으로 뒤덮고 있다. 성내는 물론 교외의 가도는 한 자 이상
의 눈이 쌓여 걷기가 보통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관에서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쌓인 눈을 치워 길을 내고 있었으나
계속 내리는 눈으로 인해 그 작업도 포기될 정도였다.
하후성은 걷고 있었다.
커다란 눈송이가 그의 머리에, 어깨에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끝없이 걸어온 듯 그의 발걸음은 일정한 규
칙으로 쉼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설지를 걷는 그의 보법(步法)은 매우 독특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규칙적으로 내밀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눈
위에는 발자국이 앞 부분밖에 찍히지 않았다. 또한 발자국의 깊이
도 아주 얕아 눈이 몇 번 떨어지면 그 즉시 지워질 정도였다.
하후성은 계속 그런 식으로 눈길을 걸으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걷다가 문득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뇌리에 초췌하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종리유향.'
그의 가슴 속에 연민의 정(情)이 물결처럼 밀려 들었으나 일면 가
슴 한 쪽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때 어디선가 낭랑한 웃음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하하하! 하후소협, 무엇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시오?"
하후성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렸다.
언덕의 한 나무 밑에 흑의문사(黑衣文士)가 서 있었는데 그는 바
로 위전풍이었다.
위전풍은 손에 옷과는 대조적으로 백색의 섭선(攝扇)을 가볍게 거
머쥔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눈발 속에 대조적인
흑삼을 입은 그의 모습은 웬지 음침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산뜻하고
탈속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 위형!"
하후성은 반색을 지었다. 웬일인지 그는 위전풍이란 기이한 인물
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이곳에서?"
위전풍은 섭선을 흔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후형과 그대로 헤어지기 섭섭하여 이곳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
고 있었소."
하후성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하루 종일?'
아울러 그는 새삼스런 눈길로 위전풍을 바라보았으며 그의 가슴에
는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잊혀졌던 훈훈한 정이 피어나고 있었
다.
위전풍은 그에게 다가오며 낭랑하게 말했다.
"참, 하후형. 시장하지 않소?"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시장하긴 하지만 이 설원에서 어떻게 식사를 하겠습니까?"
위전풍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제가 좀 준비한 게 있소이다. 자, 따라오시오."
위전풍은 의아해 하는 하후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언덕을 넘어
갔다.
한 커다란 바위 아래.
그곳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모닥불 위에는 먹음직
한 토끼고기가 한참 알맞게 익어가고 있었다.
타닥... 탁!
모닥불 타는 소리와 함께 토끼고기에서 구수한 기름냄새가 풍겨났
다. 그 누구라도 혹한의 눈보라 속 설원에서 이렇게 모닥불에 익
고 있는 토끼고기를 보면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으리라.
더구나 바위가 눈보라를 막는 병풍 역할을 하고 있어 아늑한 느낌
마저 주는 장소였다.
"허허허... 먹음직스럽게 익었군. 자, 한 점 드시오."
위전풍은 유쾌한 듯 껄껄 웃으며 토끼고기를 권했다.
하후성은 잠시 망설였다.
소림에서 생활했던 그는 오랫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었다. 그
러므로 토끼고기를 보는 순간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사의를 표하며 토끼의 한 쪽 다리를 떼었다.
'이미 나는 승인(僧人)이 아니다. 구태여 속세의 음식을 피할 이
유가 없지 않은가?'
하후성은 이렇게 생각하며 토끼고기를 한 점 베어 물었다.
위전풍은 벌써 고기를 뜯고 다시 언제 준비했는지 호리병에 든 술
을 들이키고 있었다.
"크으... 과연 여아홍(女兒紅)은 독하군. 자, 하후형도 한 잔 드
시오."
위전풍은 호리병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하후성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 역시 한 모금 마셨다. 독하고 향기
나는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는 부지런히 고기와 술을
들었다.
어느덧 하후성의 마음은 속(俗)으로 돌아와 춥고 황량한 설원에서
마음에 드는 위전풍이란 사나이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흐뭇해 하
고 있었다.
그런 생각은 위전풍도 다르지 않았는지 두 사람은 서로 시간이 흐
를 수록 친근감을 느껴가고 있었다.
이윽고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났고 위전풍은 기름묻은 손을 눈덩이
로 닦아낸 후 바위에 기대앉았다.
그는 하후성을 호감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후형, 소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소?"
하후성은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았으며 위전풍의 얼굴에는 갑자기
진지한 기운이 어렸다.
"하후형은 정(正)과 사(邪)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실로 기이한 질문이라 하후성은 의아함을 느껴 반문했다.
"갑자기 그것은 왜?"
위전풍은 진지한 표정에 일말의 열기를 띄우며 말했다.
"수천 년 전부터 정과 사는 세불양립(世不兩立)이었소. 숱한 반목
의 역사를 만들며 한 번도 정사가 함께 평화를 이룬 적이 없었소
이다. 그러나 최근 백 년 이래로 정사는 다소 융화를 이루었소이
다. 비록 언제 균형이 깨질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별 탈이 없이
형평을 이루고 있소이다."
하후성이 가만히 듣고 있자 그는 다시 물었다.
"하후형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위전풍의 질문은 무척이나 심각한 것으로써 그는 커다란 기대를
품은 듯 하후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후성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침묵하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
다.
"으음, 소생의 견해는 정사란 단지 마음(心)에 달린 것이라고 봅
니다. 정이라고 모두 좋거나 사라고 모두 나쁠 수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위전풍의 표정에는 은은히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하후성의
대답에 몹시 만족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눈에 기이한 광망을 나
타내며 하후성을 직시했다.
"하후형, 소생이 누군지 아시오?"
뜻밖의 질문에 하후성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단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위전풍은 침중하게 신음을 발하며 말했다.
"으음, 솔직히 말씀드리겠소이다. 하후형은 혹시 사파무림의 남맹
북단(南盟北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이까?"
하후성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자 위전풍은 섭선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소생이 바로 남맹북단 중 북단(北檀), 즉 흑룡단(黑龍檀)의 단주
(檀主)인 선풍마서생(旋風魔書生)이오."
하후성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위전풍은 불안감이 어린 눈으로 하
후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매우 초조한
모양이었다.
하후성이 이내 그를 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위형, 그것을 밝히기 위해 소생을 기다린 것입니까?"
위전풍은 얼굴을 활짝 펴며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렇소. 솔직히 소제는 하후형을 처음 볼 때부터 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소이다. 그러나 정과 사는 서로 걷는 길이 달라서."
하후성은 그의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위형,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소제는 강호에 나와 위형을 만
난 것이 오히려 평생의 지기(知己)를 얻은 느낌입니다."
"하후형!"
위전풍은 감격하여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고맙소, 하후형!"
"위형."
뜨거운 사나이들의 우정(友情)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내는
서로의 가슴으로 우정을 확인하면서 언제까지고 믿음이 깃든 눈으
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릉현(天凌縣).
호북(湖北)의 명산 대홍산(大洪山)의 웅자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
이다. 이곳은 대홍산의 웅대한 산세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시작하
여 삼백여 호의 가호가 모여 있었다.
눈보라는 이곳 천릉현도 뒤덮고 있었다. 그 바람에 천릉현에서 보
면 거대한 대홍산의 웅자도 희뿌연 설막에 가려 희미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객점(客店).
천릉현을 지나는 행인들을 위해 생겨난 이 객점은 작고 초라했으
며 이름도 없었다. 단지 객점 밖에 꽂은 장대 끝에 붉은 천 조각
이 나부끼는 것이 객점임을 알리는 표기의 전부였다.
객점 안은 의외로 손님이 꽉 차 있었다.
아마 저마다 눈보라에 발이 묶인 모양으로 퀴퀴한 술냄새와 온갖
음식냄새 등이 뿌연 김과 함께 꽉 차 있었다. 객점 안에는 십여
개의 탁자가 있었는데 거의 모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쪽 구석진 곳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주객(酒客)이 있었다.
주객이라면 당연히 사내여야 했으나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그
것도 누구나 한 번 보면 눈이 번적 뜨일 정도의 절세미녀(絶世美
女)였다.
녹의(綠衣)를 입고 날씬한 어깨에 역시 녹색의 피풍을 두른 미녀
의 나이는 대략 이십사오 세 가량 되어 보였다.
살결이 빙옥(氷玉)같고 오관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얼
굴에는 까닭모를 냉막함이 서릿발처럼 맺혀 있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투명해 보이는 옥소(玉簫)를 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빈 술병이 나란히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여
자가, 그것도 절세미인이 실로 대단한 주량이었다.
녹의미녀는 연거푸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술을 따르다 술병이 빈 것을 느끼자 고운 아미를 찌
푸리더니 앙칼진 음성으로 외쳤다.
"이봐, 주인장!"
"네! 네."
주방 쪽에 있던 허름한 중년사내가 달려왔다.
"술 한 병 더!"
"네? 또... 술을... 요?"
객점주인은 어이가 없는 듯 멍한 표정이었으나 몸을 돌려 주방으
로 걸어갔다.
'빌어먹을, 얼굴은 천하절색인데 무슨 여자가 그 독한 죽엽청(竹
葉靑)을 다섯 근이나 먹는담?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군.'
객점주인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도 잠시 후 다시 한 병의 죽엽청
을 가져왔다.
"저... 안주는."
"필요 없어."
녹의미녀는 차갑게 내뱉고는 섬섬옥수로 술병을 잡아 잔에 가득
따르더니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객점 안의 손님들은 벌써부터 이 미녀주객(美女酒客)에 대해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녹의미녀의 얼굴에 서릿발처럼 어려있
는 냉막하고 차가운 기운에 감히 드러내놓고 관심을 보이지는 못
하고 있었다.
녹의미녀는 술잔을 내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약간 치켜올라간 아름다운 눈매에 문득 짙은 고독감(孤獨感)이 어
렸다. 빙결같이 희고 깨끗한 이마에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칼이
또한 그녀의 고독한 분위기를 더해 주어서 일까?
왠지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기운이 있었
다. 녹의미녀는 내심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세월은 흘러 또 일 년(一年)이 지났구나. 그러나.'
끼익!
이때 문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가 일시에 객점 안으로
쏴 밀려들어왔다.
그로 인해 마침 고개를 들던 녹의미녀는 객점 안으로 들어서는 인
물을 보게 되었다. 녹의미녀는 막 들어서는 사람을 보는 순간 버
들잎 같은 눈썹 끝을 가늘게 떨었다.
객점 안으로 들어선 인물은 준수하게 생긴 백의청년으로, 일신에
는 눈같이 흰 옷에 칠흑같은 머리칼을 묶어 등 뒤로 늘어뜨린 특
이한 차림새였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녹의미녀는 짧은 순간이었으나 하후성의 탈속한 모습에 눈길을 빼
앗긴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곧 돌리며 술잔을 들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다시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하후성은 한 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후 간단한 음식을 시켰다. 음
식이 나오자 그는 묵묵히 식사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지극히 안
정되어 있었다.
하후성은 식사를 마친 후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음, 대홍산까지 오기는 왔는데 천화곡(天火谷)을 아는 사람이 아
무도 없으니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는 천기선사의 명대로 대홍산 천화곡을 찾아온 것이었다.
'더구나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有無心)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자가 없으니.'
하후성은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분명 천기선사로부터 광검절심 유무심이 천하삼대검객(天下
三大劍客)중에서도 첫 번째라고 들었다. 그러나 태을성수 종리자
허조차도 광검절심이란 명호는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후성은 준미한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
덜컹!
이때 다시 객점의 문이 열리며 다섯 명의 청년(靑年)들이 찬 바람
과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이십대에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제법
준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옷색깔이 모두 틀렸다.
또한 그들은 한결같이 오만하고 패도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
다.
그들은 객점 안을 훑어보더니 일제히 시선이 한 쪽으로 집중되었
다. 혼자서 자음자작하고 있는 녹의미녀를 발견한 것이었다. 오인
의 청년들은 녹의미녀를 발견하고는 모두 안색을 굳히며 눈빛을
번쩍였다.
이윽고 다섯 명의 청년들 중에서 금의(金衣)를 입은, 나이가 비교
적 어려보이는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성큼성큼 녹의미녀 앞으로 가더니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옥소마녀(玉簫魔女) 채상홍(蔡桑紅)!"
녹의미녀는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매서운 두 눈에 일순 살기가 스
쳤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술잔을 들이키며 냉담하게 말했다.
"오상공자(五霜公子)였군."
금의청년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무척이나 태연한 척 하는군."
그는 다짜고짜 예고도 없이 좌수(左手)를 쭉 뻗었다.
쉭---!
칼끝같이 펼쳐진 좌수는 녹의미녀, 즉 옥소마녀 채상홍의 앞가슴
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강호상에서 여인의 가슴 부위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나 청년은 일부러 금기를 깨는 듯 했다.
"파렴치 한 놈!"
옥소마녀 채상홍은 냉랭하게 부르짖고는 술병을 들어 막았다.
술병은 정확히 금의청년의 손을 쳐냈다. 술병의 매끄러운 곡면을
이용한 방어법으로 병은 손상되지 않고 금의청년 손이 옆으로
튕겨나갔다.
그러나 금의청년은 냉소하며 즉시 오른발로 절묘한 자오각법(子午
脚法)을 펼쳐 옥소마녀가 앉아 있는 탁자를 강타했다.
펑!
탁자는 순식간에 박살나며 그 위에 놓여 있던 빈 술병들이 사방으
로 날았다.
그러나 옥소마녀 채상홍은 어느새 앉은 채로 뒤로 삼 장(三丈)이
나 미끌어져 있었다. 실로 귀신같은 신법이었다.
금의청년은 다시 그림자처럼 덮치며 양 손을 쫙 펼쳐 손가락을 일
제히 튕겼다.
피핑핑.!
그의 손가락 끝에서 매화꽃 형상의 환영이 영출되며 날카로운 경
기가 뻗었다.
"매화십지(梅花十指)!"
옥소마녀 채상홍은 부르짖으며 안색이 변했으나 몸을 핑그르르 돌
리며 수중의 옥소를 어지럽게 휘둘렀다.
파팍... 팍팍팍!
실로 절묘하게 그녀는 금의청년의 지법을 완벽하게 차단시켰다.
이 느닷없는 살벌한 싸움에 객점 안의 손님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
며 한 구석으로 몰렸다.
이때 객점주인이 허겁지겁 주방에서 달려 나오며 부르짖었다.
"여, 여러분... 왜 이러십니...... 윽!"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네 명의 청년 중 맨 앞에 서
있던 흑의청년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죽고 싶지 않으면 참견하지 말고 물러가라!"
흑의청년의 음산한 말에 객점주인은 안색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으... 으... 으!"
이번에는 갈의를 입고 얼굴이 음침하게 생긴 청년이 휙 몸을 솟구
치더니 하나의 탁자 위로 올라섰다. 이어 그는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들 이곳에서 사라져라!"
갈의청년은 음침하게 웃으며 발로 가볍게 탁자를 밟았다가 떼었
다. 그러자 탁자에는 시커먼 족인(足印)이 찍힌 채 구멍이 뚫려있
는 것이 아닌가?
"늦는 자는 머리에 이런 것을 찍어주겠다!"
"아이쿠...! 사람 살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님들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채 혼비백산하여 삽시간에 밖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객점주인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흑의청년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뿌리쳤다.
"아이쿠!"
객점주인은 비명소리와 함께 창문을 박살내며 밖으로 사라졌고 객
점 안은 삽시간에 텅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 명 만은 애초의 모습 그대로 탁자에 그대로 앉아 있
었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하후성은 태연한 표정으로 창 밖
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발견한 흑의청년은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흑의청년은 하후성을 향해 다가갔으나 이내 흠칫하더니 걸음을 멈
추고 말았다.
하후성의 뒷모습이 마치 태산(泰山)처럼 그를 압도해왔기 때문이
었다. 그 느낌은 그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중압감을 가지게 해 더
이상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흑의청년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대체 이 자는 누구기에 이토록 위압감을 풍긴단 말인가?'
이때였다. 펑! 하는 폭음이 일며 객점이 흔들렸다. 금의청년이 뒤
로 연달아 삼 보(三步) 후퇴하고 있었다.
그는 금의 앞가슴 부위가 날카롭게 찢겨져 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옥소마녀 채상홍이 살기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의청년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찢어죽일."
그는 신형을 날려 다시 공격하려 했으나 이때 흑의청년이 그에게
외쳤다.
"다섯째, 잠깐!"
금의청년은 멈칫하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대가(大哥)! 왜."
"잠시만 물러가 있거라, 다섯째."
흑의청년은 그를 물리치고 나서 옥소마녀 채상홍의 앞으로 걸어가
더니 싸늘하게 입을 떼었다.
"채상홍! 너도 우리가 올 줄은 예상 못했겠지?"
"흥!"
채상홍은 대답 없이 냉랭하게 코웃음 칠 뿐이었다.
"너는 미살혼(美殺魂) 광무(廣武)가 우리 오상공자(五霜公子)와
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었지."
채상홍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
다. 그러자 흑의청년의 얼굴에는 점차 살기가 짙어졌다.
"그런데도 그를 죽인 이유는?"
채상홍은 냉소했다.
"흥! 얼굴 하나 반반하다고 함부로 여인을 건드리는 그런 놈은 백
번 죽어 마땅하지!"
순간 흑의청년의 두 눈이 냉혹하게 변했다.
"우리 오상공자는 언제나 결과 만을 따진다. 어쨌든 미살혼 광무
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 적이 있고 네가 그를 죽였으니 우리는
너를 죽여 그의 원혼을 달래주겠다."
한편 하후성은 등지고 앉은 채 그들의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오상공자라면 현 사도무림(邪道武林)의 젊은이들 중에서 가장 두
각을 나타내는 자들로 정파의 사룡사봉(四龍四鳳)과 필적한다고
들었다.'
그는 혼자서 읊조리며 빙긋 웃고 있었다.
'더우기 이들은 사룡사봉과 동등한 실력을 지녔으면서도 언제나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강호의 고인(高人)들조차 이들에게는 한 수
양보하는 실정이라고 들었다. 그것은 이들의 합격술 때문이라고.'
오상공자(五霜公子).
그들은 사도(邪道)의 후기지수로 각각 그 출신은 물론 무공내력조
차 모두 달랐다.
원래 그들은 사오 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강호에 나타났었다. 서로
각각 무명을 날리던 그들은 이 년 전 천붕산(天朋山) 마애봉(魔涯
峯)에서 만나 서로의 무공을 비견해 보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호승심으로 격돌했으나 그날 이후 의기가 상통하여 그
자리에서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들은 오상공자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함께 행동하면서 쟁
쟁한 정파의 고인들과 유수한 전대 고수(高手)들을 차례로 격파하
였다.
흑풍공자(黑風公子) 적무성(赤武成).
독수공자(毒手公子) 전비(田飛).
백변공자(百變公子) 영호랑(令狐郞).
오독공자(五毒公子) 사마균(司馬均).
매화공자(梅花公子) 하익룡(河翼龍).
이들 다섯 명의 청년 고수들은 제각기 특성 있는 무공으로 기묘한
배합을 이루어 정사(正邪)를 막론하고 종횡무진 하는 위명을 떨쳤
다.
챙!
흑의청년, 즉 오상공자의 첫째인 흑풍공자 적무성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자루와 검신이 모두 흑색(黑色)인 괴검이
었다.
"채상홍! 이 자리에서 너의 시신을 거두겠다."
그는 싸늘하게 말한 후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우들! 포위해라!"
휙휙!
나머지 네 명의 오상공자는 신속하게 신형을 날려 옥소마녀 채상
홍의 퇴로를 차단했고, 그것을 본 채상홍은 아미를 찌푸리며 냉소
했다.
"흥! 역시 비겁한 놈들이군. 염치없게 합공(合攻)을 하다니."
그러나 그 말에 흑풍공자 적무성은 표정이 변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오상공자는 오체일심(五體一心)으로 상대가 약하건 강하건 늘 합
공한다. 이미 우리들의 이런 행동은 강호 친구들이 너무도 잘 알
고 있다. 그러니 네가 뭐라 건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받아라!"
쉭--- !
그의 수중에서 흑검이 시커먼 검막을 형성하며 공격했고, 옥소마
녀 채상홍은 긴장된 표정으로 신중히 응수했다.
파파팟!
윙--- !
옥소가 어지럽게 날고 검과 장(掌), 지(指)가 돌풍을 일으키며 얽
혔다.
싸움은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그것은 오대 일의 불공평한 대결이
었다. 그러나 옥소마녀 채상홍의 무공은 실로 대단했다. 그녀의
신법은 마치 그림자 같았으며 이따금 휘두르는 옥소의 공격은 날
카롭기가 가히 살인적(殺人的)이었다.
옥소의 그림자는 수십 개에서 수백 개로 늘어나 전후좌우를 면밀
히 차단시키며 수세를 펴다가 갑작스럽게 치명적인 살초(殺招)를
전개하곤 했다.
하후성은 비록 등을 지고 앉아 있었으나 단지 청각 만으로도 싸움
의 상황을 환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옥소마녀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옥소마녀 채상홍이라면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옥소마녀(玉簫魔女) 채상홍(寨桑紅).
그녀는 강호에 출도한 지 칠팔 년 정도로 미색(美色)이 절륜하고
무공이 출중하여 출도하자마자 강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숱한 청년들이 그녀의 사랑과 환심을 얻으려 했으나 불행히도 채
상홍은 그들과의 애정관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녀
에게 접근하는 청년들이 모두 그녀의 외면적인 미(美), 즉 육체
만을 탐했기 때문이었다.
채상홍은 결국 천하의 남성들에게 배신감과 혐오를 느끼게 된 나
머지 성격이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그녀는 차갑고 혹독해졌으며 특히 강호에서 여색(女色)으로 소문
이 좋지 않은 남자를 만나면 반드시 잔혹한 수단으로 제거하곤 했
다.
또한 정사를 가리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살인을 했기 때문에 강
호인들은 마침내 그녀를 마녀(魔女)라고 부르게 되었다.
옥소마녀 채상홍.
그녀의 무공은 이백 년 전 한 자루의 옥소로 이름을 날리던 괴객
마소객(魔簫客) 궁천(弓天)의 마라옥소비경(魔羅玉簫秘經)을 얻어
익힌 것으로 이미 강호의 절정고수의 반열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옥소마녀 채상홍의 무학이 아무리 고절하다해도 한 쌍의
손으로 오상공자의 합공을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어느덧 숨막히는 접전이 이십 초 수에 이르자 그녀는 점차 신법이
흐트러지며 밀리게 되었다.
위--- 웅!
파파파팍!
채상홍의 옥같은 이마에는 식은 땀이 맺혔으며 머리칼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찌익!
흑풍공자의 흑검이 가공할 수법으로 뻗자 그녀의 앞가슴 옷자락이
베어 나갔으며 그 사이로 백옥같은 젖가슴의 한 부분이 살짝 노출
되었다.
흑풍공자 적무성은 음산하게 외쳤다.
"채상홍! 이제 십 초 내에 너의 목을 베겠다!"
파파파... 팟!
그의 흑검이 무서운 검기를 쏟아내며 채상홍을 몰아쳤다.
피핑! 핑!
매화공자 하익룡의 독문절기인 매화십지(梅花十指)도 숨 쉴 틈
없이 그녀의 요혈을 파고 들었다.
그밖에 나머지 오상공자의 공세들도 비바람 몰아치듯 일제히 채상
홍의 전신으로 쇄도했다.
오 초(五招), 육(六) 초, 칠(七) 초.
"받아라!"
오상공자는 마침내 동시에 무서운 합격을 퍼부었고, 그 공격은 사
방 팔방의 모든 방위(方位)를 차단시켜 버렸다.
채상홍의 냉담하던 얼굴에 마침내 한 가닥 절망이 어렸다.
"흐흐흐... 채상홍! 죽을 때가 도래했다!"
흑풍공자의 음산한 웃음과 함께 그의 흑검이 섬전처럼 채상홍의
목을 베어갔다.
'트, 틀렸다.'
채상홍이 체념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순간, 어디선가 담담하
고도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손속이 너무 지나친 듯 하오이다."
아울러 소리도 없는 무형(無形)의 강기가 전권에 밀려 들었다.
그것은 일시에 오상공자의 공세를 완전히 차단했으며 마치 무형의
철벽으로 채상홍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았다.
펑! 펑--- 펑!
연이어 폭음과 함께 오상공자는 일제히 뒤로 튕겨나가고 말았다.
"으윽!"
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사오 보씩 밀려난 채 만면에 대경의
빛을 띄웠다.
'대체 어떤 놈이.?'
그들은 가슴이 섬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서야 하후성은
서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오상공자는 모두 안색이 굳어진 채 하후성을 노려 보았다. 특히
흑풍공자는 눈썹을 경련하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손을 쓴 것은 친구의 짓이오?"
"그렇소이다."
담담한 대답에 흑풍공자는 내심 신음을 베어 물었다.
'으음, 어쩐지 이 자가 풍기는 기운이 신비하다 했더니. 대체 누
구이길래 이토록 엄청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친구의 명호는?"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소생은 하후성이란 무명소졸이오."
순간 오상공자는 물론 옥소마녀 채상홍조차 경악하고 말았다.
"그, 그대가 환영신룡 하후성이란 말이오?"
하후성은 쓴 웃음을 지었다.
'또 환영신룡이군.'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반면 오상공자의 표정은 돌변했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거짓말처럼 싹 바꾸며 일제히 포권하는
것이 아닌가?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환영신룡이신지도 모르고 무례를 저지르다
니."
뜻밖의 말이 적무성의 입에서 나오자 하후성은 어리둥절해지고 말
았다.
그러나 적무성은 만면에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들은 이미 위전풍 대가로부터 하후형에 대한 말을 모두 들었
습니다."
"아, 위형."
하후성의 의문은 비로소 풀렸고 분위기는 금방 부드러워졌다. 적
무성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제는 이미 하후형의 쟁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벌써부터 만나
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진정 큰
영광입니다."
"별 말씀을."
"저희 오형제는 흑룡단(黑龍檀)의 동도로 이 년 전 위형님과 형제
지의를 맺었습니다."
적무성은 차례로 소개했다.
"소제가 첫째인 흑풍공자 적무성, 둘째는."
적무성의 소개에 하후성은 일일이 답례했다.
이윽고 인사가 끝나자 하후성은 문득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다섯 분께 소생의 청이 하나 있소이다."
오상공자가 모두 궁금한 표정을 짓자 하후성은 한 쪽에서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옥소마녀 채상홍을 일견한 후 말했다.
"채여협과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풀 수 있는 것이라면
소생의 얼굴을 봐서라도 원만히 해결했으면 좋겠소이다."
오상공자는 그 말에 난색을 지으며 서로의 얼굴들을 마주 보았고
다섯째인 매화공자 하익룡이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
었다.
"하후형의 뜻은 알겠습니다만, 옥소마녀는 저희 오형제와 친분이
있는 미살혼 광무를 죽였습니다."
그러자 이제껏 가만히 있던 채상홍이 차갑게 냉소하며 말했다.
"광무, 그 자는 죽어 마땅한 자였다!"
"뭣이?"
하익룡은 분노하여 대뜸 공격을 취하려 했으나 하후성은 그를 만
류하며 물었다.
"하형, 그렇다면 그 미살혼 광무라는 사람의 품행은 어떠하오?"
하익룡은 우물쭈물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건."
하후성은 정중히 읍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소생의 체면을 좀 세워주셨으면 좋겠소이다."
하익룡이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자 흑풍공자 적무성이 끼어들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할 수 없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하후형의 부탁인데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사의를 표했다.
"감사하오이다, 여러분."
적무성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핫! 자, 이제 모두 끝난 일입니다. 우리 술이나 한 잔 합
시다."
이어 그는 혼쾌한 표정을 지으며 옥소마녀 채상홍에게 말했다.
"자, 채낭자. 이제 우리의 일은 이것으로 끝난 것으로 합시다. 우
리는 광무의 일을 없던 것으로 하겠소이다."
채상홍은 힐끗 하후성을 바라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적무성은 고개를 돌리며 음성을 높였다.
"주인장!"
그 말이 끝나자 객점의 문이 열리며 조금전 창 밖으로 날아갔던
객점주인이 벌벌 떨며 기어 들어왔다.
적무성은 호탕하게 말했다.
"이 객점에서 제일 잘하는 요리와 제일 좋은 술을 가져 오시오!"
"네, 네."
객점주인은 연신 굽실거리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객점주인은 양 손에 두 개의 넓은 소반을 받쳐 들고 나왔
는데 소반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먹음직스런 오리구이와 여러
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일행은 한 탁자에 앉아 곧 웃고 떠들며 유쾌하게 식사와 술을 들
었다.
시간이 흐르자 하후성은 오상공자가 매우 호쾌하고 솔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자신과 의기도 상통하는 것을 느꼈다. 반면 오상공자도
역시 이야기하면 할수록 하후성에 대해 경탄에 경탄을 금치 못하
고 있었다.
바로 한 탁자 건너편에는 채상홍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점차 이채를 띄기 시작하더니 한 쌍의 매서우면서
도 아름다운 눈으로 줄곧 하후성을 응시했다.
흑풍공자 적무성은 술 한 잔을 쭉 들이키고는 호탕한 음성으로 말
했다.
"하후형, 외람될지 모르나 부탁이 있습니다."
하후성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하후형의 소문을 들은 이후 젊은이로써 한 번 비무(比武)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전 하후형의 무공을 보니
소제가 감히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대신 멋진 한
수로 우리 형제들의 안목을 넓혀주시기 바랍니다."
하후성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생의 보잘 것 없는 무학을.“
독수공자 전비(田飛)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하후형, 소제들의 안목을 넓혀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하후성은 마침내 더 거절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럼, 보잘 것 없지만."
그는 승낙한 후 마침 시중을 들고 있는 객점주인에게 부탁했다.
"주인장, 여기 뜨거운 차(茶) 일곱 잔 만 갖다 주시겠소?"
"네, 네."
객점주인은 공손히 대답하고 즉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객점주인은 커다란 소반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찻잔 일곱 개를 받
쳐들고 왔다.
"주인장, 거기 좀 서 있으시오."
"네?"
그는 멍청히 일 장(一丈) 밖에 섰고 오상공자와 채상홍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후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후성은 앉은 자리에서
합장하더니 양수를 가볍게 뻗었다.
"앗!"
객점주인이 얼빠진 소리를 발했다.
그가 손에 받쳐들고 있던 소반이 통채로 무형의 힘에 이끌린 듯이
허공으로 떠올랐던 것이었다.
하후성이 가볍게 손을 젓자 일곱 개의 찻잔이 놓인 소반은 통채로
부서진 창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스스스.
소반은 눈보라를 뚫고 일직선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광경에 오상공자와 채상홍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떠
올랐다. 하후성이 펼친 것은 허공섭물(虛空攝物)에 진기도인공(眞
氣導引功)을 함께 시전한 것으로 그 정도면 그들도 능히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후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지으
며 그저 담담하게 술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반면 오상공자와 채상홍의 안색이 점차 의혹으로 변해갔다.
기이하게도 소반이 밖으로 날아간 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땅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최소한 백 장(百丈)은 갔을 텐데 아직도 떨어
지지 않다니.'
시간이 또 흘렀다.
마침내 모두의 얼굴에는 놀람과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고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주인장, 양 손을 앞으로 내미시오."
"네?"
객점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두 손을 내밀었다.
쐐--- 액!
느닷없이 창 밖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리며 흰 빛이 무서운 속
도로 흑풍공자 적무성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억! 누구냐?"
적무성은 대경하여 급히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쌍장을 뻗으려 했
다. 그러나 흰 빛은 단지 그의 머리를 스쳤을 뿐 객점주인이 내민
팔 위로 가볍게 내려앉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얼마 전 창밖으로 날아갔던 소반이었다.
"아!"
중인들은 모두 경탄성을 발했다.
"이럴 수가?"
객점주인도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이 멍하니 자신의 손 위에 내
려있는 소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
으나 기이하게도 소반에는 한 점의 눈도 묻어 있지 않았다.
오공자와 채상홍은 놀라는 중에도 똑같이 의문을 느꼈다.
'소반은 돌아왔는데 그렇다면 찻잔은?'
하후성이 그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여러분께 차 한 잔씩 대접하겠소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의 열려진 창문으로부터 번개 같은
일곱 가닥의 빛이 날아들었다.
쉭! 쐐-액!
중인들의 안색이 대변하는 사이, 그들의 탁자에는 소리 없이 찻잔
하나씩이 내려앉았다.
"오오!"
그들은 일제히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들이 놀란 것은 찻잔이 자신들의 앞에 놓여진 때문만은 아니었
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찻잔은 붉게 달구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찻물이 뜨거운 김을 내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시식!
찻잔이 닿은 탁자가 연기를 냈다. 뜨겁게 달아오른 찻잔으로 인한
현상이었다. 하후성은 빙그레 읏으며 말했다.
"차가 너무 뜨거운 것 같군요."
그가 슬쩍 소매를 저으니 차가 끓는 것이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중인들은 주위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적당히 김이 피어오를 정도의 알맞은 온도로 식은 차를 들여다 보
며 중인들은 이 신기(神技)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하후성이 보여준 절기야말로 도저히 인간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
으로써 그들은 세상에 이런 류의 무공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실상 조금 전 하후성이 펼친 것은 천기선사로부터 배운 다섯 가지
암기술(暗器術) 중 하나인 허공회류비선표(虛空廻流飛旋漂)였고,
거기에 본신의 삼매진화(三味眞火)로 찻잔을 뜨겁게 한 것이었다.
마침내 흑풍공자 적무성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하후형. 진정 몸과 마음이 다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내 평
생 이런 무공은 그 비슷한 것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진정 하후
형은 신과 같은 분입니다."
오상공자 중 셋째인 백변공자 영호랑도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소제가 오늘 본 것을 남들에게 말하면 아마 모두들 소제더러 미
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넷째인 오독동자 사마균도 고개를 흔들었다.
"육십 년 전 천산파의 장문인인 천산비검옹(天山飛劍翁)이 황산의
비무대에서 한꺼번에 백 자루의 검을 날리는 신기를 보였다지만
그도 아마 하후형의 솜씨를 보면 다시는 비검(飛劍)을 쓰지 않으
려 할 것입니다."
하후성은 연속 쏟아지는 찬사에 얼굴이 뜨거웠다.
"과찬이시오, 과찬."
적무성이 힘주어 말했다.
"과찬이 아닙니다. 소제는 진정 하후형과 같은 고인을 만나 기쁘
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정말로 몹시 기분이 좋은 듯 호쾌하게 찻잔을 들어올렸다.
"자! 하후형, 우리 이 차를 듭시다. 오늘 일은 소제에게 평생 잊
지 못할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는 채상홍에게도 찻잔을 들어 보였다.
"자, 채낭자도 드시오, 아까 일은 소생이 사과드리겠소."
그 말에 차갑기만 하던 옥소마녀 채상홍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무슨 말을... 오히려 제가."
그녀의 태도는 짧은 시간 동안에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녀의 차갑기 만한 눈에는 점차 야릇한 기운이 부드럽게 일어나
고 있었으며 또한 그녀는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느
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따금 멍한 표정을 지었으며 계속 하후성의 준미한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침(朝).
하후성과 오상공자는 객방(客房)에서 나와 가벼운 식사를 들며 작
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거센 눈보라 때문에 밤길을 가지
않고 객점에 하룻밤 묵은 것이었다.
하후성은 아쉬워하는 오상공자와 작별한 후 객점을 나섰다. 그런
데 옥소마녀 채상홍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홍산(大洪山).
눈부신 설화가 수목의 가지마다 피어 있고 대홍산에 쌓인 눈은 몇
자에 달했다.
그러나 이미 오상공자들로부터 천화곡(天火谷)의 위치를 알아낸
하후성은 한시바삐 광검절심을 만나기 위해 대홍산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하나의 산등성이를 넘을 즈음 누군가 한 그루의 커다
란 설목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인물은 바로 뜻밖에도 옥소마녀 채상홍이었다. 그녀는 설목에
기댄 채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여협이?'
하후성이 다가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여전히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채여협, 어떻게 이곳에 계시오?"
하후성이 먼저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채상홍은 허공에 시선을 매단
채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그러자 하후성은 멋적은 듯이 말했다.
"아침에 말없이 먼저 떠나셔서 섭섭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
갑소이다."
그 말에 채상홍은 눈빛을 반짝 빛내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
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후성은 부드럽게 물었다.
"채여협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저는 호남성(湖南省)으로 가요. 소협은?"
"소생은 대홍산에서 누구를 만나야 합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채상홍은 희디흰 목선을 드러내며 내내 고
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한없이 약하고 가련한 여인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강호에 널리 알려진 옥소마녀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
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화시켰는지.
이윽고 하후성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채여협, 소생이 한 마디 만 하겠소이다."
채상홍은 흠칫했다.
"채여협, 세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한 쪽
면 만을 보면 그 면이 곧지 않고 구부러져 있지만 다른 면은 뜻밖
에 곧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채상홍의 어깨에 걸쳐진 녹색 피풍이 바람도 없는데 가늘게 흔들
렸고, 하후성은 여전히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또 세
상을 살다보면 수많은 난관이 가로막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난관을 헤쳐나가야 만이 진정 현명한 자요, 강한 자라 할 수가 있
을 것입니다."
채상홍은 가느다란 음성으로 말했다.
"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하후성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채상홍, 이른바 옥소마녀(玉簫魔女).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魔女)라고 불렀고 그녀 자신도 언제부
터인가 그 말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하후성이란 청년에게서 만큼은 자신이 마녀
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커다란 수치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녀를 깨우치게 했다. 불과 하루, 결코 길지
않은 만남을 통해 하후성이란 청년은 그녀의 인생관을 크게 변화
시켜 버린 것이었다.
갈림길이 나타났다.
인생은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갈림길처럼 인생의 길
도 언젠가가 두 갈래, 혹은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서게 될
것이다.
나란히 걷던 하후성과 채상홍의 앞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하
후성은 걸음을 멈추고 채상홍을 바라보았다.
"소생은 이쪽으로 가야 합니다."
"......."
채상홍은 멍한 표정으로 두 갈래 길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어느 쪽 길을 택해야 할 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실상 딱히 예정된
목적지라는 것이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녀는 말을 흐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러고 보니 방향없이 살아온 것이 그녀의 인생이었다. 세상 모든
남자로부터 실망한 후 그녀는 표독스럽고 냉혹하게 변했다. 여색
을 탐하는 무리들을 무차별로 죽이면서도 조금의 만족도 얻지 못
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허전하게 했으며 세상
을 믿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니 자연 갈 곳이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왔던 것이다.
하후성은 그녀가 멍한 표정을 짓자 정중히 포권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채상홍의 아름다우면서도 창백한 얼굴이 흔들렸다. 하후성은 빙그
레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뵐 때는 채여협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채상홍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미소? 미소라고?'
하후성은 씨익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채 여협같이 아름다운 분에게는 싸늘함보다 웃는 모습이 훨씬 어
울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후성은 말을 마친 후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갔으며 채상홍은 멍하니 서서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맑은 눈에서 수정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창백한 두 뺨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의 옥소마녀가 눈물을 흘리다니.
하후성이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나도 채상홍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나 차디차게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가슴은 어떤 알 수 없는
힘(力)에 의해 녹기 시작했다.
뜨겁고 훈훈한 힘(力), 그것은 대체 무엇이며 또 누구를 향한 것
일까?
옥소마녀 채상홍의 차가운 눈에는 어느덧 환상처럼 아름답고 정열
적인 이채가 발하기 시작했다.
'하후성.'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만난 지 불과 하루. 그러나 그녀의 마음
에 하후성이란 이름은 깊이깊이 새겨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