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六章 反三聖勢

第十六章反三聖勢  햇볕이 내리쬐는 이른 아침. 형산의 거봉인 자개봉(紫蓋峰)을 부지런히 오르고 있는 청수한 인상의 노검객(老劒客)이 있었다.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얼굴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염(黑髥)이 탐스럽게 나 있었고, 두 개의 검을 교차해 등에 맨 것이 눈에 띄었다. 노검객은 뭐가 그리 바쁜지 전신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전혀 쉴 생각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달리기에만 여념이 없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조급한 기색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갔을까? 정신없이 산길을 오르던 노검객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꼭 그를 미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누구냐?” 노갬객의 벼락치는 듯한 호통에도 불구하고 사위(四圍)는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잘못 들었나?” 그가 중얼거리며 다시 몸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스윽! 돌연 한 무리의 인영이 나타나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나타난 자들의 움직임이 어찌나 표홀(飄忽)하던지 절정의 고수라고 자부하던 노검객조차 그들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정도였다. 흠칫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던 노검객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나타난 사람은 모두 넷이었는데, 그 중 만승검왕 단리석과 그의 아들인 단리평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노검객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보자 결코 좋은 일로 자신을 막은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단리(段里) 형(兄)께서 노부를 가로막은 이유는 무엇이오?” 단리석이 경직된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이(易) 장문인(掌門人)께선 잠시 저와 함께 가주셔야겠소.” 노검객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이오?” 단리석이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자 노검객의 얼굴에 차가운 빛이 떠올랐다. “단리 형이 나를 납치하겠다는 말이시오?” 노검객이 냉랭한 어조로 다시 말을 꺼냈지만 단리석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노검객은 그제서야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형산파의 장문인인 자신을 납치하려는 자가 있다니.더군다나 자신을 도모하려는 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단리석이 아닌가. 형산에 근거지를 같이하고 있는 형산파와 만검산장은 이전부터 강호의 평화를 위해 함께 애써 오던 사이였다. 자연히 형산파를 책임지고 있는 그와 만검산장의 주인인 단리석은 어느 정도의 친분 관계가 있었다. 한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노검객, 쌍수쾌검(雙手快劒) 이운량(易雲亮)이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이 자리에서 한걸음도 움직일 생각이 없소.” 순간, 단리석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장문인께서 움직이지 않겠다면 강제로 모셔 갈 수밖에 없소.” “나는 여태껏 단리 형이 정의를 아는 대협이라고 생각했었소. 한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구려.” 이운량의 빈정거림에 단리석의 얼굴에 잠시 자책의 빛이 떠올랐다. 그때 단리석의 옆에 있던 흑의인이 냉막한 어조로 이운량에게 말을 꺼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 이러는 것이오.” 이운량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죽은 사람처럼 안색이 푸르스름한 것이 매우 음산해 보였으며 보통 칼보다 훨씬 짧아 보이는 도를 칼집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들고 있는 것이 꽤나 특이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또한, 바로 옆에 서 있는 흑의인과 하나에서 열까지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둘은 쌍둥이가 분명했다. “당신은?” “예정후(芮頂珝)라 하오.” “음산쌍도(陰山雙刀)?” 이운량의 얼굴 가득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음산쌍도(陰山雙刀)! ` 그들은 고강한 무공과 그것보다 훨씬 뛰어난 합격술로 인해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서역(西域)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음산(陰山)을 본거지로 활동했던 연유로 중원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역에서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최고고수로 군림하던 자들이 바로 음산쌍도였다. 특히, 황교(黃敎)의 제일고수인 아목하(兒木河)를 제거한 이후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해 서역 일대에서는 그들에게 시비를 거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음산쌍도는 이미 십 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느닷없이 이곳 형산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 이운량이 놀란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음산쌍도가 이미 제마궁(帝魔宮)에 포섭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그의 말이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이운량이 얼굴 가득 의혹을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제마궁주(帝魔宮主)의 명을 받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오?” 이번에는 음산쌍도의 둘째인 예명후(芮明珝)가 말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그렇소, 당신 생각대로요.” “나를 왜 데려가겠다는 것이오?” “궁주께서는 강호의 기인(奇人)들에 대해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소. 특히 요 근래 강호가 피바람 잦아들 날 없이 어지러운 것에 회의를 느끼고 계시던 중 마침내 뜻을 세우시고 명망 있는 여러 선배고인(先輩高人)들과 더불어 강호를 편안케 하려는 목적에서 이렇게 이 장문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외다.”  이운량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의 말은 매우 그럴싸하지만, 한마디로 말해 강호를 통째로 집어삼키겠다는 시커먼 속셈이 아니오?” 이운량이 대놓고 빈정거리자 이번에는 예정후가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궁주님의 깊은 속을 우리가 어찌 알겠소? 우리는 그저 명(命) 받은 대로 행할 뿐이오.” 이운량이 다시 빈정거렸다. “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시커메서 그 속을 다 볼 수 없는 것이겠지.” 예명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하나, 이운량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다시 대꾸했다. “내 입으로 내가 말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소?” “이……!” 예명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발작하려 하자 보다 못한 예정후가 앞으로 나섰다. “너는 잠시 물러나 있어라.” 예명후는 형이 가로막자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나면서도 이운량을 비수 같은 눈으로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예정후는 동생을 진정시킨 후 이운량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운량은 그의 눈에 차갑기 그지없는 한광(寒光)이 감도는 것을 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자는 만만치 않겠군……’ 이운량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예정후가 냉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 말 할 것 없소. 당신은 우리를 따라가겠소, 아니면……” “아니면?” 예정후의 표정이 스산하게 변했다. “흐흐흐, 이곳이 당신의 무덤이 될 것이오.” “그게 그렇게 쉽다고 생각하시오? 자개봉이 본 파의 영역이란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예정후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형산파의 인물들은 당신의 주검밖엔 구경하지 못할 것이오. 당신이 비록절정고수(絶頂高手)라 하나 이곳엔 당신 혼자뿐이오…… 사람들이 도착했을 땐 우리들은 이미 여기에 없겠지.” “으음!”  이운량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그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 비록 절정고수라 하나 음산쌍도 또한 그 못지않은 고수였다. 게다가 십대고수 중 하나인 만승검왕마저 가세한다면 이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하나, 그렇다고 명문정파(名門正派)의 우두머리가 되어 강호를 제패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에게 순순히 항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딪치는 데까지 부딪쳐 볼 수밖에……’ 이운량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신중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더 이상의 동조자는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만 벗어난다면 적들은 더 이상 그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흐흐흐, 마음을 정한 것 같군. 애석한 노릇이야!” 이운량이 조금도 그들의 말을 따를 것 같은 기미가 안 보이자 예정후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 한 발 그에게 다가왔다. 도를 움켜쥔 손에 시퍼런 힘줄이 내비치는 것을 보니 예정후 또한 이운량의 내심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았다. 동시에 예명후도 이운량의 등 뒤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음산쌍도는 상대가 강적이라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합공을 하려는 것이다. 이운량도 등뒤의 검으로 손을 가져 가며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팔짱을 낀 채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단리석과 그를 호위하듯 나란히 서 있는 단리평의 모습이 들어왔다. 단리석은 아직 싸움에 가담할 마음이 없는지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다행이로군.’ 이운량은 한편으론 조금 안심이 되었다. 단리석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직 일말의 희망은 있었다. 최대한 빨리 음산쌍도를 처치한 후 이 자리를 피한다면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이운량이 막 몸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무량수불, 잠시 행동을 멈추시오.” 느닷없이 도호(道號) 소리가 들리며 대여섯 명의 인물이 장내에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여섯 사람이었는데, 도인 다섯과 청수한 인상을 한 초로(初老)의 인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인들은 모두 청색 도포(道袍)를 걸쳤고 하나같이 신태가 비범한 것을 보니 언뜻 보기에도 절정의 고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무당오자(武當五子)였다. 무당오자가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초로의 인물은 그들보다 훨씬 신태가 비범해 보였다. 겉에는 맑은 물빛 장삼을 걸쳤는데, 수염이 하나도 없는 청수한 얼굴과 달리 두 눈은 시린 듯 맑아 그 깊이를 추측하기조차 어려웠다. 더군다나 두 눈에서 가끔씩 뻗어 나오는 신광(神光)은 간담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절로 등골이 오싹할 만큼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바로 검제(劒帝) 냉좌기(冷佐起)였다. 그를 보자 여태껏 여유만만하게 있던 단리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내, 냉(冷) 선배!” 아마 냉좌기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냉좌기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그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반대로 냉좌기와 무당오자를 본 이운량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전부터 무당오자와 친분이 있었는지 반가운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정와도장!” “무량수불, 조금만 늦었다면 큰 낭패를 당할 뻔했습니다.” 이운량은 반가운 와중에서도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사부님의 분부로 저희들도 대정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 시주께서도 제갈 군사에게서 무엇인가 들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나 너무도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라 반신반의하고 있었지요. 그 일로 본 파의 장로(長老)들과 의논을 하려고 급히 가던 중 저들을 만나게 되었소. 제갈 군사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더군요.” 이운량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냉좌기가 단리석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광채가 어찌나 싸늘하던지 단리석은 단지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주눅이 들 정도였다. “단리 노제(老弟)! 나는 그래도 자네만큼은 믿고 있었는데…… 정말 실망을 금할 수 없네.” 단리석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꾸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 한구석에 한 가닥 거리낌이 있었는데 냉좌기의 날카로운 추궁을 듣게 되자 절로 부끄러운 마음이 든 것이다. 하나, 예정후는 단리석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단리 대협, 저자가 도대체 누구기에 그러는 것이오?” 단리석이 여전히 대꾸를 않자 성미 급한 예명후가 앞으로 나섰다.  “형님, 그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차피 같이 없애 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며 냉좌기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도(刀)를 휘두를 기세였다. 하나, 냉좌기는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지 단리석에게 눈길을 둔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단리 노제(老弟), 자네가 지금 하려는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네. 나는 자네가 저들의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자네만 좋다면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허물을 웃어넘길 수 있네.”  순간적으로 단리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을 눈치 챈 예명후가 그를 노려보며 음산하게 일갈했다. “만약 우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은 물론이고 식솔(食率)들도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순간, 냉좌기의 눈에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그의 눈빛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음산쌍도는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냉좌기가 잠시 그들을 노려보다가 불쑥 내뱉었다. “너희들은 너희들 일이나 걱정해라.” 순간, 음산쌍도는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냉좌기의 두 눈이 유리알처럼 투명해지며 그 속에서 기이한 광망(光芒)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살의(殺意)였다. 음산쌍도가 누군데 그런 것도 눈치 채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얼굴색이 변한 채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냉좌기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만약 우리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본문에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순간, 냉좌기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굉량한 광소(狂笑)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 그 소리가 어찌나 커다랗던지 근처에 있던 새들이 다 놀라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웃!” 음산쌍도 또한 고막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뒤로 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야 겨우 신형을 안정시킨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에 찬 표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서역 일대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실력과 명성이 쟁쟁했던 그들이 중원의 일개 노인이 터뜨린 웃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만 내상을 입은 것이다. “이……!” 하도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예명후가 막 뭐라 입을 열려고 할 때, 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냉좌기가 돌연 웃음을 뚝 그치며 차가운 눈으로 음산쌍도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마치 살갗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음산쌍도는 차마 마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냉좌기의 말에 대꾸할 생각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버티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몰랐으나, 웃음에 실린 공력(功力)과 눈빛만 보고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서로 힘을 합치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그들이 겁을 먹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제아무리 대단한 자라 할지라도 자신들 또한 서역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웃음에 실린 공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약간의 내상을 입긴 했지만, 그것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한 기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윽! 음산쌍도는 서로 눈길을 교환하며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 후 기습을 하려는 것이다. 쌍둥이 형제인 그들은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할 만큼 서로를 잘 알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도 이런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 하나, 냉좌기는 물론이고 무당오자조차도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지 그저 그들의 행동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정도 가까이 접근했다 싶자 음산쌍도의 신형이 돌연 번개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뒈져랏!” “죽엇!” 파앗!  순간, 그들이 쥐고 있던 도에서 시퍼런 도기(刀氣)가 뿜어져 나오며 냉좌기의 상반신을 무자비하게 쓸어 갔다. “앗!” 단리평의 입에서 단말마 같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는 냉좌기를 잘 알지 못했다. 하나, 아버지를 수렁에서 건져 줄지도 모르는 사람이 심히 위태로워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른 것이다. 그만큼 음산쌍도의 공격은 빠르고 절묘했다. 특히,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아 온 그들의 합공은 싸움이 아니라 꼭 무슨 곡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서로 호흡이 잘 맞던지 두 사람이 아니라 꼭 수십 명이 도를 휘둘러대는 것 같았다. 하나, 상대는 천하 제일검이라는 검제였다. 냉좌기는 상대의 날카로운 기습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왼쪽으로 슬쩍 틀더니 음산쌍도의 공세에 맞서 검을 마주 휘둘렀다. 우우웅…… 실로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마치 벌떼가 우는 듯한 괴음이 터져 나오며 엄청난 검기(劒氣)가 음산쌍도의 공격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음산쌍도의 공격도 절묘했지만, 냉좌기의 방어는 더욱 뛰어났다. 휘황(輝煌)한 검기가 마치 빛살과도 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음산쌍도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 낸 것이다. 카카캉!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오며 충격을 이기지 못한 음산쌍도가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냉좌기를 쳐다보았다. 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부상을 입히기는커녕 서역 최고의 고수라는 자신들만 오히려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냉좌기가 검을 들어 음산쌍도를 가리키더니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네놈들을 없앰으로써 성검문(聖劒門)과 나 냉좌기의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순간, 음산쌍도의 표정이 하얗게 탈색되었다.그들은 비로소 상대가 누군지 깨달은 것이다. 그들이 놀라고 있는 사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냉좌기가 차가운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헉!” 음산쌍도는 너무도 놀라 도를 정신없이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시퍼런 도기가 허공 가득 일어나며 냉좌기의 전신을 덮쳐 갔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다시 검을 좌우로 슬쩍 휘둘렀다. 순간, 꾸우우웅……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굉음과 함께 실로 어마어마한 검기가 주위로 빠르게 확산되어 나갔다. 그것은 음산쌍도가 전력으로 펼친 도기(刀氣)를 뚫고 그들의 몸마저 집어삼켰다. 꽈꽝! “으아아!” “케에엑!” 폭음과 합창하는 듯한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부릅뜬 눈으로 장내를 살피던 정와도장은 고개를 돌린 채 연신 도호를 외기 시작했다. “무량수불……!” 주위 어디에서도 음산쌍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단지 혈구(血球)로 변한 두 구의 시신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음산쌍도는 너무도 엄청난 검기에 시신조차 온전하게 보존치 못하고 이승을 하직하고 만 것이다. 수십 년 이상 무림을 떨어 울린 명성에 걸맞지 않은, 너무도 허망한 최후였다. 냉좌기는 불과 이 초 만에 음산쌍도를 불귀의 객으로 만든 후 고요한 눈으로 단리석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싸움을 치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조용하고 차분한 몸가짐이었다. “단리 노제, 잘 보았나? 바로 이게 악인(惡人)들의 말로(末路)네. 끝끝내 그들을 도와준다면 자네도 이렇게 되지 말란 보장이 없는 것이네.”  그의 말은 언뜻 들으면 단리석을 협박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단리석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충고해 주는 것이었다.그렇지 않아도 부친의 행동이 걱정되었던 단리평이 냉좌기를 돕고 나섰다. “아버님, 저분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부디 그들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분으로 강호를 위해 일하십시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정와도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무량수불…… 아드님의 말씀이 백배 옳습니다. 악인들의 발호로 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이때, 단리 시주 같은 고인(高人)이 발 벗고 나선다면 실로 만생(萬生)의 홍복이 아닐까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묵묵히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단리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기이하게 번쩍이고 있는 그의 표정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정말 제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까?” 순간, 단리평의 얼굴에 가득 화색이 돌았다. 단리석이 마음을 고쳐 먹은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정와도장 또한 기쁘기 그지없는 얼굴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세상에 단리 시주 같은 분께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누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냉좌기 또한 기쁘기는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정말 잘 생각했네. 나는 자네가 당연히 이렇게 나올 줄 알았네.” 그의 말에 단리석이 얼굴 가득 부끄러운 빛을 띠었다. “냉 선배, 내가 잠시나마 무엇에 씌었던 모양이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늦게나마 이 장문인께도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오.” 이운량이 가당치 않다는 듯 손을 홰홰 내저었다. “아니오. 지금이라도 단리 형이 올바른 길을 찾았으니 천만다행이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내 어찌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겠소?”  이운량이 짐짓 엄살을 섞어 가며 말하자 옆에 있던 냉좌기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허허, 이 장문인의 말이 맞네. 그리고 나는 자네가 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네.” 그 말을 들은 단리평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는 단리석이 자신을 위해 악인들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부친의 사랑이 얼마나 끔찍한지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낀 것이다. “한데 내가 그들과 함께 이 장문인을 습격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이까?” 단리석의 물음에 냉좌기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나도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네. 하나, 제갈(諸葛) 군사(軍師)가 이번 일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모종의 계책(計策)을 꾸민 것이 아닌가 생각할 뿐이네. 역정보를 흘려 넣었을 수도 있겠지.” 가만히 냉좌기의 말을 듣고 있던 단리석의 얼굴에는 진한 후회가 묻어 있었다. 아무리 가족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런 자들을 도와 주려 했다는 것이 영 실감이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잠시 그의 신색을 살피던 정와도장이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리석의 표정으로 보건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후회가 큰 만큼 삼성의 음모를 분쇄하는 일에 더욱더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대정회는 실로 커다란 동조자가 생기는 것이요, 삼성에게는 적지 않은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정와도장은 기쁜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무량수불…… 그나저나 정말 큰일이군요.” “뭐가 말인가?” “성검문에서 무림을 전복하기 위해 이런 일을 꾸몄다면 비단 형산파에만 국한되진 않았을 게 아닙니까?” 냉좌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지…… 하나 더 큰 문제는 성검문뿐만 아니라 당금 사대세력 중 삼 개 세력이 함께 힘을 합쳐 무림을 전복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세.” 그의 말에 단리석이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자 무당오자의 수좌인 정와도장이 냉좌기의 말을 거들었다. “무량수불, 냉 선배의 말씀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는 어두운 얼굴로 삼성과 그들의 음모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대략 일다경(一茶頃) 동안의 설명이 끝나자 단리석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후회막급이로군요. 하나, 이번 일을 거울삼아 다시는 저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냉좌기가 그를 위로하려는 듯 어깨를 툭 쳤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이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는 있게 마련이지.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일세. 그 점에서 자네는 정말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야.”  “냉 선배, 정말 고맙습니다.” 냉좌기는 그의 진심 어린 표정에 가느다란 웃음으로 답례를 했다. 잠시 옆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운량이 입을 열었다. “그들의 음모가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미력하나마 나도 여러분들을 도와 드리겠소.” 그의 말에 정와도장이 반색을 했다. “무량수불…… 이 장문인께서 도와주신다면 저희들에게는 실로 큰 힘이 될 겁니다.” “별말씀을.” 이운량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럴 게 아니라 잠시 본(本) 파(派)로 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무량수불…… 그렇게 하지요.” 그들의 모습은 이내 울창한 숲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숲은 다시 예전의 고요함에 빠져 들었다. 쪼로롱! 단지 새들의 울음소리만이 흡사 음산쌍도의 죽음을 애도하듯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대전(大殿). 족히 삼사백 평은 될 듯한 거대한 대전이 온통 어둠에 젖어 있었다. 한치 앞조차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둡고 칙칙한 실내. 천장에 달린 조그만 야명주(夜明珠)만이 광채를 뽐내며 넓은 실내를 비추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불빛은 너무도 미약해 넓은 대전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치 독사의 혓바닥처럼 일렁이는 푸르스름한 빛이 온 힘을 모아 대전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대전의 바닥. 야명주의 희미한 잔광(殘光)을 받으며 바닥에 깊숙이 부복해 있는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너무 어두워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략 이십대로 보이는 청년이 얼굴을 바닥에 묻다시피 한 채 최대한 공경한 어조로 말을 꺼내고 있는 중이었다. “사부님! 하오면 제마궁에서 도움을 청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실내를 부유(浮游)하는 야명주의 희미한 잔광뿐이었다. 실내 어디에도 사람의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청년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선 어떤 복안을 갖고 계신지요?” 청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 온 목소리 하나. 언뜻 들으면 노인의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젊은 청년의 것 같기도 한 목소리는 잔잔하지만 힘 있게 청년의 귓가로 울려 퍼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괜한 자만심 때문에 그들처럼 낭패를 볼 필요는 없겠지.” 청년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네가?” “예! 이번 기회에 놈을 제거해 철저하게 화근을 뿌리 뽑겠습니다.”  청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문득 희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후후, 네 원한 때문이 아니고?” 청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 어둠 속에서 들려 온 목소리는 단지 한 마디뿐이었지만, 청년은 사부가 자신을 질책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청년이 굳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사부님의 영명에 누를 끼친 죄 백번 죽어 마땅하나,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기필코 놈의 수급을 잘라 오겠습니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기이한 무형(無形)의 기세가 그의 몸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실 몇 가닥으로 그의 몸을 감은 것처럼 미약했지만, 나중에는 만근 거석처럼 그의 온몸을 짓눌러 왔다. 그는 사부가 이와 같이 엄청난 기운을 내뿜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바로 화가 났을 때였다. 청년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사부는 평소 그들 사형제에게 자상한 편이었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짓을 했을 때는 절대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사부가 싫어하는 것, 그것은 바로 패배(敗北)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부는 누구와 겨뤄서 패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정정당당한 패배보다는 오히려 비겁한 승리를 더욱 좋아했다. 사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청년으로서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부의 노여움을 샀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흐읍!’ 청년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사부에게서 무슨 벌을 받기도 전에 온몸의 혈관(血管)이 모조리 터져 나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몸의 여기저기 핏줄이 서고 옷마저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을 즈음 어둠 속에서 조여오던 무형의 기세가 씻은듯 사라지며 잔잔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를 어떤 방법으로 처리하겠느냐?” 급작스런 물음에 청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렸다. “그, 그건……” 청년이 말을 못하고 더듬거리자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어둠 속에서 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칠객(七客)을 데리고 가거라. 그들이라면 충분히 그자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순간, 청년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청년의 얼굴에는 이미 일을 성사시킨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지만, 어둠 속의 목소리는 단지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청년은 사부가 혼자 있고 싶어 함을 알았다. “사부님! 그럼 제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청년은 어둠을 향해 조심스럽게 절을 한 후 자리를 물러났다. 넓은 대전은 이내 쥐새끼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새어나왔다. 번쩍! 그 빛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실내가 순간적으로 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강렬한 빛을 낼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사람의 눈빛이었다. 노인(老人). 횃불 같은 안광을 토해 내며 노인 하나가 묵묵히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이는 수염이 탐스러운 노인은 태사의에 앉아 상념에 빠져 있었다. ‘홍아(鴻兒)! 너는 놈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상념은 계속되었다. ‘비록 그들과 힘을 합치기는 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뜻을 이루게 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겠지. 그때를 위해서라도 놈을 꼭 없애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힘의 우위를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노인의 눈에서 더욱 강렬한 빛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다.파앗! 마치 암흑의 대지(大地)에 번개가 작렬하는 것 같았다. 하나,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눈빛은 광채를 잃고 다시 어두운 대전 속으로 사라졌다. 암흑(暗黑)의 대전. 희미한 야명주의 불빛만이 일렁이는 넓은 대전은 태고(太古)의 적막함을 유지한 채 그저 시간의 흐름에 온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