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친구냐? 적이냐?
(1)
두 사람이 맞부딪치는 순간,
꽈과과과……꽝!
벽력 같은 폭음이 터지고 태양과 태양이 충돌하듯 번쩍 휘황찬란한 빛을 뿌렸다.
그리고 주위는 고요해졌다.
마치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석비룡과 면사인은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휘이잉!
잠시 그쳤던 바람이 다시 격전의 현장 위를 몰아쳤다.
석비룡은 사뭇 놀라는 표정으로 면사인을 바라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남궁세가(南宮世家)의 탈맥신수(奪脈神手)에 해남(海南) 은풍문(銀風門)의 용형구괴공(龍形九壞功)까지, 천하의 모든 무공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놈이다! 거기다 환공보법의 움직임까지 훤히 파악하고 있을 정도라면 저놈의 무공은 도대체가……? 가만…….'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줄기 불길한 느낌.
'환공보법을 안다면 설마……?'
면사인은 석비룡을 향해 다가왔다.
"후후후……! 아무리 바동거려도 소용없어. 내 손에 걸려서 무사한 놈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놈! 좋아하기는 아직 일러!"
석비룡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쳤다.
파팍!
그의 두 손에서 뻗어나온 두 줄기 강기가 면사인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면사인은 비웃음을 흘리며 쌍장을 교차시키며 펑펑! 앞으로 쳐냈다.
"그런 평범한 수법으로 날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후회할 거야, 라는 뒷말은 미처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날린 쌍장과 석비룡이 내뻗은 강기가 맞부딪치려는 순간, 갑자기 아래로 휙 꺾어지더니 땅 속으로 파고들어간 것이다.
꽈꽝!
폭발을 일으키며 거대한 흙더미가 위로 솟구쳤다. 솟아오른 흙은 마치 산사태가 덮치는 면사인의 몸을 덮쳐왔다.
"감히 잔재주를……!"
면사인은 고함과 함께 맹렬히 쌍장을 뻗어냈다.
수백 개로 늘어난 손 그림자가 흙을 사방으로 쳐냈다.
"허억!"
면사인은 깜짝 놀랐다.
쉐에엑……!
흙 속에서 섬전과 같이 예리한 빛 한 줄기가 쏘아져 날아온 것이다.
뒤이어 석비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인간으로선 피할 수 없는 무영탄기라는 것도 알고 있을 테지!"
"빌어먹을!"
면사인은 발끝으로 땅을 찍고 황급히 솟구쳐오르며 몸을 뒤집었다.
팟!
빛줄기는 그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무영탄기는 허공으로 사라졌고 면사인은 빙그르르 한바퀴 공중제비를 넘으며 땅 위에 내려섰다. 허나 무영탄기는 어김없이 흔적을 남겼다.
면사인의 얼굴을 가렸던 면사가 두 쪽으로 갈라져 하늘거리며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진면목을 확인한 석비룡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금수왕 뇌파극! 역시 네놈이었구나!"
뇌파극은 흥!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먼저 시비를 걸은 건 네놈이야. 천뇌옥에서 네놈에게 속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돌아!"
두 사람은 자신의 얼굴근육으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분노를 얼굴에 표현하고, 잡아먹을 듯이 상대를 노려봤다.
그리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게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치사한 놈! 아무리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날 희롱해?"
"그렇다고 무림맹과 결탁해 나를 죽이려 하는 놈이 어딨어?"
"이 나쁜 자식! 네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개망신을 당했는지 알아? 그러고도 네놈이 내 친구냐?"
"개소리 집어 치우고 일찌감치 죽었다고 복창해, 이 우라질 자식아!"
두 사람은 똥물에 튀겨 죽일 자식이라거니, 네놈의 살로 포를 떠 지나가는 똥개에게 던져 주겠다는 둥 왜 자신들이 일찍이 세상의 더러운 욕을 배우지 못했는가를 한탄했을 정도로, 욕이란 욕은 모두 동원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ㅋㅋㅋ! 당세를 풍미하는 두 영웅이 그러고 있으니 정말 볼만한 구경거리군, 그래!"
두 사람은 흠칫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휘릭! 휘리릭!
수십 개의 검은 신형들이 마치 새처럼 폐장원의 정문 위로, 담 위로 솟아올라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이건 또 뭐야?"
처척!
맨 앞에 표표히 내려서는 인물은 삐쩍 말라 해골을 연상시키는 노인이었다.
'일양파 문주 제천혈랑 백충산!'
석비룡은 눈썹을 찌푸렸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가 운가려를 고쳐준 죄(?)로 신수궁에 잡혀있을 때, 무림맹의 척살자로 신수궁을 침입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이놈이 또?'
석비룡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노려보자, 뇌파극은 손을 훼훼 내저으며 사래 치듯 고개를 저었다.
"난, 난, 아냐! 이건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만수왕의 말이 맞네."
백충산은 뇌파극을 향해 가볍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일전엔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은 격이 됐지만 이번엔 우리 힘으로 자네를 찾았다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퍽이나 사이가 좋은 것 같았다.
"여러분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하는 바외다."
뇌파극은 백충산의 인사에 포권으로 답하고는 석비룡을 돌아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것 보라구. 친구를 그렇게 의심하는 게 아냐."
뇌파극은 누명을 벗게 된 것이 기쁜 듯 의기양양해서 껄껄 웃었다.
"자, 그럼 여러 형제들께서 무림의 악인을 징벌하러 여러분들이 오셨으니 소인은 이만……."
뇌파극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이곳에는 잡으려는 자와 도망가려는 자 간에 한바탕 피 튀기는 살바람이 불 것이고, 자신이 괜히 끼어들어 피 볼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백충산이 뇌파극의 얄팍한 심보를 눈치 못챌 리 없다.
그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누구 맘대로 어딜 가겠다는 건가?"
오른손을 척, 올리자 뇌파극의 앞을 스스슥! 나타나는 네 명의 인영들.
일양파에서 도망자를 추적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키워낸 귀원포사였다.
뇌파극은 백충산을 쳐다보며 웃는 낯으로 물었다.
"백 문주님, 왜 이러십니까?"
백충산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소용없어. 어차피 네놈도 천리무영과 함께 무림맹의 살명부에 오른 놈이니까."
뇌파극으로서는 펄쩍 뛸 일이었다.
"그……그건 완전히 잘못 아신 겁니다!
한쪽에서 고소하다는 듯 키득키득 웃고 있는 석비룡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소연을 했다.
"난 정말 억울해! 주범은 저놈이고 난 단지 아무것도 모르고 저놈이 시키는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백충산이 석비룡에게 물었다.
"만수왕의 말이 맞나?"
석비룡이 맞다고 할 턱이 있는가?
그는 당연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된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저놈 말을 믿소? 교활하기로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수왕 뇌파극, 저놈이 누가 시킨다고 무턱대고 아무 일이나 할 것 같습니까?"
뇌파극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여 몸을 부르르 떨며 악을 썼다.
"서……석가 이놈! 네놈이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석비룡은 사뭇 다정하게 말했다.
"설령 네 말 대로 너는 아무 죄도 없이 내게 누명을 썼다 말한다고 이분들이 믿어 줄 것 같냐? 다 나름대로 조사를 마치고 오신 분들인데……."
그의 말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느 누구도 뇌파극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뇌파극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소매를 팔꿈치까지 척척 걷어 올렸다.
"좋아! 오늘 네놈과 아예 끝장을 보고 말겠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석비룡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섰다.
백충산은 잠시 멍청하게 두 사람이 하는 모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처한 위험에는 아랑곳없이 서로 헐뜯고 싸우는 꼴이라니.
위기감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나 한참을 보고 있자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놈들이 대체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을……? 일양파 문주인 내가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백충산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소리쳤다.
"뭣들하고 있느냐!"
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귀원포사를 비롯 사십 명에 이르는 일양파의 무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만사멸절진(萬絲滅絶陣)!
한 번 발동하면 돌파를 허용하지 않는 일양파 최고의 진식이 펼쳐지는 것이다. 무사들 하나하나가 오랜 훈련을 받은 듯 행동이 빠르고 절도가 있었다.
처처척!
그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졌다 모이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점점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석비룡과 뇌파극을 겹겹이 에워싸는 것이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이 지경이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가 없다.
옥신각신 하던 석비룡과 뇌파극도 주위를 둘러보면서 사태가 심상찮음을 깨달았다.
"그래, 네놈이 잘났으니 이쯤에서 관두자, 관둬!"
석비룡이 먼저 휴전을 제의했고, 뇌파극도 자못 비장한 모습으로 동의했다.
"비록 네놈이 먼저 시작한 일이지만 지난날의 우정을 생각해서 원한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언제 말다툼이라도 했냐는 듯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랜 우정을 간직한 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지극히 정겨운 미소……
그러나 아마 누군가 이 순간 두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흐흐! 내가 그 일을 잊을 것 같아? 내 복수는 아직 십분지 일도 안 끝났어!'
'기생오라비 같은 놈! 감히 날 물 먹여? 뒷간에 얼굴 처박고 통곡하도록 만들어주마!'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으니……
그동안 일양파의 무사들은 완벽한 진형을 갖추었다.
석비룡과 뇌파극을 에워싼 후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 뒷줄은 왼쪽으로, 이렇게 줄과 줄이 교차하면서 반대편으로 돌아가는데,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이내 그들의 신형은 보이지 않았고 하나의 선으로 변해 석비룡과 뇌파극을 압축해 들어왔다.
진식 뒤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백충산의 모습은 한가하게 불구경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한번 걸리면 먼지 한 톨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본문의 자랑거리 만사멸전진일세."
석비룡과 뇌파극은 등을 맞댄 채 흥! 코웃음을 치며 맞받았다.
"이봐 석가! 이자들이 아직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군."
"우리가 힘을 합치면 천하의 누구도 막지 못한다는 걸 아직 모르나 보군!"
"자! 가볼까?"
"좋지!"
두 사람은 외침과 동시에 쉐엑! 위로 솟구쳐 올랐다.
"도망을 치겠다고? 어림없는 수작!"
백충산의 외침에 뒤이어,
"아합!"
"아자잣!"
진식의 뒷줄에 있던 무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 모습은 보자기를 훌렁 뒤집는 것 같다고 할까, 그물을 던지는 것 같다고 할까?
석비룡과 뇌파극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공중의 퇴로가 막히자 멈칫했다.
그때 백충산의 고함이 터졌다.
"놈들을 잡아랏!"
진식을 이룬 무사들이 일제히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츄츄츄츄!
쉬쉬쉿!
그들의 소매 속에서 뻗어 나오자마자 넓게 펼쳐져 두 사람의 몸을 덮치는 수만 가닥의 선(線). 그것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반투명의 가느다란 실이었다.
휘리리릭!
어떻게 옴쭉 달싹할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을 칭칭 휘감아버리는 실들.
석비룡과 뇌파극의 지금 모습은 거미줄에 휘감긴 벌레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무사들이 일제히 줄을 잡아당기자 석비룡과 뇌파극은 어억, 비명을 지르며 더 이상 공중에서 버틸 힘을 잃고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2)
"흐흐흐! 네놈들이 먼지가 아닌 이상 만사멸절진을 빠져나갈 수는 없지."
백충산은 애초 우려했던 것보다 너무 수월하게 잡았다 생각하면서 무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빠져 나왔다.
'네놈들을 찾느라 십팔만 리를 헤매며 고생을 했으니 그 분풀이로 두 놈의 따귀를 갈기고 얼굴을 발로 짓밟아 주리라.'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던 백충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부릅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만사멸절진이 잡은 것은 석비룡과 뇌파극이 아니라 석비룡의 손에 죽어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뒹굴고 있던 항주의 뒷골목 패거리 가운데 두 명이었다.
"병신 같은 새끼들!"
쫙…… 쫘쫘쫙!
무사들의 눈에 하얀 불똥이 번쩍 튀겼다.
백충산의 손바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그들의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
무사들은 볼을 감싸쥐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일로(一路)는 남쪽! 이로(二路)는 북쪽!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무사들은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허둥지둥 일어나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 * *
폐장원에서 사오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숲은 야트막했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아 울창한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숲에는 자욱한 밤안개(夜霧)가 밀려들었다.
타다닥……!
백충산을 비롯 일양파의 무사들은 전력으로 경공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상대방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꼬박 세 시진 동안 추적을 계속하고 있었다.
백충산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추적에는 일가견을 가진 천하의 귀원포사조차 쉽게 꼬리를 잡을 수 없었다.
귀원포사들이 사방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석비룡과 뇌파극의 흔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즉시 땅바닥에 엎드려 귀를 대본다, 주위의 흔적들을 찾아봤지만 영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공중에서 백충산이 표표히 아래로 내려섰다.
"어떻게 된 거야?"
귀원포사 중의 하나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놈들의 흔적이 끊어졌습니다!"
"무슨 소리야? 촌각도 놓치지 않고 쫓아 왔는데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말이 되나?"
백충산은 고함을 지르면서도 눈동자를 빠르게 좌우로 굴렸다.
숲에 밀려드는 안개의 농도는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번뜩이며 안개를 뚫고 우거진 삼림 사이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때였다.
수하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문주님! 저기를 좀 보십시오!"
그가 가리킨 오른쪽, 안개 저편으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뭔데 호들갑을……."
백충산은 신경질 적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저, 저건……!"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안개 속으로 보이는 거대한 장원……
거대한 담장이 마치 성벽처럼 둘러쳐졌고, 대문 바로 앞에는 커다란 사자상 한 쌍이 서로 마주보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문루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았으며 문액에는 황금빛 찬란한 글씨로 큼지막하게 일양파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수천 리 떨어진 남해에 있어야 할 일양파가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멍청히 서 있지 말고 따라와!"
백충산은 고함과 함께 장원을 향해 빠르게 쏘아져 날아갔다.
두 손을 세차게 앞으로 휘둘렀다.
콰쾅!
그의 내갈긴 일장에 대문은 산산조각났다.
부서진 대문 안으로 들어선 백충산의 눈은 점점 더 커졌다.
"또, 똑같다!"
대문 안에는 매끄러운 석판이 깔려진 보도가 길게 뻗어 있었고, 길 양편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푸른 장송(長松)들이 늘어서 있는 것까지……
무사들의 얼굴은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맙소사!"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어떻게……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마치 여우에라도 홀린 듯 무사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놀란 순간도 잠깐, 백충산은 어느새 다시 침착성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부하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있을 건 다 있지만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그것은 냄새! 대기 속에서 바다의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고향 특유의 냄새가!"
과연 그랬다.
그들을 가둔 환영진(幻影陣)은 절묘했지만, 일양파의 냄새까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이건 뭔가 이상해……."
수하들이 정신을 차릴 때쯤 다시 진식이 발동했다.
삐이꺽!
월동문이 열리고 수십 명의 남녀가 그들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저 사람들은 일양파의 식솔들인데……?"
"갈수록 점점……."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의 파도에 휩쓸렸다.
그들이 본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딸과 아들이며, 아내며, 부모들이다.
백충산은 바락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려! 이건 환상일 뿐이야!"
이미 수하들의 의지는 꺾인 후였다.
백충산은 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앞으로 쭉 뻗었다가 휙 잡아당겼다. 일신 내력(內力)이 삼갑자 이상이어야 시전할 수 있는 허공섭물(虛空攝物)……
쑤우욱!
귀여운 소녀 하나가 그의 손 앞으로 쭉 빨려왔다.
백충산은 소녀의 목을 꽈악! 움켜쥐었다.
"감히 이따위 잔재주로 노부를 희롱하려 들다니!"
왼손으로 머리통을 잡고 위로 힘껏 뽑아올렸다.
뿌드득!
통째로 뽑혀 올라가는 소녀의 머리통.
일양파의 무사들은 그 잔인함에 고개를 돌려 외면했지만 소녀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피가 아니라 지푸라기였다.
짚으로 만든 인형에 불과했던 것이다.
백충산은 짚 뭉치로 변한 소녀의 머리통을 번쩍 쳐들어 보이며 외쳤다.
"봤나? 이것들은 모두 허수아비란 말이다!"
"예……예!!"
부하들은 그제야 화들짝 정신이 드는 기색이었다.
백충산은 빠르게 외쳤다.
"알았으면 모조리 없애버렷!"
그런데 그때였다.
그들의 귓속을 파고드는 한 줄기 전음이 있었다.
'명심할 것은 잘 골라 없애야 한다는 거야. 그들 중에는 우리를 쫓던 당신의 부하들, 일로와 이로 소속의 수하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니까…….'
부하들은 우뚝 멈춰 서 버렸다.
전음은 계속 들려왔다.
'안 그래? 아무리 화가 나도 자신이 키운 부하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비극은 없어야 할 게 아닌가?'
백충산은 분기탱천하여 발을 쿵 구르며 소리쳤다.
"천리무영 석비룡, 이놈! 숨어서 큰소리만 치지 말고 썩 앞으로 나서라!"
휘이이잉!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한 줄기 전음.
'백충산! 당신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환상진이라네. 모든 게 공짜이니 원 없이 즐겨 보시도록…… 틀림없이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 믿소.'
"저, 저게 도대체……?“
바람이 사라진 후, 눈 앞에는 봄날 아지랑이와 기운이 감돌았다.
스스스……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 땅에서 솟아오르듯 모습을 나타냈다.
꿈 속에서나 그려봤던 여인들……
한 둘이 아니었다.
수십 명에 이르는 아리따운 용모와 몸매를 자랑하는 절세의 미인들이 나비와 같이 나풀나풀 춤을 추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 엄청난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내공이 정심한 백충산을 제외한 대부분 일양파 무사들의 정신이 휘말려들기 시작했다.
이 순간, 천지간의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이 변해 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만물들이 사라지고 시간까지 정지해 버린 듯했다.
여인들은 춤을 추며 그들 앞에 날아와 멈춰 섰다.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섬섬옥수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어깨 밑으로 촤르륵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렸다. 아래로 내리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옷자락이 흘러내렸고, 긴치마가 길고 흰 다리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일양파의 무사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선 야수와 같은 욕정의 불길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풍만한 젖가슴과 가냘픈 허리, 그리고 숲이 우거진 삼각지대……
마침내 여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벽한 나신이 되어 그들 앞에 섰고……
어느 순간, 일양파의 무사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정신없이 앞을 향해 내달려갔다.
백충산이 어떻게 말려 볼 사이도 없었다.
그들은 여인을 끌어안고 볼과 입술을 비벼댔다.
어떤 자는 여인의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고, 어떤 자는 달려가며 자신의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있었다.
백충산은 극도의 분노에 휩사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리무영 석비룡 이노옴! 절대 널 용서치 않겠다."
그의 노여움에는 아랑곳없이 숲속에는 여인들의 야릇한 교성과 함께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만 뜨겁게 차오르고 있었다.
(3)
붉은 대리석이 깔린 화려한 욕실이었다.
뽀오얗게 피어오른 수증기 속에서 부드러운 여체가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움직이고 있었다.
챠륵, 챠르륵……!
여인의 몸 위에 부딪는 물소리가 맑고 가볍다.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오만해 보이는 얼굴. 바로 묘수옥녀 채소소였다.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찰랑찰랑거리며 부드럽게 어깨와 뺨을 때렸다.
'내가 왜 이러지. 고작 한 번 만나봤을 뿐인데…….'
그녀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 매혹적으로 웃어주던 한 남자!
'대체 누굴까?'
채소소는 뜨거운 물 속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신비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야.'
목까지 숨이 차서야 그녀는 얼굴을 수면 위로 빼 올렸다.
"휴우!"
목줄기에서 모였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조그만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곱게 그녀의 얼굴 위에 반사됐다.
'오늘 따라 달빛은 왜 저리 고운 거야?'
그런데 그 달빛 속으로 나비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반쯤 열린 창문을 넘어 안으로 나풀나풀 날아 들어왔다.
"흐음, 넌 또 무슨 연유로 밤을 떠도느냐?"
길고 가느다란 손을 쭉 뻗어 가볍게 나비를 잡았다.
손가락 사이에 날개가 끼어진 나비는 애처롭게 날개를 떨었다.
"너도 나처럼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는 거니?"
채소소는 나비를 놓아주었다.
"어서 그 분에게 가렴. 가서 네 마음을 전하려므나."
마치 사랑의 전령이라도 되는 듯 나비는 그녀의 애타는 마음을 담아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피슛!
한 줄기 예리한 지풍이 나비를 관통했다.
파직!
나비는 그대로 으스러져 버렸고, 두 쪽의 아름다운 날개만 하늘하늘 욕조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누구……?"
채소소는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지풍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어떤 놈인지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 감히 내 앞에서 이따위 무례를 범하다니……!"
언제 들어왔을까?
욕실 문 앞에 하늘빛 장포를 입은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약관이 갓 지났을까?
칼날 같은 눈썹에 영기가 있어 보이는 눈동자, 풍류아다운 멋을 드러내는 준수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좀 경박해 보이고 눈꼬리 사이에 음침한 기운이 엿보이는 것이 단점이었다.
채소소는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누군가 했더니 단명회(丹鳴會)의 후계자인 주전학 도련님이시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욕조 속으로 깊이 몸을 파묻었다. 아무리 항주의 말괄량이로 소문난 묘수옥녀지만 처녀가 사내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는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도련님이라…… 별로 듣기 좋은 호칭은 아닌걸."
주전학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욕조 앞으로 다가왔다.
"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해욧!"
채소소의 목소리 끝이 뾰족하게 올라갔지만 주전학은 여유 있게 야릇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 말도 삼 년 만에 만난 낭군님께 던질 말은 아니야."
채소소는 끈끈한 눈길이 자신의 가슴과 그 아래를 더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전학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빛나는 눈동자와 깨물어 주고 싶도록 붉고 촉촉한 입술, 그녀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온몸에서 자아내는 관능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야릇한 열기가 그의 눈에서 시작돼 가슴으로 급속히 번져갔다.
채소소는 세면대 위에 걸쳐놓은 잠옷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먼저 주전학이 낚아챘다.
"도……돌려주지 못해요."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뺏기 위해 일어설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오도 가도 못하는, 꼼짝없이 욕조 속에 갇힌 한 마리 병아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전학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누이는 정말 아름다워졌는걸? 그야말로 눈이 부실만큼 성숙해졌어."
채소소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쌩 돌았다.
"그래요? 하지만 어쩌죠? 난 당신만 보면 교활한 뱀이 떠오르니 말예요. 어서 나가요! 이러면 당신 몸이 성치 않을 거예요."
주전학은 빙글빙글 웃었다.
"자꾸 그러지 말라구. 소소 누이와 난 웃어른들에 의해 이미 혼인이 결정 난 사이야."
채소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슨 헛소리?"
주전학은 여유만만 했다.
"몰랐나? 웃어른들께서 현명한 판단을 하신 게지. 소소 누이의 백소회와 우리 단홍회의 힘이 합쳐지면 십팔봉회 전체를 장악하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것은 곧 우리 십팔봉회의 서열을 구파일방이나 육문오가의 앞에 세우는 기초가 될 거야."
"호호홋!"
채소소는 조소를 터뜨리며 홱 돌아앉았다.
"뭔가 엄청난 환상에 빠져있군요. 그따위 잔머리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주전학의 손이 채소소의 어깨를 꽉 움켜잡고 몸을 돌렸다. 그의 날카로운 한 쌍의 눈이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잘 들어. 열흘 후 벌어지는 십팔봉회의 비무대회에서 우승하는 건 우리 단홍회야. 그 자리에서 소소 누이와 나의 혼인은 발표될 테니까!"
채소소는 눈을 찔끔 감아버렸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말을 돌렸다.
"그쪽이 편한 대로 하시지. 아예 내친김에 천하통일을 해버리든지……."
주전학의 턱이 꿈틀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턱을 받쳤다.
"소소 누이…… 난 가시달린 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채소소는 눈을 번쩍 떴다.
"경고하겠어. 당장 이 손을 떼지 않으면 큰코다치게 될 거야."
주전학은 빙긋 웃었다.
"그래? 어디 큰 코 한 번 다쳐볼까?"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는 것이다.
"이 발칙한……!"
순간 채소소의 두 손이 물 속에서 촤아악! 솟아나와 손 끝이 주전학의 가슴을 노렸다.
그러나 이 동작은 커다란 실수였다.
주전학은 이미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란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채소소의 오른손이 물 밖으로 빠져나와 쏜살같이 공세를 가했을 때,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가슴을 뒤로 젖혀 손이 허공을 치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는 왼손을 내밀어 재빨리 채소소의 어깨 혈도를 찍어버렸다.
"아앗!"
채소소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쉽게 그의 함정에 빠져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너무 때가 늦어버린 후였다.
"흐흐흐! 너무 아쉬워 말고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시오, 소소 누이. 장차 아내 될 사람과 피 튀기게 싸워서야 어디 남자라고 할 수 있겠소?"
"이 개자식아! 차라리 날 죽여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 소소 누이같이 어여쁘고 귀여운 여자에게……."
주전학은 승자의 여유를 한껏 부리며 그녀의 입술을 유린하기 위해 천천히 얼굴을 아래로 가져왔다.
채소소는 입을 오므렸다가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 퉤, 침을 뱉었다.
침은 그의 뺨에 착, 달라붙었다.
"이게 뭐야……."
주전학의 가늘게 찢어진 눈초리에 뱀처럼 차가운 냉기가 물씬 뿜어 나왔다.
"이 계집이, 귀엽게 봐주려 했더니……."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뻑!
채소소의 고개가 옆으로 홱 젖혀졌다.
볼이 욱신거렸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재차 침을 뱉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리 대비하고 있던 주전학의 손바닥에 막혔다.
"말로 해서는 안 되는 계집이군."
왼손을 들어 채소소의 머리끄댕이를 움켜쥐고는 오른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갈겨대기 시작했다.
쫙, 쫙, 쫙……!
그의 손바닥이 연달아 그녀의 뺨에 작렬했다. 주전학은 자신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 세차게 뺨을 때렸다.
채소소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백소회의 금지옥엽으로 온 집안의 귀염만 받으며 자란 그녀에게 이런 치욕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눈물을 보고 주전학은 손을 멈췄다.
채소소의 뺨은 퉁퉁 부어오르다 못해 살이 갈라지고 피가 배여 나와 있었다.
"쯧쯧, 불쌍한 소소 누이. 그렇게 앙탈만 부리지 않았으면 내가 다정스럽게 해줬을 텐데……."
가증스럽게도 주전학은 뱀 혓바닥 같은 혀를 내밀어 뺨을 날름날름 핥았다. 또한 조금 전까지 모질게 뺨을 때리던 손을 물속으로 집어넣어 채소소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채소소는 치욕감과 굴욕감에 치를 떨며 이를 악물었다.
놈의 손이 더러운 벌레의 더듬이처럼 그녀의 온몸을 기어 다녔다.
날씬한 어깨와 팔, 허리를 더듬으며 내려오다가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주전학은 마치 갓 구워낸 도자기를 쓰다듬 듯 채소소의 몸을 어루만졌다.
"흐흐흐! 진작 이렇게 순순히 굴었으면 그렇게 맞지 않아도 됐잖아."
뭉클!
주전학이 손아귀 가득 그녀의 젖가슴을 쥐고 일그러뜨린 것이다.
채소소는 이 순간 혀를 깨물고 죽을 작정을 했다.
이런 놈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키는 것이 나으리라.
첫댓글 rr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