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우리(부부)는 20대 중반 결혼하여 부산에서 결혼하여 신혼생활을 시작했었다. 태생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결혼 신혼 생활도 어렵게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시절(70년후반) 에는 나라도 백성도 어려웠든 시절이였다. 나 또한 빈농의 자식으로 어려운 객지 생활을 하며 신혼 생활을 시작했었고 당시 나는 직장을 다니며 아내는 아들 두명과 함께 가사家事에만 전념했었다. 어느날 직장에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아내가 하는 말이 요즘들어 잠을 자면 큰 구렁이가 꿈에 자주 보여서 오늘 이웃에 아줌마들이 낮에 모여 있는 자리에서 이런 저런 예기를 하던 중에 꿈예기를 했었다고 말을 한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랫방에 사는 젊은 새댁이가 어느날 언니하면서 부르길레 나가보니 언니 우리집에 와보라 하길레 따라 가보니 자기 친정엄라고 소개하면서 얼마전 언니 꿈예기 자세히 다시 말해 보라고 하길레 꿈예기를 하니 듣고 있든 친정 엄마께서 한숨을 쉬면서 그 꿈은 시주를 모셔야 된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시 새댁의 엄마는 무당이였다. 훗날 뒤늦게 알았다) 아내는 처음 듣는 시주 예기를 듣다 보니 그게 뭔데요 라고 물어보니 단지에 쌀을 넣어 선반이나 찬장에 모셔 놓으면 된다고 말을 하길레 아내가 그러면 아저씨하고 의논을 해야 되는데 우리 아저씨 이런 말들은 씨알도 안먹힙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훗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내는 빈손을 하여 시주를 모셔 놓았다는 말을 듣고 어느날 가만이 생각해 보니 언제 부터인가는 모르지만 퇴근길에 시내버스에서 하차하면 집까지 걸어서10여분이 걸리는데 무슨 바쁜일이 없는데도 매일 뛰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오고 했던기억이 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주의 영험이 이런거구나 라고 생각 했던 지난 시절이 있었다. 훗날 아내는 시주를 모셔 놓고 나서 언젠가 부터 이웃에서 놀러오는 낯선 여자들을 마주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생각 하지도 않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날 새댁의 친정엄마가 왔길레 그동안 아내가 있었던 상황들의 예기를 듣더니 아내에게 하는 말이 새댁은 빈손을 해서 명월을 모시고 비는 공간을 만들어 정성을 들여야 되겠다고 하면서 시어머니가 선생이 되어서 아들 살리자고 들어 오는데 어쩌면 좋을고 라고 하시며 혀를 끌끌차면서 한숨을 쉬며 걱정을 하며 말을 하지 못하길레 아내도 이것은 진짜 안된다고 잘라서 말을 했다고 한다, 아내 생각은 남편인 내 성격을 알기 때문에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첫말에 안된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난 어느날 아내가 내 눈치를 보면서 힘들게 말문을 열고 나에게 그간에 있었든 일들을 말을 하며 의논을 하기에 나는 첫마디에 승락을 했다. 이런 내 모습에 아내는 감짝 놀라면서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내 나이 4살때 내 여동생은 두살때 어머니는 병환으로 저 세상을 떠나셨다. 성인이 되고 나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중 어린시절 어느날 초저녁 내가 없어서 찾아보니 감나무 밑에 앉아서 달을 보고 달아 달아 우리 엄마는 왜 오지 않느냐고 하면서 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 날 이후 어느날부터 계모밑에서 자라다 보니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내 가슴 한켠에 엄마에 그리움의 사무침이 한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에 나는 알게 되었고 지금도 엄마 예기만 나오면 지금도 목이 메인다 . ㅠ ㅠ 당시에는 정월달이면 곳곳에서 용왕맞이 동토 안택과 고사 그리고 굿을 년래 행사로 집에서 많이 했었다. 우리 시주를 모시는 일도 옆방에 사전 양해를 구하고 집에서 일을 했었다. ●내가 당시에 체험한 굿예기●
그때 내나이 30대 중반 옆방 총각에게 아내가 사전양해를 얻었다고 하는데 내하고는 안면 부지다. 당시 방음도 안되는 집들인데도 굿한다고 왜 양해를 해 줬을까 하는 고마운 마음과 더불어 의문이 생긴다. ㅎㅎ
굿을 하는대 법사1명 보살1명이 굿을 시작하는데 갑자기 나와 아내가 양쪽에서 마주 보고 대나무를 잡고 있다가 대나무가 내리면(흔들림) 내가 잡은 대를 아내에게 줘야 굿이 쉽게 끝난다고 했다.
양쪽에서 대를 마주잡고 법사가 신명경을 읽어며 북,징을 두드리며 잡은 대가 흔들리기 를 바라는데 그 순간 내 머리속에 무당들이 굿할적에 대를 흔드는 것은 그냥 자신들이
흔드는 것이지 신이 내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라는 짓굿은 생각이 들면서 법사 보살이 아무리 북과 징을 쳐도 나는 절대로 손에 잡은 대나무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다짐하며 손에 잡고있는 대나무를 힘주어 더 세게 움켜 잡았다.
한참 동안 북과 징을 치며 경송經誦을 하는데 내 손에 잡힌 대끝의 잎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흔들리기 시작했고 내가 잡은 대나무가 흔들리면 상대편 아내에게 대를 줘야 일이 마무리 된다고 했다.
내게온 신명줄이 한쪽으로 모우는 의식인데 아내에게 대나무를 주게되면 나에게 있든 신명의 양줄이 걷이게 되고 그 신명의 양줄이 아내가 받아서 양줄을 한곳으로 모아 받게되는 의식이였다.
지금에 와서 당시 모습을 생각해 보면 웃고 지나갈 일인데 한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신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했고 지금은 그당시의 경험이 신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난후 나무 합판을 가지고 잠자는 작은 방한켠에 찬장 모습으로 명당을 만들고 명월을 붙혀 놓고 시주 단지를 모시고 촛불을 켜고 정화수를 올리며 아내는 가정평안을 위해 명당을 모셨지 손님을 받고 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날이후 시간이 하루하루 흐르며 아내의 모습이 달라져 갔는데 낯선 사람을 보면 무슨 말을 하든 한마디를 꼭 뱉었다. 이래저래 소문이 입으로 전하여 소문이 나고 얼마후 이사를하고 명당을 새로 만들어 본격적인 무당의 길을 들어서게 되었다. 지난 세월 언제부터 인가 나에게 단명보를 지니고 태어 났다는 말들을 많이 들어며 살아왔다. 그 단적인 예로 내나이 15살쯤 되던 해 어느날 문득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한참 들때가 있었다.
요즘와서 그때를 되돌아 보면 그때 절에 들어가서 출가를 했어야 하는 시기였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 단명보를 면하려면 출가를 해야 된다는 말은 많이 듣고 살았는데 이런저런 가정 환경이
변화로 뒤늦게 출가의 길을 들어서게 되었고 당시 아내의 모습은 나이도 묻지 않고 얼굴만 보고 점사를 보다 보니 마산에서 한때 유명세를 탓었다. 나는 뒤늦게 출가를 하였고 얼마후 신명의 인연과 아내의 노력으로 3년여만에 절을 창건하고 나는 하산하여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늘에 오기까지 세번의 창건불사를 하고 이곳 통영으로 선몽을 받고 현제 기도정진과 더불어 아내는 지금도 손님을 친견하고있다. 우리 보살(아내)도 절을 창건하면서 수계를 받고 이곳에서 신神의 고통에서 헤매는 인연자들 에게 바른길을 이끌고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 이유인가?
현제 거주하는 통영도량이 신명도량이고 이런 도량을 꿈에 선몽을 받고 인연이 되었고 아내의 경우에서 보듯이 자유천문 自有天門은 어느 누구나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니다.
몇백 몇천의 금전을 들여도 아무에게나 하늘의 천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천문을 열린자는 막힘도 없고 부정도 잘 타지 않는다. 천문이란 제자에게도 인연이 되고 신법神法을 받고 들어 오는 선관(조상)의 능력에 따라 자유自有 천문이 열리게 되는데 무당이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제자는 선관의 신력神力에 따라 제자의 운명은 달라지게 된다,
무당이라면 찾아오신 손딤들의 점사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점사를 올바르게 보아야 점사를 보러온 손님의 운명이 점사의 말 한마디로 희비喜非가 엇갈리게 되는데 점사를 아무리 잘볼려고 해도 도법을 받고 오신 선관의 신력神力의 능력에 달렸지 제자의 문제가 아니다.
무당의 말 한마디에 때로는 인생의 운명이 갈리기도 하기 때문에 점사는 신중하고 신중해야 한다. 점사도 중요하지만 신굿은 더더욱 중요하다 돌다리 두드리 듯이 최선을 다해서 신굿을 해야 한다. 사람잃고 돈잃은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다함께 노력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통영 자미정사 일정수월 합장 拜
# 자미정사 신명 기도도량 터 입니다.
# 자미정사 앞바다에 보이는 용왕 머리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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