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21:1]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리바람 같이 몰려 왔도다..."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 '해변광야'는 바벨론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이다 아라비아 사막의 남단 대평원에 위치한 초기의 바벨론은 세미라미스가 댐을 쌓기 전까지는 , 아비데누스가 '마치 바다 처럼 보인다'고 말했을 정도로, 범람하는 유브라데 강물에 자주 침수되었다. 그러나 '해변 광야'란 상징적인 이름에는 물에 잠겨 있는 바벨론의 지형 조건만이 아니라,
그 모습을 통하여 선지자가 미리 내다본 바, 바벨론의 궁극적인 운명의 불길한 전조까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이 선지자의 환상 속에서 점점 구체화된다. 적병이...남방 회리바람같이 몰려 왔도다. 바벨론에 임할 재난은 광대한 아바리아 사막에서 급속도로 불어오는 태풍에 비유된다. 광야 곧 두려운 땅에서 오리라고 예언된 적병은 다음절에 나오는 엘람과 메대인들을 가리킨다.
[사 21:2]"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주께서 가라사대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혹독한 묵시 - 이는 '묵시'의 내용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무겁다는 뜻이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 옛 주석가들은 본문을 포악한 바벨론 군주들에 대한 묘사로 본다. 이에 따르면, 바벨론이 왜 멸망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선지자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본문을 바벨론의 침략자들에게 적용시킨다.
두 가지가 다 문법적으로 가능하나 후자를 취한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 '올라가고 에워싸라'는 말은 바벨론에 대한 공격 명령이다. 이 명령은 엘람과 메대에게 주어졌다. '엘람'은 현재의 이란 남부에 해당하며 바사 제국을 가리킨다. '엘람'은 히브리인들에게 잘 알려진 반면, '바사'는 그때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바사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엘람은 후에 바사에게 합병되었다. 바사와 메대는 B.C. 539년 고레스 왕의 주도하에 바벨론을 정복하였다. 이사야 선지자 당대에 엘람과 메대가 바벨론의 연합국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묵시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이러한 혜안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영감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사 21:3]"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전절의 '혹독한 묵시'는 선지자에게 두 가지 신체적인 반응, 즉 극심한 요통과 마음의 진동을 야기시켰다. 포로기의 선지자들이 바벨론의 몰락을 환호한 데 비하면, 본문에 묘사된 선지자의 반응은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 카이저는, 이 같은 표현은 선지자들이 자기 계시의 엄중함을 부가시키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수사학적인 기교라교 설명한다
반면에 칼빈은 자기가 본 것을 백성들에게 생동감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자신을 바벨론과 동일시하여 마치 배우처럼 자신을 입을 통해 바벨론의 참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을 취하든지, 묵시의 혹독함이 간접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
본문의 히브리어 '할할라'는 '춤추다', '꼬이다'는 뜻의 '훌'에서 파생된 명사로, 몸부림치는 고통을 의미한다.선지자는 이 고통을 '임산한 여인의 고통'으로 비견한다.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 '희망의 서광'은 직역하면 '나의 기쁨의 저녁'이니, 한 날의 근심을 벗고 안식하리라고 기대되었던 저녁 시간조차 두려움의 때로 변한다는 말이다.
[사 21:4]"내 마음이 진동하며 두려움이 나를 놀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전절의 '혹독한 묵시'는 선지자에게 두 가지 신체적인 반응, 즉 극심한 요통(3절)과 마음의 진동(4절)을 야기시켰다. 포로기의 선지자들이 바벨론의 몰락을 환호한 데 비하면, 본문에 묘사된 선지자의 반응은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 카이저는, 이 같은 표현은 선지자들이 자기 계시의 엄중함을 부가시키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수사학적인 기교라교 설명한다
반면에 칼빈은 자기가 본 것을 백성들에게 생동감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자신을 바벨론과 동일시하여 마치 배우처럼 자신을 입을 통해 바벨론의 참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을 취하든지, 묵시의 혹독함이 간접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
본문의 히브리어 '할할라'는 '춤추다', '꼬이다'는 뜻의 '훌'에서 파생된 명사로, 몸부림치는 고통을 의미한다. 선지자는 이 고통을 '임산한 여인의 고통'으로 비견한다.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 '희망의 서광'(네쉐프 히쉐키,)은 직역하면 '나의 기쁨의 저녁'이니, 한 날의 근심을 벗고 안식하리라고 기대되었던 저녁 시간조차 두려움의 때로 변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