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 고대근동의 신과 비교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의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애착의 신이시다. 이기적인 욕구에 집중하여 인간들을 괴롭고 시달리게 했던 고대 근동의 신들과 달리 구약은 하나님을 인간들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신 분으로 설명한다. 애착의 반대는 거절이며, 거절의 끝은 유기, 즉 버림받음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때 하나님과의 샬롬을 회복하게 된다는 구약의 관점은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애착을 회복하는 의미가 깊다.
그래서일까? 성경은 잃어버린 자들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노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성경은 고아와 과부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한다. 성경 이야기는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나 성경의 조연들은 버림받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버림받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구약의 족장시대 아브라함의 가족 중에서 첫번째로 버림받음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이스마엘일 것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가 낳은 아이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한참 많도록 아들을 낳지는 못한다. 그러자 사라는 당시 문화를 따라 자기 여종을 통해 아들을 낳고자 한다. 그러면 그것이 곧 자신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이 여종의 이름은 하갈로 이집트 출신이었다. 아브라함과 하갈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사라의 명목상의 아들이기도 한 아이의 이름은 이스마엘이었다.
이스마엘의 탄생 이야기에는 이미 한 차례 버림받음이란 주제가 담겨 있다. 대리모의 입장이었던 종 하갈은 주인인 아브라함의 아이를 갖자 여주인인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분이 나빴던 사라는 하갈이 도망갈 때까지 학대하게 된다. 사라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광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된 하갈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오고,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로 지으라는 말을 듣게 된다. 돌아온 하갈은 천사에게 들었던 대로 말을 듣는다. 이 이스마엘의 이름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이다.
이스마엘의 이름 뜻은 중의적이다. 여주인에게 버림받은 하갈에게는 고통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 될 것이요,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당연스레 이스마엘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아이를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그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 되었으면 좋겠노라 말씀드린다. 아브라함이 그랬으니, 당시 이미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있던 이스마엘도 응당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예상밖의 일이 생긴다. 이삭이 태어난 것이다.
이삭이 태어난 뒤에 이스마엘의 입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성경은 정확히 기록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삭이 젖을 떼고 아브라함이 베푼 큰 잔치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고 되어 있을 뿐이다. 이스마엘이 달라진 분위기에 이삭에게 적개심을 품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나이차이는 많이 나지만 첫째가 둘째를 놀리는 것은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처음 태어나 혼자만 사랑을 받던 첫째들이 갑자기 생겨난 경쟁자 둘째들에게 질투심을 느끼면서 놀리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성경도 괴롭혔다기 보다는 놀린 것으로 기록하지 않는가?
하지만 사라의 눈에는 달랐다. 성경은 사라가 보니,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한다. 하갈, 자신이 조금 더 젊었을 적, 믿었던 여종이어서 아들을 얻으려 남편에게 보냈더니 나를 무시했던 녀석. 그 녀석의 아이가 내 아이를 무시하고 놀리고 있다. 사라의 눈에 이것은 더 이상 아이들 사이의 일이 아니다. 나를 무시했던 하갈, 나의 아이를 무시하고 있는 그녀의 아들. 지난 날 하갈에게 당했던 시당했던 사건의 재경험이다. 내 아이를 위해서는 두고볼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 길로 사라는 아브라함을 찾아가 말한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이 여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유산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현대인의 성경)” 10년이 넘도록 자신의 후계자로 여겨왔던 이스마엘의 문제인지라 아브라함은 오래 고민한다. 하지만 이스마엘과도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먹을것과 마실 것 얼마를 주고 내쫓게 된다.
하갈은 또 다시 버림받게 된 것이다. 첫번째 버림받고 돌아갔을 때, 그녀는 다시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조심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도 했고, 두 번째 버림받음의 발단이 됐던 사건은 하갈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그녀는 또다시 아이와 함께 광야를 헤메이고 있다. 이전에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이제는 다 자란 아이와 함께.
물이 모자라서 더이상 마실 물이 없는 상태에서 내 아이는 쓰러진다. 이스마엘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지만, 광야에는 얄굳게도 둘 사이를 가릴 것 조차 없다. 그저 저 멀리 떨어져서 하갈은 비참한 버림받음의 눈물을 흘린다.
이 엄마들 사이의 일을 겪었던 어린 이스마엘의 심정은 어땠을까? 당시 이미 아브라함은 인접지역의 왕 아비멜렉이 와서 평화협정을 맺을 정도로 강성했던 사람이었다. 이스마엘은 그런 아브라함 가문의 첫째 아들이요 후계자였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은 엄마와 함께 광야에 버려져 마실 물조차 없어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 되었다. 버림받은 아이가 된 것이다. 이해할 수 없고, 한 없이 슬프고, 무섭고, 화났을 것이다.
하갈이 처음 버림받았을 때 찾아왔던 하나님의 사자는 이스마엘에 대해 예언하였다. “네 아들은 들나귀와 같은 생활을 할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은 그를 칠 것이며 그는 적개심을 품고 자기 형제들과 동떨어져 살 것이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성격이 나쁠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있을 때 이스마엘은 존귀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지위에서 버림받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유가 분명치 않았을 것이다. 겨우 배다른 동생을 놀렸다고 이런 일을 겪는다는 것이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충격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버림받은 사람의 마음에는 의심이 자리잡는다. 가장 믿을 만한 대상에게 버림받은 경험은 이제 모든 것을 의심해야 안전한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이런 마음을 가진 이들은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작은 거절의 단서도 크게 확대해석해서 주변사람들을 의심한다. 그러면서 소심해지거나 반대로 먼저 공격한다. 그러면 당하는 사람은 황당해 하며 반박하며 떠난다.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버림받은 자는 점차로 마음으로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 하갈이 버림받았을 때 받은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예언은 그가 버림받은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예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버림받은 이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삭과 대립하게 되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가 버림받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는 두 어머니들의 영향이 컸다. 사라는 하갈을 용서하지 못한 채, 그 분노와 불안의 마음을 이스마엘에게 투영했다. 어쩌면 작은 이유가 그녀에게는 너무 크게 느껴졌다. 하갈은 처음 버림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 주셨음에 놀랍다고 고백 했다. 어찌나 놀랐던지 그 장소의 이름을 하나님이 만나주셨다는 뜻의 브엘라 헤로이라고 지었다. 두 번째 버림받았을 때에도또 다시 하나님을 만나 아들을 살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경험은 했지만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결국 아들은 버림받은 자로 살게 된다.
이스마엘의 슬픈 버림받음의 이야기 속에서는 또 다른 두 명의 버림받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었던 셈이다. 믿었던 하갈에게 멸시를 당하며 남편과 하갈에게 버림받은 기분을 느꼈던 사라, 그리고 두 번이나 아이와 함께 버려졌던 하갈. 너무나 흥미로운 점은 성경은 이 둘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셨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들이 없어서 무시당하던 사라에게는 태를 열어 아들을 주셨고, 아들과 함께 두 번이나 버림받은 하갈은 두번이나 나타나 주셨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 속에서 사라는 용서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였고, 하갈은 버림받은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알려 주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버림받은 어머니들은 이스마엘에게 버림받음을 되물려 주게 되었다.
세월이 오래 지나 아브라함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아들의 자격으로 장례를 치른다. 어렸을 때 나를 사랑해 주고 자신의 후계자로 바라봐 주었던 아버지. 그리고 자라나서는 나를 버리는 선택을 했었던 아버지. 아버지의 애착을 그리워하던 그는 버림받은 자의 정체성으로 온 세상과 투쟁하며 살아왔다. 물론 그에게는 애착어린 하나님 아버지가 필요했다. 그저 사라가, 하갈이 경험했던 것처럼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넘어, 버림받은 자에게 특별한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사랑하시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했다. 필요했지만, 또한 더욱 믿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믿을 만한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은 이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기가 어디 쉬웠겠는가? 그 어머니들조차도 해내재 못했던 것이 아닌가.
버림받은 자는 세상과 투쟁하는 삶과 살게 된다. 그러나 투쟁과 버림받음을 쫓아 살 듯 보이는 그들의 마음도 사실 샬롬을 원한다. 이스마엘이 그렇다. 아브라함의 장례식 때까지 그의 아들임을 잊지 않았듯이 말이다. 하갈과 사라가 먼저 하나님과의 회복된 애착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그 마음의 한을 풀 수 있었다면, 그래서 그 애착어린 하나님의 사랑을 되물려 줄 수 있었더라면,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후계자는 더 이상 아니더라도 버림받은 자의 정체성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그리고 참으로 내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