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만섬에 대하여
후기: 류구가 있었다? 제가 고교시절 썼던 '역사부도'에도 대만성을 틀림없이 '류구'라고 표기한 지도가 있습니다. 어린시절 이에 대한 의문을 품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류구 또는 소류구(小琉球)가 있었다는 대만성에 대하여 기존사학체제가 기술한 역사서술을 옮겨 해석해보겠습니다.
"타이완섬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한민족(이하 漢族을 뜻함.)이라고 하며 그에 관한 중국의 기록문헌 《임해수토지(臨海水土志)》는 3세기 중엽의 것이다. 7세기 초 수(隋) 때부터 한민족이 타이완의 정찰정략(偵察征略)을 시도했다고 한다. 원(元)은 1360년 펑후섬에 처음으로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다. 명대(明代)에 이르자 한민족의 도래가 증가하고 동시에 서구의 열강도 타이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 이 시대엔 류구가 대만성 및 복건성까지 장악하던 시절입니다. 이후 신라에 밀려 왜(倭)가 복건성으로 밀려났고, 류구는 연쇄적으로 대만과 오키나와일대로 국한되었습니다.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모사(Fomosa, 또는 포르모사, Formosa)라고 명명하였다. 네덜란드는 타이완 남부의 한민족을 누르고, 일찍이 1624년 안핑[安平:臺南市]에 제란디아성(城)을 구축하였다. 에스파냐도 1626년 지룽[基隆] 지방의 서랴오섬[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다시 3년 후에는 단수이항[淡水港]에 산토도밍고성을 각각 축조하고 타이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네델란드는 1642년에 에스파냐를 구축(驅逐)하고 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 1590년 포르투갈과 류구가 국교를 수립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를 전후하여 에스파냐와도 국교를 수립한 듯 합니다. 1624년에 일본-네덜란드 연합군과 류구-에스파냐 연합군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대만섬을 강탈당하고 오키나와도 빼앗긴 바, 대만은 네덜란드가, 오키나와는 일본이 분할 점령한 것이며, 이로 인하여 현대의 오키나와인들은 류구어(현재의 한반도어)와 일본어가 합성된 독특한 언어(호겐)를 쓰는 것입니다.
"1661년 명의 유신 정성공(鄭成功)이 부하를 이끌고 타이난[臺南]에 상륙하여 제란디아성을 점령해서 네덜란드인을 항복시키고 이곳을 항청복명(抗淸復明)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1683년 6월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 청(淸)은 타이완에 진격하여 정군(鄭軍)을 무조건 항복시켰으므로 정(鄭)의 타이완 지배는 불과 3대, 23년으로 끝났다. 다음해인 1684년 청은 타이완을 푸젠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타이완부(府)를 설치하였다."
==> 정성공은 일본 나가사키 출신입니다. (이 나가사키란 곳은 현 일본열도가 아닌 숭명도 부근입니다. ) 바로 도요토미 등의 서일본계의 사실상 마지막 군벌(軍閥)로서 많은 일본인들을 끌어들여 서일본세력의 앙숙인 동일본의 도쿠가와 가문과 친교했던 네덜란드를 쳤고, 이후 조선과 마지막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1683년에 서일본의 잔당들은 조선에 그들의 잔류근거지마저 함락당하며 그 세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1684년(숙종10년)에 대만부(臺灣府)를 설치한 정권은 분명 조선(朝鮮)입니다.
"그 후 대륙으로부터 이민이 격증하여 (대만섬 내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신천지를 개척하고 1885년 타이완은 하나의 성으로 독립하였다. 청일전쟁(淸日戰爭) 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1895]에 의하여 타이완은 213년간 계속되었던 청나라의 통치를 벗어나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다. 그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에 복귀할 때까지 타이완은 51년간 일본치하에 놓여 있었으며, 1949년에는 중국공산당의 내전(內戰)에 패배한 국민당(國民黨)의 장제스[蔣介石]정권이 타이완으로 이전하여 그 지배체제가 유지되어 왔다. "
==> 1700년대~1800년대,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많은 복건, 광동, 객가어 사용자들이 바다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이 때 많은 복건인(대륙조선인+일본인의 혈통, 문화, 언어의 혼혈인), 특히 남부의 하문(厦門, 샤먼)일대 이른바 복건어의 민남( 南)방언 사용자들이 대만으로 들어갔으므로, 대만성에서는 민남어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문을 장악한 적이 있던 정성공 및 그 추종 일본인 잔당들의 이민도 대만의 민남방언 계열의 언어형성에 큰 기반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점에 이의가 없습니다.
한편, 류구왕국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기간은 1429년부터 1609년까지라고 합니다. 류구왕국은 상파지(尙巴志)가 1429년에 분열되어 있던 대만섬 내의 3국을 통일하고 세운 나라로서, 1609년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에 복속되어 사쓰마번과 청의 양속(兩屬)관계였다는 역사해설이 있으나 이는 믿기 어렵습니다. 다만 1609년에 조선군에 쫒겨 도망하던 사쓰마 군벌의 일부 잔당들이 동일본(현 일본열도)으로 도망치기 위해 류구를 거치면서 류구를 잠시 유린, 약탈한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이 때부터 1624년에 걸쳐 현재의 오키나와 등 난세이(南西) 제도를 일본에 빼앗긴 것입니다. 또한 이미 AD1100년 이전에 류구라는 명칭자체는 존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