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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는. 등 )
*** 08;40 반영억 신부님, 최정훈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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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22 05:08
-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니
의식주 같은 것은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진정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우리가 걱정할 필요 없도록 청하기도 전에 다 주시는가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다 주시는지는 의문입니다.
필요한 것을 다 주신다면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들이 없어야 하고,
우리의 경험 안에서도 안 들어주신다는 느낌이 없을 텐데 실제로는
굶주린 이들이 너무 많고 우리 기도도 안 들어주신 적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일까 주님께서는 토를 다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제 생각에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달라고만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을 실천하려는
그런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필요한 것을 청하더라도 그것이 의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어리면 어릴수록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고,
어리면 어릴수록 자기중심적이고 할 도리를 모르며,
어리면 어릴수록 자기 좋을 대로 하고 대의를 저버립니다.
제 생각에 대의(大義) 중의 대의가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한두 사람의 선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 곧 공동선을 늘 지향하고,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것을 지향합니다.
그러니 자기밖에 모르는 미성숙한 사람은 대의를 저버리고,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대의를 찾고 공동선을 지향할 것이며,
신앙적으로 성숙하면 하느님의 의를 먼저 찾고 늘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소인이나 미성숙한 사람은
기도를 하더라도 자기 좋을 것만 찾을 것이고,
자기 좋을 것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지
실은 자기에게 좋은 것이 아닌 것을 찾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달라고 청한다고 합시다.
술만 먹으면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술을 달라고 청하면,
간경화 환자이면서 술을 달라고 청하면 하느님께서 안 들어주시겠지요.
그의 필요를 아시지만
그의 필요가 공동선도 자기 개인을 위한 선도 아닌 필요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굶주림과 필요를 하느님은 외면하시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고,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외면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집단적인 불의는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의인 다섯도 없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과 롯 외에 아무도 의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 모두가 회개하기 전까지 온난화로 인한 폭염은 계속될 것이고,
니네베처럼 왕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 배 채우기만을 일삼던
그 탐욕을 멈추지 않으면 남이 배를 곯고 집단적인 기아는 계속될 것입니다.
집단적인 불의에 의한 집단적인 불행과 빈곤은,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고 우리 인간이 집단적으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밖에는 답이 없음을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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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야구선수가 한 기자와 인터뷰했습니다. 이 선수는 오랜 시간 야구를 한 베테랑이었는데, 기자는 관중석에서 상대 팀 팬들이 야유를 많이 보내지 않냐면서 이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전 그런 말을 듣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기자는 그렇게 크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냐면서 다시 그 비법을 물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면 지는 겁니다.”
프로야구 선수에게는 승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는 방법이 아닌 이기는 방법만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힘든 훈련도 이기기 위한 것이고, 이기기 위해 때로는 미신과 같은 징크스를 만들어 실천하기도 합니다. 요즘 인기를 끄는 최강야구의 김성근 감독은 2만 개가 넘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역시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야유에 흔들린다면 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야유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놀리거나 험담의 말, 부정적인 말 등…. 과연 이 말을 듣고 흔들린다면 삶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듣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늘 걱정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자신을 흔들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만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우리를 향해 하시는 따뜻한 말씀이었습니다. 걱정은 참으로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 자기 명예에 대한 걱정, 무엇보다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각종 말과 행동에 대한 걱정도 너무나 큽니다. 이런 걱정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자신 있게 살 수 없습니다. 이기는 삶이 아닌, 지는 삶입니다.
이기는 삶은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에 중심을 두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커다란 선물입니다. 주님께 중심을 두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뜻에 중심을 두는 삶입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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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을 향해 가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올리버 웬들 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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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일까? 어떻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주장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에 속하며, 자기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르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성취나 자신의 편리나 이기, 자신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찾기’를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곧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혹 내가 지금 물질이나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다면,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자신의 입을 것이나 먹을 것 등 자신의 처지나 형편만을 탓하고 걱정하고 있다면,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믿고 따르며 섬겨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주님!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재물을 섬기느라, 저 자신을 섬기느라,
주인이신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아니라
당신이 재물의 주인이요, 저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 있는 것,
이미 선물로 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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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걱정하지 마세요
일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남모르는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실 모두가 근심 걱정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엇을 걱정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걱정해 봤자 소용없는 것을 걱정하는 어리석음은 그만둬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랍니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시편 저자는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시편55,22).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이는 주님께 의탁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근심을 끌어안고 삽니다.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루카 복음에 보면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주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하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위치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물면 쓸데없는 일로 바쁘지 않을 것이요, 또 괜한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과 몸을 보호하기 위한 의복의 걱정에 앞서서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주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공중의 새나 들판의 꽃들조차도 하느님의 안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 만물의 영장, 인간이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뢰하며 모든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맡겨야 함은 당연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이러한 물음은 지극히 인간적인 걱정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인생 여정에 우선적인 선택이 주님이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의탁하고 섭리에 맡기면 모든 일이 잘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이태석 신부님 아시죠? 2010년 1월 14일 오전 5시 35분 선종하셨는데 오전 1시경 사경을 헤매시던 신부께서 상체를 조금 들고 돈 보스코! 말하며 이어서 Everything is good(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란 말을 남겼습니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데 일생을 바쳤던 돈 보스코처럼, 마지막 유언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영원한 새 삶의 시작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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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팬데믹이 시작되고, 뉴욕의 상황이 심각했을 때입니다. 한국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습니다. 다행히 저는 큰 어려움 없이 팬데믹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텍사스에 토네이도와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비바람이 있었습니다. 뉴스를 접한 분들로부터 안부를 묻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텍사스가 워낙 큰 지역이기에 제가 속한 동네는 큰 피해는 없었지만,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강풍으로 ‘전기’가 나갔습니다. 전기가 있을 때는 그 고마움을 몰랐습니다. 전기가 없으니 답답한 것이 많았습니다. 서랍을 열어보니 초가 있어서 급한 대로 불을 밝혔습니다. 다행히 전기는 3시간 있다가 복구되었습니다. 전기는 늘 우리 곁에 있어서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공기와 같습니다. 전기가 없으면 우리의 생활에도 큰 불편함이 있을 겁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포스의 불덩이를 훔쳐다 인류에게 전해주었고, 그 불로 인해 인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기만큼 현대의 인류 문명을 만들어 낸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전기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걸 아시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족을 이루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을 나는 새도, 들의 꽃도 다 먹이고 입히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기 때문에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많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소의 고삐에 달린 줄을 잡고 걸으면 커다란 소는 아무런 저항 없이, 어린아이 뒤를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면 재물, 권력, 업적은 마치 소가 어린아이를 따라가듯이 주어질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의 뜻은 찾지 않고 먼저 재물, 권력, 업적만을 쫓기에 재물이라는 램프 안에, 권력이라는 램프 안에, 업적이라는 램프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3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3가지 소원은 아니지만 3가지 질문에 충실한 사람은 3가지 소원이 아니라, 원하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할 일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만나는 이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1997년 8월과 9월에 두 분의 여성이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한 분은 시골의 소녀에서 영국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던 ‘다이애나 황태자 비’였습니다. 다른 한 분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평생을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마더 테레사 수녀님’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마더 테레사는 더욱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이애나 황태자비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막강한 권력, 엄청난 재물을 지녔던 분은 점차 기억에서 사라져 갑니다. 주름진 얼굴, 가난한 삶, 겸손한 마음을 지녔던 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있습니다.
인생은 늘 밝고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생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의 때에는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그 힘을 더불어 사는 이웃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한 마음, 한 몸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이 땅은 곧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이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열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인은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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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원폭으로 모든 것을 잃었고 자기 삶도 피폭으로 인해 마치게 된 ‘나가이 다카시’가 저술한 ‘묵주알’이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집터 안방이었던 곳의 한쪽을 정성 들여 파보니 역시 우리 집 제단에 모셨던 십자가가 있었다. 물론 나무는 타버렸지만, 청동으로 된 그리스도상만은 손상된 곳 없이 그대로였다. 이 십자가는 도쿠가와의 박해 시대부터 남몰래 전해 내려온 유서 깊은 것이다. 나는 모든 재산을 잃었으나 이 십자가를 잃지 않은 것이 무척 기뻤다.
(나가이 다카시 지음. 이승우 옮김. 묵주알 중에서)
자신도 모든 것을 잃었지만 원폭 피해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의사이며 신앙인이었던 그의 글에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
국가를 떠나서 신앙인의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 다시금 느끼게 하는 순간입니다.
십자가만으로 기뻤다는 그의 말에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도 우리에게 같은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또 두려워하는 것들은 사실 모두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가 우리에게서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잡을 수도 또 그 떠나는 날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 손 가득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말입니다.
나가이 다카시가 원폭으로 모든 것을 잃고도 십자가를 잡고 기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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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보는 방법
꽃이 만발했던 지난봄의 어느 날
십자가 동산에 앉아 하염없이 꽃을 보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가까이, 또 조금 더 가까이….
예쁜 꽃을 더 가까이서 보려고 다가섰습니다.
그렇게 코 앞까지 다가갔습니다. 꽃의 안쪽까지 볼 수 있는 거리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꽃의 안쪽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안에는 벌레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리 예쁘지 않았던 것입니다.
꽃만 그렇겠습니까? 모든 것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사람까지도 말입니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그 티와 때가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실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대가 그렇게 인간관계에서 실망했다면 그 실망은 누구에게서도 아닌 그대에게서 온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그 빛과 어둠이 있기 때문입니다. 티와 때조차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때 다가가십시오.
그전까지는 조금 멀리서 보세요. 그러면 예쁘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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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
“걱정하지 마라, 보라, 찾으라”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4.>
언제 어디서나 더불어의 삶중에도 내면은 위의 민들레꽃처럼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가난하고 겸손한 은수자로 살아갈 수 있는 내공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신선한 도움이 됩니다.
“매일 자기 전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으로 위대함은 확실하게 쌓여간다”<다산>
“날마다 세 가지 점에서 나를 반성한다. 일을 할 때 불성실하지는 않았는가? 벗의 신의를 저버린 일은 없는가? 배울 때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은 없는가?”<논어>
이런 좋은 습관 역시 얼마나 믿음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요! 예전 피정자들에게 자주 예로 들었던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1.품위있는 노년 삶의 우선 순서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2.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정확하게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역대기 상권에서 요아스 임금이 우상들을 섬긴 것도, 배은망덕하게도 생명의 은인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를 죽인 것도, 그리하여 마침내 그 자신이 살해된 근본적 원인도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라면 그런 삶자체 모두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양자택일 역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삶의 중심이 하느님과 재물 둘일 때, 그리하여 마음이 갈릴 때입니다. 확고부동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이요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세 가지 충고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첫째, 걱정하지 마라!
정말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라면, 모두가 하느님 섭리 안에 펼쳐지는 삶이라면 저절로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의 삶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믿음 약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복음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 부족을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함을 아신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이미 전래 되는 속담에도 믿음의 흔적이 있습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다 그가 먹을 것은 타고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인명은 재천이라 사람의 목숨을 하늘에 달려 있다.’, 이런 삶의 낙관 역시 믿음의 반영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은 전반적으로 얼마나 약화되어 있는지요!
하루하루의 삶에,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좋은 추억을 쌓아가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됩니다. 말그대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게 하는 믿음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 믿음의 삶이 탄력좋은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 무너질 때 무기력, 무감감, 무의욕의 삶이요 저절로 죄와 더불어 심신도 병들게 됩니다. 영적 건강에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둘째, 보아라!
‘들어라!’,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삶의 허상이나 환상을 꿰뚫어 삶의 진상을,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 믿음의 눈이 열릴 때 하느님 섭리의 현존으로 가득한,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이며 마음 깊이에서는 찬미와 감사도, 기쁨과 평화도 샘솟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그런 분이십니다. 대영성가이자 신비가이자 관상가입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 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조화로운 평화공존의 세상이요 하찮은 미물들 역시 하느님 안에서 한가족임을 깨닫습니다. 지구에 대한 무절제한 채굴과 세상 생명체들에 대한 잔인한 착취와 학대 역시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습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도 차려 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입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강론을 능가할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낙관적 믿음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 크나큰 도전이 됩니다. 매사 세상 만물과 사건들은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눈여겨보고 지켜봐야함을 깨닫습니다.
셋째, 찾아라!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인간 실존입니다. 그러니 자나깨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생명과 빛의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의 평생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져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안빈낙도 자족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도의 필요로 최대의 행복을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기후위기에 대한 궁극의 유일한 처방이 이런 내적 혁명의 회개의 삶이요,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더불어 공동체 삶중에도 내면은 충만한 고독의 은수자로,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처럼 살게 하십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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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걱정하는 사람>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먹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모자랄지언정
먹일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차고 넘치지요
가질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가진 것이
모자랄지언정
나눌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가진 것이
차고 넘치지요
살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이룬 것이
모자랄지언정
살릴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이룬 것이
참고 넘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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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마태 6,27-28)
하느님의 섭리와 우리의 걱정
예수님께서 불명료한 것을 자명한 것에 비교하심으로써 그 뜻을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걱정한다고 해서 육신의 수명을 한 치라도 아니 그보다 훨씬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함으로써 여러분의 삶을 몇 순간이라도 늘릴 수 있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힘을 미치는 것 같아 보이는 일들조차도 결국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견줄 때, 우리의 걱정과 근섬과 수고 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밀랍을 뚫을 정도로 봉인을 누르면, 봉인이 찍히지 않은 부분이 없을 것이고, 그러면 밀랍은 봉인과 구별이 안 되게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정확한 지식으로 하느님께 도달하기만 한다면, 그분의 형상과 모상 안에서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이야말로 “단순한 앎”이다. 그것은 “영혼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신적 존재를 직접 알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앓이다. 신적 존재가 흘러들면서 영혼은 천사들과 똑같이 신적 본성을 받고, 즐거워한다.”
우리의 신적 근원들은 마침내 여기서 만난다.
“내가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나는 단순히 하느님이 되어야 할 것이고, 하느님도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내가 되어야 할 것이고, 나도 하느님이 되어, 이 ‘그분’과 이 ‘나’가 하나의 “존재”를 공유할 만큼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분’과 이 ‘나’는 이 ‘존재’ 속에서 우리의 일을 영원히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그분’과 이 ‘나’, 곧 하느님과 영혼은 열매를 많이 맺고, 우리는 영원히 하나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190)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니파나는 유일신 신앙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수피즘은 <꾸란>의 계시성과 무하마드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전통을 긍정하면서도, 신비주의 특징으로서 알라 그 자신으로부터 계시된 알라의 속성을 조심스럽게 구별하였다. <꾸란>은 알라가 선택한 예언자 무하마드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계시적 말씀이기 때문에, 정통 이슬람 신앙은 정전이 지닌 해석학적 인간의 몫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알라의 절대 초월성을 말히는 동시에 신의 속성과 인간 속성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신인동형론이라는 모순에 직면하곤 했다.
수피즘은 알라에 대한 모든 언어가 은유이거나 상징이므로 그것을 넘어 실재 그 자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그 길은 학문적 논리의 길이 아니라 인간 내면 깊은 영혼 안에서 신성과 직접 접촉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수피즘 전통 안에 풍요로운 은유적 신학, 상징 신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수피즘은 신을 체험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지성, 이성, 관념보다는 감성적 체험을 강조하였고, 그 절정에 이르러서는 신과 인간 간의 일치 경험을 에로틱한 성애 관계로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것은 고도의 종교적 은유로서 동서고금의 신비주의에서 자주 보여지는 바이기도 하다. 신비주의에서 신의 본질은 무한하고 온전하게 하는 ‘사랑'이라고 파악되는 것이다.
초기 <꾸란> 중심의 정통 이슬람 교리가 말하는 신의 접근 불가능성, 도덕적 책임을 묻는 엄정성, 심판자로서의 경외성 등과 비교할 때 이러한 수피즘의 모습은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러나 감정을 중시하는 이러한 특징이 오히려 무슬림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시며 수피즘의 대중화에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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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6, 32~34)
제가 저 자신을 바라볼 때 세상에서 참 좋은 몫을 택했다고 봅니다. 사실이지 제게 무슨 심각한 세상적인 걱정이 있겠습니까? 흔한 말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 걱정이 없으며, 명퇴나 정년퇴임이 없는 종신 직장에다 보험도 든든하고 노후 걱정도 없으니, 자식 걱정이나 부모님들도 이미 돌아가셨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제 팔자가 정말이지 상팔자인데 왜 세상 사람들은 저와 같은 신분(=수도자)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아마도 제가 모르는 그 무슨 비밀을 세상 사람들은 알고 계시듯 싶습니다. 도대체 아무도 가르쳐 주시지 않는군요!
어느 종교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걱정과 근심을 지닌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인생살이란 과거에 대한 후회와, 현재에 대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살아간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후회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려드는 게 인생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한 압박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가정이 있고 가족이 있다면 저인들 별도리가 있을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니 훨씬 더 무거운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살아가리라 봅니다.
성서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든 아니면 지나쳐 버리든 각자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자신의 몫이라고 봅니다. 암튼 걱정에 관한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한 문장으로,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6,27)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걱정이란 말은 본디 근심한다, 염려한다, 관심을 가진다고 하는 뜻입니다. 걱정은 근심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에 관해서 수많은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것은 죽음이잖아요. 뻔히 죽을 것 알면서 그 죽음에서 어떤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는 한계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적 한계 현실입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근심과 불안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를 수용하고, 수용하지 않으냐에 따라 인생관과 인생에 대처하는 삶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걱정하며 살아가는 걸까요? 주님은 이렇게 처방전을 줍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6,30-32)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걱정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적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믿음이 약하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이 하느님 언약의 말씀을 믿지 못할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며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근심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약속을 붙들고 싸우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만큼, 의탁하는 만큼 자유의 폭은 정비례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때론 예기치 않은 시련이나 환난 그리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담대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신실하시며 언제나 자기의 영광을 위해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또한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신앙은 약한 믿음입니다. 인간의 걱정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염려에 대하여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을 의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걱정에 대한 성서적인 해답은 그 걱정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베1서 5,7) 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시며 걱정을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고 했으니, 결론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6,33)라는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매일 그리고 생애를 거쳐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원칙이며 명제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명심하고 최우선적인 삶의 가치로 살아갈 때,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6,33) 그러니까 하느님의 모든 축복의 비밀은 이 짧은 말씀에 온전히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며 목표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대의 일이 그대의 목적과 늘 일치하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흔히 사용하는 목적이란 영어 purpose는 의도하다, 는 propose(=pro+pose; 앞에 두는 것)에서 파생한 단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의도하는 일이 항상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과 일치해서 살아간다면 매일의 삶이 분명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목적을 위해 부르심 받았기에, 이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축복받은 삶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라고 하신 당신 말씀처럼 당신의 섭리에 맡기고, 다만 오늘 이 순간 제 삶의 자리에서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자각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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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섭리’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섭리’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지혜와 힘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과 사건을 믿는 이의 구원을 위하여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힘이 우리를 이끌고 있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섭리는 진지한 삶의 태도를 먼저 내세웁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인간에 대하여 이해가 깊은 이들은 개인의 내적인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운명의 흐름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섭리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느님 나라와 거룩한 정의를 먼저 바라는 믿음으로써 주위에서 진행되는 일들이 질서를 찾게 됩니다.
사물, 인간, 상황, 운명과 같은 주변 세계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방식에 따라 형태를 갖춥니다.
믿음으로 질서 잡힌 삶을 살아가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라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을 얻게 됩니다. 곧 믿는 이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구원에 도움이 됩니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까지도 삶의 궁극적인 목표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섭리에 대한 가르침은 결코 가볍지 않은 요구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추구를 첫자리에 놓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우리에게 위대한 약속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가진 이에게 ‘구원으로 이끌리는 삶’을 마련하여 주실 것입니다.(로마노 과르디니, 『예비 기도 학교』, 154-158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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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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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게 생각하시기에
결코 굶주리게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기에
그것을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장 먹을 것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말씀이
공허한 외침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실 것만 기다린다는 것이
무책임한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가 직접 노력해야 합니다.
반면 우리가 노력해서 할 수 없는 부분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걱정한다고
우리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없습니다.
건강해지기 위해서 좋은 것을 먹고 운동도 하지만
우리 목숨에 있어서 죽고 사는 문제는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노력은 하지만
그 노력의 결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건강한 삶은 살 수 있지만
죽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내일 죽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하는 것보다
오늘 하루를 건강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내가 잘못된 것을 원했다고
자신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한다는 것은
지금 나에게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하기에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것을 원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부분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채워주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또한 하느님과 관계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할 떄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도
풍요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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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마태 5, 29-29)
시골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과 마음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때만 되면 그 끈질기고 왕성한 잡초들 사이로 여기저기 피어나는 청초하고 어여쁜 들꽃들이 있습니다.
나리꽃이며, 구철초며, 개망초며...
비싼 값의 씨앗을 따로 뿌리지도 않았습니다. 힘들게 허리 굽혀가며 모종을 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절기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화사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셀수도 없이 많은 야생화들이 무리 지어 피어나지만, 가끔 걸음을 멈추어 딱 한 송이 들꽃만을 바라봅니다.
그 자태가 얼마나 예쁜지, 그 작은 얼굴이 오목조목 갖출 것 다 갖추고, 정말이지 신비스럽습니다.
우리 각자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표정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때, 때로 한심하고, 정말 못 나 보이고, 때로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지만, 하느님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비슷하고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하느님 시선으로 바라보실 때는,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이 다 소중하고, 다 특별하며, 다 나름 사랑스럽습니다.
남은 날들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우리 주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다 섭리하시고 돌보아 주실 터인데, 미리 앞장서서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매일 반복해야겠습니다.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오늘은 자비하신 주님의 충만한 현존 안에 편안히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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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인간은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용도가 사악하여 인류에게 너무나 많은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24절) 하신다. 이 재물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마력을 발휘하여 인간을 온통 지배한다. 이 마몬은 인간이 섬겨야 할 상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려야 할 종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재물에 압도되어 종이 될까 봐 제자들에게 포기하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걱정하지 마라.”(25절) 하신다. 우리가 입을 수 있는 해는 재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재물 때문에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재물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그 재물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재물을 잘 사용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새와 들에 핀 나리꽃들과 들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30절) 하신다.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도 그렇게 보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만드셨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며, 율법을 주셨고, 표현할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을 이루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주셨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 우리의 궁극적인 선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어떤 일을 하던 이것을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이르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필요한 것이 충족되어야 하므로 곁들여 받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의 선행이 완전한 행위가 될 때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알맞을 때 얻게 된다. 열심히 선행하자.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34절) 하신 것이다. 주님께 완전히 신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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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생각을 끊으면 걱정도 끊긴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에 ‘마음속에서 걱정을 몰아내는 법’이란 내용이 나옵니다.
강연을 많이 했던 데일 카네기가 더글라스라고 하는 사람이 했던 강연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더글라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두 번에 걸친 비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첫 비극은 다섯 살짜리 딸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아내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를 물고 참았습니다.
하늘은 또 하나의 생명을 선물해주었지만 그 아이도 역시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휴식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들이 처방한 약을 먹어보고 여행도 떠나보았지만 그의 슬픔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친척들 중 한 조카아이가 자신에게 배를 만들어달라고
청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힘도 없었지만 더글라스는 조카를 위해 장난감 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배를 만드는 동안 슬픔에서 잠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 안의 작은 소일거리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고쳐야 되는 목록이 무려 242개였고 2년 동안 자신의 손으로 모두 수리를 하였습니다.
“걱정할 틈이 없다.” 이 말은 세계 제2차 대전 중 하루 18시간 일을 했던 윈스턴 처칠이 한 말입니다.
전쟁 중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에 온전히 뛰어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웅평 대위가 넘어올 때 진짜 전쟁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저희 집이 미군 비행장 옆에 살았기 때문에 전투기들이 뜨고 사이렌과 방송이 나올 때
어머니는 전쟁 나면 어디로 찾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정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나?’
그 당시 저는 실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었던 윈스턴 처칠보다 전쟁에 대한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전쟁은 나지 않았습니다.
걱정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걱정을 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걱정은 마귀가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마귀가 있는데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와 대화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걱정을 하게 돼 있습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면 걱정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으려면 생각을 접고 무언가에 열중하면 됩니다.
대학에 떨어질 걱정을 하면 무엇 합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에 몰입하면 됩니다.
직장에서 잘릴 걱정을 하면 무엇 합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에 열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절대 잘리는 일이 없습니다.
걱정하며 아무 일 안 하는 사람이 잘립니다. 걱정은 일이 잘되게 만들지 않고 그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걱정이 믿음이 되고 믿으면 믿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때 잘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던 같은 반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은 왠지 잘릴 위험성 있는 것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잘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부 안 되면 누가 되겠어?’ 이 생각은 교만이라기보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잘리면 프란치스코처럼 살지 뭐.’라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니 크게 걱정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걱정해서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내일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대신 걱정하라고 맡겨버리라는 뜻입니다.
걱정은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나를 믿으면 생기는 것이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나에게 사로잡히면 될 일도 안 됩니다.
그리고 안 돼봐야 별게 없습니다.
우리는 환상을 만들어놓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사라질 것인데 그 사라지는 것을 잡기 위해 걱정하는 것입니다.
걱정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장 크게 걱정하게 만드는 적은 자아입니다.
생각을 끊어야합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이 세상입니다.
그것만 배워 가면 됩니다.
믿고 노력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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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두 함께, 걱정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1)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하느님만 사랑하고, 하느님만 섬겨라.” 라는 명령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만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즉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마태 22,37)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19).”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라는 말은,
이천 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2)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만일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런 상황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또는 공동체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니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야단치기 전에 먼저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금방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에서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말만 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랑도 ‘죽은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도 같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내가’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3)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마태 10,9-11)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빈손’으로 떠났는데,
그들을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먹을 것을 하늘에서 직접 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사도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각 개인의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먹여 주시니까
일하지 않아도 된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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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일 걱정은 내일에 ”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것들 중에서 부정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요. 하나를 놓고 한 사람은 긍정적인데 비해 한 사람은
부정적인 경우가 있지만 그 결과의 차이는 엄청 큰 것입니다.
마침 현대 건설의 회장을 맡았던 고 정주영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일화에서
긍정(肯定)의 힘이 얼마나 놀랍고 세계적인 현대건설의 위치를 만들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2011.01.20 ‘매일 경제 명사 초청 강의’에서 유승렬 SK주식회사대표이사가 했던
인용 이야기입니다.
1975년 여름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렀다.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 오십시오. 만약 정사장도 안 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抛棄)하지요.”
정주영 회장이 물었다.
“무슨 얘기입니까?”
"1973년도 석유파동으로 지금 중동국가들은 달러를 주체하지 못 하는데
그 돈으로 여러 가지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은데,
너무 더운 나라라 선뜻 일하러 가는 나라가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관리들을 보냈더니, 2주 만에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없어 공사를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요, 오늘 당장 떠나겠습니다.”
정 주영 회장은 5일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박 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습니다.”
박 대통령이 대꾸했다.
“무슨 얘기요?”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입니다.”
“뭐요!”
“또 뭐요?”
“건설에 필요한 모래,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고요”
“물은?”
“그거야 어디서 실어오면 되고요.”
“50도나 되는 더위는?”
"천막을 치고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고요.“
박 대통령은 부저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임자, 현대건설이 중동에 나가는 데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줘!”
정 회장 말대로 한국 사람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을 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그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들어왔다.
사막의 횃불은 긍정(肯定)의 횃불이다.
긍정(肯定)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긍정(肯定)은 천하를 얻고, 부정은 깡통을 찬다.
또 우리가 많이 들어 왔던 명언이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아무리 좋은 여건이라도 스스로 노력하고
개척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달리 어떻게 하실 수 없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와 연결시킬 수 있는 말이 ‘진 인 사 대 천 명 盡 人 事 待 天 命’라는
고어가 있습니다. 사람이 할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라는 뜻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만들어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하신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만들어 주셨어요?
사람에게 좋은 것이 이 세상에 다 널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많은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아무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마태 6,2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하늘의 새도 먹여살리시고 들에 핀 나리꽃도 꾸며주시는
사실을 들어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쓸 데 없는 걱정을
안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 6,31)
그래서 사람은 이 좋은 세상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고 전적으로 하느님 뜻에
맡기며 사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또 의심을 갖고 사는 사람은 주님께서도 표현하셨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리는 사실 부정적으로 살아갈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휘말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겨자씨만한 하느님께 대한 신앙만 가지고 있다면 좋은 것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천진한 어린이처럼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을 맡기며 기쁘게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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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하느님 의로움을 재물보다는 먼저 /
박윤식 [big-llight] 05:31 ㅣNo.173552
누가 뭐래도 현대인에게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란다. 어떤 이는 단지 그것만 덜 가진다 해도, 아마도 수십 년은 족히 더 살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한다나.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좀 더 평화로운 삶을 살까? 예수님께서 명쾌한 그 답을 주셨다. “걱정한다고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까?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떠나게 될 이 세상 집착하기보다, 매일이 은총의 시간임에 감사하고, 긍정적으로 기쁘게 살 결심을 하자.
한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잦은 걱정으로 늘 불안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걱정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정말 좋은 착상을 했다. 걱정거리 상자를 하나 만들어, 그게 생길 때마다 간단히 적어 상자에 넣어 두고는, 매 수요일을 ‘걱정 해소의 날’로 정해, 그날에 그것들을 몽땅 한 참에 꺼내어서 해소해 보기로 작정을 했단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상자 속 메모지를 살피다가 그는 이런 것을 깨달았단다. 상자에 넣을 때만 해도 정작 큰 걱정거리였던 게, 새삼 다시 꺼내보니 그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나. 그래서 지나친 걱정이 오히려 행복한 삶을 방해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실히 알았다나. 그렇다. 매사에 너무 지나치게 걱정에 시달리다 보면, 아예 행복은커녕 어쩜 근심만 가득할 게다.
재물에 대한 집착도 만찬가지다. 마치 재물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는 꼴이다. 사실 이로 인한 패가망신 당한 이가 주변에 부지기수다. 예로부터 부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리라. 그러니 이러한 관점에서 부 만큼은 정말 그분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 주실 게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새들이 농사짓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먹여 주시고, 들에 핀 꽃들이 길쌈도 하지 않지만 그분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입혀 주시는지 보라고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소중한 자녀들이야 더 잘 돌보아 주시지 않으시겠냐고 반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결단코 없다고 단언하신다. 그러기에 아예 재물을 하느님께 의지하지 말라는 거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재물 모으는 데 하느님 능력을 찾는다. 재물에 그분 능력이 있는 줄 착각만 한다. 이 꿈을 깨야만 할 게다. 그걸 접어야만 자신의 진정한 부에 눈뜰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렵다. 우리 삶의 태반이 의식주에 얽힌 두려움인데 어떻게 접나? 이러니 우리가 진정 마음 써야 할 것은, 그분 뜻을 곰곰이 헤아리는 거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히 기쁨을 얻게 될 게다. 그러니 내일의 불확실한 걱정일랑 아예 진작부터 하지를 말자. 다 털어버리자. 아무도 재물과 하느님의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을 반드시 명심하자. 내일 걱정은 내일이 알아서 할 게다. 단지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그 의로움만을 생각하자. 그러면 정말 그분께서 섭섭지 않게 모든 걸 그때마다 다 해 주시리라. 물론 과욕을 버리면, 재물도 담뿍 챙겨 주실 게다.
자고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생명을 그저 주셨다면, 이에 필요한 것은 모두 넉넉히 주시리라. 그러니 우리는 먼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찾자.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오늘 그분과 그분께서 사랑하는 주위의 이웃을 찾아 나서면 참 좋겠다.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것에 앞서, 마음이 깨끗해야 삶이 참으로 행복하고 아름다워진다는 이 진리를 결코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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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고난 당할 때 믿음으로 맞서는 삶
<2024.6.22> 아침을 여는 묵상(행 24:1~23절)
❝고난 당할 때 믿음으로 맞서는 삶❞
❚ 옳은 일을 하는 상황에서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 고난 당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 옳은 일에도 시련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1~9절).
헤롯 궁에서 보호를 받은 지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벨릭스 총독에게 와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1~2절).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말씀을 증거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더둘로는 벨릭스의 통치에 대한 찬양과 함께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바울이 전염병과 같은 자로서,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자이기에 벨릭스의 통치에 암적 존재라고 고발했습니다. 또한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지칭하며,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여 잡아 왔다고 주장했습니다(3~7절). 더둘로는 총독에게 바울을 심문하도록 촉구했고, 유대인들은 그의 말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8~9절).
신령한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고,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할 때, 세상은 늘 비방과 조롱과 핍박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선한 행동에 대하여 악한 행동으로 주변의 사람들이 반응할 때 실망과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옳은 일을 하는 데도 많은 반대에 부딪힌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도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언제나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좋은 일에도 시련이 있을 줄 알고, 담대한 믿음과 용기로 이겨 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거짓된 비방과 고발로 사탄이 공격해 올지라도 말씀으로 분별하고 끝까지 인내하므로 믿음으로 맞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비난 속에도 당당히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10~21절).
더둘로와 유대인들의 고발이 끝나자 바울은 벨릭스 총독과 무리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합니다.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12일밖에 되지 않았고,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와 변론하거나 회당 또는 성내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밝힙니다. 그는 고발한 대로 불법을 행하거나 군중을 선동하지 않았으니 재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0~13절). 바울은 자신의 신앙이 유대인에게 이단이라 불리는 도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는 그들처럼 조상의 하나님을 잘 섬기는 길이며,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믿는 것이며, 유대인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인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설명합니다(14~15절).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썼다고 고백합니다(16절). 바울은 고소당해 변명하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고소가 거짓됨을 증명했습니다. 거짓 증언에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대처했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을 의식한 나머지 우리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비웃음을 사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담대하게 전해 진정한 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처럼 항상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날마다의 삶 가운데 선한 양심을 따라 모든 일을 하나님께 하듯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기꺼이 의를 위하여 고난에 동참함으로 복을 받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통해 어떠한 비난 속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므로 믿음으로 맞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세상 속에도 세심한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22~23절).
바울이 연설을 마치자 벨릭스는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했습니다(22절). 벨릭스는 바울에게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무죄임을 인정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또한 아직까지 판결받지 않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벨릭스는 그 누구보다도 바울이 말하는 ‘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고소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은 터무니없으며, 바울의 변증이 정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시는 보다 정확한 판결이라는 미명하에서 천부장 루시아가 올 때까지 판결을 유보하였습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에서 더 이상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춘 것이며, 유력한 친구가 많았던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벨릭스에 의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비록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감옥 안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며,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 누구를 통해서라도 당신의 자녀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세심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맞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옳은 일을 하는 데도, 선한 일에도 반대에 부딪히고, 장애물이 있다 할지라도 말씀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잃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므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24:1~2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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